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제사 대전(祭祖大典)
제사 전용 곡조와 함께 위풍당당한 대열이 황성을 떠나 상백을 향해 오고 있었다.
그들은 말도 마차도 없이 뚜벅뚜벅 걸어왔다.
제사 대오는 황실, 종친, 문무백관을 포함해 수백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대봉 황조의 권력 정상들만 모인 대오였다.
맨 앞에서 소박한 도포에 목잠으로 머리를 묶은 원경제가 대오를 이끌었다. 오순(*五旬: 50세)이 넘은 그는 준수한 외모에 긴 수염을 흩날리고 있었다. 도를 닦는 도인의 풍채가 느껴졌다.
그 뒤로 점잖은 분위기에 귀티가 흐르는 황후와 귀비가 뒤따랐고, 그 뒤에야 황자와 황녀가 보였다.
원경제는 자제가 무척 많았다. 황자만 해도 열두 명이었다. 그에 비해 황녀는 네 명 밖에 안 됐다. 장공주도 올해 스물다섯밖에 안 되어 장자인 황자와는 열 살 차이가 났다.
재능과 미모로 경성에 소문이 자자한 장공주는 새하얀 피부에, 눈동자가 못 같이 맑고 깊었다. 그녀는 범접불가의 고고한 분위기를 풍기면서 묵묵히 대오를 따르고 있었다.
곡조가 울리는 가운데 제사 대오는 명황색 천막 앞에서 멈춰섰고, 도인의 풍채를 드러내던 원경제는 대환관 두 명과 함께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기타 사람들은 그 밖에서 기다렸다.
제사를 책임지는 신하들이 분주히 돌아다녔다. 신을 부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오를 정렬하는 사람도 있었다. 모두 자신이 맡은 직책을 다하면서 제사 준비에 나섰다.
허칠안은 몸을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서 최대한 고개를 돌려, 곁눈으로 제사 현장을 훔쳐봤다.
한 대오가 황색 비단으로 덮은 위패를 받들고, 구불구불한 수상 장랑(長廊)을 따라 한백옥고대로 올라가 위패를 사당 앞 탁자 위에 놓았다.
그가 돌아오자 다른 한 대오가 태상시 관원의 지휘에 따라 제기와 제물을 가져갔다. 종류가 무척 다양했다. 줄잡아 이삼백 건은 되었다.
모든 것이 준비 완료되자 태상시경(太常寺卿)이 천막 밖에서 높은 소리로 외쳤다.
“안신(安神)을 마쳤으니, 폐하를 모시겠습니다.”
황녀와 황자, 문무백관 모두 일제히 무릎 꿇고 절을 올렸다.
대환관들이 발을 올리자, 황색 곤룡포로 갈아입은 원경제가 장엄한 기세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도인의 풍채는 온데간데없고 제왕의 위엄만이 남아있었다.
‘이 분위기는 전생의 최고 회의보다도 더 장엄하네……. 이런 장면도 목격할 수 있다니…….’
허칠안은 흥미진진하게 눈앞의 광경을 지켜보는 가운데 갑자기 감응을 느꼈다. 지서에 누군가가 말을 보내온 것이다.
잠깐 기다리던 그는 순찰 대오가 지나간 다음 가슴에 손을 넣고 옥석경을 들여다보았다.
[이: 오늘은 대봉 황실에서 제사를 지내는 날이지? 일호, 삼호, 맞는가?]
[사: 시간을 얼추 짐작해보니 오늘이 맞군. 과거 나도 황실 제사에 참석한 적 있는데.]
[이: 과거? 허, 사호 과거에 관직에 있었나 보군? 그것도 지위가 낮지 않은 관원으로.]
[사: 맞네.]
‘사호가 과거 조당 관원이었다? 사호라면 인종 여국사와 친분이 있잖아. 그래, 그럼 말이 되지. 관직에 있었으니까 여국사와 친분이 있는 거겠지. 보아하니 사호도 사연이 많은 인물인가보군.’
허칠안은 천지회에 대한 흥미가 날로 더해졌다. 지서 파편 소지자들 모두 신분이 신비로울 뿐만 아니라 수행 품계도 높았다.
그들을 알아가는 건 베일을 한 겹씩 벗겨내는 것 같은 재미가 있었다.
[이: 오호. 일호와 삼호 모두 답장이 없구먼.]
이호가 이때 문자를 보낸 건 황실 제사에 관심 있어서가 아니라 일호와 삼호의 신분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였다.
지서와 소지자의 관계에 의하면 문자가 도착하기만 하면 깊은 잠에서도 놀라 깼다. 그랬기에 미처 확인하지 못한 경우는 존재하지 않았다.
긴급 상황 때문에 답장을 못하는 경우밖에 없었다.
