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장신구를 사다
“사상금고…….”
허신년이 그 네 글자를 곱씹었다.
“운록서원의 원장 역시 사상금고의 전형이다. 정씨 학술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그걸 돌파하여 새로운 학파를 개설하려 했다니. 정작 그 자신마저 소용돌이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서, 어찌 천하 서생들을 이끌고 그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겠어. 이를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오직 소용돌이 밖에 있는 사람뿐일 거다.
어쩌면 이 형님은 읽은 책이 적어서 남다른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정씨의 이념에 영향을 적게 받아 새로운 걸 쉽게 발견했겠지.”
‘물론, 내게도 사상금고의 모습이 있다. 21세기에서 온 사상금고. 단지 내게 경고하는 사람이 없을 뿐…….’
사상금고란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 세 가지 관념은 시대의 영향하에 형성된다. 어느 시대에 몸을 담그든, 그 시대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니까. 따라서 그 시대의 문제를 쉽게 발견하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허나 오랜 시간이 흘러 시각적인 단차가 분명해지면, 문제를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허신년은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일주향(*一炷香: 향 하나가 다 탈 시간. 약 30분을 말함)의 시간이 흐르자,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형님의 말에 마음이 확 트이는 것 같습니다.”
‘오성(*悟性: 지성이나 사고의 능력)이 엄청 강한 녀석이로군.’
허칠안은 마음속으로는 인정했지만, 겉으로는 오히려 비웃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쉽구나. 우리 신년이 허씨 집안의 훌륭한 유전자를 이어받은 것이 아니라 이씨 집안의 유전자를 이어받아서.”
‘이럴 때 형님은 참 얄미워…….’
허신년은 갑자가 허칠안과 말을 섞기 싫어져 인상을 구겼다.
‘이 말을 어머니께서 들으셨으면, 아마 또 탁자를 내리치면서 욕설을 퍼부었을 텐데.’
* * *
경성에 돌아온 두 사람은 말을 돌려주고는, 보증금을 되찾아 가게를 나갔다. 이때 허칠안이 입을 열었다.
“신년아, 너 먼저 돌아가. 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허신년은 머리를 끄덕이고는, 더 이상 묻지 않고 허부 방향으로 걸어갔다.
* * *
허칠안은 길옆에서 계화떡(桂花糕)을 사들고 먹으며 걸어갔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장신구 가게에 도착했다.
‘보기헌!’
보기헌의 주인은 수재였다. 이렇게 책을 좀 읽었다 하는 사람들이 장사하는 건 엄청 보편적인 일이었다. 특히나 귀족들은 세만 거두어서는 대가족의 지출을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경성에서 큰 점포나 청루와 같이 장사가 잘되는 가게의 배후에는, 늘 귀족의 그림자가 있었다.
‘대봉의 상업은 전대미문으로 발전을 해왔지. 하지만 방대한 세금의 압박은 백성이 끌어안게 되었어. 이것만으로도 귀족놈들이 꼼수를 부렸다는 것을 알 수 있지. 농사를 지어봤자 얼마나 벌 수 있겠어? 부유해지려면 필히 상인들의 호주머니를 털어야 해.
백성들의 생활이 개선되고 대봉의 국고가 넘쳐나려면 개혁은 필수다. 하지만 조정에 관리들이 득실득실한데, 나같은 하급 관리가 나설 자리가 어디 있겠어. 우선 작은 목표를 하나 세워야지. 우리 집 신년을 대봉 재상의 자리에 앉혀야 해.’
교만한 동생 녀석이 미래에 황제의 신하가 되는 모습을 그리던 허칠안이 입을 삐죽거렸다.
이내 가게에 들어선 허칠안이 진열대를 훑었다. 빨간 비단 위에 놓인 다양한 장신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차(钗), 전(钿), 계(笄), 보요(步摇), 화승(华胜) 등,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부셨다.
금으로 만든 게 가장 비쌌고, 옥으로 만든 건 종류에 따라 달랐다. 비싼 건 금보다도 더 비쌌으며, 저렴한 건 은과 비슷했다.
자신의 호주머니를 만지작거리던 허칠안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돈으로는 좋은 걸 살 수 없겠는데…….’
그때, 발밑에 딱딱한 뭔가가 밟혔다. 허칠안은 슬그머니 허리를 굽혀 발에 밟힌 그 무언가를 줍더니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그것을 호주머니에 넣었다.
동작이 너무 자연스러웠던지라 아무도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은자 한 전으로는 도움이 안 되는데. 금자 한 전이면 모를까.”
