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공로를 세워 죄를 면할 기회를 얻다
황자, 황녀들은 어서방을 떠나 자신들이 데려온 시위들과 합류했다. 장공주는 시위장의 손에서 자신의 패검을 건네받았다.
둘째 공주가 동복형제인 태자의 팔짱을 끼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흥, 회경에게 기회를 빼앗겼어.”
태자가 고개를 절레절레하면서 입을 열었다.
“좋은 일만은 아니다. 이 사건은 위연도 어려워했잖아. 회경은 그저 여분의 한 수를 둔 것뿐이야. 그 동라가 사건을 해결하면 뜻밖의 수확이고 해결하지 못해도 회경은 손해 보는 일이 없을 테지. 어차피 요참될 죄인이니까.”
“흥! 회경은 진짜 사악하다니까.”
둘째 공주가 예쁜 코를 찡긋하더니 태자에게 물었다.
“오라버니, 영진산하 사당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예요?”
두 사람은 걸어가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태자가 주위를 한 번 살피더니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이번 사건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아니면 위연이 그렇게 수심으로 가득한 표정을 지을 리가 없어. 그 비밀은 아마 아바마마 한 사람밖에 모를 것이다.”
‘물론 나도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그가 속으로 한 마디 보충했다. 그런데 이때 태자의 머릿속에 세속의 때가 묻지 않은 것 같은 국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자 그는 화가 치밀었다.
“임안!”
장공주의 한 마디에, 두 사람은 가던 길을 멈췄다.
태자와 둘째 공주가 동시에 머리를 돌렸다. 임안공주가 사납게 한 마디 대꾸했다.
“무슨 일입니까?”
손에 검을 든 장공주가 걸어오면서 말했다.
“아무 일도 아니다만…….”
오누이 두 명이 경계심을 늦추자, 장공주는 삽시간에 둘째 공주의 엉덩이를 검으로 힘껏 내리쳤다.
극심한 고통에 둘째 공주의 얼굴이 순간 백지장이 되더니, 몇 초 후에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장공주를 삿대질하며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회경, 본 공주가 널 죽여 버릴 것이다!”
태자가 정색을 하더니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회경, 너무 심하구나.”
“임안의 무공을 점검해 본 겁니다. 임안이 이에 불만이라면 똑같이 저를 점검해보아도 좋습니다.”
장공주가 재빠르게 몸을 돌리자,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둘째 공주가 훌쩍거리며 소리쳤다.
“고발할 거야. 아바마마께 고발할 것이다!”
태자가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다음에. 지금 아바마마께서는 널 상대할 마음이 없을 것이다.”
황자들 사이에 충돌이 생기거나 몸싸움이 벌어지면 원경제가 직접 나서곤 했다. 엄벌도 함께 내려지곤 했으나, 황녀 사이의 싸움은 다들 조용히 넘어가는 편이었다.
황자들은 모두 무공을 익혔기에 몸싸움이 벌어지면 부상을 입을 수 있지만 황녀 중에서 제대로 무공을 익힌 자라고는 장공주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임안공주가 입술을 깨물더니 장공주를 저주했다.
“회경, 기다려라! 내가 네 것을 모조리 다 빼앗고야 말 테니!”
* * *
이튿날 아침.
좌선 명상을 마친 위연에게 황제의 어명이 내려왔다.
“폐하의 명을 전달했으니, 위 공, 이제 감옥에 가서 그 동라를 청해 오시지요.”
황제의 어명을 전하러 온 환관의 태도는 무척 겸손했다.
“폐하께서 오늘 아침도 몇 숟가락 못 드셨습니다. 생각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위 공께서 하루 빨리 사건을 해결하여 폐하의 걱정을 덜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을 시켜 환관을 배웅하고 난 위 공의 얼굴에 웃음이 드러났다.
의부와 조식을 함께 먹던 양연이 안도의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의부께서 따로 마음을 써서 구할 필요가 없게 생겼네요.”
남궁천유가 헛웃음을 짓더니, 무공만 연마하다 머리가 녹 슨 멍청이가 됐다며 양연을 조롱했다.
“넌 어젯밤에 의부님이 장공주마마께 왜 그런 말을 했다고 생각하지?”
양연은 잠깐 생각해보더니 그제야 깨달았다.
