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아성(亚圣)과 그의 아내
아성학궁(亚圣学宫).
허칠안은 사촌동생을 따라 계단을 올라가 향로를 지나 전내로 들어갔다. 칠 미터 높이의 홍색 기둥이 둥근 천장을 지탱하고 있었다. 학궁에서는 운록서원의 창시자를 모셨다.
아성상이 가느다란 촛불에 비춰졌다. 그는 청색 유삼에 높은 유관을 쓰고, 한 손은 뒤로하고, 한 손은 앞쪽 허리에 놓은 채 먼 곳을 내다보고 있었다.
아성의 옆에는 아름다운 백록(白鹿) 한 마리가 서 있었다. 새하얀 털에 구름 무늬가 은은하게 보였다.
허신년이 백록을 가리키며 말했다.
“운록서원이라는 이름은, 바로 저 백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허칠안이 대꾸했다.
“학자는 참 우아하셔. 백록을 타고 다니다니.”
허신년이 허칠안을 힐끗 쳐다보더니 시정했다.
“백록을 타고 다닌 게 아니라, 백록이 아성의 아내입니다.”
“!!!”
허칠안은 아성을 다시 한번 자세히 살폈다.
허신년이 그의 생각을 읽은 것 마냥 설명을 늘어놓았다.
“서원 <운록지>에 따르면, 백록은 요괴라 하더군요. 성인한테서 경전을 듣다가 사람으로 변하여 아성의 신변을 지켰는데, 어린 시절부터 사이좋게 지낸 두 사람이 나중에는 부부가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사람과 요괴의 사랑은 용납되지 않았지요. 물론 지금도 마찬가집니다만, 성인은 둘의 관계를 알고 나서 떼어놓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혼사를 찬성했다고 합니다. 사랑에는 경계가 없다고요. 그러니까 사랑만 있다면 사람과 요괴도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함께 걸어갈 수 있던 거지요.”
‘자고로 사람과 요괴의 사랑에는 별명이 붙었잖아. 예를 들어 천인합일(*天人合一: 하늘과 사람이 합일체임을 밝히는 유교적 개념)과 같은. 그럼 아성 부부의 별명은 뭐로 하면 좋을까? 지록위마(*指鹿为马: 사슴을 말이라고 하다, 흑백을 전도하다)?’
허칠안이 아성상을 향해 공수했다.
허신년이 아성을 향해 공손하게 제자의 예를 갖추는 동안, 전내를 한 번 살피던 허칠안은 대전의 좌우 양측에서 사람 키 높이만한 비석을 발견했다.
비석 하나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고, 다른 하나에는 글자가 써있었다.
허칠안이 비석 앞으로 걸어가 비석에 새겨진 글자를 읽었다.
“장의사절보군은 (*仗义死节报君恩: 장의의 순국은 군자의 은혜를 갚기 위한 것이니), 유방백세만고명 (*流芳百世万古名: 만고에 그 이름이 길이 남을 것이다), 정회(程晦).”
반듯한 필적으로 쓰인 글은 군자의 드높은 기개를 보여주었다.
“이건 국자감의 아성이 남긴 겁니다.”
허신년이 걸어오더니 글을 쓴 이에 대해 설명했다.
“국자감의 아성? ……맞아, 국자감과 운록서원의 원한은 어떻게 생긴 거야?”
허칠안이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허신년을 바라봤다.
그러자 허신년이 갑자기 주위를 살피더니,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낮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것을 설명하려면 200년 전 국본지쟁(国本之争) 사건부터 말해야 합니다.”
“국본지쟁?”
허칠안은 역사에 대해 아는 게 많지는 않았지만, 국본이 뭔지는 알았다.
태자는 나라의 근본이라 국본이라 불렀다.
즉 국본지쟁이란, 태자 책봉을 둘러싼 분쟁이라는 뜻이었다.
“인종(仁宗)이 황제의 자리에 있을 때, 그는 10년 넘게 태자를 책봉하지 않았습니다. 황자 두 명이 유력한 후보였는데, 한 분은 황후가 낳은 적장자였고, 다른 한 분은 귀인(*贵人 : 황제비빈의 봉호) 소생의 서자였습니다. 미모가 빼어났던 귀인은 인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지요.
인종이 서자인 황자를 태자로 책봉하려 하자, 조정의 문무백관이 극구 반대했습니다. 인종이 성지를 여러 번 내렸지만, 내각에서 반대한 탓에 모두 무산되고 말았지요. 당시 문무백관을 이끈 것이 바로 운록서원 출신의 관원들이었습니다.
장자와 적자를 세우고, 서자는 세우지 못하는 것은, 예부터 전해진 규제들이었지요. 설령 황제라도 이를 위배해선 안 됐습니다. 형님 말이 맞습니다. 예제(*礼制: 국가 규정의 예법)가 학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도룡술이지요.
