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각 수행체계
허칠안이 탄식하듯 숨을 한번 크게 내쉬더니 손을 내밀면서 입을 열었다.
“붓과 묵!”
하급 관리가 붓을 건네주자, 허칠안은 목판 위에 선지를 펴놓았다.
붓을 종이 위에 올리던 허칠안이 눈을 감았다.
‘비록 나는 마음속에 군도 없고, 신에게 절하지도 않는 확고한 유물론자지만 그나마 악인은 아니다. 내 마음속에는 정의도 있고, 발아래에는 원칙도 있다. 백성을 괴롭힌 적도, 서리 신분으로 타인의 것을 갈취한 적도 없다. 설령 모든 사람이 그런 짓을 했을지라도……. 공감을 원한다면 소원대로 시 한 수 증여하지.’
허칠안이 붓을 움직였다. 그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추하디 추한 글씨를 써내려갔다.
<이식이녹(*尔食尔禄: 너희 먹을 것과 녹봉은), 민지민고(*民脂民膏: 백성들의 피땀이니라), 하민이학(*下民易虐: 하층 백성은 괴롭히기 쉽지만), 상천난기(*上天难欺: 하늘은 속이지 못하느니라).>
하급 관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종잇장에 쓰인 네 구절을 읽었다.
그가 선지를 거두고 나서 허칠안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문심관은 이미 끝났습니다. 대인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다만 결과가 나오기 전에는 관아를 떠나지 마십시오. 야경꾼의 자질은 모두 위 공께서 친히 평하십니다. 소인, 지금 바로 위 공께 전해드리겠습니다.”
말이 끝나자 하급 관리는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갔다. 쿵쿵쿵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 * *
허탈해진 허칠안은 목판을 잡고 잠깐 숨을 돌리고는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송정풍과 주광효가 일층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허칠안이 내려온 것을 보자 손짓하면서 물었다.
“몇 번 꿇었어?”
송정풍의 웃는 모습은 영락없는 여우였다.
아래층으로 내려온 하급 관리가 그에게 시험 과정과 결과를 알려주지 않은 모양이었다.
허칠안이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주광효가 웃음기가 전혀 없는 굳은 표정으로 눈썹을 치켜들더니 입을 열었다.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군.”
‘안 좋기만 하겠어. 마치 생사의 갈림길에서 배회하다 온 느낌이야…….’
녹초가 된 허칠안이 머리를 절레절레하면서 입을 열었다.
“앉아서 차 좀 마시면서 휴식하고 싶은데.”
송정풍이 음흉한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거기에 기루의 여인이 어깨와 다리를 두드려주면 더 좋겠지.”
‘이 놈은 만담도 참 잘할 것 같다. ’
허칠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교방사에 가서 부향 낭자를 청해오는 거지.”
이 말에 멍하니 허칠안을 쳐다보기만 하던 송정풍이, 하하하 크게 웃더니 말을 꺼냈다.
“그 꿈은 나도 어린 시절에 꾸었지.”
* * *
야경꾼 관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호기루(浩氣樓)였다. 찬첨식(攒尖式) 지붕에다 층마다 비첨(飛檐)이었다.
아래 네 층은 밖엔 회랑이 있었다. 오층과 육층의 회랑에서는 아래로 야경꾼 관아를 전망하기 딱 좋았다.
강호에서 위연, ‘위청의(魏青衣)’라 불리는 대환관이 바로 이 건물에 거주하고 있었다.
칠층 차실의 폭신폭신한 긴 의자 위에 청의를 입은 사내가, 반쯤 기대어 책을 읽고 있었다.
그가 입은 하늘색 유삼에는 복잡한 구름무늬가 수놓여 있었다. 검은 머리는 옥잠으로 묶었고, 귀밑머리는 희끗희끗했다. 수염이 없는 얼굴은 희고도 깨끗했다. 꺼져 들어간 두 눈은 갖은 고난을 겪은 것마냥 깊었다.
위연은 품위와 외모 모두 갖춘 사내였다. 준수한 외모에 우아한 품위까지, 깊이가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차실에는 두 사람이 더 있었다. 한 명은 위연과 함께 차를 마시며 책을 읽는 중이었다. 정직하면서도 엄숙해 보이는 그 사내는 오관이 조각상마냥 굳어있어, 감정이라고는 드러나지 않았다.
다른 한 명은 미모의 사내였다. 그는 가늘고 긴 눈썹에, 외꺼풀이지만 결코 작지 않은,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 눈, 그리고 얇고도 빨간 입술을 갖고 있어 얼핏 보면 여인이 남장한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는 전망을 감상할 수 있는 높은 정자에 앉아 따스한 햇볕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허리에 찬 패도에 손을 얹은 그가 입을 열었다.