허칠안은 마치 전생에나 들러봤던 명품 주얼리샵을 구경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살 수 없으니까. 다른 점이라면 이 시대 가게 주인들은 전생의 명품 주얼리샵 종업원들처럼 뒤를 쫓아다니면서 귀찮게 소비를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뭐 하나 물어봅시다. 이 가게에 할인하고 있는 물건이 있습니까?”
허칠안이 진열대를 똑똑 두드리면서 물었다.
가게 주인은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었다. 서생 옷차림을 한 그는 벽 쪽을 가리키더니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여기에 있는 자미(*字谜: 글자 수수께끼)를 맞히면 가게에 있는 모든 상품을 절반 가격에 살 수 있네.”
이는 보기헌만의 특색이었다.
‘수수께끼를 풀면 절반 가격이라고? 재미있네.’
허칠안은 벽 가까이로 자리를 옮겨 자미를 한 번 훑었다.
‘운파월래화농영(*云破月来花弄影: 달이 구름을 뚫고 나와 머리를 내밀자, 밤바람이 불어오더니 꽃 그림자가 달빛 아래서 한들한들 춤을 춘다)!’
방대한 지식 비축량과 논리적인 사고를 통해, 허칠안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미를 풀었다.
‘여기에 있는 장신구들은 무게만 하더라도 어마어마할 텐데. 거기에 인건비까지 더하면……’
허칠안은 잠깐 계산을 해보고는 반값이라도 좋은 장신구를 살 수는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한참 고민하더니, 좋은 방법이 떠올랐는지 눈을 반짝였다.
보기헌에서 장신구를 살 수 있는 여인이라면 집에 돈 좀 있다 하는 집안의 여인들일 터였다.
‘게다가 돈이 있으니 글도 익혔을 테고.’
이런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글을 익혔다고, 이를 무척 드러내고 싶어 한다는 점이었다. 보기헌의 판매 꼼수는 바로 이러한 사람들을 겨냥했을 것이었다.
같은 가격이더라도 보기헌에서 장신구를 사는 이유는, 자미를 맞추기 위함이었다.
자미를 풀기만 하면 가게 주인은 자미가 적힌 나무조각에 정확한 답안을 적어, 장신구와 함께 손님에게 증정했다.
맞히지 못했으면 모를까 일단 맞혔다 하면, 그들은 이것을 친구들한테 가져가서 자랑할 터였다.
이건 허칠안이 옆에 있던 묘령의 여인 둘의 대화를 듣고 나서 정리한 생각이었다.
역시 수재는 운영 수단이 남달랐다. 그들은 돈 많은 고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줄 알았다.
“옥 언니, 여기에 걸어놓은 자미들을 하나도 맞히지 못하겠네요. 너무 어려워요.”
“그러게. 가게 주인이 공명을 얻은 수재라 하더니 문제에 확실히 난이도가 있네. 글 좀 익혔다고 맞힐 수 있는 건 아닌 거 같아.”
“우리 낭군께서도 언니랑 똑같은 말을 하더라고요. 그러니 내가 자미를 맞혀 집에 가져가면 우리 낭군도 나를 달리 볼 건데.”
“그림의 떡인 건 알지?”
“언니…….”
여인 두 명은 우거지상으로 오랫동안 자미를 쳐다봤다.
그들의 옷차림을 보니 돈깨나 있는 집안 여인들인 게 분명했다. 게다가 글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을 터였다. 아니면 자미에 미련을 가지지도 못했을 테니.
“두 분, 안녕하십니까?”
뒤에서 웬 낯선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여인 두 명이 경계하며 머리를 돌렸다. 그들은 그가 준수한 외모에 강대한 몸집의 청년임을 확인하자 다소 마음을 놓는 듯했으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대봉 황조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였지만, 여인이 거리에서 낯선 사내와 대화를 하는 건 좋지 못했다.
허나 허칠안은 이에 개의치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제가 두 분을 위해 자미를 풀어드릴 수 있습니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절약하신 돈에서 절반은 저에게 주셔야 합니다. 은자 5전을 절약하셨다면 저에게 2전 반을 주셔야 하고요. 은자 4전을 절약하셨다면 저에게 2전을 주셔야 하는 거지요.”
허칠안의 제안을 듣던 가게 주인이 의아하게 허칠안을 살펴보더니, 피식 웃고는 다시 머리를 떨어뜨렸다.
