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타경-45화 (45/712)

45화. 시를 베끼는 건 거래하기 위함이지 잘난 척 하기 위함이 아니다

“이를 어찌하느냐? 우리 셋이 다도회에 쏟은 은자를 합치면 삼십 냥이다. 이걸 그냥 날리게 생겼다!”

제대로 급해진 숙부가 아들을 보면서 말했다.

“신년, 어서 좋은 방법 좀 생각해보렴.”

‘이게 돈 문젭니까? 아무 정보도 캐내지 못한 문제라고요.’

형제 둘은 속으로 미친 듯이 허평지를 나무랐다.

허신년이 부친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제게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다 운수 나름이잖습니까. 저와 형님은 그렇다 치고 아버지는 왜 오신 겁니까? 정녕 스스로가 어느 수준인지 모르시는 겁니까?”

허신년의 말이 심해졌다. 그만큼 절박하고 급했기 때문이었다.

‘오늘 제대로 밑졌네. 은자는 차치하더라도 정보를 하나도 얻지 못했잖아…….’

하녀를 따라가는 조 공자의 모습을 지켜보던 허칠안의 머릿속에 문득 뭔가 떠올랐다.

‘부향이 칠현금과 시에 남다른 재능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허칠안은 재빨리 여종에게 붓과 먹, 선지를 가져오라고 분부했다.

그러고는 탁자 위를 정리하여 일정한 공간을 비워내더니 옆에 서 있던 허신년을 끌어당겼다.

“신년, 네가 대신 써줘.”

허신년은 허칠안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의자에 바로 앉아 붓을 들었다.

허칠안이 시를 빠른 속도로 읊었다.

“중방요락독선연(*众芳摇落独暄妍: 백화는 지는데 매화만 찬바람 속에서 의젓하게 꽃을 활짝 피워), 점진풍정향소원(*占尽风情向小园: 정원의 아름다운 분위기를 독점했구나).”

허신년이 필을 날리더니 초서로 적었다.

“소영횡사수청전(*疏影横斜水清浅: 듬성듬성한 그림자가 얕고 맑은 물에 비끼고), 암향부동월황훈(*暗香浮动月黄昏: 그윽한 향기가 황혼의 달빛 아래서 떠다니네).”

허신년이 갑자기 붓을 멈췄다. 그는 넋을 잃더니 입으로 두 마디를 계속하여 곱씹었다.

“얼른 써!”

허칠안이 허신년을 살짝 밀치면서 말했다.

그러자 잠에서 깬 것마냥 정신을 벌떡 차린 허신년이 계속하여 붓을 날려 마저 썼다.

허칠안이 재빨리 선지를 쥐더니 여종를 불러와 분부했다.

“이 시를 부향 낭자께 드리거라. 얼른! 그리고 양씨가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전해라.”

처음에는 시큰둥해하던 여종은 허칠안이 쇄은자 한 줌을 쥐여주자, 바로 달려갔다.

* * *

부향의 방.

네 겹의 병풍으로 막힌 욕통에서 증기가 피어올라 천정의 들보를 휘감았다.

욕통에는 장미꽃잎이 출렁였다. 물속에 담근 부향의 몸이 장미꽃잎에 가려졌다. 머리를 높이 얹자 아름다운 목선이 두드려졌다. 촛불에 비친 몽롱한 그 모습은 사람의 혼이라도 빼 갈 것 같았다.

피부는 맑고 매끈한 것이, 티 하나 없는 옥 같았다.

여종 한 명이 욕통 옆에서 시중을 들다가 말을 꺼냈다.

“조 공자께서 옆방 차실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밖에 손님들의 말을 들어보니, 조 공자께서 국자감의 수재라고 합니다.”

“수재가 뭐 그리 대단하더냐.”

부향이 피식 웃고는 물을 살짝 튕기면서 말했다.

“조 공자의 재능이면 거인에 급제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거다.”

여종이 소리를 죽여 웃더니 입을 열었다.

“그렇죠. 부향 낭자는 재능 있는 공자만 좋아하잖아요. 주립 같이 부친의 권력만 믿고 우쭐대는 공자는 딱 질색이시죠? 재능이 남다른 조 공자와 잘 지내다 보면 나중에 미담으로 남을지 누가 알아요. 여인도 청사(*靑史: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을지도요.”

“감히 나를 놀려…….”

부향이 손가락으로 여종의 머리를 콕콕 찌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여인이 청사(*靑史: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이더냐. 청사(*靑史: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건, 수많은 서생들의 일생의 바람이기도 하잖니.”

그때 안방 문이 열리더니, 여종 한 명이 들어와 병풍 밖에 서서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낭자, 밖에 양씨 성을 가진 손님이 소녀에게 시 한 수 전해달라 부탁하셨습니다.”

부향이 눈썹을 찌푸리니, 옆에 있던 여종이 큰 소리로 책망했다.

