112화. 영수(靈獸)
허칠안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때 갑자기 뒤에서 은방울 같은 웃음소리와 함께 물보라가 출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붉은 치마를 입은 둘째 공주가 괴물의 등 위에 올라, 양손으로 괴물 머리 꼭대기의 뿔을 쥐고 흔들거리며 몸을 가누고 있었다. 그 뒷모습은 유연하고 아름다웠다.
그 괴물은 온몸이 새하얬고, 비늘이 촘촘하게 나 있었으며, 등에는 평평한 갑옷이 있어 사람이 서 있기 딱 좋았다. 몸길이가 3미터에 배에는 날카로운 발톱이 있어 용처럼 보였다.
장공주가 몸을 돌려 설명했다.
“이 짐승은 영룡(靈龍)이라 불리고, 중주(中州)에만 있는 영수다. 성격이 온순하고 고대 인황(人皇)이 수중에서 타던 짐승이라고 전해지지. 인간 세상의 상서로운 기운을 빨아들이는 걸 좋아해. 때문에 역대 황실에 의해 궁중에서 길러졌다. 상서로운 기운이 동쪽에서 온다는 우의를 가지고 있지. 인족(人族) 정통이다.”
장공주는 또 덧붙여 말했다.
“이 짐승은 망기술을 가지고 있어.”
‘알고 보니 호수에서 본 것이 저거였군…….’
허칠안은 이해하는 듯한 소리를 냈다. 상서로운 기운은 왕공(王公) 귀족만이 지니고 있는 기운으로, 이런 괴물은 상서로운 기운으로 온양해야 하는데, 이는 곧 서수(*瑞獸: 상서로운 짐승)임을 의미했다.
서수는 때로는 머리를 쳐들다가, 때로는 수면에 바싹 붙어 기면서 잔잔한 물보라를 일으켰다. 둘째 공주의 웃는 얼굴은 꽃처럼 예뻤다. 그녀는 쉴 새 없이 깔깔거리며 웃었고, 아주 즐거워 보였다.
황자들이 미소를 머금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또 다른 황녀 둘이 물가로 달려가 임안에게 오라고 소리쳤고, 모두가 돌아가면서 놀았다.
“영룡의 성정이 온순하기는 하나 동시에 교만하기도 하여, 평범한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면 공격하기도 해. 임안은 황녀라 그와 함께 놀 수 있는 거야.”
장공주는 말하면서 입을 삐죽거리다가, 허칠안이 예상치 못한 행동을 했다.
검지를 입가에 대고, 휘파람을 힘껏 분 것이었다.
휘파람 소리를 듣더니 영룡은 마치 뱀처럼 고개를 높이 쳐들고 몸뚱이를 옆으로 돌렸다.
영룡은 잠시 멈칫한 듯하다가, 갑자기 쉬지 않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구멍으로 맑고 깨끗한 울음소리를 내며, 머리를 흔들어 둘째 공주를 뿌리치려 했다. 아마도 둘째 공주가 올라탄 것이 아주 치욕적이었던 모양이다.
“야……!”
둘째 공주는 놀라서 비명을 지르며 호수로 떨어졌다.
영룡은 발광하면서 몸을 좌우로 흔들어댔고, 장공주를 향해 헤엄쳤다. 영룡은 물을 헤치고 오면서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울부짖었다. 극도로 흥분해서 그런 건지 성이 난 건지는 잘 구분되지 않았다.
휘익!
물가에 가까워진 영룡이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가 묵직하게 내리찍어 머리를 둔치에 찧으니, 위로 솟구친 흙탕물이 여기저기 튀었다.
장공주의 새하얀 옷자락에 진흙 자국이 몇 방울 튀었다.
장공주는 좀 의아하게 생각했다. 영수는 자신과 아주 친밀했다. 그녀가 휘파람을 분 이유도 영수를 부르려던 게 아니라, 그의 눈길을 끌어 그가 몸을 돌릴 때 하체가 안정적이지 않은 임안을 물속으로 떨어트릴 심산이었다.
영룡이 이렇게 과하게 반응하며 바로 머리를 흔들어 임안을 물속에 내던질 줄은 몰랐다.
‘장공주의 풍격이 어째 좀 운록서원의 지식인 같지……? 사람이 아주 의뭉스러워……. 우리 집 동생도 이렇게 음흉하고 악독한데 말이야. 아, 장공주도 운록서원에서 공부한 적이 있구나…….’
