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생명보다 귀한 것
허칠안은 얼음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눈빛으로 눈앞의 동라를 쳐다보더니 허리에 찬 요패를 살폈다.
“계속해. 이미 네 이름을 머리에 저장했으니 나중에 위 공께 직접 고발해주지.”
위연은 이름 자체만으로도 그 위력이 대단했다. 그 동라는 위연의 이름을 듣자마자 당황한 얼굴로 부인과 허칠안을 번갈아 보며 망설였다.
허칠안은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고, 방금 전과 똑같은 방법으로 다른 방의 문들을 박차고 들어가서는 위연의 이름으로 위협하여 몹쓸 짓을 하려던 동료들을 제지시켰다.
‘어째 주씨가 보이지 않는군…….’
허칠안은 덜컥 내려앉은 마음을 뒤로하고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맨 마지막 방문을 박찼다.
과연, 방 안에는 주 은라가 있었다.
그는 섬뜩하게 웃으면서 소녀를 제압하고 옷을 한 겹 한 겹 벗기고 있었다.
소녀는 딱 봐도 무척 어려 보였다. 그녀는 흐느끼고는 있지만 감히 울음소리를 내지는 못했다.
이 장면을 목격한 허칠안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하지만 그는 경솔하게 덤비지 않고 우선 주 은라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얼른 꺼지지 못해!”
주 은라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허칠안은 당연히 꺼지지 않았다. 그는 추호의 두려움도 없이 연신경 고수와 눈을 마주치면서 똑똑히 말했다.
“저 소녀를 건드리기만 해. 나중에 위 공께 고발할 거다.”
이 말에 소녀의 눈에 희망이 서렸다. 마치 익사하기 직전 지푸라기라도 잡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두 사람의 언성이 높아지자 동라와 백역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동라와 은라가 대치하고 있는 모습에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 이 겁대가리 없는 놈아.”
이전에는 그저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허칠안이 눈에 거슬린 것뿐이었으나, 이제 주 은라는 허칠안을 기필코 죽이고야 말겠다는 결심이 섰다.
주 은라가 손으로 소녀의 목을 쥐어 올리더니 성큼성큼 방을 나섰다.
무척 강렬한 기기를 느낀 허칠안은 저도 모르게 칼자루를 잡고 경계 태세로 뒷걸음치며 주 은라를 피했다.
그러자 주 은라는 소녀를 들고 밖으로 나오더니 그녀를 돌탁자 위에 내동댕이치고 고개를 돌려 섬뜩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놈이 어쩔 것이냐?”
허칠안의 관자놀이에 선 핏줄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칠안…….”
송정풍이 어두운 안색으로 달려오더니 도를 누른 허칠안의 오른손을 잡으면서 이를 악물고 말했다.
“충동적으로 행동하지마. 뒷일이 어떨지 알잖아…….”
그의 말투에는 애원이 섞여 있었다.
허칠안은 냉정함을 되찾고 송정풍의 경고를 알아들었다.
우선, 동라가 은라를 공격하는 것은 큰 죄였다. 목숨을 잃는다 해도 자업자득인 셈이었다.
다시 말해서 주씨가 여자아이를 밖에 끌고 나와 겁탈하려는 행동은 사실상 허칠안이 도를 뽑도록 자극하기 위함이었다.
이건 허칠안을 죽음으로 몰려는 것이었다.
‘연기경이 어찌 연신경과 대적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허칠안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비장한 어투로 다시 한 번 반복했다.
“건드리기만 해. 위 공께 고발한다고 분명 말했다.”
주 은라가 미친 듯이 웃어대더니 한마디 내뱉었다.
“고발해보거라. 다만 내가 눈앞에 있는 어린 미인과 즐기고 난 후.”
다른 동라들은 허칠안의 위협을 두려워할지 몰라도 그는 두렵지 않았다.
그는 금라인 부친을 두었기에 뒷심이 든든했다. 게다가 본분에 지나치게 어긋나는 행위는 하지 않아 여태 크게 책잡힌 일도 없었다.
그런 그에게 죄를 범한 관리 집안 여인을 겁탈하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런 일이 한두 번 발생하는 것도 아니었다. 해마다 그렇게 많은 관리들이 재산을 몰수당하고 유배당하는데, 그 집안 여인들이 연좌제가 아니라고 가볍게 몸만 뺄 수 있겠는가?
‘대가는 지불해야 할 거 아냐?’
주 은라는 경멸의 웃음을 짓더니 소녀를 겁탈하려는 자세를 취했다.
