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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타경-110화 (110/712)

110화. 즉흥적으로 시를 짓다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시위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날카로운 눈빛을 쏘아보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이윽고 ‘경(庚)’자가 수놓인 그 마차의 창문이 열렸다. 희고 고운 손이 휘장을 젖히니 허칠안은 장공주의 날카롭고 새하얀 턱과 불그스름한 입이 움직이는 걸 볼 수 있었다.

“따라오거라.”

허칠안은 속으로 무척 기뻐했다. 그가 말을 채근하며 지나가면서 곁눈질로 힐끗 바라보자, 네 번째 마차에서 누군가 창문을 밀어젖히고선, 동글반반하고 아리따우며 다정다감한 얼굴을 내미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허칠안을 주시했기에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쳤다. 그녀는 입가를 씰룩대더니 창문을 닫았다.

‘저분이 둘째 공주마마? 씁……. 황제의 딸들은 다 예쁘구먼.’

허칠안은 눈길을 거두고 마음속으로 묵묵히 두 공주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다른 유형의 미인을 두고 잠을 이루지 못할 수는 있으나 무리하게 우열을 가리는 건 사실 의미가 없지. 이건 전적으로 각자의 취향에 달렸으니까.’

허칠안은 장공주와 둘째 공주 중에 누가 더 아름다운지 평가하지 않기로 했다. 두 공주가 사람에게 주는 느낌에 대해서만 얘기해 보자면, 장공주는 마치 설산 위에 피어난 연꽃처럼 다소 도도한 스타일이었다.

허칠안은 그녀가 고귀하고 우아하며, 청아하고 세속에 물들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기에 그녀를 놀리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 후에 그녀가 난처해하며 수줍어하는 모습을 보는 재미가 있을 터였다.

허칠안은 둘째 공주를 겪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방금 그 한 번으로 인해, 허칠안은 그녀를 그가 있었던 시대의 확고한 클럽 여왕의 모습으로 상상해보았다. 무척 잘 어울렸기에 허칠안은 절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 * *

황자와 황녀들은 외출하여 함께 식사하고 활동하기로 했다. 장소는 황성에서 경치가 좋은 호숫가였다.

호숫가에는 사시사철 푸르른 설송(雪松), 측백(側柏)이 심어져 있었고, 눈앞에는 꽃이 다 시들어버린 꽃밭이 펼쳐져 있었다. 내년 봄이 되면 틀림없이 경치가 훨씬 더 아름다워질 터였다.

햇빛이 따사롭고 바람도 불지 않아 햇볕을 쐬기에 좋은 날이었다.

호숫가에는 정방형의 평상이 있었다. 차야들이 탁자를 옮겨와 단향목을 깎은 목재에 불을 붙이고, 찬합에서 정교하게 쌓아놓은 음식을 꺼냈다.

허칠안은 말을 나무에 묶고, 잠자코 장공주 뒤를 따라다녔다. 두 여종이 그녀를 대신해 치맛자락을 잡아 올려주었다.

장공주의 땋은 머리는 아주 단정하고 말끔했고, 아주 값진 금보요(金步搖)를 꽂고 있었다. 금색 술 끄트머리에는 동그랗고 매끄러운 진주가 달려 있어, 걸을 때마다 찰랑거리는 게 정말 예뻤다.

두 사람은 아무런 말이 없었지만, 허칠안이 자연스레 그녀의 뒤를 따랐기에 절로 시위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다른 황자와 황녀들은 호화로운 마차에서 내려 허칠안을 한번 훑어보았다.

‘외모가 나쁘지 않군.’

한편, 허칠안도 황자들의 외모를 평가했다.

하얀 망포(蟒袍)를 입고, 머리를 묶고 금관을 쓴 태자는 의기양양하고 비범해 보였다.

사실 황자들의 외모는 태자를 포함해 그가 신경 쓸 만한 가치가 없었다.

‘어쨌든 아무리 잘생겼다 해도 나의 사촌 동생 허신년만큼 준수하지는 못하네.’

네 명의 공주 중에는 장공주와 둘째 공주의 용모가 가장 아리따웠다. 그들은 빼어난 미인이었다.

착석할 때는, 고의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둘째 공주가 본래 장공주가 앉아야 했던 자리를 빼앗았다.

질책하는 사람은 없었다. 황자와 황녀들은 익숙하다는 듯 보고도 못 본 척했다.

장공주는 둘째 공주의 자리에 앉지 않고, 그녀와 탁자 하나 떨어져 앉았다.

‘장공주와 둘째 공주의 사이가 별론가?’

