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상백 아래에 봉인된 물건
허칠안은 명단을 한번 훑어보았는데, 명단에는 4품 무사가 가장 많았고, 3품은 얼마 되지 않으며, 2품은 없으니 1품은 말할 것도 없음을 발견하자 실망스러웠다.
‘상백에 봉인될 수 있는 건 2품이 마지노선이다. 아니면 술사 1품인 감정만이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는데, 근본적으로 봉인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설마 내 생각의 방향이 틀린 건가? 봉인된 것이 사람이 아니고 사물인 것인가?’
“잠깐만……. 감정?!”
허칠안은 간담이 서늘해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그는 한 가지 사건을 떠올렸다.
‘감정의 역할은 경성에 주재하며 경성을 지키는 수호신이다. 적어도 이 시대의 감정은 그러하다. 그렇다면 무종이 황위를 찬탈하고자 했던 그해, 감정이라는 관문을 피해갈 수 없었을 것이 분명하지.’
한 가지 대담한 추론이 허칠안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는 이내 몸이 오들오들 떨리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저 소저, 그대의 사부님이 초대 감정이오?”
허칠안은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스스로를 통제하며 물었다.
“아니야, 사부님은 제2대 감정이셔.”
허칠안은 저채미의 대답에 피가 들끓는 것을 느꼈다.
‘상백 밑에 봉인된 것이 누구인지 알겠다…….’
허칠안은 침을 꿀꺽 삼켰다.
“초대 감정은 어떻게 죽었소?”
저채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건 모르겠어. 사부님께서는 단 한 번도 스승의 과거에 대해 언급하신 적이 없거든.”
‘초대 감정이다. 상백 밑에 봉인된 것은 초대 감정이야!!’
허칠안은 이렇게 추측한 후 전율을 느꼈다.
‘그러면 이 비밀을 원경제만 알고 있고, 감정이 병을 얻고, 북방 요족이 이런 재미있는 볼거리를 꾀하려 했던 게 다 설명이 된다.
만일 초대 감정이 곤경에서 벗어나려 한다면, 경성에서는 대란이 일어날 거야……. 아니지, 초대 감정은 이미 곤경에 처했어.’
이때, 허칠안은 빨리 경성에서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망치자, 빨리 도망치자……. 숙부와 숙모를 모시고 함께 가자. 초대 감정은 곤경에 처해있고, 피비린내 나는 바람이 불 거다. 무려 1품이지 않은가. 경성 전체가 아수라장이 되고 말 거야.’
그런데 여기까지 생각이 드니 허칠안은 도리어 도망치겠다는 마음을 접게 됐다.
원경제는 그에게 공을 세워 죄를 면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렇다면 위연에게는 이 사형수를 감시할 책임이 있는 것인데, 그가 도망치면 위연에게 누를 끼치게 될 터였다.
물론, 이게 가장 중요한 건 아니었다.
허칠안은 물론 도망칠 수도 있었지만, 경성의 백성은 도망치지 못할 것이다.
‘만약 경성에서 정말 일품 고수들 간의 결전이 벌어진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게 될까? 원경제 이 늙은 몹쓸 자식, 지는 황궁 안에서 많은 고수들의 호위를 받고 있지만, 성안의 일반 백성들은 어떡하라고? 일품 강자들 간에 얽히고설킨 원한은 내가 간섭할 수가 없다고……. 까발리면, 이 일을 까발리고자 해도 자연스레 윗선에서 막겠지. 즉시 결단을 내려야 해!’
그러나 허칠안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위연을 찾아가기로 했다.
비록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명성이 높은 계략가 위연의 존재는 확실히 안정감을 주었다.
위연이 만약 평범하고 진취적이지 않은 장관이었다면, 허칠안은 사천감에 감정을 찾으러 달려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때마침 한 하급 관리가 들어와 허칠안을 보더니 뜻밖의 성과에 아주 기쁜 듯 말했다.
“소직, 허 대인을 한참 동안 찾았습니다. 위 공께서 찾으십니다.”
‘공교롭네. 나도 그를 찾아가려 했는데…….’
허칠안은 저채미와 작별하고, 하급 관리를 따라 호기루로 향했다.
* * *
관아에서 가장 높은 건물에 들어서 7층에 도착하니 청의(靑衣)를 걸치고 구레나룻이 희끗희끗한 위연과 금라 둘이 보였다.
“사건이 진척을 보이고는 있으나 안타깝게도 단서가 끊겼네. 조정에서는 이미 주적웅에게 지명 수배령을 내렸지만, 보름 내로 그를 찾는다는 건 현실적이지 않은 듯 보이네.”
