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줄행랑치다
“저편에 있는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비석은 그럼…….”
허칠안의 머릿속에는 이미 답이 있었다.
“원장이 세운 겁니다. 다만 십여 년 동안 그는 비석에 손을 댄 적이 없지요.”
허신년이 그 비석 옆에 놓인 탁자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 후, 학생들이나 대유들도 비석에 글을 남겨 정 아성의 비문과 우열을 가리려고 시도했지만, 그들이 남긴 비문은 이튿날에 바로 지워졌습니다. 다만 탁자 위에는 여전히 붓과 벼루가 놓여 있지요. 어쩌면 이는 원장의 일말의 기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기발한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여기에 와서 글을 남기는데, 원장이 기다렸던 그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과거 저도 이곳에 비문을 남긴 적 있고요.”
허신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경망스러웠던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기 싫었던 것이다.
‘장의사절보군은, 유방백세만고명……(*仗义死节报君恩, 流芳百世万古名: 정의의 순국은 군자의 은혜를 갚기 위한 것이니, 만고에 그 이름이 길이 남을 것이다).’
비문을 마주 보던 허칠안이 잠깐 침묵하더니 진지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신년, 너한테 물을 게 있다. 군왕이 중하더냐, 천하창생이(*天下苍生: 온 나라의 백성을 뜻하는 말)이 중하더냐?”
허신년은 추호의 망설임 없이 답했다.
“그야 당연히 천하창생이 중하지요.”
허칠안이 또 물었다.
“그럼 네가 학문을 닦은 이유는 무엇이냐?”
허신년의 입에서, 반사적으로 말이 툭 튀어나왔다.
“충군보국(*忠君报国: 군왕에 충성하고 나라에 보답한다)…….”
허신년은 자신의 입에서 나간 말에 깜짝 놀랐다.
허칠안은 개의치 않은 듯 계속하여 물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것이 진정 서생의 일생 목표더냐?”
허신년이 이에 답하지 않고 침묵했다. 바로 그 침묵이 모든 것을 설명했다.
운록서원의 대유 두 사람이, 허칠안이 지은 시구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것도, 이를 충분히 설명해줬다.
허칠안은 묵묵히 탄식했다.
‘군왕이 신하더러 죽으라 한다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 왜? 부친이 자녀더러 죽으라 한다면 자녀는 죽어야 한다? 왜? 이 개똥 같은 사회에는 진정 인권이란 것이 아주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
“내가 학문에 깊이는 없다만, 나도 뭔가를 쓰고 싶구나. 신년아, 나를 위해 먹을 갈아주렴.”
허칠안의 요구에 허신년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허칠안이 말했다.
“어차피 붓과 먹은 쓰라고 있는 거잖아. 형님이 잘 쓰지 못했다면 내일 누군가가 지우겠지.”
허칠안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탁자 앞으로 걸어가 먹을 갈던 허신년이 비석 앞에 서서 물었다.
“뭘 쓰고 싶으십니까?”
“이번에는 나 스스로 쓰고 싶다.”
허칠안은 손에 붓을 잡더니, 아무것도 적힌 게 없는 텅 빈 비석을 한참이나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머릿속에 오늘 아침에 만났던 노점 주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분명 간절하면서도 자신한테서 감히 은자를 받지 못하던 불쌍한 그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대봉 황조에서 관리들의 횡포는 엄청 오래된 일이었다.
‘짐승보다 못한 놈들의 입에서 충군보국이라는 말이 어찌 그리 술술 나오는지.’
허칠안의 머릿속에서는 또, 주립의 오만방자한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관리들이 아무런 증거 없이 사건을 기록하는 모습도 그려졌다.
거친 무력은 봉건왕조의 폐단을 더욱 두드러지게 했다. 바로 그 무력이 있었기에 백성들은 반기를 들고 반항할 용기조차 갖지 못하는 것이었다.
허칠안의 전생에는 최소한 기세 드높은 농민봉기가 몇 차례 있었다. 하지만 이 대봉 황조에서는 농민봉기가 일어날 기회조차 없었다. 규모를 갖추기도 전에 몰살당할 테니까.
허칠안이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내뱉더니, 비장한 표정으로 비석에 붓을 댔다.
“위천지입심(*为天地立心: 천하를 위해 마음을 정하고), 위생민입명(*为生民立命: 백성을 위해 사명을 정하며), 위왕성계절학(*为往圣继绝学: 성인을 위해 학문을 이어가고), 위만세개태평(*为万世开太平: 만세를 위해 태평 국면을 여느니라)!”
