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싸움
이모백이 공고란을 바라봤다. 학생들이 그 앞에 점점 더 많이 모였다. 심지어 서원의 선생들도 소식을 듣고 찾아와서는, 감격에 못 이겨 허벅지를 내리치면서 감탄했다.
이모백이 귓바퀴를 한 번 움직이더니, 바람에 실려 오는 대화들을 전해 들었다.
“먼저는 ‘천하수인불식군’이라는 시가 나오더니, 이번에는 권학시라니. 우리 대봉 유림의 시사가 다시 궐기하는 건가?”
“근 200년간 훌륭한 시가 몇 수 안 나왔잖아. 근래에 이렇게 훌륭한 시 두 수가 나오다니. 후세에 부끄럽지 않게 생겼네.”
“천하수인불식군과 비교하자면, 권학시가 더 널리 알려질 거야. 수시로 꺼내 학자들을 채찍질할 수 있으니 말이야.”
“왜 서명하지 않으셨지? 어느 대유 분의 작품이지?”
마음이 움찔한 이모백이, 낮은 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벗 둘을 힐끗 보더니 아무 소리 없이 뒤로 물러나 자리를 떴다.
장진이 이모백이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 물었다.
“이모백은? 방금 전까지 여기에 있었는데…….”
진태가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더니, 담벼락 방향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기 있네.”
장진이 진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눈을 돌리자, 이모백이 학생들을 물리고는, 붓을 들고 종잇장에 뭔가를 쓰고 있는 게 보였다.
이모백이 무엇을 쓰고 있는지 궁금해진 장진과 진태가 정신을 집중하더니, 동공을 깊이 가라앉혔다. 이렇게 하면 백 미터 밖의 얇은 실오라기도 다 보였다.
두 사람의 시야에 이모백이 <권학시>의 옆에 쓴 작은 글씨 한 줄이 눈에 들어왔다.
‘경자말 신축초, 스승 이모백이 권학하여 이에 영감을 받아 시를 지음.’
그 뜻인 즉, 경자말 신축초에 스승 이모백이 분발하라고 권학하여, 이 시가 나왔다는 뜻이었다.
이 시에도 숟가락을 얹는다고? 이를 보던 대유 두 명이 순간 폭발했다.
“이 후안무치한 노인네야. 얼른 붓을 놓지 못할까!”
* * *
산을 등진 서원 뒷면의 아각(雅阁).
동쪽은 육첩포(*六叠瀑: 폭포 이름)요, 서쪽은 사시사철 푸른 대나무숲이었다.
대나무는 북방에서 보기 드문 식물이었다. 북방에서는 대나무를 살리기도 어렵거니와 번식시키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우후죽순은 남방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이 대나무숲은 서원의 선생들이 대나무를 남방에서 옮겨와 심은 후, 온갖 심혈을 기울여 50년이라는 시간을 거쳐서 형성한 것이었다.
학자들은 대나무에 특별한 애정을 가지곤 했다. 대나무의 기개를 높이 평가하면서 대나무로 타인, 혹은 자신을 비유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대나무들이 숲을 이룬 어느 하루, 운록서원의 원장이 대나무숲에 와서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했다.
‘벌써 이렇게 무성해졌다니! 대나무는 엄동설한에도 굴하지 않고, 사시사철 불굴의 기개로 자신의 자리를 꿋꿋이 지켜나가는구나! 이게 바로 내가 아닌가?’
그 이후로 원장은, 다른 사람들을 몽땅 쫓아내고 자신이 아각을 독차지했다고 한다.
* * *
간결하면서도 우아함이 물씬 풍기는 차실.
삼베로 만든 옷을 입은 노인과 화려한 복장의 여인이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아각 밖은 예기(*銳器: 끝이 뾰족하거나 날이 예리한 물건)를 갖춘 갑사들이 지키는 중이었다.
백발을 풀어헤친 노인은 산뜻함이 부족한 반면, 소탈함과 자유로움을 풍기고 있었다. 팔자주름과 양미간 주름도 매우 깊었고, 웃음을 지으면 눈가주름이 훨씬 더 짙어졌다.
외모로 보아서는 그저 초라한 차림의 늙은 서생이었다. 그가 당대 유학의 일인자인 운록서원의 원장이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노인의 맞은편에 앉은 여인은 스물이 넘어 보였지만, 단순한 나계(*螺髻: 소라껍데기 모양으로 틀어 올린 머리)를 틀어 올린 것으로 보아, 출가 전인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머리에 반짝거리는 금보요(金步摇) 하나를 꽂은 채였고, 옅은 남색의 화려한 치마를 입고 있었다. 엄청 긴 치마라 치맛자락이 바닥에 흐트러져 있었다.
