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그래도 양심은 있네
식사를 마친 허평지는, 어도위에 다녀오고 나서야 조카와 아들을 불러놓고 내일 벌어질 일에 대해 논의했다.
그는 엄청 늦어서야 방에 돌아왔다. 그런데 침상에 앉아있는 부인은 아직도 화가 나 있었다.
“여태까지 화낼 일이 아니잖소?”
허평지가 답답함에 말을 꺼냈다.
숙모는 두 눈을 부릅떴다.
“그 나쁜 녀석, 진짜 양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요! 나리가 저에게 그놈을 건넬 때만 해도 한 손에 들어오는 아기였어요. 그런 애를 지금까지 누가 키워줬는데요? 잘하는 거라고는 나를 화내게 하는 것밖에 없잖아요.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정말 왜 키웠나 싶어요.”
숙모에게서 불만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이때 허평지가 갑자기 가슴팍에서 작은 나무상자 하나를 꺼냈다. 나무상자 표면에는 ‘보기헌’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숙모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남편을 쳐다보았다.
“칠안이가 그대에게 전해주라고 하더군.”
허평지가 한숨을 쉬더니 말을 이었다.
“어차피 두 사람 다 서로 지려고 하지 않으니……. 칠안이도 당신에게 직접 건네주기 난감했나 보더군. 그래서 밥 먹는 자리에서 내놓지 못했다고 했소.”
숙모가 급하게 상자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딸의 보요보다 금 함량이 더 높고 가공도 더 정교한 금보요가 놓여 있었다.
그녀는 보요를 보배처럼 다루더니 거울 앞에 가서 꽂아보았다.
숙모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한마디 던졌다.
“그 나쁜 녀석, 양심은 있나 보군.”
반면 창 옆에 서 있는 허평지의 얼굴에는 엄숙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묵묵히 고요한 정원을 살폈다. 그의 손 가까이에는 어도위 장도가 놓여 있었다.
* * *
밤이 무사히 지나갔다. 뜬 눈으로 지낸 허평지와 허칠안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후련함을 느꼈다.
새날이 밝자 허영월은 여전히,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옷 한 벌만 걸치고는 창을 열어 맑은 공기를 들이쉬면서 늘씬한 몸매를 쭉쭉 폈다.
“소저, 뭘 그렇게 보십니까?”
“아무것도 안 봤어.”
한참이 지난 후.
“소저, 뭘 그렇게 기다리십니까?”
“안 기다려.”
“얼른 와서 치장해야지요.”
“……알았어. 넌 정말 나를 귀찮게 하는구나?”
* * *
허평지는 날이 밝기 바쁘게 집을 나서서 휘하의 어도위를 집합시켰다. 허칠안은 마차를 세내러 갔고, 허신년은 집에서 하인들을 거느리고 짐을 쌌다.
오시(*午时: 오전 11시~오후 1시 사이)가 되자 마차 두 대와 수십 명이 함께 성문을 빠져나와, 운록서원이 있는 서북쪽을 향해 달렸다.
달리는 속도가 빠르지 않아, 그들은 한 시진이 지나서야 청운산 아래에 도착했다.
허씨 집안 남자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너무 초조한 나머지 초목이 다 적으로 보였다.”
허평지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자 병법에 조예가 깊은 허신년이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만약 어제 형님을 미행한 사람이 주부 사람이었다면, 그들은 우리를 공격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두 번이나 놓친 겁니다.
어쩌면 주 시랑은 우리가 너무 하찮아서 언제든지 밟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 아닐까요? 그들에게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라 아직 우리를 신경 쓸 겨를이 없을 수도 있잖아요.”
적을 얕잡아 보는 것은 병법의 금기였다. 다만 이는 쌍방의 실력이 엇비슷할 경우에 한해서였다. 허씨 집안에게 주씨 집안은 비교하려야 비교할 수 없는 상대였다.
“하지만 우리가 명심해야 할 건, 주 시랑을 제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언젠가 죽음을 맞이해야 할 거라는 거지.”
허칠안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때 허영음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대화를 잠시 중단했다. 콩알이가 발을 들어 머리를 내밀더니, 흥에 겨워 교외의 풍경을 감상했다.
콩알이는 아무래도 놀러 나온 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때 허칠안이 운록서원의 건축물 윤곽을 가리키며 물었다.
“너 저기가 어떤 곳인지 알아?”
“모르는데요!”
허영음이 깔깔 웃으면서 답했다. 동그란 얼굴이 사과알 같았다.
“저기, 둘째 오라버니가 다니는 서원이야.”
허칠안이 말했다.
서원이라는 두 글자에 돌연 경계태세에 들어갔던 콩알이가, 큰오라버니를 빤히 쳐다봤다.
허칠안이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네가 글을 배울 수 있게 서원에 보낼 생각이다. 오늘부로 넌 집에 돌아가지 못해.”