일부 동라들이 머리를 돌렸다. 몇몇 동라들은 휘파람을 불면서 괴이한 웃음을 지었다.
중학교에 진학할 나이쯤으로 보이는 어린 소녀가 맞이하게 될 끔찍한 운명은, 21세기에서 날아온 영혼을 제대로 자극했다.
“그 손 놔!”
허칠안이 주 은라를 향해 단호히 한마디를 뱉었다.
허칠안의 눈빛은 침착했고 호흡은 차분했다. 그는 자신의 격앙된 감정을 가라앉히고 최적의 상태에 들어갔다.
그는 칼자루를 누르고 있던 엄지손가락으로 흑금장도(黑金长刀)의 날밑을 조금 튕겨, 도날을 일 촌 정도 뺐다.
곧바로 장도가 도실을 벗어나는 소리가 후원에 울려 퍼졌다. 주 은라가 폭발한 것이다.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허칠안을 노려보면서 그를 향해 도날을 휘둘렀다.
허칠안도 대비하고 있었다.
해조(海藻)를 방불케하는 사나운 기기가 용솟음치더니, 반석 마냥 제자리에 끄떡없이 서 있던 허칠안이 한 점을 목표로 절정에 이르렀다.
다시 한번 도날이 도실을 벗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무척 가는 도광이 반짝하고 사라지는 것과, 도를 누르고 있던 허칠안의 손이 조금 움직인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들이 신기하다 여긴 점은 허칠안의 도가 여전히 도실에 있다는 것이었다. 다들 방금 전 그 소리를 환청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주 은라는 딱딱히 굳어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가슴에 묶여있던 은라에 균열이 생기더니 땅으로 곤두박질 쳤다.
뒤이어 그의 가슴이 도흔(刀痕)으로 찢어지더니 피가 사방으로 마구 튀겨, 허칠안의 얼굴과 몸은 한순간 피범벅이 되었다.
쥐 죽은 듯 고요한 가운데 주 은라가 힘없이 뒤로 넘어졌다.
송정풍의 반응이 가장 빨랐다. 그는 창백해진 얼굴로 주 은라의 옆으로 달려가 동맥을 만져보았다.
“죽지 않았어. 죽지 않았어…….”
송정풍이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얼른 사람을 불러와, 얼른!”
현장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다. 일부 동라들은 주 은라를 구하기 위해 급히 기기를 주입했고, 단약을 입에 부어넣고는 그를 들고 나갔다. 야경꾼 관아에 돌아가 치료할 예정이었다.
다른 일부 동라들은 도를 뽑아 들었다. 도날 뽑는 소리가 연달아 울리더니 허칠안이 포위당했다.
한결같이 과묵하던 주광효가 칼자루를 누르더니, 허칠안 앞에 나서면서 말했다.
“칠안…….”
얼굴이 백지장이 된 송정풍이 어렵게 한마디 뱉었다.
“도망쳐!”
일도에 기기를 깡그리 사용해버린 허칠안은 고개를 절레절레하더니 애써 웃으면서 말했다. 그의 미간에서는 탈진감이 느껴졌다.
“내가 도망치면, 숙부와 숙모는?”
송정풍이 폭발했다. 그는 허칠안의 옷깃을 잡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소녀를 가리키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럴 가치가 있어? 일면식도 없는 아이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야!”
“아직 어린 애잖아…….”
허칠안이 그녀를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이 세상에는 생명보다 귀한 것도 있어.”
그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 누구도 감히 막아 나서지 못했다. 그가 한 걸음 앞으로 내딛으면, 야경꾼들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열 걸음 뒤, 허칠안은 허리춤에 걸었던 요패와 패도를 땅에 집어던지더니 누구도 알아보지 못할 동작을 취했다.
그는 고개를 젖혀 저 멀리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며 군례를 올렸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허칠안은 경찰학교를 졸업할 때 그 정의로 똘똘 뭉쳤던 패기가 다시금 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비록 온몸은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말이다.
허칠안의 군례는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지만, 송정풍은 일부 동라들의 살기를 느꼈다. 바로 주 은라 수하에 있는 동라들이었다.
“저 놈을 잡아라. 도망치지 못하게!”
송정풍이 크게 소리를 지르더니 맨 먼저 허칠안을 덮쳤다. 그는 허칠안을 바닥에 누르고, 허칠안의 두 손을 뒤로 가져가 주위를 살피면서 말했다.
“동라 허칠안이 상급인 은라를 습격했다! 법이나 규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이 놈은, 반드시 관아에 넘겨 처리해야 한다!”
