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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타경-46화 (46/712)

46화. 가로채기

여종이 안방 문을 열어 허칠안을 안내했다. 여종은 들어가지 않으려는 모양이었다.

“양 공자, 들어가세요!”

미닫이문이 열리는 순간, 향기가 허칠안의 얼굴을 덮쳤다. 안방 바닥엔 가격이 상당한 비단이 깔려 있었다. 가격은 차치하더라도 엄청난 인력을 들였을 것이다. 비단에 청색 연꽃과 구름을 수놓았기 때문이다.

여인이 그 위를 걸으면 걸음마다 연꽃이 생기고, 관리가 그 위를 걸으면 단번에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있는 도안이었다.

<우타파초도(雨打芭蕉图)>를 모사한 세 겹의 병풍이, 잠자는 곳과 청을 갈라 놓은 채였다. 그곳엔 빼어난 자태를 자랑하는 묘령의 여인이 병풍 앞에 무릎 꿇고 앉아있었고, 그 앞에는 봉미금(凤尾琴)이 놓여있었다.

무척 얇고 가벼운 견사를 걸친 부향의 백옥 같은 피부가 보일 듯 말 듯했다.

문어귀를 향해 웃음을 짓던 부향은, 허칠안과 눈이 마주치자 바로 고개를 살짝 떨어뜨리더니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고개를 떨어뜨리는 모습은 유순함에 찬바람을 이겨내지 못하는 수련화의 수줍은 모습을 방불케 하는구나.’

허칠안은 부향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예전에 읽었던 시구의 장면을 떠올렸다.

벌주 놀이 때는 대갓집 규수의 우아함을 보이더니, 안방에서는 사람의 혼을 쏙 빼놓는 매혹적인 모습이었다.

이건 교방사 여인들만이 겸비할 수 있는 두 가지 모습일 터였다.

“공자?”

부향이 미소를 짓더니 입을 열었다.

“저를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허칠안이 깊이 탄식하며 입을 열었다.

“오래전부터 부향 낭자가 절세미인이라는 말은 들었으나, 오늘에야 그 말이 믿어져서 말이오. 천하제일이라 해도 믿겠소.”

“공자, 저를 놀리지 마세요.”

부향이 입을 오므리더니 쑥스러워하면서 고개를 떨어뜨렸다. 입가에 웃음이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보니, 무척 기쁜 모양이었다.

* * *

옆방 차실에서는 조 공자가 차를 한 주전자나 마시는 중이었다. 방광이 두 번이나 항의에 나섰다. 세 번째에는 끝내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내가 지금 차 마시러 온 건 아니잖아?’

조 공자는 투덜거리면서 차실을 나가 안방 방향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문어귀에서 여종이 그를 가로막았다.

“오래 기다렸소. 부향 낭자는 왜 아직도 나를 만나주지 않는 거요?”

조 공자가 힐문했다.

“우리 낭자께서는 이미 다른 사람을 선택하셨습니다.”

여종이 답했다.

조 공자는 벼락을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가 이어 주체할 수 없는 분노를 느끼고 항의했다.

“부향 낭자가 선택한 건 나요.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뀐 거요? 사람을 갖고 노는 거요? 합당한 답변을 주지 않으면 나도 가만히 있지는 않겠소.”

거친 말에 놀란 여종이 반사적으로 원 내 수종을 부르려 했다.

“평아(萍儿), 조 공자께서 불만이시니 여기에 있는 시를 가져가서 보이려무나.”

방안에서 기녀의 매혹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여종이 조심스레 조 공자를 살피더니, 미닫이문을 빼죽이 열고 쏙 들어가서는 문을 닫아 버렸다.

몇 초 후, 여종이 또 쏙 빠져 나와서는 바로 미닫이문을 닫고, 조 공자에게 선지를 건넸다.

선지를 받아 쥔 조 공자는 시를 한 번 훑더니, 얼굴에 가득했던 분노를 감췄다. 그 대신 놀라움과 감격의 정서가 북받쳐 오르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선 자리에서 꼼짝달싹 못했다. 그러다가 손가락에 힘이 풀렸는지 선지를 놓쳤고, 그 선지는 너울너울 바닥에 떨어졌다.

* * *

조 공자가 안방에서 나오는 모습을 본 손님들은 깜짝 놀랐다.

‘끝났나?!’

하지만 조 공자의 표정에서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쫓겨난 게 분명했다.

“조 형, 이게 무슨 일이오?”

서생 옷차림을 한,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청년이 앞으로 다가가더니 물었다.

겉으로는 관심 없는 척했으나 실은 무슨 재미있는 일이 있나 궁금했던 것이다.