글을 다 쓰고 난 허칠안은 기분이 상쾌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음속에서 부풀었던 우울함도 싹 사라졌다. 그는 붓을 내던지면서 큰소리로 말했다.
“신년, 이게 바로 서생들이 해야 할 일이다.”
형님이 남긴 비문을 읽던 허신년의 머릿속은 천둥번개가 치는 듯했다. 혼돈 속에 불분명하던 영식(灵识)이 살아나고, 영혼의 족쇄가 풀리는 것 같았다.
허신년은 넋이 나간 채 허칠안을 바라봤다. 그는 사촌형님의 머리 위로 짙은 자색 기운이 순간 피었다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으드득!
갑자기 돌덩이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정 아성이 비문을 남긴 비석에 수직으로 균열이 생겼다.
허칠안과 허신년은 이에 깜짝 놀랐다. 두 사람이 이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아성학궁이 크게 진동하더니 둥근 천장에서 먼지가 떨어지며 촛대가 넘어졌다.
아성상에서 청기(*靑氣: 깨끗하고 맑은 기)가 피어오르더니, 산 정상의 구름을 뚫고 하늘 위로 올라갔다. 이는 수십 리 밖에서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허칠안은 넋이 나가더니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게 무슨 일이야? 사, 사고친 거 아냐?”
“사고는 무슨 사고요!”
허신년의 감정이 격해지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이건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우린 아성학궁을 온 적 없는 겁니다!”
허신년은 말이 끝나기 바쁘게 머리를 싸매고, 문밖으로 도망쳤다.
“동생, 천천히 좀 가지!”
허칠안도 급히 쫓아갔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래도 책을 읽은 녀석의 임기응변이 빠르네.’
* * *
아성학궁을 빠져나온 두 사람은 큰길로 달리지 못하고, 서원의 가장자리에 있는 작은 길을 밟아 산림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들은 오랫동안 전속으로 달리고 나서야 비로소 멈췄다.
고른 숨을 쉬는 허칠안에 비해 허신년은 한 손으로 소나무를 짚고 서서 숨을 매우 가쁘게 쉬었다. 격렬한 운동으로 인해, 허신년의 새하얀 얼굴에 발그스레한 홍조가 피어올랐다.
“이제 어떡해?”
허칠안이 ‘일처리에는 일가견이 있는’ 동생에게 물었다.
“방금 전에 내가 서원의 천고 난제를 푼 거 아냐?”
허칠안은 자신의 입놀림이 이런 사태를 불러일으킬지 상상도 못했다. 그러니 어떤 좋지 못한 결과가 찾아올지도 당연히 몰랐다. 그래서 허신년을 따라 도망쳤던 것이다.
헐떡이던 허신년이 숨을 고르더니, 턱을 치켜세우고 피식하면서 입을 열었다.
“천고는 무슨. 길어봤자 200년이죠.”
허칠안이 물주머니를 허신년에게 건넸다.
허신년은 물주머니를 받아서 한 모금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금방 서원에 입학한 저였다면, 아마 형님더러 제자리에 남아 서원 선생과 학생들의 숭배와 찬사를 마음껏 받으라고 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형님을 데리고 한시 바삐 그 자리를 뜨고 싶었습니다.”
물을 다 마신 허신년이 물주머니를 다시 허칠안에게 던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얼굴은 다시 원상 복구되었다.
실망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허신년은 형님의 모습에 내심 흐뭇했다.
흐뭇한 거야 당연히 허칠안이 아버지와는 달리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고, 실망한 거야 이후로는 허칠안의 앞에서 지능의 우월함을 운운하며 나대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허칠안이 여러 차례 놀라운 시를 지어냈어도, 그가 비석에 균열이 가는 비문을 적어냈어도…… 허신년은 여전히 자신의 지능이 허칠안보다 낫다고 여기고 있었다.
이런 오만함이 없었다면 ‘천하가 나를 용납하지 않으니 이후의 대봉에 캄캄한 밤이 내리리라…….’ 같은 말을 입 밖에 낼 수 없었을 것이었다.
* * *
형제 둘은 산림을 지나 쥐도 새도 모르게 마구간으로 다가갔다.
작별인사 없이 조용히 떠나는 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다.
허칠안이 현장에 남아 있으면 운록서원에서 그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대유로 인정해줄까?
‘……그건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운록서원이 허칠안에게 감사한다면, 국자감 출신들은 허칠안을 적대시할 수 있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조정의 고관 모두가 국자감 출신이라는 것이었다.
세은 사건 하나로도 뒷일 처리가 이렇게 어려웠다. 그런데 이는 세은 사건보다 백배, 천배는 위험하고 번거로운 사태였다.