허칠안은 이 사소한 부분도 마음에 새겼다.

이윽고 태자가 형제자매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우리가 한동안 놀러 나오지를 않았더구나.”

황자들이 맞장구를 쳤고, 황녀들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허칠안의 눈빛이 호수에 머물렀다. 그는 호수 속에 검은 그림자가 스치는 것을 보았으나 뭐가 살고 있는 건지 감이 오지 않았다.

태자는 연회의 상석에서 주령을 진행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는 주제 제시를 담당하고, 연회를 이끌었다.

연회에서 하는 주령은 몇 가지가 있었는데, 고상하고 우아한 주령은 더욱이 적었다.

연회 자리에 참석한 이들이 모두 지위가 있는 사람들이니, 화권(*劃拳: 술자리에서 흥을 돋우기 위하여 두 사람이 동시에 손가락을 내밀면서 각기 한 숫자를 말하는데, 말하는 숫자와 쌍방에서 내미는 손가락의 총수가 서로 부합되면 이기는 것으로, 여기서 지는 사람이 벌주를 마시는 놀이)이나 주사위 던지기 같은 놀이는 절대 할 수 없었다. 해야 한다면 아령(*雅令: 고상한 주령)밖에 없었다.

아령에는 여러 종류가 있었다. 아령은 현장에서 벗어나 시를 짓는 그런 고차원적인 놀이로, 비화령(飞花令)이 아령 중에서도 난이도가 높은 편이었다.

태자가 운을 뗐다. ‘수(水)’를 주제로 첫 글자도 ‘수’였다.

둘째 황자(二皇子)가 지은 시의 두 번째 글자도 ‘수’자이면, 이를 통해 유추하는 것이었다.

현장에는 황자가 많았고 황녀는 적었다. 첫 번째 차례가 끝이 났다. 칠황자(七皇子)는 머리를 쥐어짜냈지만 그 시의 말미가 ‘수’자인 걸 떠올리지 못해 벌주를 한 잔 마셨다.

팔황자(八皇子)는 몇 년 전에 요절하였다.

구황자(九皇子)는 이 비화령을 계속해서 이어나가는 역할을 맡아, 태자처럼 첫 글자를 ‘수’로 잡았다.

둘째 공주 차례가 되자, 그녀는 매력적인 도화안을 아주 크게 뜨고 까맣고 빛나는 눈동자를 굴리더니 작은 손으로 박수를 치며 낭랑하게 말했다.

“있어요. 소영횡사수청천(*疎影横斜水淸淺: 성긴 그림자가 맑고 얕은 물에 비스듬히 비치네).”

화사한 햇빛이 그녀를 내리쬐었다. 그녀는 선홍색의 궁장(宮裝)을 입고, 화려하고 복잡한 장신구를 차고 있었다. 평범한 여인이었다면 이렇게 사치스러운 치장을 감당하지 못했을 터였다. 물론 둘째 공주인 그녀한테는 오히려 플러스 요인이 되었지만 말이다.

장공주의 귀티는 뼛속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왔다. 반면 둘째 공주는 마치 화려한 한 마리의 카나리아 같았다. 아무리 사치스러운 치장이라도 그녀의 아름다움을 더해줄 뿐이었다. 하지만 만약 소복 차림이라면, 아마도 둘째 공주는 장공주에게 훨씬 밀릴 것이다.

태자가 웃으며 말했다.

“이 시 나도 들어본 적이 있네. 교방사에서 퍼져나온 것이지. 아마 장락현의 어느 서생이 지은 것일 게야. 학계에서는 영매절창(詠梅絕唱), 고금 제일의 시로 칭송받네.”

마치 지식인처럼 학식이 깊고 품위가 있는 삼황자(三皇子)도 평을 했다.

“안타깝게도 이 뛰어난 작품을 뜻밖에도 한 기녀에게 선사했다고 하네. 아까운 줄 모르고 함부로 낭비한 것이지.”

재자(才子)와 명기의 사랑 이야기는, 세간에 널리 퍼져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공개 석상에 올리면 안 되는 이야기였다. 더욱이 황족에게 있어서는 더더욱 그랬다.

삼황자는 지식인으로서 이 점이 몹시 한스러웠다.

‘아까운 줄 모르고 함부로 낭비했다니! 부향 기녀가 이 시를 얻음으로써 몸값이 폭등하고, 대봉 황조에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고. 게다가 나는 겸사겸사 그녀와 관포지교를 맺었으니 분명 윈윈인 것을!’

허칠안은 속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주령은 계속 이어졌다. 장공주의 차례가 되었을 때, 그녀는 칠황자와 같은 난제를 직면하게 됐다.

