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시가 완성되다
이모백이 몸을 돌려 회랑을 돌아 방으로 들어오더니, 싸우고 있는 두 사람에게 물었다.
“원장(院長)은 어디 간 건가?”
“장공주께서 오셔서, 장공주마마와 함께 있을 거네.”
바둑판만 뚫어져라 쳐다보던 장진이 무심결에 답했다.
“그렇군.”
이모백이 머리를 끄덕였다.
이때 진태가 탄식하면서 말을 꺼냈다.
“3개월 후면 춘시(*春闱: 봄에 치르는 시험으로 회시를 말함)인데, 서원 서생들의 학구열이 높지 않네. 어젯밤 서생들 숙소를 한 바퀴 돌아보았는데 불을 켜고 공부하는 서생이 몇 안 되었지. 게다가 불을 켠 방도 불이 책이 아닌 바둑판을 비추고 있었네.”
진태가 말하면서 손을 내밀어 바둑판을 마구 휘젓더니, 원한이 맺힌 목소리로 한마디 뱉었다.
“이까짓 게 뭐라고 원대한 이상과 포부를 잃어, 글쎄!”
“이런 염치없는 노인네를 봤나!”
장진이 대노했다.
‘지면 이상과 포부를 잃게 하는 나쁜 짓이고, 이기면 타인 앞에서 우쭐대는 놈이 되는 건가?’
“자네도 이모백과 마찬가지구먼. 승부도 인정하지 못하면서 바둑은 왜 둬?”
“나랑 그게 무슨 상관인가?”
장진의 말에 이모백이 발끈했다.
그러자 셋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운록서원 학생들의 벼슬길은 가시밭길이었다. 거인과 진사에 급제하더라도 관가에서 높은 지위에 오를 확률이 거의 없었다. 가난하고 척박한 지방으로 보내지거나 아니면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썩거나, 둘 중 하나였다. 따라서 과거 급제를 향한 학생들의 열정도 식어갔던 것이다.
진태가 엄숙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지탱해야 하네. 운록서원 학생들의 벼슬길이 끊겨서는 절대 안 되네.”
이에 이모백이 대꾸했다.
“그럼 학생들을 모아놓고 학문을 권장하는 게 어떻겠는가? 원장이 직접 나서면 되잖은가.”
바둑돌 하나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던 장진이 입을 열었다.
“원장이 해마다 학문을 권장하지 않았는가. 기세등등하게 시작하다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기가 다시 사그라들었지. 큰 효과가 없을 걸세.”
진태가 수염을 쓰다듬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 새로운 방식으로 학생들 스스로가 학업의 필요성을 깨달아, 춘시를 중히 여기도록 하는 거지. 의론문(议论文)을 쓰는 건 어떤가?”
이모백이 고개를 절레절레했다.
“의론문은 힘만 들지, 좋은 소리는 못 듣네.”
“그러면 시밖에 없지.”
차를 한 모금 마시던 장진이 입을 열었다.
“자고로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건 시 아닌가. 훌륭한 시 한 수 뽑는 게 사람을 모아놓고 입이 닳도록 훈육하는 것보다 훨씬 나을 걸세.”
대유 세 사람이 눈을 마주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대봉 유림에는, 시가 쇠약해진 지 오래 됐을 뿐이었다.
“양공이 청주에 부임하지 않았더라면, 이 일을 그에게 맡기면 됐을 텐데. 우리 가운데서는 그가 시에 조예가 가장 깊지 않은가.”
장진이 말했다.
진태의 긴 수염이 바람에 흩날렸다. 그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형님이 나보다야 조정 관직에 훨씬 더 잘 어울리지.”
“지금 내가 일을 떠넘긴다고 놀리는 건가? 자네가 할 수 있으면 어디 한 번 해보시든지! 내가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을 테니.”
장진은 진태의 장난기 섞인 말투에, 화내지 않고 오히려 맞장구를 쳤다.
또 한바탕 싸움이 벌어질 기미가 보였다. 그런데 이때, 장진의 시동(侍童)이 총총걸음으로 들어오더니 몸을 굽혀 인사하고는 입을 열었다.