허칠안은 허신년의 경고에 대해 더욱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역시 속이 검은 자만이 속이 검은 자를 가장 잘 아는 모양이었다.
수면 위의 동태에 모든 황손이 놀랐고, 태자는 앞서서 물가로 달려가 시위에게 사람을 구하라고 소리쳤다.
“영룡은 역시 회경을 더 좋아하는구먼.”
“이는 임안보다 회경의 상서로운 기운이 더 강하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겠는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영룡은 우리에게도 그다지 친절하지 않으니. 그가 비굴하게 아첨하는 모습을 나는 어릴 적에 딱 한 번 본적이 있네. 그때 영룡이 마주한 건 아바마마이셨지.”
“회경이 지나가는군…….”
장공주는 치맛자락을 치켜들고, 옅은 미소를 지으며 영룡에게로 걸어가 올라타려 했다.
태자를 비롯한 모든 황자, 황녀들이 그 광경을 지켜봤다.
‘음, 의뭉스러울 뿐 아니라 사실 장공주는 승부욕도 강하군…….’
허칠안은 행동심리학 분석을 통해 장공주의 성격 중 강한 면을 추측해냈다.
‘어랏…… 어째서 영룡이 나를 보고 있는 느낌이 들지?!’
영룡의 눈은 매서운 세로 동공이 아니었다. 흑진주 같은 눈동자는 전생에 본 적 있는 반려견처럼 눈이 반짝거리는 흑단추 같았다.
이러한 이유로 영룡은 퍽 온순해 보였다.
물론 이게 요점은 아니지만……. 허칠안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을 받았다.
영룡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장공주가 영룡에게 가까이 다가갈 때, 모두가 예상하지 못한 장면이 펼쳐졌다.
영룡이 갑자기 아주 거칠고 공격적인 면을 내보인 것이었다. 장공주를 향해 낮고 쉰 울음소리를 내며,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위협했다.
장공주는 눈살을 찌푸리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영룡은 더 이상 울부짖지 않더니 머리를 둔치에 기대며, 전처럼 ‘빨리 와서 나에게 올라타’라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어랏, 영룡이 회경을 올라타지 못하게 했어.”
“어찌 된 일이지? 영룡이 오늘 기분이 좋지 않나?”
“아니야. 저 자세는 누군가 올라타길 기다리는 건데…….”
황자들이 왈가왈부하기 시작했다.
허칠안은 황자들이 의논하는 소리를 듣지는 못했지만, 더는 영룡과 대치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상서로운 기운을 빨아들이기 좋아하는 영수 한 마리가 황녀에게 복종하지 않는다는 건, 결국 두 다리를 꿇고 내가 올라타길 기다린다는 것이다. 이건 절대 좋은 일이 아니야!’
허칠안은 자신에게 이상한 운이 작용한 거라고 어림짐작했지만, 그는 스스로 이 상황을 천천히 모색하기를 바랐다. 설령 아무런 성과도 없이 허탕 치더라도 비밀이 폭로되는 건 원치 않았다.
‘이 세상의 생존 법칙이 그랬다. 내가 사정을 알지 못해도 죄를 면할 수는 없으니!’
“장공주마마, 이 괴물은 매우 위험합니다. 빨리 벗어나셔야 합니다!”
장공주가 자신을 떠올리지 못한 틈을 타, 허칠안은 재빠르게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렇게 하면 영룡의 시야와 겹칠 수도 있고, 또 장공주가 영룡의 심기가 불편하다고 인지하게 할 수 있었다.
허칠안은 엄호하는 척하며 장공주를 먼저 보내고, 자신이 뒤따라갔다. 수십 미터 걸어 나오니, 뒤에서부터 영룡의 억울한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 * *
허칠안은 회경과 사방대(四方臺)로 돌아왔고, 그 사이 둘째 공주 임안은 건져 올려졌다. 온몸이 흠뻑 젖어 두꺼운 외투를 걸친 둘째 공주는, 양손을 가슴에 포갠 채 추워서 덜덜 떨었고, 입술은 파랗게 질린 채였다.
그녀는 회경을 가리키며 울면서 말했다.
“아바마마께 말씀드릴 거야. 회경, 너랑 끝장을 보겠어.”
장공주는 담담하게 답했다.
“본 공주와 무슨 상관이지? 분명 오늘은 영룡의 감정이 폭발해 통제되지 않은 거잖아?”
임안은 연전연패했다. 하지만 연전연패의 이미지가 자리 잡은 지 이미 오래되었기에 황자와 황녀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영룡의 이상한 점에 대해 너도나도 토론하기 시작했다.
