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근심거리 (1)
허칠안이 막 사람들을 데리고 떠난 뒤, 형부와 부아의 관원들이 말을 채찍질하여 주부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들은 부서진 대문을 보고 금세 간담이 서늘해졌다.
저택의 하인들을 불러 심문하니 야경꾼들이 허탕을 쳤고, 주 백호는 일찍이 경성에서 도망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두 관아 관원들의 심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복잡했다. 축하해야 하는 것인지 안타까워해야 하는 것인지, 영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 * *
황혼이 드리운 시각.
유 공공은 성문이 닫히기 전에 황궁으로 돌아왔다. 그는 아들들의 시중을 받으며 환복하고, 목욕을 한 후 식전 차를 마시고 있었다.
환관 하나가 황급히 들어와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어르신, 폐하께서 입궁하라는 전갈을 보내오셨습니다.”
유 공공은 미간을 꼬집으며 퉁명스럽게 답했다.
“알겠느니라!”
그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아들에게 환복하라고 지시하였다. 자신은 망포로 갈아입고 막 문턱을 넘는 순간, 그는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다.
“권종을 챙겨 오너라. 오늘 집에 가져온 그 권종 말이다.”
환관이 방으로 돌아가 이를 가져왔다.
* * *
정심전(静心殿)까지 쭉 온 후에 안내를 받아 들어가니, 도포를 입고 긴 수염을 흩날리는 원경제가 보였다.
원경제는 좌선하지도 집무를 보고 있지도 않았다. 그는 손에 서책을 쥐고 있었으나 생각은 딴 데 팔려있는 듯했다.
“유영(劉榮), 짐이 사람을 보내 사건 해결을 독촉한 지도 벌써 하루가 되었네. 무슨 수확이 있는가?”
원경제는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유 공공은 뜨끔했다. 그는 몇 십 년을 궁중 관리로 몸담아왔다. 특히 원경제가 이런 태도를 취할수록, 그의 마음은 더 조여오곤 했다.
‘사건의 경위에 대해 묻는 것은 구실이고, 폐하께서는 지금 역정을 내려고 하시는 것이겠지.’
유 공공은 잠시 겁을 먹었지만 이내 또 다행스럽다고 생각했다.
‘미리 준비하여 다행이다. 게다가 오늘은 정말로 수확이 있지 않은가.’
“폐하, 이것이 오늘의 사건 경위 보고입니다. 소인이 마침 폐하께 올리려 하였사옵나이다.”
유 공공은 소매 속에서 얇은 책자 한 권을 꺼냈다.
원경제 곁에서 시중을 드는 대태감(大太監)이, 손의 먼지를 털며 걸어와 책자를 받고서 원경제에게 아주 공손한 자세로 건네주었다.
원경제는 손에 쥐고 있던 서책을 한편에 두고, 책자를 받아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점점 그의 두 눈썹은 치켜 올라갔고, 눈은 분노로 차올랐다.
“온통 쓸데없는 말뿐이지 않느냐. 형부와 부아의 관원들이 갈수록 제 구실을 못하고 있구나.”
원경제는 분노하며 말했다.
그가 흘겨보자, 유 공공은 놀란 나머지 몸을 덜덜 떨었다.
원경제는 책자를 대충 집어 던졌다. 감정이 없는 어투는 유 공공을 한층 더 섬뜩하게 만들었다.
“야경꾼 관아 쪽은 어찌 되어가고 있느냐?”
유 공공은 고개를 숙이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저, 저 뒤편에 적혀 있사옵니다…….”
원경제는 양미간을 한번 치켜올리더니, 다시 책자를 집어 들고 계속해서 읽어 내려갔다.
돌연 원경제의 찌푸렸던 눈썹이 자연스레 펴지더니 양미간의 초조함 역시 서서히 사라져갔다. 그는 뜻밖에도 아주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옆으로 누워있던 원경제는 어느새 단정하게 앉은 자세를 하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점점 엄숙해졌고, 눈빛 역시 점점 날카로워졌다.
대태감 둘은 자신도 모르게 호흡을 늦췄다. 황제를 방해할까 걱정이 되어서이기도 했고, 불똥이 튈까 두렵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끝까지 다 읽은 후 원경제가 책자를 내려놓았을 때는, 이십여 년 동안 도를 닦은 도인의 비범한 풍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속세 제왕의 위엄과 맹렬한 기운만이 남아있었다.
유 공공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폐하께서 만족해하실 거라 여겼는데, 상황을 보아하니 역효과가 난 듯했다.
