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능숙한 이중간첩
호기루 칠층, 차실.
허칠안이 입을 열었다.
“평원백 사건에 대해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위연이 진지하게 말했다.
“천지회?”
단순히 평원백 사건의 단서를 말하기 위해서였다면, 그에게 직접 보고하는 것이 아니라 은라나 금라한테 보고할 수도 있었다.
‘나에게 찾아왔다는 것은 필히 천지회와 관련이 있다는 뜻이겠지.’
천지회는 이미 두 사람만 아는 비밀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허칠안이 말했다.
“평원백은 천지회 육호가 죽인 겁니다.”
위연이 잠깐 침묵하더니 물었다.
“이유는?”
“육호의 사제 한 명이 밀매조직에 의해 유괴 당해 생사를 알 수 없어 단서를 따라 찾아가니 평원백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허칠안은 자신이 육호를 도와 도망친 과정과 사천감 백의를 속여넘긴 방법까지 숨김없이 일일이 보고했다.
다만 대유들이 그에게 책을 준 내막은 말하지 않았다. 그저 사촌 동생의 선물이라고만 했다.
위연은 옷소매를 휘둘러 찻잔을 바닥에 떨구었다. 어느새 그의 얼굴에 머금었던 온유함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더니 눈빛이 검같이 예리해졌다.
“허칠안, 죄인을 풀어주다니! 동죄(同罪)로 치부할 것이야!”
위연이 호통쳤다.
강한 압박이 몰려왔다. 허칠안은 폭풍우를 맞는 것 같단 착각이 들어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소직, 죄를 인정합니다.”
허칠안은 바로 죄를 수긍했다. 이어 큰 소리로 말했다.
“큰 죄를 범한 줄 알았기에 간밤에 내내 자지 못했습니다. 끝끝내 양심의 가책을 벗어나지 못해 이렇게 위 공께 자백합니다. 죽이든 유배든 위 공께 맡깁니다. 다만 소직의 양심의 가책은 죽어 마땅할 평원백의 죽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저를 믿고 일을 맡겨주신 위 공께 면목이 없어서입니다…….”
얼음같이 굳은 위연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오늘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위 공께서 폐하께 질책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조정 관원들한테 약점이 잡혀 공격당하고 있다는 것도…….”
허칠안이 진심을 다해 말했다.
“소직, 위 공께서 저에게 베푼 은혜를 생각하면…….”
굳은 안색이 약간 풀리던 위연이, 가볍게 허칠안의 말을 잘랐다.
“은혜까지는 과분하군, 바로 내막을 설명해 보거라.”
‘아니, 이 반응은 내가 예상했던 반응이 아닌데…….’
허칠안은 멍해지려던 정신을 붙들고 다시 말을 이었다.
“평원백이 암암리에 밀매조직을 키워 경성에서 사람을 팔아먹으면서 폭리를 취했다고 합니다. 아이들과 여인들을 유괴하여 청루나 지하 작업장 같은 곳에 팔거나 도둑으로 키웠다고 합니다. 심지어 손발을 잘라 검둥개 가죽을 씌워…….”
그는 육호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다시 한 번 서술했다. 허칠안은 말하는 과정에서 평원백에 대한 자신의 증오심을 오롯이 드러냈다.
위연은 그 모든 이야기를 인내심을 가지고 들으면서 깊이 사색에 빠졌다.
그가 허칠안의 이야기가 끝나자 담담하게 말했다.
“차를 붓거라.”
이건 위연이 이미 그를 ‘용서’했다는 의미였다.
허칠안은 바로 차를 부었다. 마치 전생에 경찰서에서 상사들을 모시던 것처럼 말이다.
차를 마시던 위연이 몇 초간 침묵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했다.
“너, 천지회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느냐? 지종의 금련에 대해서는? 관아에서 조사한바에 의하면 평원백은 확실히 밀매조직을 키우고 있었지. 하지만 그 육호가 진짜 사제를 위해 복수한 건지 아니면 다른 의도에서 그랬는지 너는 아느냐? 어쩌면 평원백이 다른 일에 연루되어 있을지도 모르잖나? 혹은 밀매조직이 다른 무슨 짓을 해서 죽였는지도. 이에 대해선 생각해 보았느냐?
