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직감
밤의 장막이 내린 시각, 위무후부.
통통한 위무후가 어두운 안색으로 의자에 앉아있었다.
청에는 귀부인 두 명이 더 있었는데, 한 명은 무릎을 꿇은 채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슬픔을 금할 길이 없어 보였고, 나머지 한 명은 슬픔에 빠진 여인을 낮은 소리로 위로하고 있었다.
둘째 딸이 실종됐다. 사건 발생 직전의 마차 충돌과 연결지어 보면, 그의 딸은 납치된 게 분명했다.
위무후는 짐작가는 적들을 가늠했다. 정적은 아닐 것이다. 작위 세습이 오늘날까지 내려오다 보니, 권력이라 할 것 없이 경성의 변두리로 밀려난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뜻을 합친 공훈 무리야 간과할 수 없는 집단이긴 하다만, 무리와 개인은 그래도 차이가 있었다. 위무후의 머릿속에는 집안 여인을 납치할 정도의 정적이 떠오르지 않았다.
최근 들어 누구와 원수진 일도 없었다.
“나리께서 이미 관청에 보고했어. 그리고 성문을 지키는 금오위에게도 통지했고. 너무 조급해하지 마. 꼭 찾아올 수 있을 거야.”
“언니, 만약, 만약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이때, 하인이 종종거리며 오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나리, 소저, 소저를 찾았습니다……!”
위무후와 두 부인은 다급히 전청으로 달려갔다. 그곳엔 눈물 자국이 채 마르지도 않은 초췌한 얼굴을 한 딸이 서 있었다. 그녀를 호송해온 어도위 몇 명도 함께였다.
울고 있던 장옥영의 모친이 그녀를 품에 와락 안았다.
그러자 장옥영이 울먹이며 말했다.
“어머니, 주 시랑 공자가 저를 납치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절 죽여 입막음할 계획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장옥영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과 더불어 어떻게 악당의 소굴을 뛰쳐나왔는지까지 빠짐없이 생동감 넘치게 묘사했다.
“나리, 소첩을 위해, 영이를 위해 부디 나서 주십시오!”
장옥영의 생모는 화가 치밀어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외쳤다.
“나리, 주립이 몇 번이고 우리 영이를 괴롭히지 않았습니까! 위무후의 딸인 걸 알면서도 납치했다는 건, 우리 위무사가 안중에도 없다는 뜻입니다!”
본부인이 진지한 목소리로 거들었다.
이에 위무후는 대노하더니 손바닥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그러자 탁자가 산산조각 났다. 그가 치를 떨며 고함을 질렀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데 어디 한번 보라지! 내가 가만히 있을지!”
* * *
익일. 오문, 동측문.
조회에 들던 문무관원들이 갑옷을 입은 위무후를 의아한 눈길로 쳐다봤다.
이날 조당에서는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위무후가 갑옷을 입고 입궁하여 조상의 공훈을 거론하면서 눈물을 훔치더니, 이내 주 시랑을 고발했기 때문이다.
“우리 가문의 조상들은 황실을 위해 목숨을 바쳐가면서 충성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세의 자손들이 이렇게 괴롭힘을 당하다니요! 폐하께서 저희를 보호하지 않으신다면 천하 장수들의 마음에 한이 맺힐 겁니다…….”
‘일이 커졌다!’
주범인 주립은 멍해졌다.
‘내가 언제 장씨 가문의 둘째 소저를 납치했단 말인가?’
* * *
원경제(元景帝)는 즉각 노발대발해서는 대리사(大理寺), 형부, 도찰원(都察院)에게 이틀 내로 사건의 결과를 가져오라는 명을 내렸다.
안건의 피의자로서, 주립은 먼저 도찰원을 거치게 될 것이다.
심문은 성을 순찰하는 어사(御史)가 맡았다.
한바탕 매질을 당한 주립이 눈물을 흘리면서 아버지, 어머니를 불러댔다.
이때 심문관이 경당목을 내리치면서 호통쳤다.
“주립, 위무후의 서녀를 가둔 저택이 네 사택이 맞더냐?”
“네!”
주립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권리를 쥔 귀족들이 내성에 사택을 사들이는 건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주립은 저택을 살 때, 아예 타인의 손을 거치지 않은 참이었다.
저택 증서에도 그의 이름이 적혀있었고, 부아에 저택을 산 문서들도 있어 발뺌할 수가 없었다.
“네 사택이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서명하고 화압하거라!”
아역 두 명이 주립에게로 다가왔다. 한 명은 자백서를 든 채였고, 나머지 한 명은 주립에게 강제로 화압을 시켰다.