이 말에 허영음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머리를 움츠려 마차 안으로 들어가더니 몇 초 후에 대성통곡했다.
“어머니 저 서원에 안 갈래요. 저 글 안 배울래요. 잉이이이잉…….”
“시끄러워 죽겠네. 큰오라버니가 거짓말한 거야.”
“큰오라버니는 왜 거짓말을 해요?”
“그놈은 나쁜 놈이니까.”
허칠안은 기분이 갑자기 좋아져 실실 웃었다.
* * *
허칠안과 허신년은 장진을 찾으려 했으나, 그들을 맞이한 건 이모백이었다.
“스승님은요?”
허신년이 물었다.
“폐관(*闭关: 외부와 단절하고 홀로 수련하는 과정)했다.”
이모백이 허칠안을 한 번 훑더니 말했다.
“이미 너희 가족이 있을 곳은 마련해두었으니 염려 말거라.”
허신년은 읍하면서 감사를 표하고, 말을 이었다.
“동생이 이제 글을 익힐 나이가 되었는데, 혹시 서원에 있을 동안만이라도 서원에서 글을 배우면 안 되겠습니까?”
이건 과한 부탁이 아니었다. 상대가 허영월이었다면 아마 거절했을 테지만, 허영음이야 이제 5살 된 어린아이니 가능했다. 이 시대의 서생들은 어린이가 글을 익히는 걸 배척하지 않을뿐더러 심지어 권장했다.
단지 일반 가정에서는 자녀들에게 글을 가르쳐줄 능력이 없었을 뿐이었다.
이모백이 머리를 끄덕이면서 허락했다.
* * *
그렇게 이틀이란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허신년과 허평지는 벗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정보를 수집하느라 정신없었다. 그들 셋은 서재에 다시 모였다.
그들은 주립을 무너뜨리는 계획을 세우기 위해, 정보를 한데 모아보았다.
그들이 모아놓은 정보는 이러했다.
“최근 며칠간 주립이 무척 얌전하더구나. 주 시랑이 경고한 모양이다. 법에 어긋나는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않고 매일 고관 2세들과 함께 도박장, 주루, 교방사만 전전하고 있지.
그밖에 주립이 자주 드나드는 저택이 하나 있는데, 편액도 없는 걸 보아서는 그가 밖에서 개인 명의로 사들인 사택인 거 같다. 저택에는 여종 한 명, 나이든 하녀 한 명, 그리고 문지기 노인 한 명에 여인 한 명이 살더구나. 십중팔구 집사람 몰래 밖에 둔 여인일 것이야.”
허신년과 허칠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듣기만 했다. 허칠안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탁자를 똑똑 두드리고 있었다. 허신년은 옷소매에 두 손을 넣은 채, 45도 각도로 고개를 젖혀 천정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말이 끝난 허평지가 조카와 아들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너희는 이를 어떻게 보느냐?”
허칠안과 허신년은 약속이나 한 듯 그를 무시하고 서로를 마주봤다. 허신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서원 출신과 국자감 출신은 적대 관계라 서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하지만 같은 시기에 거인에 급제한 서생들끼리는 가끔 모이곤 합니다. 비록 도통(道统)은 대립하더라도 사적인 친분은 쌓을 수 있으니까요. 이것도 하나의 인맥이 아니겠습니까. 이 관계를 잘 다져놓으면 향후 유용하게 활용할 수도 있잖아요. 개인 이익에 비하면 도통 대립은 간과할 수 있는 거죠.
오만방자한 주립은 이미 국자감의 여러 서생들과 갈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충돌이 생긴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고요. 하지만 절대 머리가 나쁜 녀석이 아니더라고요. 그와 갈등이 있었던 서생들을 보면 모두 배경이 그다지 좋지 못했습니다.”
허칠안은 이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 주립이 자신을 상대로 사용했던 수단과 방법들을 분석해보아도, 머리가 나쁜 녀석은 아니었다.
‘게다가 꾀도 엄청 많은 놈이다.’
그의 오만방자함은 세력이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한테만 적용되는 듯했다.
“그를 무너뜨릴 난이도만 더해진 게 분명하군.”
허칠안이 한숨을 쉬었다.
허신년이 그런 허칠안을 힐끗 흘기더니 투덜댔다.
“내 말을 끊지 마세요. 마저 들어보시라고요. 주립은 교방사 부향(浮香)이라 불리는 기생을 오랫동안 사모해왔다고 합니다. 교방사만 간다 하면 그 기생을 만나려고 하는데, 매번 타차위(*打茶围: 청루에 가서 기생과 함께 술놀이를 하는 시간)에서 선택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부향? 왕 포두가 그녀와 시간을 보낼 수만 있다면 한평생 한이 없겠다던 그 미인?’