경찰 기간이다. 악당들이 날뛰고 있지. 사흘 후면 폐하께서 제사를 지내는 날이다. 절대 경솔한 태도를 취해서는 안 돼.”
‘지금 나한테 일을 가르치고 있다. 나를 위해 일의 전반 과정을 분석해주고 있다. 그는 나를 진짜 키우고 싶어 하는 거야…….’
허칠안은 감동을 받았다. 그는 눈앞의 대환관에게 호감이 생겼다.
“위 공 말씀이 맞습니다.”
허칠안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위연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어쨌거나 잘했다. 우선 물러가거라. 이 일은 내가 사람을 시켜 조사할 테니, 넌 계속해서 천지회에 잠복해 빠른 시일 내에 일호를 끄집어내도록.”
“소직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허칠안이 큰 소리로 답했다.
* * *
허칠안은 호기루를 떠나서야 숨을 크게 내쉴 수 있었다. 과감한 시도였지만 다행히 성공적으로 위연의 신임을 얻었다.
입지를 굳히고 위로 더 높이 올라가려면 줄을 설 줄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강한 세력에 기댈 줄도 알아야 했다.
이건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였다. 앞으로 오랜 기간 동안, 허칠안은 끊임없이 위연의 환심을 사서 그의 신임을 얻어야 했다.
이번에 위연에게 속내를 토한 것은 한순간의 충동이 아니라 미리 계획했던 일이었다.
야경꾼은 평원백과 같은 쓰레기에 대해서는 치욕을 느끼기에, 사건 수사에도 적극적이지 않았다.
‘게다가 이 일을 통해 천지회 내부에서도 일정한 영향력을 갖추게 됐지. 이호와 사호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으니까.’
위연은 이렇게 작은 일로 천지회를 절대 포기하지 않을 터였다.
‘더군다나 나 같은 귀요미를 내칠 리가 없지.’
맨 마지막으로 위연이 했던 충고는 허칠안이 우려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는 육호를, 그리고 천지회를 아직 신뢰하지 않았다. 늙은 여우에 대적할 수 있는 건 그래도 늙은 여우뿐일 터였다.
그렇기에 난제에 봉착하면 위연을 찾는 것이 현재로서는 허칠안에게 있어 최선의 선택이었다.
물론, 능숙한 스파이으로서 기타 잔꾀들도 필요했다.
허칠안은 사람 없는 구석진 곳을 찾아 옥석경을 꺼내더니 글씨를 입력했다.
[육호, 내가 파악한 소식에 의하면 야경꾼이 출처가 불분명한 단서를 얻었는데 자네한테 불리한 듯해. 적시에 도망칠 수 있게 만전을 기하게.]
지서의 서신 전달에는 지연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지서와 주인 사이에는 뭔지 모를 감응이 형성되어 정보가 입력되자마자 주인에게 감지되곤 했다.
다만 아홉 개의 지서는 일체인지라, 일대일 대화가 불가능했다. 이게 가장 큰 폐단이었다. 허칠안은 이 부분이 못내 아쉬웠다.
* * *
육호는 양생당 후원에서 ‘검둥개’의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다. 그는 잠시 짬을 내어 가부좌를 틀고 좌선하고 있다가 감응을 느껴, 지서 파편을 꺼냈다.
삼호가 보낸 문자였다. 육호의 사각형 얼굴에 그림자가 비꼈다.
‘야경꾼의 행동이 이렇게 빠르다고? 하루 만에 나를 위협할 수 있는 단서를 찾아내다니. 잠깐. 삼호가 이를 어떻게 안 거지?’
의문이 생기던 그때, 일호의 문자도 도착했다.
[일: 삼호, 자네가 어떻게 야경꾼 내부의 소식을 알아낸 것인가?]
일호는 이 일에 무척 신경을 쓰고 있었다.
‘과연 일호는 경성 고위층에 관련된 일이라면 무척 큰 관심을 보이는군.’
허칠안은 바로 답장하지 않고 잠깐 머리를 굴리다 글씨를 입력했다.
[삼: 자네 보기에는?]
허칠안은 지서 파편 소지자들 모두가 거울을 염탐하며 묵묵히 정보를 읽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반드시 합리적이면서도 놀랄만한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주어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해야 했다.
[삼: 유가 정통을 둘러싼 논쟁이 이백 여년이나 지속됐네. 우리 서원에서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이 말은…… 운록서원에서 야경꾼 관아에 첩자를 두었다는 뜻?’
