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그래, 한 가족이라면 응당 함께 해야지
영매소각의 손님 접대는 일층에서 이뤄졌다. 정원을 향한 미닫이문은 열어놓은 상태로, 얇은 견사를 드리워 찬바람을 막았다.
십여 명의 손님들이 방안에서 술을 마시고 대화를 나누며, 매화를 감상하고 있었다.
방안의 네 모퉁이에는 활활 타오르는 화로가 놓여 있어 겨울의 추위를 몰아냈다.
하녀 한 명이 허칠안을 방안으로 안내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삽시간에 옅은 남색의 서생 장포를 입은 늘씬한 몸매의 청년에게 쏠렸다.
허칠안은 머릿속에 왕 포두가 가르친 다도회에 관한 지식을 떠올리며 최대한 점잖은 웃음을 짓고는 다른 사람들을 향해 읍했다.
“장락현아 수재 양릉이라고 합니다.”
자리에는 비단 옷차림을 한 부자들도 있었고, 국자감 서생들도 있었다. 다들 신분이 높지도 낮지도 않은 듯했다.
허칠안을 본 그들은 관심이 없다는 듯 시선을 거두거나, 아래위로 자세히 훑어보거나, 미소로 응답하면서 저마다 다른 반응을 보였다.
‘경찰 기간이다 보니 대봉 관원 모두 신중해진 모양이지……. 예전 같았으면 부향 기녀 정도면 무조건 누군가가 원을 독점했을 텐데.’
허칠안은 담담하게 자리에 착석하면서 부향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기녀 부향의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눈동자에는 빛이 반짝였고 자태는 아름다웠다. 수많은 미인을 봐왔음에도 불구하고 허칠안은 그녀의 미모에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부향의 미모는 거리에서 뭇 사내들의 뜨거운 시선을 한 몸에 받을 만큼 빼어났고, 수려함과 우아함이 엿보였다. 하지만 이 시대의 여성들이 감히 상상도 못할 얇은 견사 옷을 걸친 채였다. 옷자락 사이로 늘씬한 목선과 흰 어깨가 드러났고, 가슴은 분홍색 얇은 견사로 감쌌는데, 곡선이 보일 듯 말 듯했다.
부향이 기녀가 된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석규(席纠)는 부향 담당이었다. 영관(*令官: 술자리에서 흥을 돕기 위해 하는 놀이의 사회자)이라고도 불리는 석규(席纠)는 벌주 놀이를 주도하는 사람으로, 술자리에서 분위기 담당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는 기녀가 이 역할을 도맡았다. 일반 여인은 하려고 해도 할 수 없었다. 석규(席纠)는 문학 소양에 대한 요구가 높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한창 대구(對句)를 만드는 중이었다. 허칠안의 좌측에는 옅은 남색 옷에 허리춤에 옥패를 여러 개 걸고 있는 중년 사내가 앉아 있었다.
그 사람 차례가 되었다. 중년 사내는 잔을 들더니 한참이나 고민하여 입을 열었다.
“빙랭주일점이점삼점(*冰冷酒一点两点三点: 한자 획의 개수로 만든 대구. 일점이점삼점은 한자의 점 개수로, ‘氷’은 점 하나, ‘冷’은 점 두 개, ‘酒’는 점 세 개를 의미).”
그러자 기녀가 손 옆에 놓여 있던 작은 깃발을 흔들면서 한바탕 칭찬을 늘어놓았다.
중년 사내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폈다.
이것이 바로 문학적인 지식이 풍부한 기녀가 석규를 맡아야 하는 이유였다. 어느 정도의 수준을 갖추지 않고서는 이 상황에서 아첨하려 해도 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부향의 반짝이는 눈빛이 허칠안에게 머물렀다. 허칠안의 차례가 된 것이었다.
‘대구는 잘 못 만드는데……. 글자를 맞추는 게 어려우니까.’
허칠안은 내심 초조했다.
그러나 허칠안은 느긋하게 시선을 정원으로 옮겨 매화나무에 고정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머릿속에 영감이 떠올랐다. 허칠안은 일부러 술 한 잔을 마시며 소탈하고 호탕한 모습을 보이다가, 우렁찬 목소리로 읊었다.
“정향화백두천두만두(*丁香花百头千头万头: 한자 획의 개수로 만든 대구. ‘丁’과 ‘百’은 모두 ‘一’로 시작하고, ‘香’과 ‘千’은 모두 ‘艹’로 시작하고, ‘花’와 ‘萬’ 모두 ‘艹’로 시작함)!”