삼사(三司) 재심 절차에 따라 도찰원에서 심문이 끝나면, 판결서를 형부에 전달하게 된다. 형부가 도찰원의 결과에 이의를 제기할 경우 피의자를 다시 심문하게 될 것이다.
형부로 이송된 주립은 지옥에서 천당으로 온 기분이었다. 형부에서 술과 고기로 자신을 대접하며, 심문을 맡은 형부 낭중은 의원까지 불러 피로 젖은 엉덩이를 치료해주었기 때문이다.
몇 시간의 ‘심문’을 거친 후, 형부에서는 도찰원의 심문 결과를 뒤집어 주립이 결백하다고 판결 내렸다.
권종은 다시 대리사로 넘어갔다.
대리사에서도 두말할 것 없이 주립을 한바탕 때리고는, ‘엄밀’한 심문을 거쳐 형부의 판결을 반박하여 주립이 유죄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튿날, 대리사, 도찰원, 형부에서 저마다 자신들의 주장을 펼쳤다. 그들은 결론이 나지 않자, 원경제가 삼사에서 합동심문을 하라고 소를 올렸다.
대리사에서 사정(寺正) 한 명, 사승(寺丞) 두 명을 파견하고, 형부에서 낭중 두 명, 주사(主事) 네 명을 파견하고, 도찰원에서 순성(巡城) 어사 두 명을 파견했다.
그렇게 총 열한 명의 관원이 합동심사를 진행했다.
삼사의 합동심사에서 형부는 주립이 무죄라 주장했고, 대리사와 도찰원은 주립이 유죄라고 주장했다.
온종일 논쟁을 펼쳤지만 결판이 나지 않았다.
* * *
황혼이 내리자, 사천감 백의 한 명이 하급 관리를 따라 심문 현장에 찾아왔다.
“폐하의 명을 받고 안건 조사를 도우러 왔습니다.”
사천감 백의는 자신이 온 이유를 밝힌 후, 무릎 꿇은 주립을 향해 호통쳤다.
“주립, 위무후 서녀 장옥영을 납치한 적 있느냐?”
주립이 머리를 마구 저으며 말했다.
“그런 적 없습니다. 억울합니다!”
자리에 있던 관원들이 일제히 사천감 백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백의가 당당하게 말했다.
“저 자는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주립의 얼굴이 순간 백지장이 되었다.
* * *
삼 일 후, 주 시랑은 국고의 재물과 양식을 탐하고 자제를 제대로 교육하지 못한 죄로 파면당해 충군(充軍)했고, 주립은 남쪽으로 유배되었다.
* * *
말 오십여 필이 관도에서 느릿느릿 달리고 있었다. 허평지는 맨 앞에서 군대의 행렬을 이끌었다. 초겨울의 찬바람도 봄바람처럼 따스하게 느껴졌다.
주 시랑이 무너졌단 소식이 전해지자 허평지는 허칠안, 허신년과 함께 밤새 술을 마셨다. 복수를 마쳤단 후련함도 있었지만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홀가분함이 더 컸다.
허신년이 물었다.
“형님께 물어볼 게 하나 있습니다.”
허칠안이 고개를 돌려 허신년을 힐끗 쳐다보더니 말했다.
“왜 주립이 죄를 인정했냐고? 혹은, 어째서 위무후를 포함한 조당의 관원들이 그다지 치밀해 보이지도 않는 꼼수를 보아내지 못했냐고?”
허신년이 입을 열었다.
“일부 가능성만 생각해냈습니다. 주 시랑의 정적은 주립이 억울하든 말든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겠죠. 이 기회를 잡아 주 시랑을 제거하면 되니, 위무후에게도 복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을 겁니다. 예전에 주 시랑에게 반격하지 못했던 건 조력자가 없어서였으니, 이번에는 그야말로 하늘이 도운 거라 생각했겠죠. 그래서 갑옷까지 입고 입궁하여 조당 전체가 이 일을 의논하게 만든 거고요.
물론 자신의 딸을 정말 주립이 납치했는지에 대해서도 의심했겠지만, 충분한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더라도 주립은 여전히 자신의 딸을 괴롭힌 전적이 있는 망할 놈이니 문제가 있었겠습니까?
허나 이건 분명 주립이 한 일이 아니고, 주 시랑과 그의 당파들은 누구보다 이에 관련된 진실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응당 이에 조치를 취했어야 했지요. 그런데 어째서 하지 않은 건지, 그것이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럼 넌 내가 그날 사천감에 왜 찾아갔다고 생각해?”
허칠안이 크게 웃었다.