일호와 삼호가 동시에 긴급 상황에 처할 리는 없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두 사람 모두 제사에 참석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제사를 지내는 과정에 참여한다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지서를 꺼내들고 답장하지는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때, 허칠안의 행동이 송정풍의 눈에 들어왔다.
이를 발견한 허칠안은 바로 손에 힘을 풀어 밖으로 반쯤 드러난 옥석경을 다시 품에 넣었다.
“쓸데없는 행동하지 말고 똑바로 서 있어.”
송정풍이 눈썹을 찌푸리면서 경고했다.
“알았어. 알았어.”
허칠안이 건성으로 답했다.
‘이걸 어쩐담? 난 운록서원의 제자인데, 황실 제사에 참석할 이유도 자격도 없잖아. 꼬리가 밟히게 생겼군……. 빌어먹을! 천지회 놈들 모두 약아빠져서는! 잠깐! 일호도 답장을 하지 않았잖아……. 허, 그럼 일호도 현장에 있다는 건데, 과연 누구일까?’
허칠안이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을 때, 천지회의 다른 구성원들도 동일한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다.
‘삼호는 운록서원의 제자가 아니었어? 모두 알다시피 운록서원 학생들의 벼슬길은 거의 끊기다시피 됐잖아. 그럼 황실 제사에 참석할 자격도 없을 텐데.’
‘삼호가 드러낸 분위기로 판단했을 때 그는 아직 운록서원의 학생이다. 그럼 제사에 참석할 자격은 더 없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럼 삼호는 운록서원의 제자가 아니란 건가?’
‘아니야. 그렇다면 이전에 발생했던 일들은 어떻게 해석할 건데.’
‘다른 신분으로 황실 제사에 참여했을 수도. 운록서원이 암암리에 조정에 배치한 사람이라면 말이 된다. 그럼 어느 관아인가? 신분은?’
그들은 오히려 일호의 신분에 대해서는 그다지 놀라고 있지 않았다. 오래 전부터 일호가 조정에서도 높은 지위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호, 자네는 관직에 있었으니 삼호를 좀 분석해보게.]
[사: 나는 이미 어느정도 알겠네만 그걸 왜 자네한테 말해줘야 하나?]
[육: 이호, 자네는 경성에 있지도 않으면서 삼호와 일호의 신분을 알아서 뭐 하는가?]
사호와 육호 모두 삼호를 두둔하고 나섰다.
허칠안은 오가는 문자 내용이 궁금했지만 애써 참고 확인하지 않았다.
제사 대전을 지켜보고 있던 허칠안은 자꾸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제사의 곡조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구해줘. 날 좀 구해줘…….”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귀를 기울이자 목소리가 사라졌다.
“정풍, 광효. 무슨 이상한 소리를 듣지 못했어?”
허칠안은 자신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동료에게 물었다.
“제사 곡조를 말하는 거야? 좀 그렇긴 해……. 귀청이 떨어질 것 같군.”
임기응변에 강한 송정풍이 애써 에둘러 자신의 소감을 표현했다. 사실 그는 제사 곡조가 무척 듣기 싫었다.
주광효는 고개를 절레절레했다.
허칠안이 막 입을 열려는데, 괴이한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번에는 무척 똑똑히 들렸다. 상백 호수에서 전해지는 소리였다.
“구해줘. 날 좀 구해줘…….”
허칠안은 으스스한 소리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마치 악귀(恶鬼)가 자신에게 귓속말을 하는 것만 같았다.
소름이 끼친 나머지 허칠안의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그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상백 호수를 살폈다.
경비임무를 맡은 야경꾼이 고개를 돌려 제사 장면을 훔쳐보는 것은 금지사항이었다.
허칠안이 고개를 돌리자, 세 걸음에 한 번 고두(叩头)하면서 천천히 한백옥고대에 오르는 황색 곤룡포를 입은 원경제와 이를 지켜보는 문무백관, 황자와 황녀, 위연과 의자(義子) 두 명이 보였다.
그리고 기세가 웅장한 사당과 금군, 환관들이 보였다.
그가 고개를 돌린 찰나, 소리는 다시 사라졌다.
‘환청인가?’
허칠안이 숨을 크게 한번 들이쉬더니 고개를 돌리면서 입을 열었다.
“너희 둘은 상백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어?”
주광효와 송정풍의 대답에는 별로 가치 있는 정보가 없었다. “개국황제가 득도한 곳”이라던가 “현무가 검을 증여했다”던가, “황실에서 제사를 지내는 곳”이라던가, 전부 허칠안이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구해줘. 날 좀 구해줘…….”
그 소리는 또다시 들려왔다. 허칠안이 뻣뻣해진 목을 조금씩 돌려 다시 한 번 제사 장면을 훔쳐봤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소리는 다시 사라졌다.