누구 하나 수그러들지 않자 국본지쟁은 6년이나 지속됐습니다. 그 기간 동안 내각의 재상이 네 사람이나 바뀌었고, 조정의 관원들도 잇달아 떠나갔지요. 경성과 지방을 합치면, 모두 이백여 명의 관원들이 영향을 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때 운록서원 출신이었던 한 사람이 재상의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는 선배들의 이념을 고수하지 않고 인종의 뜻을 따랐지요. 온갖 욕설을 무릅쓰면서도 인종을 위해 태자 책봉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그제야 조정을 한바탕 뒤흔들었던 국본지쟁이 막을 내렸죠.
그 일로 인종이 운록서원에 철저하게 실망하게 된 겁니다. 심지어 운록서원의 존재 자체를 황권 통치의 걸림돌이라 인식했지요. 그때 정회(程晦)가 인종에게 국자감을 설립하여 조정 스스로 인재를 육성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유가의 쇠약도 그때부터 시작되었고요. 이것이 유가 정통을 둘러싼 운록서원과 국자감의 분쟁 유래입니다.”
‘국자감은 국립이고, 운록서원은 사립이다. 사립이 어떻게 국립을 이겨.’
허칠안은 머릿속으로 이야기를 정리해보았다.
설명을 마친 허신년이 시험관 어조로 허칠안에게 물었다.
“형님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음, 국본지쟁 사건에 한해서만. 학술과는 무관하게 말입니다.”
“왜? 학술을 언급하면, 형님같이 꼼수만 부릴 줄 아는 사람은 답하지 못할까 봐?”
허칠안이 한마디 던졌다. 그러고는 말을 이었다.
“겉으로는 국본지쟁이라 하지만 실은 권력 싸움이로구나. 소위 학자라는 사람들이 포부를 펼치려면 손에 권력을 쥐어야 하는데, 한 나라의 권력은 제한되어 있지. 누군가가 권력을 많이 쥔다는 것은 누군가가 권력을 놓아야 한다는 의미이고. 당파를 이루어 서로 싸워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소득이, 바로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어 자신이 실권을 잡는 거 아냐?”
무심결에 떠보려고 던진 물음의 본질을 꿰뚫은 허칠안의 대답에, 허신년의 안색이 변했다.
허칠안이 허신년을 힐끗 쳐다보더니 한마디 던졌다.
“왜? 내 말이 맞지 않아?”
‘이런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되는데…….’
허신년이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더니 입을 열었다.
“계속해서 말씀해보세요.”
허칠안이 말을 이었다.
“도룡술이 제아무리 대단하다 하더라도 황권에 비하지는 못해. 문무를 불문하고 관원이라면 모두 황제와 조정을 위해 존재하잖아. 자고로 탐관이든 청관(清官)이든 간에 권력을 가진 관원은 대부분 좋은 최후를 맞지 못했지.”
그들이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건 잠시뿐이고 결국은 청산 당하게 될 터였다. 신하는 결국 신하니까. 허칠안은 전생에 많은 역사서에서 수많은 실권을 잡은 관리들을 봐왔다. 하지만 정작 좋은 최후를 맞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물론 조아만(*曹阿瞒: 조조의 어릴 적 이름)은 예외였다.
‘황권이 바닥을 쳤던 전쟁 시기는 또 다른 상황이니까.’
허신년이 급하게 캐물었다.
“그러면 해결할 방도는 있습니까?”
허칠안이 말한 것들은, 서원에서는 가르쳐주지 않은 것들이었다.
“방법이 없어.”
머리를 절레절레하던 허칠안이 한숨을 내쉬면서 말을 이었다.
“조정은 전장이나 마찬가지야. 당쟁은 잠시 성취감을 느끼게 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은 온 가문을 이끌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행위와 다를 바 없어.”
허칠안의 말투는 살짝 수상했으나 눈빛은 천년의 역사를 담고 있는 것마냥 깊었다. 그 눈빛을 바라보노라니 허신년은 그만 넋이 나갔다.
“하지만 내게 생각이 하나 있지.”
허칠안이 갑자기 말머리를 돌렸다.
“말해보세요.”
“전 대유의 일생이 바로 생생한 사례잖아. 한 나라의 국운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정도가 되면, 황권에 따르기만 하는 서생이 아니라 황권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강자가 될 수도 있다는 거지.”
허신년의 눈빛에 생기가 보이더니 얼굴에 희색이 감돌았다.
허칠안이 그런 허신년을 보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내 동생은 참 똑똑해.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안다니까.”
“…….”
이에 허신년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내가 형님을 떠본 건데…….’