청아함이 묻어나는 그녀의 외모는 물 위의 수련을 방불케 했다. 티 하나 없이 맑고 깨끗한 눈동자는 얼음같이 찬 느낌을 주었다.
“반년을 뵙지 못한 건데, 그새 원장님의 흰 머리가 늘어났네요.”
장공주가 말을 꺼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다 번뇌의 결과겠지요.”
차를 마시던 원장이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답했다.
“오늘 서원에 도착하자, 서원의 제자 한 명이 시 한 수를 읊더군요. 막수전로무지기, 천하수인불식군!”
이 말을 하는 장공주의 얼음같이 찬 눈에는, 일말의 온기가 서려있었다.
“이토록 훌륭한 시에 매우 기뻤답니다. 어느 대유 분의 신작인가요?”
이에 원장 조위(赵衛)가 머리를 절레절레하더니 실소로 답했다.
“원장님, 왜 웃으시는지요?”
“글쎄, 인재가 많기로 유명한 운록서원에 이 시를 지을 만한 사람이 없었다는 게 우스웠던 겁니다. 아니, 대봉 유림 전반을 둘러봐도 이 시를 지을 만한 사람을 찾아볼 수가 없는 게 현실이지요.”
“……원장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본 공주, 알아듣지 못하겠습니다.”
조용한 분위기의 장공주가 난화지(*兰花指 : 엄지와 중지를 구부리고 나머지 손가락은 펴는 손놀림)로 찻잔을 들어올렸다. 그녀는 차를 마시는 모습에서도 귀티가 철철 흘러넘쳤다.
조위가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말을 꺼냈다.
“이 시를 지은 건 운록서원의 유생이 아닙니다. 장락현아의 서리이지요.”
장공주의 신색에 미세한 변화가 보였다.
대봉 황조의 장공주는 일반 여인과 달랐다. 선비 가문의 대규수는 금기서화(*琴棋書畫: 거문고, 바둑, 서예, 그림)에 능통하기만 하면, 찬사를 한 몸에 받곤 했다.
하지만 장공주는 위연에게서 바둑을 배우고, 장진을 따라 병법을 배웠으며, 진태에게서 치국에 대해 배웠다. 성인 경전을 줄줄 외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의론문과 책론 역시 국자감 학자들에 못지않았다.
그녀는 식견이 넓을 뿐만 아니라 기억력도 뛰어났고, 책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읽어 학문의 깊이 또한 남달랐다.
18세에는 황제의 허락을 받아 한림원(翰林院)에서 책을 편찬하는 일을 도왔고, 지난해에는 전 조대의 역사서를 다시 편찬하려고도 시도했다. 하지만 신하들이 강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일이 중동무이하게 된 상태였다.
“원장님, 정말 출사하실 계획은 없으십니까?”
장공주의 눈에 간절함이 서렸다. 어조에는 진정성이 묻어났다.
“유도는 수명도 길지 않잖아요. 더 이상 세월을 허비하시면 안 됩니다.”
극히 적은 사람들만이 아는 사실이었지만, 청주 통정사의 관직은 사실 조위에게 수여된 것이었다.
다만 조위는 부임을 계속 미루다가, 조정에 상서하여 자양거사, 양공을 추천했다.
“세월을 허비하는 것이 후세에 배움의 길을 터주는 일이라면, 노부, 기꺼이 받아들여야지요.”
조위가 한숨을 쉬더니 말을 이었다.
“아쉬운 게 있다면, 대나무숲에서 도를 닦은 지도 10년이 넘었지만, 정씨아성(程氏亚圣)이 그은 참호(*天堑: 천연의 요새)를 넘지 못한 것입니다.”
“그건 원장님의 집념입니다. 굳이 그럴 필요 없잖습니까.”
장공주가 태연한 기색으로 찻잔에 차를 따르며 말을 이었다.
“부황께서 원장님께 출사 요청을 보내신 건, 운록서원을 다시 중용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정말 운록서원의 학생들을 생각하신다면 거절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조위가 벙긋 웃더니 입을 열었다.
“위연을 다루기가 어려워진 겁니까? 아니면 귀족들의 도룡술(屠龙术)이 점점 더 예리해진 겁니까?”
“다 대봉의 백성을 위해서지요.”