“버르장머리 없기는! 낭자께서 이미 조 공자를 선택하셨는데 바꾸는 경우가 어디 있어? 너 돈 받아먹은 거지?”

여종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부향이 담담하게 말했다.

“탁자 위에 놓고 가거라. 손님에게는 부향이 고맙다 하더라 전하고.”

여종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안도하더니, 선지를 탁자 위에 놓고 나갔다.

목욕을 마친 부향이 얇은 사(纱)로 된 옷을 걸치고는, 맨발로 탁자로 걸어와 의자에 앉았다.

“가서 조 공자를 모시고 오너라.”

부향은 탁자 위에 놓인 선지를 무심코 바라봤다.

종이를 집어 들어 시를 읽던 부향의 눈이, 점점 멍해졌다.

<영매소각 증 부향(影梅小阁赠浮香)>

중방요락독선연(众芳摇落独暄妍), 점진풍정향소원(占尽风情向小园).

소영횡사수청전(疏影横斜水清浅), 암향부동월황훈(暗香浮动月黄昏).

문 앞까지 걸어간 여종이 조 공자를 모시기 위해 문을 열려던 순간, 갑자기 부향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손에 선지를 꼭 쥔 부향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여종이 여태 본 적이 없던 표정을 하고 있었다.

“누…… 누가 보낸 시더냐? 어느 공자? 얼른 말해!”

“양씨라고 한 것 같습니다…….”

여종의 말을 듣자마자 부향은 무작정 방문 앞까지 달려왔다.

“낭자, 낭자……! 이렇게 방문을 나서면 안 됩니다. 절대 안 됩니다!”

여종이 부향을 꼭 끌어안고 나가지 못하게 막았다.

“얼른 놓거라! 얼른 놓으란 말이다!”

흥분과 다급함에 부향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공자를 가지 못하게 하고, 얼른 가서 데려오너라!”

여종은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부향 낭자가 시 한 수에 이렇게 전례 없던 추태를 보이다니. 평소 사리에 밝고 부드러우면서도 우아한 낭자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제가 지금 바로 가서…… 시를 쓴 그 공자를 모셔오겠습니다.”

여종이 떠난 후, 부향은 옷을 바로 입지도 못하고 멍하니 탁자 옆에 앉아 손에 쥔 종잇장을 들여다 보기만 했다.

“소영횡사수청전(疏影横斜水清浅), 암향부동월황훈(暗香浮动月黄昏). 증 부향(赠 浮香), 증 부향(赠 浮香)…….”

부향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더니, 아예 탁자 위에 엎드려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 * *

전청.

일부 손님들이 떠나고 일부 손님들이 남아 있었다.

다도회가 끝나면 낙선된 손님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다른 원(院)의 다도회에 가거나 원한다면 영매소각에서 여종 한 명을 선택해 함께 밤을 보내는 것이었다.

“부향 낭자가 너를 거들떠보지도 않던데.”

조카를 바라보는 허평지의 양미간에 초조함이 서렸다.

‘시는 전달했는데 가벼운 한마디 감사 인사가 전부라니.’

이건 허칠안의 시가 부향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는 의미였다.

허신년이 조소하며 말했다.

“일개 여인이 시사의 정수를 어찌 알아보겠습니까.”

허평지가 아들을 보면서 물었다.

“칠안이의 시가 그렇게 훌륭하느냐?”

오만한 허신년도 허칠안의 작시 능력에는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무척 훌륭하죠. 무척!”

한편, 허칠안도 의문이었다. 이 시에 거는 기대가 컸기 때문이었다.

이 칠률시는 무척 유명했다. 특히 뒤에 쓰인 두 구절은 정수 중의 정수였다.

‘당시적막빙상하(*当时寂寞冰霜下: 얼음 같이 고독했던 당시), 양구시성만고명(*两句诗成万古名: 시구 두 구절이 만고에 이름을 날렸다)는 위의 두 시구를 향한 찬사였다.

양구시성만고명, 얼마다 높은 평가였던가.

<암향>과 <소영>은 사패(*词牌: 사의 곡조의 명칭)명까지 되었다. 이것만으로도 시의 지위를 알 수 있었다.

구양수와 사마광 등 유명인사들도 이 두 시구에 대해 높은 평가를 내린 적 있었다.

‘따라서 이 칠률시로 작가의 이름도 천고에 길이 남은 거지……. 음, 작가의 이름은 떠오르지 않지만. 아무튼 뭔가 잘못됐을 거야. 나를 거절할 이유가 없어. 이 시를 운록서원의 대유 두 분께 드렸다면 나를 친아들로 생각할 텐데…….’

생각을 거듭하던 허칠안은 한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냈다.