허칠안은 부향이라는 이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반사적으로 찻잔을 들어 올리던 허신년이, 텅 빈 찻잔을 확인하고는 실망 어린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저는 주립과 서생들의 갈등을 이용하려고 했는데, 주립과 갈등이 생겼던 서생들로는 주립과 맞설 수 없습니다. 게다가 주립은 자신의 부친보다 더 높은 관직에 있는 관리의 자제를 절대 건드리지 않을 거고요. 주립이 교방사를 드나드는 빈도가 가장 높다고 하니, 부향이라 불리는 기생한테서 더 많은 정보를 얻어낼 수 있지 않을까요?”
허칠안은 여전히 탁자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러다 그는 허평지와 허신년이 고개를 돌려 자신을 보자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드릴 말씀이 있는데, 언제 어디서나 우리는 감법(減法)을 써야 한단 겁니다. 복잡한 계획일수록 허점이 많아질 테니까요. 주립을 상대로 우리는 너무 복잡하고 교묘한 계획을 세우지는 말아야 합니다. 우리 두 집안 사이의 격차를 항상 명심해야 하지요. 신년아, 사고의 늪에 빠지지 마라.”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일수록 타인을 꾀하려다가, 오히려 그 꾀에 자신이 넘어질 때가 많았다. 자신의 계획에 지나친 난이도를 설정하여, 포석에만 신경을 써서 나타나는 결과였다.
특히 자신을 지능을 지나치게 높이 사고, 병법에 조예가 깊은 허신년은 더더욱 그런 착오를 범하기 쉬울 터였다.
허신년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형님의 말에 동의했지만 승복하기 어려웠다.
“그럼 형님은 어떤 고견이 있으십니까?”
“단순. 단순하면 단순할수록 좋아.”
허칠안이 생각을 좀 해보더니 말했다.
“흔적 없는 범죄란 뭔지 알아? 격한 감정으로 살인하는 거. 우리도 계획을 세울 때 이를 목표로 해야 돼. 어떻게 단순하게 짜냐면 첫째, 관련된 사람이 적어야 한다. 둘째, 그렇게 복잡한 일이면 안 돼. 신년아, 내가 먼저 묻고 싶은 건, 만약 주립이 다른 고관 2세와 충돌이 생겼어. 그런데 마침 그 고관의 세력이 주 시랑과 견줄 수 있어. 그럼 넌 어떻게 할 테냐?”
허신년은 사색에 잠겼다.
“네 침묵이 모든 걸 설명해주는구나.”
허칠안이 손을 흔들면서 동생의 생각을 중단시켰다.
이 짧은 시간에 허신년의 머릿속에는, 아마 엄청 많은 권모술수가 떠올랐을 것이다.
“내가 생각한 방법은, 우리가 변장하고 기회를 잡아 그 고관 2세를 마구 때리고 도망치는 거야.”
이때 허평지가 대화에 참여할 기회를 잡았다는 듯 허벅지를 내리치면서 말했다.
“칠안의 생각이 내 마음에 쏙 드는구나.”
이에 형제 둘은 동시에 눈을 희번덕거렸다.
허신년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물었다.
“이렇게 간단하다고요?”
허칠안이 머리를 끄덕였다.
“단순하다고 무용하지는 않아. 가끔은 빈 공간을 내어놓는 게 더 도움이 돼. 얻어맞은 고관 2세는 생각할 거다. 최근 누굴 잘못 건드렸을까? 그러다가 주립 그 미친놈의 짓이라고 판단하겠지.
물론 주립은 이 일을 죽어도 인정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이미 판단이 섰으니까. 그렇게 되면 갈등만 격화되겠지. 네가 나를 때려? 그럼 나도 가만히 있을 수야 없지. 이렇게 되는 거지.”
역시 허신년은 머리가 좋은 녀석이었다. 그는 머릿속으로 계획을 한 번 곱씹어 보더니, 바로 뜻을 알아차린 듯 머리를 살짝 끄덕였다. 하지만 말투는 여전히 오만했다.
“괜찮은 방법이네요.”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형님은 무슨 정보를 알아냈습니까?”
허칠안은 뜸 들이지 않고 직구를 던졌다.
“주 시랑의 정적이 누군지 알아냈어.”
이 말에 허신년과 허평지가 동시에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경청의 자세를 취했다.
허칠안이 피식 웃더니 말을 꺼냈다.
“호부상서.”
‘호부상서?’
허신년의 마음속에 남아있던 많은 의혹들이 풀렸다.
‘어쩐지! 그래서 호부시랑이 세은 사건을 계획했었구나. 호부상서가 자신을 대상으로 조치를 취할 걸 알고. 그래서 구멍을 막을 급전이 필요했던 거네. 두 사람 다 호부 소속이다 보니 호부상서가 주 시랑의 꼬리를 잡을 수 있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