“묘하네!”
앉아있던 사람들이 허칠안에게 감탄의 눈빛을 보냈다.
눈웃음을 치던 부향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칭찬을 늘어놓다가, 평가를 내리자마자 허칠안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녀는 앉은 자세도 약간 굳어 있었고 술은 권할 때만 마셨다. 허칠안은 묵묵히 기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다.
행동심리학 기반으로 결론을 내리자면, 부향은 현재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수준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그저 직업적인 차원에서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이때, 하녀가 사람 한 명을 안내해 데려왔다. 흰 피부에 생기가 도는 두 눈과 얇고 빨간 입술을 가진 준수한 소년이었다.
자리에 앉아있던 손님들뿐만 아니라 부향마저도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렇게 준수한 소년은 그녀 또한 몇 명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서생 옷차림의 소년은 방안으로 들어와 사람들을 훑어보다가 그만 굳어버렸다.
허칠안도 마찬가지로 한참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이렇게 공교로울 수가.”
준수한 소년도 입꼬리를 한쪽으로 치켜세우더니 한 마디 던졌다.
“그러게요. 이렇게 공교로울 수가.”
“둘은 아는 사인가 보네?”
허칠안의 옆에 앉아있던 남색포를 입은 중년 사내가 의아한 말투로 물었다.
‘알기만 하겠어요? 내 동생인데…….’
허칠안은 난감함을 뒤로한 채, 얼굴에 철판을 깔고 말을 꺼냈다.
“몇 번 만난 적이 있습니다. 허 형도 저, 양씨를 기억하시겠죠? 우리 장락현아에서 만났었는데.”
허칠안은 일부러 성씨를 밝히면서, 허신년에게 가명을 사용하라는 눈치를 줬다.
‘이건 역정찰의 기본자세란다.’
허신년은 이런 면에서는 부족하지만 대신 총명했다. 그는 바로 뜻을 알아채고는 여러 사람을 향해 공수하면서 인사를 건넸다.
“허평안이라 합니다. 장락현아의 서생입니다.”
인사가 끝나자 허신년은 하녀의 안내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
‘짜식! 나와 숙부의 이름을 뒤섞었군…….’
허칠안이 술을 마시면서 속으로 투덜댔다.
벌주 놀이가 계속되고 있는데, 하녀가 또 한 번 사람을 안내해 들어왔다. 이번에는 두 명이었다. 왼쪽은 두꺼운 하늘빛 옷에 허리에 옥패를 걸고, 머리를 진초록 끈으로 묶은 준수한 청년이었다.
오른쪽은 우람한 체구에, 사각형 얼굴. 오관은 그럭저럭 봐줄만 했고, 부호 옷차림을 했으나 상인이나 서생과는 거리가 먼, 용맹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였다.
우람한 체구의 중년 사내는 차실에 들어서자, 주위를 한 번 훑더니 넋을 잃고 자리에 굳었다.
손님이 따라오지 않는 것을 발견한 하녀가 머리를 돌리더니 부드럽게 말했다.
“나리, 이쪽으로 오세요.”
“아…… 그러지…….”
허평지는 얼굴에 철판을 깐 채 아무렇지 않은 척 들어왔다.
허신년과 허칠안이 슬그머니 허리를 폈다.
허평지가 자리에 앉자, 세 사람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서로를 쳐다보지 않고 차렷 자세로 굳었다.
‘이 두 녀석 봐라. 시간이 없다며……. 아들의 마음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니까 신년은 그렇다 치고, 칠안이 이놈은 기루에도 드나들지 않았잖아…….’
‘숙부는 오늘 당직 아니랬어? 예전에 나와 숙모가 갈등만 생겼다 하면 이렇게 아리따운 아내를 맞은 건 내 생에 최대의 행운이라며 차마 숙모를 꾸짖지 못하더니! 쳇! 다 가식이었어.’
‘형님은 기루에 절대 가지 않는다더니……. 오늘 남색포가 왜 없어졌나 했더니! 후안무치한 사람! 아버지는 어머니를 너무 사랑해서 청루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다며?’
세 사람의 홀로 독백은 표정에 비해 훨씬 풍부하고 재미있었다.