어제 장공주는 사람을 보내 허칠안과 주성주의 충돌 경과를 조사했다. 이를 통해 장공주가 허칠안에 대해 마음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의부는 어젯밤에 일부러 장공주에게 암시를 준 것이었다. 총명한 사람들은 굳이 대놓고 말하지 않아도 다 알아듣는 법이었다. 장공주는 그 기회를 잡아 황제에게 허칠안을 사건 수사 요원으로 추천하였고, 그렇게 허칠안이 공을 세워 요참을 면할 기회를 마련했다.
이렇게 되면 허칠안은 정정당당하게 죄를 벗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이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양연은 의부가 허칠안을 구해내리라는 것을 진작 알았다. 의부가 허칠안을 지하 감옥에 넣고 칠일 후 요참으로 처형한다는 것도, 그저 관아 내부에 보여주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권력이 커질수록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적어지는 법이었다.
양연이 갑자기 눈썹을 찌푸리더니 입을 열었다.
“만약 허칠안이 보름 후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위연이 웃음을 짓더니 말을 꺼냈다.
“그럼 야경꾼 허칠안은 죽을 수밖에 없겠지. 그 후로는 강호인 신분으로 수면 위에 드러나지 않는 숨겨진 야경꾼으로 살아갈 테고.”
‘의부께서 그를 이토록 중시하다니…….’
남궁천유와 양연 모두 진지한 표정으로 내심 불만을 표했다.
위연은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웃음을 짓더니 입을 열었다.
“사람을 파견해 이옥춘에게 이르거라. 폐하께서 허칠안에게 공을 세워 죄를 면할 기회를 주셨다고 말이다. 이옥춘은 복직하라 명하고.”
잠깐 멈칫한 위연이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좀 성대한 방식으로.”
* * *
송정풍과 주광효는 동료를 데리러 지하 감옥으로 갔다. 두 사람의 얼굴은 희색이 넘쳤다.
부풀어 오른 방광을 비우느라 한 손으로 벽을 짚고 있던 허칠안은, 두 동료와 사졸이 갑자기 뛰어드는 바람에 손이 흔들리고 말았다.
“이런 젠장…….”
허칠안이 투덜거리면서 손을 죄수복에 슥슥 문질렀다.
“칠안, 너 죽지 않아도 된다!”
옥졸이 열쇠를 꺼내 문을 열자, 송정풍이 크게 웃으면서 말을 꺼냈다.
“폐하께서 너에게 공 세울 기회를 주셨어. 공을 세워 죄를 면할 기회를 주셨다고!”
‘폐하?’
허칠안은 순간 ‘일호가 폐하라고?!’라는 생각을 했다가, 곧장 머리를 털어 이를 부인했다. 뒤이어 그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면서 송정풍의 어깨에 손을 슥 가져가며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야?”
송정풍은 기쁜 소식을 전할 마음에, 자신이 한 방 먹은 것도 모른 채 일의 경과를 낱낱이 허칠안에게 말해주었다.
‘상백에 폭발사고가 일어나 영진산하 사당이 무너졌다고……?’
허칠안은 제사를 지낼 때 자신이 들었던 괴이한 소리를 떠올렸다.
자신이 사전에 했던 추측이 맞는 듯했다.
그럼 그 괴이한 소리는 허칠안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모종의 특수한 원인으로 인해 허칠안에게 들린 것이었을 테다.
‘그렇다면 그 소리는 누구를 겨냥한 것인가?’
“사당에 모셨던 신검은?”
허칠안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없이 사색에 빠졌다가 물었다.
그러자 송정풍이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 자신은 잘 모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하더니 입을 열었다.
“네 일 때문에 대장이 면직됐다. 네가 지하 감옥에 갇힌 후 대장이 호기루에 찾아가, 관아를 대상으로 욕설을 퍼부으며 위 공의 얼굴에 대놓고 침을 뱉었거든…….”
‘그래, 그게 바로 춘 형의 풍격이지…….’
허칠안은 옥졸에게서 제복과 요패와 패도를 되찾았다. 그는 옥석경을 사촌 동생이 가져갔다는 말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과연! 위연은 날 죽일 생각이 없었어! 폐하의 특별 사면이 없었더라도 위 아버지는 합리적인 구실을 대어 날 구해낼 생각이셨던 거다!’
