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추천
칠성검을 발판 삼고, 불진(拂尘)을 팔에 걸친 국사가 상백의 상공을 한 바퀴 돌더니 공중에 머문 채 원경제를 향해 말했다.
“폐하, 상백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이상이 없다…….’
원경제의 안색이 약간 어두워졌다. 위연이 고개를 돌려 금군 수령들에게 물었다.
“사상자들의 시체는 어디에 있느냐?”
그러자 금군들이 열 여명의 시체를 들고 왔다. 시체들은 천편일률로 살과 피가 바짝 말라 수십 년간 풍화된 미라 같아 보였다.
“다른 사병들의 시체도 이들과 똑같습니다.”
장군 한 명이 보고를 마치고 나서 조심스레 원경제의 안색을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폐하……. 소신들 모두 강적이 침입했다는 것을 감지하지 못했습니다.”
금군 수령들도 이번 이변의 진짜 원인이 제사 대전의 이변과 연관 있으리라 추측하고 있었다.
그들은 상백이 폭발하고 순시 사졸들이 급사한 것이 강적의 침입 때문이 아니라 상백 밑에 뭔가를 숨긴 것에서 비롯된 거라는 섬뜩한 추측 중이기도 했다.
다만 신하로서 그들은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원경제가 예리한 시선으로 시체들을 훑은 후 고개를 돌려 위연에게 말했다.
“위연, 짐을 따라 어서방(御书房)으로 가지.”
* * *
발을 내린 침상. 침전(寝殿)에는 단향이 피어올랐다.
장공주는 종소리에 깨어났다. 그녀는 눈을 뜨자마자 옷부터 입는 것이 아니라 머리맡에 걸어놓은 장검부터 뽑아들고 기세등등하게 대청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전하…….”
편청에서 잠자던 시녀도 놀라 깨어나, 다급히 장공주의 화려한 침의를 붙들었다.
“편한 옷으로 가져다 주거라.”
장공주의 아리따운 자태에서 위엄이 뿜어져 나왔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왼쪽 허리에는 쇠뇌, 오른쪽 허리에는 화총을 걸고 손에는 장검을 잡은 장공주는 시위대를 거느리고 원경제의 침전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그녀는 황제의 침전을 지키던 금군에 의해 가로막혔다. 이런 때일수록 황자, 황녀는 황제에게 접근할 수 없었다. 어느 자식이 반역을 밀모할지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장공주는 억지로 들이닥치지 않았다. 금군의 어깨 너머로 익숙한 그림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야경꾼과 군중의 고품계 무부들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발생한 거지? 강적이 침입하지 않은 이상 궁중 금군은 절대 종을 울려 경고하지 않았을 텐데……. 만요국의 강자가 침입했다기엔 또 너무나 조용하지. 게다가 사천감 사람들은 오지도 않았잖아.’
장공주는 검을 쥔 채 사색에 빠졌다.
이때 동궁 태자와 여러 황자, 황녀들이 사람들을 데리고 도착했다.
“회경!”
갑옷 차림의 태자가 장공주를 불렀다. 그의 얼굴 역시 엄숙한 기색이 역력했다.
“구체적인 상황은 아직 모릅니다.”
장공주가 간결하게 현재 상황을 전했다.
웃는 눈을 가진 매혹적인 둘째 공주가 장공주를 쳐다보았다. 편한 옷차림을 한 장공주의 미간에서 냉랭함은 사라졌지만 대신 날카로움이 서려 있었다. 자칫 잘못 건드렸다가는 바로 손에 잡은 검이 날아올 것만 같은 기세였다. 그래서 둘째 공주는 앵두알 같이 작은 입을 벌렸다가 다시금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그래, 오늘은 심각한 상황이니 회경과 말다툼할 여유가 없지.’
일각 후, 어서방의 문이 열리고 청의를 입은 환관이 나왔다.
“위 공…….”
황자와 황녀 중 위연과 가장 가까운 관계인 자는 장공주였다. 반쯤 위연의 제자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
위연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영진산하 사당이 무너졌습니다. 놈의 짓입니다. 하지만 놈은 이미 종적을 감춘 상태입니다.”
“그럴 수가!”
황자, 황녀들이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동궁 태자가 실눈을 뜨더니 감정을 가라앉히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면서 입을 열었다.
“그날 제사 대전의 일과 관련이 있는가?”
위연이 고개를 절레절레하더니, 장공주를 힐끗 쳐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제게 보름 내로 진상을 밝히고, 놈을 붙잡으라 지시하셨습니다. 허나 제가 폐하께 솔직히 말씀드렸습니다. 이 사건은 절대 그렇게 쉽게 해결될 사건이 아니라고…….”
말이 끝나자 위연이 재차 고개를 절레절레하면서 자리를 떴다.