공포가 이미 그의 마음을 삼켜버린 듯했다.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대봉 개국황제가 득도한 상백 호수, 해마다 황실에서 제사를 지내는 이곳에서 살려달라는 스산한 소리가 들리다니…….’
허칠안은 찬바람을 맞으며 전율했다.
“구해줘. 구해줘…….”
“구해줘. 구해줘…….”
소름끼치는 소리에 허칠안은 그만 이성을 잃어갔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았다. 이성을 되찾아야겠다고 판단을 내린 그는, 동료들의 시선을 고려하지 않은 채 옥석경을 꺼내들고 바로 글씨를 입력했다.
[삼: 자네들 상백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지금 바로 알려주게. 무척 중요하네.]
[이: 삼호, 드디어 답장했구먼. 진짜 제사 현장에 있는 건가? 상백에?]
허칠안은 이호의 문자에 답장하지 않았다. 몇 초간 기다리자 사호의 문자가 떴다.
[사: 상백은 대봉 개국황제가 득도한 곳이기에 대봉이 나라를 세우고 나서 상백에 도성을 세웠네. 현무에 관한 전설은 증거가 불충분하여 신빙성이 없네.
다만 신검은 진짜 있네. 호수 위 한백옥고대의 사당에 개국황제가 당시 사용했던 패검을 모셔뒀네.]
사호의 말이 끝나자 금련 도사가 보충 설명을 했다.
[구: 그건 대봉의 기운을 상징하는 신병(神兵)이네.]
[사: 산해관전역 당시, 원경제가 사당에서 신병을 꺼내 손수 진북왕에게 넘겨주었지. 산해관전역이 승리할 수 있었던 건 위연의 모략도 있었겠지만 진북왕의 전력 또한 간과할 수 없지.]
‘사당에 신검을 모셨다고? 그럼 신검이 나더러 구해달라고 말하는 건가? 우선 검에게 자의식이 있는지에 대한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나한테 구해달라고 할 이유가 없잖아.’
“구해줘. 나를 구해줘…….”
소리가 점점 더 스산해졌다. 마치 허칠안의 무시에 불만이라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살려달라는 소리가 끊임없이 귓전에 울리면서, 허칠안의 정신도 혼미해졌다. 약간의 현기증이 생기더니 의식도 함께 흐려졌다.
허칠안은 숨을 한번 깊이 쉬고는 계속하여 글씨를 입력했다.
[삼: 더 없는가? 좀 더 전면적인 정보가 필요하네. 진위를 불문하고 무릇 역사에 기재한 내용이면 모두 말해주게.]
문자를 입력하고 나서, 그는 귓전에 울리는 소리를 달래기 위해 고개를 돌려봤다.
하지만 이번에는 소용 없었다. 고개를 돌렸지만 살려달라는 소리는 여전했다.
“구해줘. 나를 구해줘!”
허칠안의 이마에 시퍼런 핏줄이 섰다. 그 소리는 마치 철침처럼 머릿속을 뚫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사: 자네 말이 내 기억을 되살렸어. 역사서를 수정할 당시 보았던 기재 한 단락이 떠오르는군.
상백은 오늘날 경성 오위의 군영에 둘러싸여 보호받지. 물샐틈없는 방어에 그 누구도 함부로 가까이 할 수 없네. 음, 그 누구라도 안 되지.
그런데 오백 년 전, 상백호가 금지구역으로 지정되기 이전에 당시 태자가 상백에서 뱃놀이를 하다가 부주의로 그만 호수에 떨어졌네. 시위에 의해 구조되었지만 그 후로 큰 병을 앓다가 정신 질환에 시달렸지. 그리고 반년 후, 그 태자는 결국 상백에서 익사한 시체로 발견됐네.
황실에서는 태자가 뱃놀이를 하다가 선조들의 노여움을 사서 벌을 받은 거라 여겼네. 그래서 이와 유사한 사건의 발생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상백을 봉쇄했지. 제사 지낼 때에만 개방하고.]
‘태자가 호수에 빠져 정신 질환에 시달렸다……. 그럼 나도 살려달라는 소리를 들었으니 그때 그 태자가 당한 봉변을 당하는 건가? 그러다가 결국 상백에서 익사한 시체로 발견된다?’
허칠안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상백에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 있는 게 분명해. 그 일은 결코 선조들의 분노를 사서 일어난 사고가 아니었어. 단지 그 재수 없었던 태자가 사전에 그 비밀을 몰랐던 거지. 미리 알았으면 상백에서 뱃놀이를 하지 않았겠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이 비밀을 역대 황제들만 안다는 점이다. 내막을 아는 황제가 상백을 봉쇄한 이유는 무엇인가? 왜 태자가 죽고 나서야 해당 조치를 취한 건가?’
추리에 능한 허칠안의 머릿속은 순식간에 의문들로 꽉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