허칠안과 허신년은 약속이나 한 듯 이 일에 대한 생각이 일치하는 듯했다.
허칠안은 허신년이 꽉 막힌 서생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그가 병법을 깊이 연구한 탓일 것이다.
“우리가 자리를 조용히 떠나기만 하면, 이후 서원에서도 함부로 떠들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를 위해 비밀을 지켜줄 거예요.”
허신년은 이 말을 하고 나서 다시는 입을 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깊은 사색에 빠져있을 뿐이었다.
* * *
성인학궁 밖의 넓은 평지.
마의에 백발을 풀어헤친 조위가 갑자기 알 수 없는 동작을 했다. 그는 순간 몸을 홱 돌리더니 서원 뒤편을 주시했다.
몇 초 지나서 대유 세 사람도 동일한 동작을 했다. 모두 무거운 표정으로 그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공주는 네 사람의 행동이 의아했던지라 저도 모르게 그들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잠깐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청기가 하늘을 찌르면서 솟아오르더니, 청운산의 두꺼운 흰 구름을 뚫고 그 위에 떠 있다가, ‘팡’하는 소리와 함께 산산이 흩어졌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았다.
그 모습을 보고 조위가 가장 먼저 사라졌다. 대유 세 사람도 잇따라 언출법수의 신비를 보여주면서, 순간 자취를 감췄다.
장공주는 양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치맛자락을 들고 고귀한 자태를 유지하면서 종종 뒤따라갔다.
늘씬하면서도 굴곡이 선명한 장공주의 몸매는 어떤 자세를 하더라도 눈에 띄게 아리따웠다.
* * *
아성학궁 전내.
그곳엔 촛대가 넘어지고, 촛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드넓은 전내에는 청기가 봄바람처럼 넘실거렸다. 그러니 조위의 뒷모습도 덩달아 돋보였다. 조위는 빠르게 안을 구석구석을 훑더니, 바로 균열이 생긴 정 아성의 비문을 바라보았다.
‘이건…….’
조위의 깊은 눈동자에서 파도가 요동쳤다. 조위는 청기의 원인을 분석했다.
학궁을 짓누르던 비문에 균열이 생기자, 운록서원에 내재해있던 호연정기(浩然正气)가 속박에서 벗어나 하늘을 찌르고 올라간 듯했다.
문제는 정 아성의 비문에 균열이 생긴 원인이었다.
문득 조위는 자신이 세웠던 비석을 바라봤다. 비석에는 비문이 쓰여 있었다. 조위가 비문을 찬찬히 읽어내린 순간, 세상이 희미해져 가는 느낌이 그의 마음속에 맴돌았다. 그러면서 비문의 추하디추한 글씨체도, 그의 마음속에 깊이 박혔다.
허나 이 순간만큼은 이보다 귀한 글씨체가 없었다.
산들산들 봄바람 같은 청기가 넘실거리더니, 대유 세 사람의 모습도 선명해졌다. 그들도 반사적으로 대전 구석구석을 살폈다.
균열이 생긴 정 아성의 비석을 본 순간, 세 사람의 눈동자는 자동으로 수축되었다.
‘멀쩡하던 비석에 웬 균열이? ……아니다. 이건 좋은 일이지. 운록서원의 기운을 눌렀던 봉인이 뒤흔들렸다는 의미잖아.’
이모백은 사색에 잠겼다가, 조위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 듯했다.
‘비석에 균열이 생겨? 유가에 아성이 나오지 않는 이 시대에 누가 정 아성의 비석을 뒤흔들었단 말인가?’
장진과 진태가 눈을 마주쳤다.
이어 그들도 조위의 이상한 상태를 발견했다.
“위천지입심, 위생민입명, 위왕성계절학, 위만세개태평……(*为天地立心 为生民立命 为往圣继绝学 为万世开太平: 천하를 위해 마음을 정하고, 백성을 위해 사명을 정하며, 성인을 위해 학문을 이어가고, 만세를 위해 태평 국면을 여느니라).”
장진이 중얼거렸다.
그는 이 구절이 내포한 기개와 포부, 그리고 기백에 놀랐다. 온몸에 닭살이 돋아 찌릿찌릿했고, 몸 안에서 피가 들끓는 것만 같았다.
“이게 바로 서생이 해야 할 일이지.”
진태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관직에 있는 자는 자신의 가문을 위해, 극소수의 사람을 위해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과 나라와 천하창생을 위해 심혈을 기울여야 마땅하지. 암, 그렇고말고.”
치국에 조예가 깊은 진태는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목소리마저도 잠긴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