위연은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온화한 말투로 말했다.
“앞으로를 준비하는 것이 어떠한가?”
허칠안은 위연에 안전에 서서 잠시 생각하더니, 태연하게 말했다.
“소직이 추측하건대 주적웅의 배후에 검은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단서가 없을 뿐입니다.”
이 사건은 세은 사건에 비해 더 복잡하고 번거로웠다. 물론, 세은 사건 때는 그가 수석 수사관이 아니어서 주로 허점을 찾아내고, 생각의 방향을 잡아주기만 하면 됐다. 다른 방면은 야경꾼과 관아에서 처리했다는 것이었다.
단서가 끊기기는 했으나 허칠안은 후속 수사를 통해 이미 대략적인 방향을 잡은 터였다.
첫째, 망기술을 차단할 수 있는 법기 측면으로 손을 쓴다.
둘째, 화약을 상백으로 몰래 운반할 능력이 되고 경로를 알고 있는 자들의 명단을 작성해 순서대로 조사에 착수한다.
두 번째 조항은 많은 에너지를 소모할 게 자명하고, 결과가 나올 거란 보장도 없었다.
“위 공…….”
허칠안이 떠보았다.
“만약 보름 내에 소직이 진상을 밝혀내지 못하면요?”
“그때가 되면 죽음을 가장하여 너를 빼낼 것이다. 강호에 가서 야경꾼의 비밀 연락원이 되거라.”
위연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관아의 정보망이 13개의 주와 각 강호의 세력에 골고루 퍼져있네. 은밀히 첩자를 키우지 않는 건 불가능하지.”
‘강호에 가라고……?’
허칠안은 얼떨떨해하며 생각했다.
“본관의 수중에 드러나지 않는 한 자루의 칼이 된다 생각하니 억울한가?”
위연은 온화하고 쾌활한 선생님처럼 웃었다.
“너는 외유내강이면서도 다소 과격한 성격을 지니고 있지. 나는 이런 자네를 높게 사기도 하지만, 또 이런 자네가 좋지 않기도 해.
야경꾼 관아의 수많은 폐단에 대해 나도 잘 알고 있네. 하지만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 본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공존하지 않는가. 이옥춘 같은 자가 얼마나 있겠는가? 만약 야경꾼 내에 이옥춘 같은 자만 있다면, 야경꾼은 조정 전체의 문무백관들을 견제하지 못할 거야.”
허칠안은 양미간을 찌푸렸다.
“저는 이러한 이치를 알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을 늘 자극하고 위협해야만 비로소 관리들이 청명하게 공무를 집행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위 공께서 너무 눈감아 주신 건 아닌지요.”
“그 역시 시기를 봐야 하네.”
위연은 화를 내지 않고 상냥한 얼굴로 설명했다.
“대봉의 관료는 부패하였고, 이미 쇠퇴하고 있지. 이 풍조를 바꾸고 싶으면, 자신을 감추고 속세와 어울리면서 하나하나 타개해야 하네. 자네 앞에 걸림돌이 없을 때야말로 자네의 포부를 펼칠 때인 걸세.”
‘위연의 뜻은, 그가 추후 정적(政敵)을 물리친 후에 더는 장애물이 없을 때 비로소 이런 난잡한 풍조를 바로잡을 손을 뻗을 수 있다는 것이다…….’
허칠안은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료 사회에서는 규율에 얽매이고, 어쩔 수 없이 자신을 감추고 속세와 어울려야 하네. 그렇지 않으면, 연이어 화를 자초할 뿐이야. 모서리가 깎여 무사의 불꽃처럼 대단한 기세를 잃는 건 어찌 보아도 수지 타산에 맞지 않아. 하지만 강호에 들어가면 그런 걸 염려하지 않아도 되지.”
위연은 간곡하면서도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무릇 자네를 건드리고, 막고, 자네 눈을 가리는 자는 잘 드는 칼로 베면 그만이네. 마음 가는 대로 행하면 되고 규율과 율법을 고려할 필요가 없지. 소위 ‘이력범금(*以力犯禁: 무력으로 금기를 범하다)’이란 바로 이런 이치이네. 많은 무사가 그 과정에서 본심을 잃어버리고, 냉혈하고 감정이 없는 망나니가 되지. 이 점은 주의하시게.”
허칠안은 한참을 억누르다가 말했다.
“소직 아직 강호에 가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 해보고 싶습니다.”
허칠안은 권세에 미련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숙부와 숙모, 신년과 여동생들에게 미련이 있었다.