칠현금과 시로 유명하다는 것은 실은 유명무실한 명분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빛 좋은 개살구였다면 문인들의 인정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전생에 보았던 연예인들이 인기를 얻기 위해 자신의 명성을 과대 부각했던 것처럼, 이 시대의 기녀들 또한 유사한 조작을 하는 경우가 있을 터였다. 하지만 후자는 그만한 능력을 겸비해야만 조작이 가능했다.

그때, 부향의 시중을 들던 여종이 종종걸음으로 오더니 급하게 누군가를 찾는 동작을 보였다. 그녀는 허칠안을 보자 긴장이 다소 완화된 것처럼 느긋하게 다가와, 예를 갖추면서 애교 섞인 말투로 말했다.

“양 공자께서 시를 보내신 게 맞으십니까?”

허씨 가문의 세 남자는 서로 마주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네, 제가 보낸 것이 맞습니다.”

여종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더니, 고분고분하게 말했다.

“낭자께서 공자를 모셔오라 하십니다.”

허칠안은 차분하게 머리를 살짝 끄덕이고는 여종을 따라, 각루의 다른 한 측에 위치한 안방을 향해 걸어갔다.

이 광경에 ‘영매소각’에 머무르려던 손님들이 저마다 귓속말로 소곤댔다.

“저 자는 왜 따라가는 거지?”

“이건 규칙에 어긋나는 거잖아. 두 사람이 들어가는 법은 없는데?”

“방금 전에 여종이 뭔 시를 언급했는데, 내가 마침 저기 준수한 청년이 조금 전에 뭘 쓰는걸 봤거든.”

부호 옷차림을 한 중년 사내가 허신년과 허평지 앞에 오더니 공수하면서 물었다.

“저 분은 왜 따라 들어간 건지 아십니까? 방금 전 두 분이 어떤 시를 쓰는 걸 제가 봤는데, 그건 또 무슨 시였습니까?”

허신년은 잠자코 있었고, 허평지는 중년 사내를 쳐다보더니 머리를 절레절레하면서 말을 꺼냈다.

“별 볼 거 없는 해학시 한 수를 썼을 뿐이요. 방금 전 들어간 공자가, 자신이 서예에 서투르다며 이 공자더러 도와달라고 하더군.”

세상 물정에 밝은 허평지는 방관자의 자세를 취하면서, 조카와 아들과의 선을 그었다.

그러자 사람들의 시선이 허신년에게로 쏠렸다. 허신년은 피식 웃으면서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는 낯선 사람은 접근금지라는 배타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에 화도 나고 난감해진 중년 사내가 옷소매를 뿌리치더니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이곳에서 하룻밤 묵으려고 계획했던 허평지는 남몰래 아들에게 눈치를 줬다. 그러자 두 사람은 전후로 영매소각을 떠났다.

* * *

“계속 남아있다가 우리 셋의 관계를 사람들이 눈치채게 된다면 좋지 않을 거다.”

허평지가 허신년에게 설명했다.

“알아요.”

머리를 끄덕이던 허신년이 찬바람에 부들부들 떨었다.

방 안은 화롯불로 따뜻한데, 밖은 방 안에 비해 온도가 너무 낮아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허평지가 그런 아들을 쳐다보면서 한마디 했다.

“영매소각에 머물렀다면 그 여종들…… 한두 냥이면 됐을 텐데. 다른 원에 가서 여인을 찾아야 한다니. 게다가 적어도 은자 다섯 냥은 더 들여야 하지 않느냐. 다도회 돈도 지급해야 하니.”

허평지는 말하다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는지 잠깐 멈칫했다. 독설로 유명한 아들이 어째서 교방사의 규칙에 대해 이렇게 잘 알고 있냐고 반문하지 않았다.

물론 그는 한편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중이었다.

허평지가 가슴팍에서 관은 한 정을 내놓았다. 관은 한 정에 은자 다섯 냥이었다.

“신년아, 은자는 네가 갖고 있으렴.”

세은 사건으로 가산이 바닥났지만 한 달이 지난 지금, 허평지는 여전히 비공식 통로로 은자를 긁어모았다. 하지만 여전히 쪼들리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이에 감동을 받은 허신년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

“그럼 아버지는요?”

허평지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버지야 연정경때부터 추위에 강했단다. 길가에서 하룻밤 자더라도 아무 문제 없다. 한데 네 몸이 이 야밤의 추위를 어찌 견뎌내겠느냐.”

허신년은 소매에 손을 넣고 몸을 살짝 움츠려 초겨울의 찬바람을 맞받으면서 은자 다섯 냥을 한참 쳐다보더니, 쉰 목소리로 말했다.

“가지지 않겠습니다.”

허평지는 한사코 아들더러 은자를 받으라고 강요했다.

부자간에 은자를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던 중, 허신년의 가슴에서 관은 한 정이 떨어졌다.

부자는 땅에 굴러떨어진 은자를 멍하니 쳐다보면서 침묵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