장공주의 말은 마음속 깊이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었으나, 조위의 웃음은 점점 조소로 바뀌어갔다.
장공주가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산해관전역이 있고 난 후, 대봉 국력이 날로 쇠약해지고 있습니다. 자연재해가 해마다 빈번히 발생하는 데다, 일은 하지 않고 녹봉만 받아먹는 관리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백성을 괴롭히는 하급 관리들의 악행들도 날로 심각해지고 있지요.
조정 고관들은 당쟁(*黨爭: 당파를 이루어 서로 싸우던 일)에 혈안이고, 수수방관하는 자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진정 조정을 위하고, 백성을 위하는 관원들은 드물지요. 이렇게 기울어져 가는 국정을 바로잡을 사람이 필요합니다.”
장공주는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
“3년 전엔 북쪽에서 조약을 파기하고 변경을 여러 차례 침범하면서 백성들의 재물을 마구 강탈해가더니, 남쪽에서도 역로를 파손시켜 우리 군을 기습하고 잃었던 땅을 되찾으려 시도했습니다. 서역 나라들은 잠자코 방관하고 있고, 불문에서는 중원에 전도하겠다며 위협하고 있습니다.”
장공주의 목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원장님, 포부를 펼치시어, 나라의 태평성세를 위해 이바지하셔야지요.”
조위는 장공주를 잠깐 보다가, 시선을 창밖으로 옮겨 무성한 대나무숲을 바라보면서 탄식했다.
“결코 원치 않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시기가 오지 않았을 뿐이지요. 장공주마마, 오늘은 이만 돌아가십시오.”
이에 장공주는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작별인사를 하려던 순간, 아각 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서원 선생 한 명이 황급히 들어오더니, 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장님 큰일 났습니다. 이모백, 장진, 그리고 진태 대유가 크게 싸우고 있습니다.”
‘서원의 대유 세 명이 싸운다고? 군자가 입으로 도리를 논하다 못해 손까지 동원한 건가?’
이에 장공주는 깜짝 놀랐다. 그녀도 운록서원에서 한동안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원의 대유들은 종종 모여 앉아 도리를 논하곤 했다. 기쁠 때에는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이따금 발끈할 때에는 욕설을 퍼붓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손까지 올리는 건 본 적이 없었다.
대유의 신분이 존귀한 만큼, 그들은 수많은 이들의 본보기가 되어야 했기에 손은 쉽사리 올리지 못했다.
조위가 눈썹을 살짝 찌푸리더니, 찻잔을 놓고 물었다.
“무엇 때문에 싸우는 건가?”
소식을 전하러 온 선생이 고개를 절레절레하더니 답했다.
“저희도 모르겠습니다. 모백 선생이 글을 쓰고 있는데, 선생 두 분이 갑자기 나타나더니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잠깐 멈칫하던 선생이 수심에 찬 얼굴로 덧붙였다.
“‘망할 놈의 노인네’, ‘후안무치한 노인네’ 하면서 싸우시는 것을 보니 정말 진노하신 듯합니다.”
웬만한 일로는 절대 흔들리지 않던 원장도, 이 말을 듣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상황이 심상치가 않아 보인 모양이었다.
이때 장공주가 입을 열었다.
“저도 함께 데려가 주십시오.”
조위가 읊조렸다.
“나, 일장(一丈)이내 성인학궁에 도착하리.”
순간 눈앞이 가물가물해진 장공주는, 어느새 책을 손에 든 성인상을 볼 수 있었다. 전내(殿内)에는 푸른색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시끌벅적하던 전외(殿外)에 광풍이 기승을 부리더니, 전내의 촛불마저 바람에 꺼져버리고 말았다.
탁자 맞은편에 있던 원장 조위는 이미 사라진 채였다. 장공주도 광풍을 맞받아치며 바깥을 향해 걸어갔다.
* * *
강풍에 장공주의 긴 치마가 몸에 찰싹 달라붙었다. 밖으로 나온 장공주가 고개를 쳐들자 저 멀리 허공에 떠 있는 대유 세 명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세 사람의 체내에서 방출되는 강한 기운이 맞부딪치며, 공중에서 광풍을 일으켰다.
“흥!”
“이모백, 이 염치없는 놈! 내 학생도 빼앗아 가더니, 그것도 모자라 이렇게 비열한 짓까지 해? 성인의 도는 어디로 배운 게냐?”
장공주는 의아한 눈길로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모백 대유가 대체 무슨 일을 했기에 장진 대유가 이토록 분노에 차 있는가? 학생을 빼앗았다는 건 또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