이건 무척 분명한 암시였다.
순간, 지서 파편 소지자들이 흥분했다. 무척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개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일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침묵은 그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게 만들었다.
허칠안이 넌지시 떠보았다.
[일호, 자네 스스로 알아볼 수도 있잖은가.]
이건 일호에 대한 도발이었다. 물론 그에게 던지는 시험이기도 했다.
만약 일호가 이에 응답하거나 암암리에 진짜 알아봤다면 허칠안은 역으로 그의 신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야경꾼은 황실 직속 관아였다.
‘위연의 말만이 의미있는 조직이기도 하지만.’
어지간한 세력들은 아예 들어오지 못하거니와 첩자를 두더라도 중고층에는 둘 수 없을 것이다.
말단들이야 첩자를 찾아낼 방도가 없었다.
일호는 무척 총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허칠안의 도발을 무시해버렸다.
한참 동안이나 지서에 아무도 말이 없자 육호가 문자를 입력했다.
[육: 요 며칠 주의하겠네. 삼호, 자네한테 또 빚을 졌구먼.]
[삼: 의협심으로 가득 찬 육호야말로 우리의 본보기일세.]
[육: 시주(施主)는 참 선한 사람이군.]
육호가 승려의 신분으로 답장을 한다는 것은 허칠안을 무척 높이 평가한다는 의미였다.
허칠안은 만족스러운 듯 거울을 거두면서 마음속으로 말했다.
‘감격은 너무 이르단다. 언젠가는 돌려받을 테니까.’
어쨌든 허칠안은 이번 일을 통해 위연의 신임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육호에게도 큰 은혜를 베풀게 되었다. 그리고 천지회의 구성원들한테도 사람 돕기를 즐기는 좋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남겼으니 이번 작전은 제대로 성공했다고 볼 수 있었다.
‘음, 일호도 나에게 점점 더 흥미를 느끼는 것 같다. 만약 그가 조정의 고위층이라면 무조건 운록서원을 대상으로 조사를 벌이겠지……. 그렇지만 아마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할 거야. 허허, 삼호가 허칠안이라는 진상에 가까워지더라도 허신년에게 뒤집어씌우면 되니까.
신년은 나와 다르다. 나는 조정에 몸 담근 터라 일호에게 내 신분이 밝혀지면 반드시 행동이 수동적으로 바뀐다. 신년은 운록서원의 친아들이니 나보다는 훨씬 떳떳할 것이다. 게다가 현재까지 나와 일호가 원한을 맺은 일이 없으니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거야.’
“신년아, 형님이 너를 이렇게 사랑하는데, 그 사랑에 보답을 좀 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니?”
* * *
춘풍당 편청에 돌아왔더니, 실눈을 뜬 송정풍이 느닷없이 비아냥거렸다. 뭣도 없으면서 여인과 잠자리를 가지는 나쁜 놈이라는 것이었다.
주광효도 이에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허칠안은 잠깐 생각해보더니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
“오늘 공문서 창고에 가서 특대 비밀을 발견했지. 여태 심장이 벌렁벌렁하네.”
송정풍과 주광효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비밀?”
허칠안이 말했다.
“아버지라 부르면 알려주마.”
송정풍이 잠깐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
허칠안이 그를 빤히 쳐다보면서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건 무척 큰 비밀이다. 넌 내가 낳은 자식이 아니니 말할 수 없다!”
“이런 젠장! 죽여!”
세 사람이 한창 시끌벅적하게 치고받고 하면서 놀고 있는데, 은라 두 명이 들어왔다. 허칠안이 처음 보는 은라였다.
“허칠안, 우리와 함께 가자.”
은라가 웃으면서 손짓했다.
허칠안은 두 동료와 눈을 마주치더니 망연한 얼굴로 따라갔다.
낯선 은라가 그를 데리고 춘풍당에 들어가 탁자 앞에서 권종을 보고 있던 이옥춘을 향해 헛기침을 하더니 말을 꺼냈다.
“이 대인, 자네 수하에 있는 이 동라, 내가 데리고 가겠네. 앞으로 내 수하에서 일을 시켜보려 하니 우리 인수인계 좀 하지.”
이옥춘은 이 말에 화딱지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