허칠안은 인생의 난감한 순간을 이렇게 맞이했단 생각에 착잡했다.
‘청루에서 숙부와 동생을 만나다니 사회적 자살이구나……. 그래도 죽는 게 나 혼자가 아닌 게 어디야!’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많이 편해졌다.
벌주 놀이가 계속됐다. 허신년은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딱’ 맞는 대구를 만들어냈다. 그는 서생이라 대구를 만드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허칠안은 달랐다. 맞출 때도 있고 맞추지 못할 때도 있었다. 허평지야 처음부터 끝까지 술을 마시지 않으면 사람들의 조소를 당하기 일쑤였다.
‘숙부는 정말 생각이라는 걸 안 하고 사는 건가? 여태 책 한 권 제대로 읽지 않고 여기는 왜 온 거야?’
숙부를 지켜보는 허칠안의 기분이 언짢았다.
‘아버지는 돈만 낭비했네…….’
허신년도 울화통이 터졌다.
허칠안과 허신년 모두 조급해졌다. 부향의 관심을 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외모가 준수한 허신년도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답만 내놓았던 탓에 부향의 관심은 점점 떨어졌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그 자리에 강력한 경쟁자가 있다는 점이었다. 맨 마지막에 들어온 하늘색 옷을 입은 준수한 청년은 재능이 많은 친구였다. 좀 늦게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재치 넘치는 대구로 사람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기녀도 그의 재치에 종종 진심 어린 웃음을 보였다.
그 청년이 갑자기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더니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이번에는 제가 첫 운을 떼겠습니다.”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자 부향이 생글거리면서 말했다.
“조 공자, 시작하시죠.”
조 공자가 사람들을 한 번 훑더니 입을 열었다.
“송엽죽엽엽엽취(*松叶竹叶叶叶翠: 송엽과 죽엽의 잎이 푸르다).”
“중첩구라니……. 훌륭하네, 훌륭해!”
“조 형, 재능이 만만치가 않구먼. 역시 국자감 출신이요!”
한 바퀴 돌았음에도 대구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담담하게 웃는 조 공자의 얼굴에 오만함이 엿보였다.
부향은 눈을 반짝거리면서 조 공자만 주시했다.
‘부향의 표정과 동작을 보아서는 조씨에게 호감이 있는 게 분명한데…….’
허칠안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돌려 허신년을 쳐다봤다.
허신년도 마침 허칠안을 보고 있었다. 형제 둘은 우수에 찬 얼굴로 서로를 마주 봤다.
허신년은 시적 재능이 다분한 허칠안이, 교방사에서도 무척 빛을 발할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반나절이나 지났는데도 대구만 만들 뿐, 시는 시작하지도 않는 것이었다.
교방사 다도회에서 시는 자주 나타나지 않았다. 근 이백여 년간 만들어진 훌륭한 시가 몇 수 되지 않았던 데다가, 서생들도 작시에 서툴렀기 때문이다.
다도회는 손님들을 기쁘게 하는 자리지 난처하게 하는 자리가 아니었기에 손님들이 어려워하면 당연히 순서는 넘어갔다.
게다가 오늘 자리에 앉은 손님들은 딱 봐도 학문의 차이가 무척 컸다. 대구도 어려워하니, 시는 더욱 어려워할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잘 읽는 부향은 일부러 작시를 시작하지 않았다. 괜히 시작했다가 손님들의 체면이 깎여선 안 됐으니 말이다.
이때, 부향이 우아한 자태로 몸을 일으키더니 예를 갖추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피곤해서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남은 시간 즐겁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다도회가 끝났다.
화괴(*花魁: 꽃 중의 꽃, 가장 뛰어난 기녀를 말함)가 다도회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하녀를 시켜 방으로 모실 것이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다면 하녀를 시켜 손님들을 배웅하고, 다도회를 새롭게 시작하게 된다.
모든 사람들은 기대감 반, 초조함 반의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반 주향쯤 지났을 때, 하녀 한 명이 걸어오더니 애교 섞인 말투로 말했다.
“부향 낭자가 조 공자를 방으로 모셔, 차 한 잔 하시자고 하십니다.”
하녀의 한 마디에 손님들은 못내 아쉬워했다. 심지어 조 공자에게 경하의 뜻을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조 공자의 입꼬리는 귀에 걸려 내려올 줄 몰랐다. 승자의 미소였다.
반면, 급해진 허씨 집안 남자들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