“영룡이 확실히 정상적이지 않아. 방금 발광한 건 좀 이상했어.”
“그게 어째서 아직도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걸까…….”
“울음소리가 아주 억울하게 들렸어.”
친오라버니로서의 태자는 친여동생 때문에 잠시 마음 아파하다가 이내 유쾌한 마음으로 토론에 합류했다.
“기분이 좋지 않은 게지. 영룡이 보통 짐승은 아니니, 성깔이 있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짐승은 짐승이라고, 그것들의 생각을 짐작할 수가 없었기에 그들은 잠깐의 토론 이후론 더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둘째 공주가 물에 빠져 열병에 걸릴 것을 염려한 그들은 연회를 앞당겨서 마쳤다. 고귀하신 전하들은 마차를 타고 돌아갔고, 차야들이 남아서 뒷정리를 했다.
* * *
장공주는 허칠안을 데리고 동화문(東華問)을 경유해 문연각 밖에 도착했다.
문연각은 황실에서 서적을 보관하는 곳으로, 7개의 다락방이 있었고, 그 안에 보관된 서적은 안개가 자욱한 넓은 바다처럼 한없이 넓고 아득했다.
허칠안과 장공주는 옛 문서에 머리를 파묻고 한 시진(時辰) 넘게 살펴보았고, 그 결과 초대 감정과 관련된 많은 자료를 찾아냈다.
초대 감정은 술사 체계의 창시자로 그 내력이 신비했다. 초대 황제를 보좌하여 천추의 위업을 이뤄 본래는 왕실의 종묘에 모셔야 하는 충신이었다.
하지만 그에 관한 기록은 오백 년 전에 갑자기 뚝 끊긴 상태였다.
이는 누군가 역사 속에서 지워 버린 것이 분명했다. 그를 지워 버린 사람은 의심할 여지 없이 무종 황제일 터였다.
장공주는 문연각의 제3장서루(*藏書樓: 서적 보관실) 2층 창가에서 전신에 햇빛을 받고 있었다. 마치 뽀얀 얼굴에 빛이 통과하는 것 같았고, 얼굴의 가느다란 솜털까지 다 보였다.
그녀가 말했다.
“만약 그해 무종 황제께서 초대 감정의 기록을 지워 버렸다면, 우리는 문연각에서 어떠한 관련 자료도 찾을 방법이 없다.”
장공주가 허칠안을 보며 실망스러운 기색을 드러내더니 이어 말했다.
“네가 돌기둥에서 불문을 발견했다고 하지 않았어? 그곳에서부터 돌파구를 찾아볼 수도 있겠는데 어찌 생각하느냐?”
한 시진 넘게 열람하고 나니 그녀는 다소 지쳤는지, 무의식적으로 책상에 다가가 앉았다.
발상을 전환하니 역시나 수확이 있었다.
“내가 《대봉: 지리지》를 뒤져봤는데, 대봉 건국 초 경성에는 절이 없었고, 불문 중에 선교하는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오백 년 전, 갑자기 보탑사(寶塔寺)라 불리는 한 사찰이 등장했네.”
장공주는 공부벌레다웠다. 자료 조사만큼은 별다른 지식이 없는 허칠안보다 훨씬 나았다.
그녀의 긴 속눈썹이 잘게 떨렸다. 그녀의 눈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으나 차갑고 쓸쓸한 눈동자에 융화되었다. 이때의 그녀는 마치 옥인(玉人)이 살아 돌아온 것 같이 보였다. 장공주는 그 발견으로 아주 기뻐하며 말했다.
“보탑사가 가장 번창할 때는 매일 같이 참배자가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지위와 명성이 대단한 사람들이 끊임없이 드나들었다고 하더군. 한 사찰에서 백 경(傾)에 가까운 양전(良田)을 사들이기도 했지. 하지만 뒤따라 조정의 멸불(滅佛) 정책이 시행되면서, 보탑사는 점차 쇠퇴하게 됐고. 현재 경성 안의 큰 사찰들은 보탑사와 별다른 관계가 없다고 하는군.
음, 보존된 한 줄기가 있긴 하다만 명칭을 청룡사(靑龍寺)로 개명했고, 서쪽 교외의 백봉산(白鳳山)에 위치하고 있는데……. 듣고 있느냐?”
“잠시만 조용히 해주세요, 사고의 흐름이 끊깁니다.”
허칠안이 양미간을 찌푸리며 답하자, 장공주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참았다. 그리고 대답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