주광효가 슬그머니 다가오더니 허리춤에서 끈을 풀어 손수 허칠안의 손을 묶었다.
두 사람이 허칠안을 체포하는 것을 본 주위의 동라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안색이 어두워진 송정풍이 주광효에게 귓속말로 말했다.
“네가 관아까지 데리고 가. 나는 먼저 가서 대장한테 알려야겠어. 주 은라의 수하가 압송하지 못하게 잘 봐.”
말이 끝나기 바쁘게 송정풍은 두 손을 모아 공수하면서 입을 열었다.
“이자는 우리와 함께 이 은라의 부하일세. 이렇게 큰 죄를 범한 데는 우리의 책임도 있네. 이자는 우리가 관아로 압송할 테니 자네들은 계속하여 재산을 몰수하게. 사안이 중대하니 행동들 조심하시게. 우리도 더는 책잡혀서는 안 되지.”
“그럼 부탁하겠네.”
대부분의 동라들이 송정풍의 말에 동의했다.
송정풍이 맡겠다고 했으니, 범인이 도망쳐도 그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재산 몰수 임무를 채 완수하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의 호주머니에 좀 더 챙겨넣고 싶었다.
* * *
송정풍과 주광효는 어젯밤 함께 놀던 동료 몇을 찾아 함께 허칠안을 압송했다.
송정풍은 화가 단단히 난 터였다. 그는 가는 도중 허칠안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심지어 발로 몇 번 걷어찼다.
그들은 저택을 나오자마자 말에 채찍을 가해, 관아를 향해 전속으로 달렸다.
허칠안은 끈에 두 손이 묶인 채 말 등에 올라 압송하는 동라 네 명과 함께 야경꾼 관아로 움직였다.
그제야 이성을 되찾은 허칠안은 근심 걱정이 몰려왔다.
죽음이 무섭긴 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방금 전의 죄인 집안 여인들은 봉변 당할 이유가 없었다.
허칠안은 줄곧 이 시대의 규칙들에 적응하려고 노력해왔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팔품 무부이기에 그는 환경에 어우러져야만 했다. 하지만 방금 전, 그 아이가 맞이해야 할 불공평한 운명에 직면한 순간, 그가 여태 억눌렀던 신념이 갑자기 날을 세운 것을 생생히 느꼈다. 경찰이 되었을 때의 그 초심이 마음속에서 다시 되살아났던 것이다.
* * *
송정풍은 미친 듯이 내달렸다. 그가 말 엉덩이에 채찍을 가하면서 소리 높이 외쳤다.
“야경꾼이다. 물러서라. 물러서!”
당황한 행인들이 빠르게 물러섰다. 욕설을 퍼붓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하지만 송정풍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전속력으로 야경꾼 관아에 도착하자마자 말고삐도 문지기 백역한테 넘겨주지 않고 관아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당 내에서 사무를 보고 있던 이옥춘이 고개를 들어 문어귀를 쳐다봤다. 몇 초 후, 송정풍이 춘풍당에 뛰어들었다.
“무슨 일인가?”
이옥춘이 물었다.
발걸음이 어지간히 급한 게 아니었다. 시급한 일이 있지 않고서야 그럴 수 없었다.
“허칠안이 하마터면 주 은라를 죽일 뻔했습니다. 대장, 얼른 그놈을 좀 구해주십시오.”
송정풍의 말은 무척 빨랐다. 그는 이옥춘이 제대로 캐묻기도 전에 이어 말했다.
“주광효와 몇몇 동료들이 함께 그를 압송하여 관아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주 금라도 금방 소식을 들을 텐데, 제가 두려운 것은 허칠안이 관아에 도착할 기회조차 없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옥춘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송정풍을 데리고 춘풍당을 나갔다.
그의 목적지는 분명했다. 양연의 신창당(神槍堂)이었다.
금라에 맞설 수 있는 것은 금라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날랜 발걸음으로 움직이면서 계속하여 대화를 나눴다.
“대체 어떻게 된 거냐?”
송정풍이 조금 숨을 고르더니 더욱 빠르게 말했다.
“범인 집안 여인을 겁탈하려던 주씨를 그놈이 나서서 제지하려다가 그만 충돌이 생겼습니다. 허칠안이 도(刀)로 내리쳤더니, 주 은라가 숨이 겨우 붙어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송정풍은 계속하여 자세한 상황을 알렸다. 출발 전에 주 은라가 허칠안을 괴롭힌 것까지 포함해서 몽땅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