“햇볕이 무척 따스합니다. 게다가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요. 여기서 풍경을 감상하는 것이 실내에서 책을 보는 것보다 훨씬 좋습니다.”
위연이 손에 쥐었던 책을 내려놓더니 웃으며 말했다.
“읽을 책은 점점 줄어드는구나. 최근 들어 사천감에 청서(青書)가 하나 생겼다던데. 거기에 천지만물의 본질이 적혀있다고 해서 무척 궁금하단다.
양연(杨砚), 열흘 뒤면 폐하께서 제사를 지내시는 날이다. 내성의 순찰 강도를 높이고 통상을 줄이라고 전해라.”
굳은 표정의 사내가 그러겠노라 답했다.
미모의 사내가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의부님, 호부시랑 자리에 우리 사람을 넣을 생각이 진정 없으십니까?”
“그건 필요한 양보다.”
위연이 한마디 하고는 시선을 차실 입구로 옮겼다. 남색옷을 입을 하급 관리가 고개를 숙이고 들어왔다.
“위 공, 이건 새로 들인 동라의 자질 시험 결과와 호적입니다.”
하급 관리가 두 손으로 문서를 올렸다.
위연이 호적을 펼쳤다. 새로 들어온 동라의 이름은 허칠안. 장락현아의 쾌수였다. 부친과 숙부 모두 군인 출신이었다.
이런 배경은 중요하면서도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이유는, 야경꾼은 신분이 특수하기에 조상 삼 대 이상이 결백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허칠안은 대봉 경성 사람이고, 경성에서 태어나 경성에서 자랐기에 신분은 합격이었다.
중요하지 않은 이유는, 모든 야경꾼이 거의 유사한 결백한 신분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호적 아래 ‘지력’ 시험 결과를 보자 위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천유(倩柔), 넌 예전에 문제를 호흡 몇 번 만에 맞혔더라?”
이 물음에 미모의 사내가 턱을 살짝 치켜세우면서 답했다.
“열다섯 호흡에 맞혔습니다. 양연은 열아홉 호흡이었어요.”
“이번에 새로 들어온 동라가 열두 호흡에 맞혔다는군.”
미모의 사내가 눈썹을 치켜들더니 교만한 어투로 평가했다.
“괜찮네요.”
얼굴이 굳은 사내가 무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짧은 시간 내에 세은 사건의 진상도 밝혀낸 자니,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위연이 웃었다. 그러더니 뒤에 적힌 비고를 읽었다.
“상자를 든 하급 관리가 다섯 호흡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미모의 사내가 갑자기 몸을 돌려 차실로 들어왔다.
양연이 눈썹을 찌푸렸다.
다시 말해서 사고하는 데, 겨우 일곱 호흡이 걸렸다는 의미였다. 뛰어나고 민첩한 사고력이었다.
양연이 몸을 일으키더니 공수하면서 입을 열었다.
“의부님, 이 사람을 제게 주십시오.”
“네 수하에 있다. 이옥춘 밑에서 일할 거거든.”
위연이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미모의 사내를 쳐다봤다.
“만난 적 있을 거다. 그날 사천감에서.”
‘사천감…….’
미모의 사내가 잠깐 사색하더니 벙긋 웃으면서 말했다.
“아, 그 녀석이군. 큰소리 뻥뻥 치던 녀석.”
양연은 새로 들어온 동라가 이옥춘 밑에서 일한다는 말에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의부님, 전력은 어떻습니까?”
양연이 물었다.
“연정 전봉이라 시험할 필요가 없다.”
위연이 웃으면서 말했다.
“이 친구는 장공주마마께서 추천했어. 사고나 반응 모두 무척 민첩해서 특별히 들인 거다.”
‘장공주?!’
양연과 미모의 사내가 의아한 눈빛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위연이 이 사실을 그들에게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계속하여 문심관 시험 결과를 보던 위연의 얼굴이 부드러운 표정에서 엄숙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푹 꺼져 들어간 눈에 예리함이 서렸다.
양연이 허리를 펴고 종잇장을 건네 받았다.
미모의 사내는 오히려 거리낌 없이 위연의 옆으로 걸어가, 머리를 쑥 내밀고 대놓고 봤다. 그러다 웃음을 터뜨렸다.
“나보다도 더 경망스러운 녀석이군. 의부님, 어떻게 처리할까요?”
웃음에서 고소함이 엿보였다.
위연이 맨 아래에 놓인 종잇장을 뽑아냈다. 종잇장 위에는, 못나도 그렇게 못날 수가 없는 글씨로 시 한 수가 적혀 있었다.