방금 전에 여종이 양씨를 데려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조 공자가 넋을 잃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보나마나 가로채기를 당한 것일 터였다.

조 공자가 사람들을 훑더니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내가 졌네. 이건 진심이네.”

“대체 뭔 일이 있었던 거요? 지다니? 뭘 졌다는 거요?”

“조 형, 그 사람이 시를 쓴 것은 맞소? 대체 어떤 시이기에 부향 낭자가 규칙마저 어기면서 사람을 바꾼 거요?”

“얼른 말해보시오. 답답해 죽겠구먼!”

남은 손님들이 모두 몰려왔지만 조 공자는 그들의 말을 들은 체 만 체 하더니 밖으로 걸어가면서 혼잣말하듯 읊었다.

“중방요락독훤연(众芳摇落独暄妍)…….”

사람들의 마음이 동했다. 그들은 조 공자가 읊는 것이, 방금 전 양씨가 쓴 시라는 것을 알아챘다.

“……점진풍정향소원(占尽风情向小园).”

조 공자가 밖으로 걸어 나갔다. 손님들도 시에 이끌려 조 공자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소영횡사수청전(疏影横斜水清浅), 암향부동월황혼(暗香浮动月黄昏)…….”

이내 조 공자는 떠났다. 손님들은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정원에는 순간 적막이 흘렀다.

얼마나 지났는지, 문인 한 명이 눈물이 그렁그렁해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시가 전해지면 아마 여태 매화시를 지었던 시인들이 얼굴을 들지 못 할 겁니다……. 소생, 먼저 가보겠습니다. 다른 다도회에 가서 이 시를 널리 알려야겠습니다.”

“저도 가보겠습니다. 대봉의 시를 널리 알리는 일에 제가 빠져서야 되겠습니까?”

손님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 시로 인해 놀라게 될 다른 사람들의 표정을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 * *

“공자께 감사드려요. 청사에 제 이름이 오른다면 다 공자 덕분입니다.”

부향의 눈에서 정감이 흘러내리자 그녀의 모습은 더 요염해졌다.

허칠안은 그녀가 뭘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자고로 시사로 후세에 이름을 남기는 명기는 많지 않았다.

그런 기회를 만나면 기뻐하지 않을 기생이 없을 것이다.

세상에는 명예를 가장 좋아하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서생과 기생이었다.

‘내가 원한 게 바로 이런 순수한 감사의 마음이야…….’

허칠안이 벙긋 웃더니 적당하게 경박한 모습을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어떻게 답례를 할 생각이오?”

방안에는 봄바람이 넘실거렸다. 술을 많이 마신 허칠안은 잠깐 앉아있었는데도 더위를 느꼈다. 그래서 그는 겉옷을 벗어 의자에 걸쳐놓았다.

이를 보던 부향이 부끄러운 듯 입을 열었다.

“공자, 밤은 길고도 길어요. 우선 제가 한 곡 연주해 드리겠습니다.”

허칠안은 순간 멍해졌다. 상대방이 자신의 뜻을 잘못 포착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굳이 해명을 하지 않은 채 미소를 머금었다.

허칠안은 인내심을 가지고 한 곡을 모두 경청했다. 기녀의 재능은 확실했다. 시는 아직 모르겠지만 칠현금 솜씨가 일품이었다.

음맹(音盲)인 그마저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음률에 빠지게 되었으니 말이다.

허칠안은 차로 술을 마셔 바짝 탄 목을 축이더니 무심코 한마디 던졌다.

“이렇게 아리따운 우리 부향 낭자를, 여태 속신해주려는 사람은 없었소?”

유쾌한 화제는 아니었다. 부향이 우울한 듯 탄식하면서 답했다.

“교방사 여인의 속신이 어디 그리 쉽나요. 속신하려는 사람이 나타나더라도 예부에서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실은 돈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일 터였다. 교방사에서 잘 나가는 기녀를 속신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관기다 보니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고, 게다가 타 청루의 기녀를 속신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은자를 들여야 했다.

왕 포두에게 듣기로는, 일반 청루 기녀는 500냥에서 1000냥 정도면 되는데, 교방사의 기녀는 이보다 두 배 내지 그보다도 더 많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천 냥이 어떤 개념이냐? 내가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십 년을 모아야 하는 돈이다. 그것도 나같이 수입이 중상인 사람이……. 이렇게 많은 돈을 들여 기녀를 속신하느니 외모가 괜찮은 첩을 들이는 게 훨씬 낫지.’

허칠안이 마음속으로 따져본 결과, 그것은 무척 밑지는 장사였다!