“명령하노라!”
원경제는 얼음장같이 굳은 표정을 하고 엄숙한 어투로 말했다.
“태강현령의 독직으로 대황산 주변의 탄광민 사상자가 수백 명에 이르니, 그의 관직을 박탈하고 감옥에 가두어 내년 추수 이후에 처결토록 한다. 또한, 부아의 포졸 여청을 육선문(六扇門) 총포두로 발탁한다.”
그는 허칠안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허칠안은 이미 죄를 뒤집어쓴 몸이기 때문에, 그의 업적과 공로는 마지막에 인정하여 그의 목숨을 상으로 하사하고자 함이었다.
“소인 명 받들겠나이다!”
유 공공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퇴장하였다.
그는 정심전에서 나와 한마디도 하지 않다가, 환관을 데리고 거처로 돌아와서야 거친 숨을 길게 내뱉었다.
‘폐하께서 뒷글을 보신 후 도리어 안색이 더 나빠지신 연유는 모르겠으나, 폐하께서 내린 명령을 비추어볼 때 뒤 아마 뒤 내용에 아주 만족하신 게지. 폐하의 심기가 불편하신 건 다른 일 때문일 거야.’
한편 정심전, 원경제는 창가에 서서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말했다.
“내성, 외성의 금지령 해제를 통고하거라.”
* * *
허칠안은 지친 몸을 이끌고 저택에 돌아왔다. 저녁 시간은 이미 지난 후였다.
허평지와 허신년은 등불이 훤히 비치는 허부 바깥 대청에서 허칠안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년아, 주자(*厨子: 음식을 만드는 사람)에게 밥과 찬을 좀 데워 내오라고 하거라.”
허평지가 말했다.
붉은 입술에 하얀 치아를 가져, 마치 그림 같은 준수한 외모의 허신년이 바깥 대청을 나서니, 이내 숙부와 조카 둘만 남겨졌다.
가볍게 흔들리는 촛불에 비친 숙부의 호방한 사각형 얼굴이 더없이 엄숙하고 냉담해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허신년이 돌아왔고, 하인들이 뒤따라 음식을 받들고 왔다. 줄곧 뜨거운 솥 안에서 허칠안이 돌아오기를 기다린 음식들이었다.
호방한 숙부와 준수한 외모의 사촌 동생을 보고 있자니 허칠안은 순간 아련해졌다.
그는 이 세계에서 혈혈단신 외톨이었다.
‘휴대전화도 없고, 컴퓨터도 없고, 키보드 워리어도 없고, 일본 멜로영화도 없지. 매일 양초나 등잔을 켜고, 화장실에 갈 때마다 쌍욕을 하며 아랫도리를 걷어 올리는 그런 삶을 살고 있을 뿐이야.’
가끔씩은 다시 전생으로 돌아가는 꿈을 꾸다가 미소를 지으며 깨기도 했다.하지만 눈을 떠 대들보가 교차하는 천장을 보면 순간 멍해지곤 했다.
“갑자기 술을 마시고 싶구나.”
허칠안은 낮은 목소리로 욕을 한 마디 내뱉더니, 하인에게 술 주전자를 건네받았다.
하인들이 음식을 다 내오자, 허평지는 그들에게 물러가라고 손짓하였다.
허칠안은 술을 한 모금 한 모금 들이부었다. 과거의 삶이 그리워지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한 구절이 떠올랐다.
‘오심안처시오향(*吾心安处是吾乡: 내 마음 편한 곳이 바로 내 고향이구나).’
‘그래도 어쨌거나 이 세계에는 밤늦게까지 나를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고, 주방에서는 나를 위해 밥과 찬을 데워주기도 하니까. 바깥에서 아무리 지치고 막막하고 쓸쓸할지라도 이곳에 돌아오면, 내가 외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돼.’
허칠안은 주전자 절반의 술을 마시고 나서야 긴 숨을 내쉬며 말했다.
“폐하께서 상백 폭발 사건을 철저하게 조사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공을 세우면 죄를 면하여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허평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일은 네가 끼어들면 안 되는 거였어.”
“알고 있습니다. 사건 조사만 맡았을 뿐, 진상 규명까지 책임지지는 않았습니다.”
허칠안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듯 말했다.
“어쨌든 시도는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해보지 않으면 도망칠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는 황권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으므로, 만약 사건을 조사해 내지 못할 경우 도주는 필연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식구들까지 연좌하지는 않을 겁니다. 어쨌거나 제가 그리 큰 죄를 지은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조금 전 그가 욕을 내뱉었던 이유는, 어렵사리 귀속감이 느껴지는 집을 찾았는데, 얼마 후면 아주 작별 인사를 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허칠안이 저지른 죄는 상급자 격살 미수로, 죽을죄를 짓기는 했으나 가족 연좌와는 한참 거리가 있었다.