이건 마치 전생에 회사의 노예였을 때 사장이 한 말과 같았다.
<시장 확대를 위해 자네를 다른 지부에 파견하여 장기적으로 주재하게 하고자 하네.>
그래서 허칠안은 답했다.
<가기 싫은데요.>
사장은 말했다.
<아니, 넌 가고 싶을 거야.>
다행히 위연은 그렇게 노동을 착취하는 사장은 아니었다. 그는 강요하지 않았고 상관없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별일 없으면 그만 물러가거라.”
‘아니, 저 일 있는데…….’
허칠안은 읍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위 공께서 좌우를 물러주시길 청합니다. 소직이 아뢸 중요한 일이 있사옵니다.”
‘우리를 또 물러가게 한다고?!’
남궁천유와 양연은 무표정으로, 허칠안을 한 번 쳐다봤다.
위연은 손을 내저으며 두 수양아들에게 호기루에서 물러나라고 했다.
한 번 화내면 두 번은 익숙해진다고, 남궁천유는 불평하고 빈정대기도 귀찮아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그 자리를 떴다.
양연은 호기루 아래에 서서 의부와 허칠안의 대화가 끝나길 기다렸다.
다실에는 두 사람만이 남았다. 위연은 엎어 놓은 찻잔을 반대로 돌려 허칠안에게 차를 따라주었다.
“천지회의 일인가?”
“소직 천지회의 남강 고족으로부터 소식을 하나 듣기는 했습니다.”
허칠안은 과분한 총애에 약간은 불안함을 느끼며, 차를 받아 한 모금 마셨다. 첫맛은 좀 썼으나 뒷맛은 향기롭고 달콤했다.
“천지회 내부의 오호가 고족인입니다. 지위도 꽤 높은 듯합니다. 어제 지서로 문자를 주고받았는데, 그가 말하길 극연 속의 고신이 회생할 조짐이 보인다고 합니다.”
위연이 표정을 굳히더니 말했다.
“갑자탕요 전 고신은 고족과 만요국이 억제하고 있어서 아무 일도 없었지. 만요국이 멸망한 현재 곳곳이 사찰이고, 최고 경지에 오른 고수도 많지 않아 고신이 정말 회생이라도 한다면, 고족만으로는 아마 저항하지 못할 걸세.”
여기까지 얘기하고 나니 그의 눈에는 걱정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지종도수(地宗道首)가 사도(邪道)에 빠지고, 고신이 회생할 징조가 보이며, 운록서원의 맑은 기운이 하늘로 솟구친다라…….’
줄줄이 이어지는 이 사건들은 모두 좋지 않은 일이 곧 발생할 것이라는 걸 암시하는 듯했다.
‘각계의 동요는 종종 대란의 해를 의미하기도 하니.’
“요 몇 년간, 불문의 세력을 확장하려는 야심이 점점 거세지고 있네.”
위연이 탄식하며 말했고, 허칠안의 마음이 동요했다.
“불문이 그해 요국을 멸살한 것이 선교 확장을 위함이란 말입니까?”
“설마 천하 창생을 위한 거라고 생각하나?”
잠시 머뭇거리던 위연이 물었다.
“내게 보고하려는 일이 무엇인가?”
허칠안이 정색하며 말했다.
“소직 이미 상백 밑에 봉인된 물건을 규명해냈습니다. 이 사건은 오백 년 전의 한 비밀스러운 일과 관련이 있습니다만, 큰 화를 초래할까 두렵습니다. 소직의 힘이 미천하여 감히 숨길 용기가 없습니다.”
여기까지 듣자 위연의 눈에 색다른 빛이 번뜩거렸으나, 그는 놀라움을 잘 감춘 채 떠보며 말했다.
“봉인된 물건?”
“바로 감정입니다. 초대 감정.”
허칠안은 조심스러운 태도로 말을 이었다.
“상백 밑에 봉인된 건 초대 감정입니다. 그해 무종이 찬…… 인품과 덕으로 황위에 올랐는데, 초대 감정이 무종을 지지하지 않아 무종이 즉위한 후에는 사서에 더는 초대 감정에 관한 기록이 없습니다.”
위연은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다 듣더니,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
“분석이 아주 일리가 있군.”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허칠안은 이어서 얘기했다.
“원경제가 지금까지 상황을 공표하지 않고 있어 모든 사람들이 속고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초대 감정과 현임 감정 사이에 충돌이 생긴다면, 경성은…….”
그는 말을 멈추었다. 위연의 지혜로움으로는 제 말뜻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