“그것도 그런 게, 부향 낭자와 재색을 견줄 수 있는 여인을 대봉 경성에서 어디 찾아볼 수나 있겠소.”

허칠안은 갑자기 부향을 치켜세웠다.

부향이 피식 웃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무척 기쁘면서도 조신한 태도를 보였다.

“놀리지 마세요. 대봉 경성의 제일 미인이야 당연히 진북왕비죠. 저는 그 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진북왕비? 또 그 여인이군.’

허칠안은 전생에도 미인을 수두룩하게 봐왔었다. 또, 이 생에서도 허영월, 저채미와 같이 외모에서 흠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미인을 만나온 터였다. 때문에 그는 왕비의 아름다움을 가히 상상할 수 없었다. 얼마나 아름다워야 경성 제일 미인이라는 호칭이 붙을 수 있단 말인가?

‘십중팔구 신분이 가져다준 광휘일 것이다…….’

허칠안의 판단이었다.

“왕비는 강남 한 선비 집안 출신입니다. 아홉 살 되던 해, 부모님 따라 옥불사(玉佛寺)에 분향하러 갔다가 주지(主持)에게서 시 한 수를 증여받았다지요.

‘출세경혼압중방(*出世惊魂压众芳: 출생부터 놀라워 많은 여인을 압도하고), 옹용경진목희양(*雍容倾尽沐曦阳: 빛이 그 용모에 기울어), 만중추숭성국색(*万众推崇成国色: 많은 사람들이 국색으로 떠받들어), 혼계인간야제왕(*魂系人间惹帝王: 인간세상을 뒤흔들더니 왕까지 알아버렸다).’

그 시로 이름을 날려 열세 살에 황궁으로 보내졌다고 합니다.”

허칠안이 호기심에 물었다.

“어쩌다 왕비가 된 거요?”

부향이 옷소매에 묻힌 섬섬옥수를 펴더니 사기병 하나를 들어 올려 고약을 조금 덜어내 바르면서 말을 이었다.

“십구 년 전, 대봉이 산해관전역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나서, 이대 공훈인 진북왕에게 폐하께서 경성 제일 미인을 하사하셨습니다.”

진북왕은 황제의 친동생이었다. 미인 하나 하사하는 것쯤이야 이상하지 않았다. 아무리 미모가 빼어나다 하더라도 여인을 끊어버리고 도를 닦은 지 오래된 황제라 별 이상할 것도 없었다…….

허칠안이 궁금한 것은 다른 것이었다.

“그럼 일대 공훈은 누구요?”

“위 공입니다. 위 공께서는 당시 삼군을 통솔했습니다. 위 공이 환관만 아니었더라도 진북왕비가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부향이 웃으며 덧붙였다.

“제가 공자에게 한 말들은, 공자에게만 말하는 것이니, 이 문을 나가는 순간부터는 함구해야 합니다.”

위 공에 대해 평민이 거론한다면 모를까, 부향은 관기라 조정 소속이기에 조당 고관을 함부로 거론하면 안 됐다.

‘그 사람이구나…….’

허칠안은 문득 머릿속에 위연을 떠올렸다.

‘그 사람은 환관이지만 재능이 남다르군. 문(文)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무(武)로 반란을 평정하다니. 환관만 아니었다면 장원에 급제하여 수부가 되는 건 식은 죽 먹기였겠네.’

허칠안과 부향이 한마디씩 주고받자, 대화는 점점 본론에 가까워졌다. 점진적으로 말을 유도하는 화술이야 허칠안의 전문이었다. 그가 심문기술을 연마하면서 갈고 닦은 기술이었으니 말이다.

먼 길을 에둘러 대화가 끝내 주립에 이르렀다.

“그 사람은 오만방자하기로 유명하죠. 여색은 또 어찌나 밝히는지, 게다가 무식하기까지하여 제가 가장 질색하는 사람입니다. 매번 다도회에 그가 있으면 저는 그를 투명인간으로 여기죠.”

부향이 화난 어투로 말했다.

“교방사는 예부 관하니, 제가 호부시랑의 자제를 굳이 두려워할 필요는 없잖아요.”

허칠안은 적당히 호기심을 드러내는 척했다.

“오만방자? 여색을 밝힌다고? 그런 공자가 화류계를 찾아다니는 거야, 정상 아니오?”

“이 일은 관장에서 쉬쉬하는 일인데…….”

잠깐 망설이던 부향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다른 관인에게 들은 터라 대략만 알고 있습니다. 양 공자가 알고 싶으시다면 말해 드리겠는데, 밖에 나가서는 절대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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