“사천감의 팔품이 뭔지 기억하나?”
“팔품 망기사…….”
허신년은 눈을 반짝이더니, 이제야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은 사건 수사 당시에 사천감 술사가 안건 추적과 심사에 참여했다는 건, 사천감에 대한 폐하의 믿음이 무척 크다는 걸 설명하지. 이번 안건은 얼핏 봐서는 합리적이지 않으나, 세부적으로 수사하다 보면 어떠한 흔적도 남아있지 않아. 형님이 또 전문가잖니. 게다가 당쟁까지 연루되다 보니 안건은 필히 복잡할 거고, 수사하기도 어려웠겠지. 그럼 가장 쉬운 방법이 뭐겠어. 사천감 술사를 찾는 거지.”
허신년이 탄복하면서 입을 열었다.
“그럼 형님은 사천감 술사를 매수한 거네요.”
“어허, 매수라니!”
허칠안이 의젓하게 말을 이었다.
“연금술사 사이의 일은 매수라고 하지 않아. 등가교환이라고 하지! 너 꼭 기억해야 된다. 이 세상에서 피를 나눠가진 가족 말고는 친구든 원수든, 모두 ‘이익’ 두 글자에 의해 맺어진다는 걸. 특히나 관장에서는 더더욱!
아무런 이유 없이 잘 대해주는 사람은 없어. 물론 아무 이유 없이 너를 적대시하는 사람도 없고. 설령 무척 친한 벗이라 하더라도 도움을 준다는 건, 네 존재가 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인 거고.
앞으로 네가 조당 관직에 앉게 된다면, 난 네가 청렴한 관리가 아닌 유능한 신하가 되길 바란다.”
허칠안이 동생에게 자신의 사심을 주입했다.
“기억해! 화광동진(*和光同塵: 자신의 지덕을 감추고 세속을 따름)! 빛은 내면에 묻어야 해.”
허칠안은 동생을 대봉의 수부로 키우기 위해서, 동생 스스로 그만한 그릇이 될 수 있는 길로 인도해야 했다. 아니면 나중에 헛된 공을 들인 거나 마찬가지가 될 테니 말이다.
허신년이 먼 곳을 바라보며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화광동진(和光同塵). 빛은 내면에 묻어라……. 제가 만약 권력을 얻고 자아를 잃어버리면 어떡해요?”
“네가 어떤 그릇이 되는지를 지켜봐야지. 물론 네가 나중에 조당에 화를 부르는 간신이 된다면, 형님이 너를 손수 처리할 거야.”
허칠안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좋습니다! 형님이 나중에 화를 부르는 무사가 된다면 저도 똑같이 그리하죠.”
허칠안은 뭔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왠지 스스로한테 플래그를 세운 것 같은데……?’
헛기침을 한 허칠안이 말했다.
“숙부, 우리 두 사람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저리 썩 물러가지 못해!”
허평지가 고개를 돌리더니 욕설을 퍼부었다.
“말끝마다 형제끼리 서로 치운다느니 어쩐다느니! 너희 눈에는 내가 안 보이더냐?”
* * *
마차 행렬이 청운산 아래에 천천히 멈춰 섰다. 호화로운 마차에서 장공주가 작은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 사졸들의 보호하에 산을 올랐다.
산바람에 장공주의 치마와 머리가 흩날렸다. 고고하면서도 냉염한 장공주가 바람을 맞받으며 실눈을 떴다.
장공주가 산중턱까지 올라 고개를 들었을 때, 정자엔 백발의 노 선생이 탁자 앞에 앉아있었다. 그 맞은편에는 어린아이 한 명도 앉아있었다.
어린아이 옆엔, 고개를 떨어뜨리고 자수를 놓는 데 전념하는 소녀가 있었다.
노 선생이 진지하게 말했다.
“몇 번이나 말했지 않느냐. 자세를 바르게 하고 붓을 잡아야 한다고.”
어린아이가 답했다.
“알겠습니다. 선생.”
“그럼 얼른 바꿔야지?”
“뭘 바꿔요?”
“됐다. 오늘은 글씨를 쓰지 말자꾸나. 나를 따라 삼자경(三字经)이나 읽으려무나.”
노 선생이 한숨을 내쉬더니, 목청을 가다듬고 삼자경을 읽기 시작했다.
“인지초(人之初), 성본선(性本善).”
“인지초, 성, 네?”
“인지초, 성본선.”
“인…… 성본선.”
“중간에는 왜 멈췄느냐?”
“잊어버렸어요.”
“다시. 인지초, 성본선.”
“인지초, 성, 네?”
이런 어린아이를 보노라니 선생은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