이때 장공주의 눈에 빛이 반짝였다.
어서방의 문이 다시 한 번 열렸다. 오사고모(*烏紗高帽: 갓모가 높은 오사모)를 쓰고 낙타색의 망포(蟒袍)를 입은 대환관이 나왔다.
“폐하께서 전부 안으로 들이시랍니다.”
동궁 태자를 비롯해 상황을 살피러 온 황자, 황녀 여덟 명은 다같이 어서방으로 들어갔다.
전청에 놓은 황제의 어용(御用) 탁자 앞에는 사람이 없었다. 대환관은 그들을 데리고 내청으로 들어갔다. 발이 내려졌고, 원경제가 부들방석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와 마주 앉아 있는 사람은 여국사였다.
두 사람은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도우(道友)가 도를 논하는 거리를 유지했다.
십여 년간 원경제는 국사와 도를 닦아 무척 큰 효과를 본 터였다. 도를 닦기 전에는 정무에 시달려 젊은 나이에 흰 머리가 생겨 서른이 좀 넘을 때 이미 살쩍이 희끗희끗했었으나, 인종 도수와 이십 년간 도를 닦은 결과, 머리가 더 검어지고 기혈과 몸 상태 모두 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태자는 국사를 저주할 수만 있다면, 인형을 만들어 마구 찌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국사, 짐의 마음은 여전히 불안하다네.”
원경제가 좌선 상태를 벗어나 눈을 뜨면서 탄식했다.
“마음의 병입니다. 그러기에 마음으로 치료할 수밖에 없습니다.”
“확실히 마음의 병이 있긴 하네만…….”
원경제가 절세의 미모를 가진 여도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웃음을 머금고 입을 열었다.
“짐은 국사가 나와 쌍수(*双修: 남녀가 함께 도를 닦는 과정을 일컬음)하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네.”
이 말을 듣던 황자, 황녀의 안색이 이상하게 변했다.
유독 장공주와 태자만 덤덤했다. 둘 다 생각이 깊기로 유명한 자들이었다.
십 년 전부터 원경제는 국사에게 쌍수를 제안해왔으나 국사가 거절했다. 그러자 원경제는 조서를 내려 국사를 선비(仙妃)로 책봉하겠다고까지 했다.
하지만 국사는 여전히 거절했다. 국사의 도움을 받아 도를 닦아야 하는 원경제였던지라 어쩔 수 없이 쌍수를 포기했다.
외부인들은 원경제가 그저 국사의 미모가 탐나 쌍수를 제안한 줄로만 알고 있었으나 절대 주요 원인이 아니었다. 황자, 황녀들은 자신들의 부황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경성 제일미인으로 불리는 진북왕비도 왕년에는 궁중 여인이었다. 하지만 당시 이미 금욕하고 도를 닦기 시작한 원경제는 그녀의 손가락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다.
부황이 자나 깨나 바라는 것은 딱 하나, 바로 장생이었다.
만족스러운 답을 듣지 못했으나, 원경제는 이에 개의치 않아 했다. 그는 발을 올리고 침상에서 내려와 자녀들을 거느리고, 탁자 앞에 높이 앉아 말을 꺼냈다.
“짐을 걱정할 필요 없다. 아무 일도 없으니.”
장자로서 황자, 황녀를 이끌어야 한다는 부담이 있는 태자가 읍하더니 먼저 입을 열었다.
“아바마마, 제사 대전에 발생했던 이상과 관련이 있는 겁니까?”
이에 원경제가 눈썹을 찌푸렸다. 설명하기 귀찮은 모양이었다.
태자가 둘째 공주에게 눈치를 줬다. 이에 둘째, 임안공주가 눈웃음을 치더니 대환관의 손에서 찻잔을 건네 받았다. 그녀는 원경제 옆으로 걸어가 애교 섞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
“아바마마, 상백은 우리 황실의 금지 구역인데, 어떤 놈이 상백에 잠입해 태조의 사당을 망가뜨렸단 말입니까? 그렇다면 그놈이 임안의 거처에도 잠입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둘째, 임안공주가 아리따운 양미간을 찌푸리면서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여러 황자와 황녀 중에서 둘째 공주가 황제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고 있었다. 애교를 부릴 줄 아는 둘째 공주는 원경제의 환심을 살 줄 알았다.
원경제는 성격이 무척 강한데다가 소유욕도 무척 대단했다. 그는 재능이 뛰어나고 독립적인 장공주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유약하고 해롭지 않으며 자신에게 의지할 줄 알고 애교를 부릴 줄 아는 둘째 공주는 무척 예뻐했다.
원경제가 둘째 공주의 보드라운 손을 톡톡 치면서 위로했다.
“허튼 소리! 이 황궁이 놈이 오겠다면 오고 가겠다면 갈 수 있는 곳이더냐?”