대봉에서 연좌는 아주 엄중한 처벌로 보통 사람들은 연좌되고 싶어도 그 자격이 없다.
‘X대 연좌’의 죄명을 얻고 싶으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했다.
첫째, 역모를 꾀하거나, 둘째, 나라에 중대한 손실을 끼치거나, 셋째, 황실에 중대한 손실을 끼거나, 넷째, 줄을 잘못 서거나!
허평지는 두 번째 조항에 해당했었다. 그는 세은을 분실하여 국고에 커다란 손해를 입혔으나 이건 자주 발생하는 일은 아니었다.
위의 네 가지 사항을 달성할 수 있는 자는 통상적으로 조정의 고관들이었다. 그 주자귀(*硃紫貴: 자색 도포를 입고 황제에게 머슴살이하는 벼슬아치를 일컬음)들이야 말로 일가의 재산을 몰수당하고 참수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오죽하면 우스갯소리로 ‘연좌’는 대감들만의 특권이라는 말이 있겠는가.
기껏해야 허칠안 같은 사형수가 도망치면, 그건 그냥 도주범이 될 뿐이었다. 숙부와 숙모까지 연루될 일은 없었다.
허 숙부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생각이 확실하다면 그걸로 됐다. 너는 어려서부터 집요했으니.”
‘그건 예전의 저겠죠. 지금의 난 변덕스럽기 그지없어요…….’
허칠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어리석은 것도 아닌데요, 뭐”
허신년도 한숨 돌리며 말했다.
“정 안 되면, 운주(云州)로 가세요.”
‘운주?’
허칠안은 어리둥절했다.
운주라면 그도 아는 곳이었다. 그곳은 도적의 난이 끊이지 않아 ‘비주(匪州)’라고도 불리며, 이호도 운주에 있었다.
“도적이 들끓는다는 것은 조정의 영향력이 가장 적게 미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설령 지명 수배가 내려진다고 해도 운주로 도망친다면 안전할 것입니다. 좀 더 독하게 마음을 먹을 수 있다면, 산속에 들어가 산적이 되십시오. 무도를 연마할 수도 있고, 권세를 잡을 수도 있습니다. 조정에서 지명 수배를 내린 많은 중범들, 강호의 방랑자들 모두 운주에서 집결하기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일리가 있어. 다른 지역에 비해 운주에 숨는 것이 더 안전하겠다. 혼란스러운 곳일수록 더 안전한 법이지……!’
허칠안의 머릿속에 번쩍하고 추측이 떠올랐다.
‘만약 내가 주 백호라면, 어디로 도망칠까?’
주 백호는 요족과 사사로이 내통하여 상백을 폭발시키고 ‘일가족 재산 몰수와 참수’, ‘삼대(三代) 연좌’라는 중죄를 완벽하게 달성한 자였다.
조정에서 그를 놓아줄 리가 만무하기 때문에 어디에 숨어도 안전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디에 숨어야 할까?’
두 개의 선택지가 있었다.
‘대봉을 떠나든가, 운주에 숨든가! 그래, 운주였던 거야!’
허칠안이 갑자기 흥분하여 사촌 동생의 어깨를 치려 하는데, 허평지가 분노에 차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운주에 가서는 안 된다!”
두 형제가 깜짝 놀랐다.
“왜요?”
허칠안은 숙부의 반응을 의아하게 여겼다.
“네가 운주에 가서 무엇을 할 것이냐? 산속에 들어가 산적이 될 것이냐?”
숙부가 화를 내며 말했다.
“조정에서 해마다 도적을 토벌하는데, 만일 장래에 신년이를 운주로 보내 도적을 토벌하면 어떡할 것이냐? 너희 둘, 그날 맺은 약속을 잊은 게냐?”
‘무슨 약속이더라……. 아! 형제끼리 싸웠던 그 일…….’
허칠안과 허신년은 부끄러운 마음에 머리를 숙였다. 정말 잊고 있었기 때문이다.
숙부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보아하니 정말 마음에 담아둔 듯했다.
“알겠어요, 알겠어요. 저 운주에 안 가고 서역으로 갈게요.”
허칠안이 말했다.
‘서역의 호희(*鬍姬: 페르시아계 여성)는 예쁘고 친절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