말미에 ‘수’자가 들어가는 시는 매우 드물었다. 장공주는 박학다식하기는 하나 시를 많이 섭렵하지 못한 듯했다. 그녀는 정교한 눈썹 꼬리를 살짝 찌푸렸고, 시를 읊조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상황을 보자마자 둘째 공주가 해죽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회경이 우리 경성에서 제일가는 재녀(才女)인데, 고작 이런 시를 맞히지 못할 리가 없지.”

‘앞으로 너를 여우라고 부르겠어!’

허칠안은 괜히 속으로 이죽거렸다.

모든 황자와 황녀가 웃음을 띠고 바라보고 있었다. 장공주는 모든 형제자매를 제칠 만큼 재능이 출중했다. 설령 여인이라 할지라도 남들의 질투를 한 몸에 받았다.

그녀가 가장 잘하는 분야에서 한번 기죽게 될 모습을, 모두가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장공주는 형제자매들의 얄궂은 눈빛을 무시하고, 약간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허칠안을 슬그머니 쳐다봤다.

‘……너 뭘 보니?’

허칠안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장공주 대단한데? 내가 용건이 있는 걸 알고 미리 나를 한 번 활용하시겠다? 완전 선 입금 후 보수가 따로 없구먼.’

‘회경이 그를 보고 무엇을 하는 걸까?’

둘째 공주는 줄곧 장공주를 지켜보고 있었다. 둘째 공주는 그녀가 고개를 내저으며 패배를 인정하기만을 기다렸다가 튀어나와 그녀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하려 했다.

‘하, 네가 드디어 너 자신이 별 볼 일 없다는 걸 인정하는구나!’

허나 회경이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그 동라와 눈짓을 주고받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다른 황자와 황녀들은 이미 어느 정도 알아차렸다. 단지 둘째 공주만큼 그렇게 풍부한 상상력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취후불지천재수(*醉后不知天在水: 술에 취하면 하늘이 물속에 있다는 것도 모르네)!”

허칠안은 나직하게 읊조리더니, 모기가 우는 소리처럼 가늘게 시 한 구절을 읊었다.

그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 말미에 ‘수’가 들어간 시를 떠올려봤으나, 이 한 구절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장공주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취후불지천재수(*醉后不知天在水: 술에 취하면 하늘이 물속에 있다는 것도 모르네).”

둘째 공주는 멍해지더니 이내 실망감에 북받쳤다.

‘회경 이 못된 언니. 이런 재능도 있다니!’

다른 황자들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해보다가, 삼황자를 쳐다봤다. 삼황자는 고개를 저었다.

“회경, 셋째 오라버니는 어째 이 시를 들어본 적이 없구나.”

장공주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건 새로 지은 시예요.”

그때, 둘째 공주가 갑자기 득의양양해하며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억지 부리면 안 되지. 제멋대로 한 구절 꾸며내서 우리를 속이다니. 벌주 세 잔 마셔.”

“아니다. 즉흥적으로 시를 짓는 것도 가능하다만?”

갑자기 태자 전하가 웃기 시작했다.

“하지만 회경, 네가 완전한 시 한 수를 지어야만 인정하도록 하지.”

삼황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큰 형님 말씀이 옳습니다.”

장공주는 다시 고개를 돌려 허칠안을 쳐다보며. “네게 맡길게.”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허칠안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장공주의 곁에서 나와,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

“소직이 새로 지어보겠습니다.”

순간 모든 사람이 허칠안을 바라봤다. 둘째 공주는 새까맣고 번뜩이는 눈으로 허칠안을 자세히 뜯어보고 있었다.

태자가 양미간을 찌푸렸고, 삼황자는 언짢아하며 말했다.

“한낱 동라가 무슨 시를 짓겠다는 말인가?”

그가 그나마 완곡하게 말한 편이긴 했으나, 일개 무사가 시에 대해 뭘 알겠냐는 의미였다.

그때 장공주가 탁자를 두드려 황손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녀는 가늘고 매끄러운 손으로 허칠안을 가리키며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그자는 허칠안이라고 합니다. 사촌 동생이 운록서원의 서생이에요.”

그 말이 무슨 뜻이란 말인가? 순간 누구도 장공주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형제자매의 머릿속이 온통 물음표로 가득 찬 모습을 보고 있는 게 아주 즐거웠으나, 일부러 무심한 척했다.

그녀는 도도한 얼굴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자양거사의 송별시도 그자가 지은 것이고, 임안이 앞서 낭독한 그 시 역시 허칠안의 작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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