그때 허칠안의 마음속에 의문이 하나 생겨났다. 운록서원은 관장에서의 벼슬길이 막혔다지만, 여전히 유도 수련의 성지였다. 허신년은 단지 운록서원 출신들의 벼슬길이 막힌 건지, 아니면 유가체계 제반이 쇠약해진 건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허칠안은 후자라고 생각했다.
‘폭포를 구경하고 있을 때 허신년은, 최근 이백여 년간 유가 최고 경지가 삼품이라고 했다. 삼품 이상이면 반드시 출사해야 해서인가? 아니면 유가의 기운이 뭔가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 건가?’
“저 비석은 무슨 뜻이야? 왜 이곳에 세워졌어?”
허칠안이 물었다.
비문(*碑文: 비석에 새긴 글)을 골똘히 쳐다보던 허신년의 눈빛이 복잡해지더니, 한숨을 푹 쉬면서 말했다.
“유가 정통을 둘러싼 분쟁의 후속, 아니, 어쩌면 일부라고 할 수 있겠군요. 정 아성(*程亚圣 : 정회(程晦)를 칭함)은 재능을 가진 자였습니다. 국자감을 설립한 이후, 운록서원을 앞서가려면 반드시 자신만의 교육체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죠. 그렇지 않은 한, 국자감의 학생은 영원히 운록서원의 학생이나 다름 없으니까요.
그래서 그는 성인 경전을 깊이 연구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더하여, 집주를 다시 했습니다. 13년이라는 시간을 거쳐 청출어람의 교육체계가 만들어진 셈이죠.”
“존천리멸인욕(*存天理灭人欲: 천리를 지키고 인욕을 없애라)?”
허신년이 머리를 끄덕였다.
“정 아성은 세상만물 모두가 모종의 규칙에 의존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는 이 규칙을 ‘리(*理: 이치)’라 지칭했고, 리가 세상의 본질로서 가장 정확하다고 여겼지요. 만물이 리에 의존해야만 왕성하게 발전하는데, 복잡하게 뒤섞인 세상만물로 인해 인류가 자신과 리를 잃는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존천리멸인욕(*存天理灭人欲: 천리를 지키고 인욕을 없애라)이야?”
허칠안이 물었다.
존천리멸인욕은 국자감의 기본 사상이었다. 다만 이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하는지 모르는 허칠안은, 허신년의 해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자 허신년이 말을 이었다.
“정 아성은 성인을 위해 집주하면서 완전한 규제 하나를 제정했습니다. 그는 서생들이 이 규제에 어긋나지 않으면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고, 언제나 올바를 것이며, 천지법칙에 응할 것이라고 하였지요. 그 규제가 바로 충효절의(*忠孝絶義: 충성과 효도와 절개와 의리)입니다. 이는 천리(天理)의 높이에 달한 거죠.”
허신년이 피식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군자가 신하더러 죽으라고 하면 신하는 죽어 마땅하고, 부친이 자녀더러 죽으라고 하면 자녀는 죽어야 마땅하며, 대의를 위해서라면 생명을 기꺼이 내놓아야 마땅하고,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는 죽음도 서슴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묵묵히 허신년의 설명을 듣던 허칠안이 갑자기 물음을 던졌다.
“그럼 신년, 네 생각은 어때? 이 관점이 옳다고 생각해? 아니면 그르다고 생각해?”
그러자 허신년은 멍하니 허칠안만을 바라보았다. 입을 열려고 했지만, 모종의 신비로운 힘에 의해 말문이 막혔다.
이때 허칠안은 그 신비로운 힘이, 바로 ‘사상금고(思想禁锢)’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튼, 그래서 이 비석이 생긴 거다?”
허칠안이 시선을 비석으로 돌리면서 물었다.
“네.”
허신년이 머리를 끄덕였다.
“운록서원과 국자감 사이의 분쟁은 학술적인 것과 이념적인 것입니다. 이 비석이 아성학궁에 200년이나 우뚝 서 있었지만 쓰러뜨릴 수 있는 사람이 없었지요. 이 비석이 쓰러지지 않는 한, 운록서원은 영원히 국자감에 눌려 숨통이 트이지 않을 겁니다.
원장이 십여 년 동안이나 서원에서 경전 연구에만 몰두하는 것도, 비문에 적힌 내용을 반박하기 위함입니다. 더 성숙하고 정확한 이념을 내놓으려고 심혈을 기울인 거지요. 하지만 실패하셨습니다.”
“비문에 적힌 내용이 진리이고 정확하기 때문에?”
허칠안이 물었다.
“네.”
허신년이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원장뿐만 아니라 서원의 역대 대유와 선생들 모두 이 비문과 겨뤄봤지만 모두 실패했습니다. 아성의 사상을 어찌 잡다한 사람들이 반박할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