세 사람은 지하 감옥을 떠나 관아 문밖으로 걸어갔다. 가까이에 있는 대문 어귀에서 징을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 * *
이옥춘이 동라들에 둘러싸여 관아로 들어왔다. 맨 앞에 선 동라가 징을 두드리며 높이 외쳤다.
“이 은라가 관직에 복직했습니다……!”
하급 관리와 야경꾼들이 사방에서 몰려오더니, 이옥춘을 가리키며 귓속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옥춘은 얼굴이 빨개져서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종종걸음으로 걸어갔다.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세 사람은 서로 마주보면서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허칠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대장이 관직에 복직했다니 경사지 경사! 우리는 가서 방해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저렇게 큰 창피를 당할 수야 없지…….’
송정풍과 주광효가 고개를 끄덕였다.
‘위연이 춘 형에게 제대로 복수했구먼. 춘 형이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위연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더니, 제대로 답례를 한 거다…….’
이 장면을 보던 허칠안은 굳은 결심을 했다. 앞으로 쉽사리 위연에게 밉보이지 않겠다고.
허칠안은 몸에서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게다가 얼른 집에 돌아가 좋은 소식을 전해야 하기에 관아에 더 머물지 않고 그가 사랑하는 작은 암말에 올라타 위풍당당하게 집으로 달렸다.
* * *
반 시진이 지나 허칠안은 허부에 도착했다.
허칠안을 본 문지기 로장이 기쁨에 겨워 울먹였다. 허칠안은 말고삐를 그에게 넘겨주고, 좋은 소식을 가족들에게 알리러 정원으로 들어갔다.
‘이 시간이면 가족들은 이미 조식을 먹었을 거고, 숙부는 당직을 서러 나갔겠지.’
허칠안의 생각은 틀린 데가 없었다. 허신년만이 집에 남아 모친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허칠안이 돌아온 것을 본 숙모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그러나 그녀는 바로 북받치는 희열을 억누르고 관습적으로 조카를 흘겼다.
허신년이 깜짝 놀라더니 말했다.
“장공주마마께서 이렇게 빨리 손 쓴 겁니까?”
이에 허칠안은 깜짝 놀라며 생각을 다시 한 번 정리해보았다.
‘그런 거였구나. 원경제가 나같이 작은 인물을 알고 있다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지. 장공주가 원경제 앞에서 날 추천한 것이었다……. 음, 위연이 기회를 잡아 공을 세워 죄를 면할 기회를 만들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
허신년이 말을 이었다.
“아버지께서 어제 사천감에 찾아가 백의 술사들의 도움을 구하려다가 나쁜 소식 하나를 전해들었습니다.”
그가 잠깐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감정이 병 들었다고 합니다.”
“뭐라고?”
허칠안이 놀라서 물었다.
“감정이 병 들었다고?”
‘일품 술사가 병 들었다?! 그것도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데서부터 수행을 시작하는 술사가?’
허칠안은 바로 자신의 추리를 전개했다.
‘상백의 이변과 관련 있는 건가? 팔괘대에만 머물러 있는 감정이 인간 세상을 내려 보다 바람 맞아 감기에 걸린 건 아닐 거 아냐?’
“구체적인 정황은 알 수 없습니다.”
허신년이 말했다.
“지금 바로 어도위 주둔지에 가서 아버지께 형님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려야겠습니다.”
허칠안을 맨날 욕하던 어머니마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으니, 아버지는 또 얼마나 속상했을지 허신년은 쉽게 상상이 갔다.
“그래, 나는 가서 영월이와 영음이를 잠깐 보고 올게. 조금 이따 또 일이 있어 관아에 다녀와야 돼.”
‘상백에 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얘기를 나누면 된다. 급한 게 아니니까.’
“그리고 형님의 거울은 제 방에 두었습니다. 나중에 형님 스스로 찾아가십시오. 소식을 알리라던 승려는 이미 그곳을 떠났다고 하더군요. 사제에게서 소식이 있다나?”
허신년의 말에, 허칠안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그렇지. 일호가 황제일 리 없지. 이 일에 대해 일호는 아예 모르고 있었다……. 그래도 위 아버지와 장공주는 참으로 믿을 만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