서생 옷차림이기는 하나, 자세히 살펴보면 체구와 피부가 서생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집 서생이 몸집이 소같이 웅장하고 피부가 저리도 누르께하겠는가? 게다가 유삼은 몸에 맞지도 않잖아.’
한편, 허칠안의 제안에 젊은 두 여인의 눈이 반짝였다.
나이가 상대적으로 많은 여인이 조심스러우면서도 신중하게 말했다.
“공자 편한 대로 하시지요. 자미를 정말 맞히신다면, 저 또한 공자께서 내놓은 조건을 나 몰라라 하지는 않을 겁니다.”
어쩐지 거리감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두 분, 자미를 하나 선택하시지요.”
허칠안이 웃으며 말했다.
나이 많은 여인은 약간 망설였다. 하지만 나이가 어린 여인은 얼른 맞히고 싶어 안달인 표정으로 언니의 눈치를 살폈다. 언니가 반대하지 않자, 그녀는 바로 자미 하나를 가리켰다.
“운파월래화농영(*云破月来花弄影: 달이 구름을 뚫고 나와 머리를 내밀자, 밤바람이 불어오더니 꽃 그림자가 달빛 아래서 한들한들 춤을 춘다).”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허칠안이 바로 답했다.
“‘능한 자가 수고를 더한다’의 ‘능(能)’입니다.”(*云破月来花弄影에서 云자의 厶, 月, 花자의 匕, 마지막으로 匕가 만든 影(그림자)이니 匕를 하나 더 따오면 能(능)이 됨)
두 여인이 바로 가게 주인을 바라봤다. 그러자 가게 주인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그 표정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었다.
그렇게 나이 어린 여인은 바로 금비녀 하나를 샀다. 기쁨에 겨운 얼굴이었다. 허칠안을 보는 눈빛도 반짝거렸다.
자미를 손에 쥔 나이 어린 여인이 눈을 한 번 굴리더니, 거리감이 좀 덜해진 어조로 허칠안에게 물었다.
“공자, 자미 하나만 더 맞혀줄 수 없을까요?”
“련아(莲儿).”
옥 언니라 불린 여인이 그녀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옥 언니, 오늘 함께 왔는데 저만 자미를 가져가고, 언니는 없으면 얼마나 기분이 상하겠어요.”
말이 끝나자, 련아라 불린 여인이 기대의 눈길로 허칠안을 바라봤다.
‘당연히 되지요.’
허칠안이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물론 가능합니다. 하나 더 선택하시지요.”
“공작동남비(*孔雀东南飞: 공작새가 동남쪽으로 날아가다).”
“손(孙)!”
허칠안이 답했다.
“…….”
가게 주인은 넋을 잃었다.
“고맙습니다, 공자.”
두 여인은 각자 마음에 드는 장신구를 사 들고 기분 좋게 가게를 나섰다.
놀라운 청력을 가지고 있던 허칠안은 가게를 나서는 련아라 불리는 여인이 하는 말을 엿들었다.
“저 공자 인재네요. 그리고 몸은, 우리 낭군보다 훨씬 튼튼한 거 같아요.”
“허튼 소리!”
나이 많은 여인이 훈계하더니, 허칠안이 따라올까 봐 두려웠는지 련아라 불리는 여인을 붙잡고 잽싸게 자리를 떴다.
* * *
허칠안은 그렇게 은자 1냥 4전을 얻었다. 거기에 자신이 갖고 있었던 3전과 주은 1전을 합하면, 모두 2냥이었다.
하지만 허칠안의 마음에 든 금보요는 10냥이었다.
그는 조금 전 방법대로 세 명의 여인을 더 도와 은자 5냥을 모았다. 이 돈이면 또 자미를 맞춰 반값에 금보요를 살 수 있었다.
“드디어 금보요 하나 값은 마련했네. 그런데 숙모도 계시잖아. 숙모도 사드려야 하는데…….”
“공자?”
안색이 창백해진 가게 주인이 깊이 고민하고 있는 허칠안을 불렀다.
“공자, 이만하면 안 되겠습니까?”
“그러면 재미없죠. 규정은 주인께서 만드신 거잖아요.”
“공자께서 갖고 싶은 걸 말씀하세요.”
“금보요 두 개요. 하지만 하나 살 수 있는 은자밖에는 없습니다. 그것도 반값으로 살 수 있는…….”
“저, 제가 공자께 금보요 두 개를 드리지요.”
가게 주인이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말했다.
“그러면 제가 얼마나 송구하겠습니까?”
“공자께서 다시는 가게에 오지 않는 게 저를 돕는 겁니다.”
‘감당이 안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