<이식이녹(*尔食尔禄: 너희 먹을 것과 녹봉은), 민지민고(*民脂民膏: 백성들의 피땀이니라), 하민이학(*下民易虐: 하층 백성은 괴롭히기 쉽지만), 상천난기(*上天难欺: 하늘은 속이지 못하느니라).>
위연의 동공이 순간 굳어졌다. 그는 옴짝달싹하지 않고 두 마디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하민이학(下民易虐), 상천난기(上天难欺)…….”
양연이 이 한 마디를 반복했다.
미모의 사내는 양연과는 정반대로, 첫마디에 눈길을 주었다.
“이식이녹(尔食尔禄), 민지민고(民脂民膏)……. 그래서 이 녀석은 황실이 아닌 백성의 피땀을 먹고 있단 말이네.”
양연이 잠깐 사색에 잠기더니 물었다.
“의부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위연이 되레 반문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양연이 답했다.
“식군지록(*食君之禄: 군왕의 녹봉을 받았으니), 담군지우(*擔君之忧: 군왕의 근심을 덜어드려야 한다).”
그 뜻인 즉, 이 말에 공감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위연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미래에 그 작은 동라가 금라가 되었을 때, 직접 그와 논쟁하려무나.”
위연의 이 말에 미모의 사내가 눈썹을 치켜들더니 물었다.
“의부님은 그 녀석이 금라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가 무사라면 문제없을 거다.”
위연이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술사는 인간 기운의 영향을 많이 받지. 주술사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이 세상에서 무사가 가장 순수하단 거다. 난 무인이 무력으로 법을 범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지. 허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건, 길들여지지 않은 오만한 무인일수록 정진이 빠르다는 거야. 마음속에 경외하는 상대가 없어야 두려운 상대가 없는 법이거든. 그래야만 세상을 뒤바꿀 수 있지.”
위연이 탁자 아래에서 새로운 벼루를 꺼내 그 안에 주사(朱砂)와 맑은 물을 넣고 마묵했다. 빨간색 먹이었다.
위연이 붓을 벼루에 찍더니 호적에 ‘갑상’이란 두 글자를 적었다.
“길들여지지 않고 오만하기만 하면 무사지만, 천하를 품으면 의(义)인이다. 의로운 자면 나라와 백성을 위해 그 한 몸 바칠 거야.”
‘갑상!’
야경꾼 설립 이래, 이런 평가를 받은 자는 손에 꼽혔다.
* * *
어느 한 밀실.
이옥춘이 나무통을 가리키며 말했다.
“옷을 벗고 들어가 앉거라.”
끝내 연기경에 들어서게 되는군. 허칠안은 마음속에서 북받치는 흥분을 가누지 못했다. 그는 코를 찌르는 냄새를 풍기는 욕통을 힐끗 쳐다봤다. 안에는 검푸른 빛깔의 액체가 담겨있었다.
이건 세수액(洗髓液)이라고 하는 건데, 한 통에 은자 백 오십 냥이었다.
허칠안은 옷, 바지, 신발을 홀랑 벗어던지고, 맨몸으로 욕통에 들어가 앉았다.
이옥춘이 물었다.
“동정을 잃지 않았겠지?”
허칠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숙부가 어도위 백호인데 제게 항상 경고했습니다. 연기경에 들어서기 전에 동정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허칠안은 편하게 욕통에 앉아서는 이옥춘에게 물을 건넸다.
“대장, 대장은 연신경입니까?”
“그렇다.”
이옥춘이 답했다.
“그럼 연신경 이후에는 동피철골이 맞습니까?”
“맞다.”
허칠안이 웃음을 짓더니 말을 꺼냈다.
“이름이 별로입니다. 왜 금강경이라 짓지 않았습니까?”
‘동피철골이 뭐냐고 글쎄! 괜히 무인들이 무식해 보이기만 하잖아.’
“불문 삼품이 금강경이다.”
이옥춘이 설명했다.
허칠안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겸손한 태도로 물었다.
“대장, 수행체계 중 어느 체계가 가장 강합니까?”
이옥춘이 추호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도문은 그들이 가장 강하다고 말하지.”
“그럼 다른 체계는요?”
“기타 체계도 마찬가지로 다 자신의 체계가 가장 강하다고 주장한다. 다만 세상에 무사가 가장 무식하고 거칠다는 공감대는 형성되었지.”
“……그건 좀 압니다. 무사는 괴력만 있고 아무런 신기(神技)가 없기 때문에 그런 거죠.”
뭔가 화려하지가 않았다.
“그건 겉으로 드러난 것이다. 더 파다 보면 더 큰 비밀을 발견할 수 있어. 수행체계의 상한에 관련된 거지.”
허칠안이 허리를 펴더니 넌지시 떠보았다.
“대장, 제게도 가르쳐줄 수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