첫 공격을 날린 태자에, 둘째 공주의 합공까지.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장공주가 앞으로 걸음을 옮기더니 예를 갖추면서 말을 꺼냈다.
“방금 전, 문어귀에서 위 공을 만났는데, 언행에서 사건의 난이도를 슬쩍 내비치더군요. 아마 아바마마께 수사 기한을 며칠 더 구해달라 아신(*儿臣: 황녀 혹은 황자가 부황이나 모후에게 자칭하는 말)에게 부탁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장공주의 말을 듣던 원경제가 코웃음을 쳤다.
장공주가 말을 이었다.
“아바마마, 아신이 수사에 재능이 남다른 친구를 알고 있사옵니다. 만약 그 친구가 사건 수사에 참여한다면 보름 내로 무조건 진상을 밝혀낼 것입니다.”
순간, 황자와 황녀들의 시선이 일제히 장공주에게 쏠렸다. 원경제의 팔을 안고 있던 임안공주도 장공주를 쳐다보았다.
태자가 곁눈으로 공주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들 모두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회경이 또 자기 사람을 추천하려는 속셈이구나.’
황자와 황녀들이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첫째, 조당의 신하를 끌어들여 자신의 옹호자로 만드는 것과 둘째, 자신의 심복을 추천하는 것이었다.
원경제가 워낙 소유욕이 강하고, 제왕적 계략 또한 비하지 못할 만큼 뛰어났기에, 태자를 포함한 다른 황녀, 황자들도 대놓고 작당을 수단으로 하는 첫째 방법은 이용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주로 두 번째 방법을 이용했다.
다만 그것도 시기적절해야 했다. 다른 황자와 황녀들은 지금이 좋은 시기라 여기지 않았다. 임무 난이도가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원경제가 실눈을 뜨며 웃음을 짓더니 물었다.
“회경, 누구를 추천하려고 그러느냐?”
장공주가 답했다.
“야경꾼 관아의 동라 허칠안을 추천하려 합니다.”
둘째 공주가 뭔가 깨달은 듯 ‘아!’ 하고 외치더니 순진무구한 얼굴로 말했다.
“제사 드리던 날, 언니를 무척 사모하는 것 같았던 그 동라를 말씀하시는 거죠? 언니가 그 동라와 웃고 떠들며 대화를 나누었잖아요.”
‘독하다!’
원경제 앞에서 장공주를 제대로 한 방 먹이는 말이었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 은 장공주가 아직 출가 전이라는 사실이었다. 원경제가 아무리 도에 미쳐 자녀들의 혼사에 관심이 없다 한들, 한 나라의 공주가 뭇 남정네들의 마음을 유혹하는 건 용납 못할 것이다.
장공주가 말을 이었다.
“아바마마께서도 이 사람을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세은 사건에 연루된 어도위 백호 허평지의 조카입니다.”
원경제가 드디어 관심을 보였다.
“기억한다. 그 사람이 가짜 은자도 정제해냈다지. 가짜 은자가 보존하기 어렵고 소금을 대량으로 낭비하지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사천감에 명해 대량으로 정제해내라 하고 싶구나.”
가짜 은자의 재료는 소금이었다. 하지만 소금은 무척 비쌌다. 원경제는 사천감 술사들의 이러한 보고를 듣고 나서야 가짜 은자의 양산을 포기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자는 장락현아에서도 무척 실적이 좋아, 여러 건의 살인사건을 해결했습니다.”
장공주가 불을 한 번 더 붙였다.
이에 원경제가 웃더니 말했다.
“그럼 네가 굳이 짐한테 청할 필요가 없잖느냐.”
장공주가 고개를 떨어뜨리더니 말을 이어갔다.
“아바마마께서 현명하게 판단해 주십시오. 바로 어제, 동라 허칠안이 관아의 은라와 충돌이 생겨 그 은라에게 큰 부상을 입혔습니다. 상급자에게 무력을 가했으니 법에 따르면 요참에 처해야겠지요.
그 동라는 현재 옥에 갇혀 있습니다. 아바마마께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동라 허칠안에게 공을 세워 요참을 면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장공주는 충돌의 원인을 설명하지도, 허칠안을 위해 변명하지도 않았다. 그런 것들이 원경제에게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원경제는 옳고 그름이나 시시비비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가 중요시하는 건 누가 유용하고, 누가 능력이 있는 가였다.
과연, 원경제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회경이 그자를 위해 간청하니, 짐이 그자에게 공을 세워 벌을 면할 기회를 주겠다. 다만 사건 해결에 참여하여 보름 내로 태조(太祖) 사당을 망가뜨린 진범을 찾지 못할 경우, 짐은 바로 그의 목을 자를 것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