“선생, 선생의 학생 허신년이 왔습니다.”
‘허신년? 그놈이 왜 왔대? 성인어록을 300번 다 베낀 건가?’
장진이 머리를 끄덕이더니 답했다.
“들여라.”
시동이 떠나자, 장진이 바둑판 맞은편에 앉아있는 진태를 향해 웃음을 지으며 말을 꺼냈다.
“노부가 최근 들어 학생 한 명을 새로 받았는데, 허신년의 사촌 형님이네. 시적 재능이 그야말로 놀라운 친구지.”
이모백이 바로 끼어들었다.
“내 학생이기도 하지.”
진태가 장진과 이모백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뭔가 떠오른 듯 입을 열었다.
“막수전로무지기, 천하수인불식군. 그 시를 쓴 시인 말인가?”
그러자 이모백과 장진 모두 얼굴에 득의양양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하하!”
소리 내며 크게 웃던 진태가, 두 벗을 손가락으로 툭툭 가리켰다.
“웃긴 왜 웃어?”
“내가 웃는 건, 명예와 질투에 눈이 먼 자네 둘 때문이네.”
진태가 웃음을 그치더니 경고 겸 조소의 뜻을 담아 말했다.
“양공의 이름은 필히 그 시로 인해 후세에 전해지겠지.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뜻이 깊은 시이니. 다만 자네 둘, 생각해 봤나? 좋은 시를 얻기란 하늘에 별따기가 아니던가. 서생들이 한평생 짓는 훌륭한 시라 해봤자 몇 수 되지 않지. 역사서에 남을 시야 더더욱 적기 마련이고.
‘막수전로무지기, 천하수인불식군’은 이미 신의 한 순데, 또 한 수, 아니 두 수를 더 바란다? 자네 둘도 이름을 천고에 길이 남기려고? 과한 명예욕이 들어차니, 자네들 마음속에 초심과 기개가 존속할 자리가 있긴 한가?”
한바탕 비난을 받은 이모백과 장진의 얼굴이 붉어졌다.
진태의 말이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고에 길이 남을 훌륭한 시는 그렇게 쉽게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허칠안은 학자 출신도 아니었고, 우연히 훌륭한 시 한 수를 얻은 것만으로도 하늘이 내려준 운이었을 터였다.
하급 관리 한 명이 잇달아 훌륭한 시 몇 수를 지어,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기를 바라는 건, 망상에 불과한 일이었다.
“자네의 말이 맞네.”
두 사람이 진태를 향해 읍했다.
“역사에 이름을 길이 남기더라도 정정당당하게 남겨야지, 지름길에 눈독 들인 우리 두 사람이 잘못된 거지.”
“잘못을 알았다면 시정하면 되네.”
진태는 성인의 말을 되풀이하면서 두 사람의 태도에 만족하듯 머리를 살짝 끄덕였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시동이 허칠안과 허신년을 방안으로 안내했다.
두 사람이 읍하며 인사를 올렸다.
“학생, 스승님을 뵙습니다.”
이모백과 장진은 약속이나 한 듯 눈을 마주쳤다. 그들은 허칠안의 방문이 의외이면서도 기뻤다.
“앉거라!”
장진이 말했다.
“허칠안, 서원에 온 것을 보니 훌륭한 시를 지었나 보구나. 우리더러 감상하라고 온 것이냐?”
이모백이 허칠안의 방문 목적을 넌지시 떠보았다.
허칠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학생, 선생들께 긴히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이렇게 걸음 했습니다.”
“그럼 얼른 말해 보거라.”
허칠안은 얼른 자신이 온 목적을 말했다. 다만 호부시랑에 대한 복수 대목은 빼놓았다. 그저 세은 사건의 배후가 주 시랑일 가능성이 엄청 컸기에, 상대방이 경찰을 무사히 건넌다면 반드시 허부에 복수할 거라고만 주장했다.
“그건…….”
이모백이 자신과 똑같이 안색이 어두워진 장진의 표정을 확인하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서원에 외부인은 묵지 못한다. 이건 내부 규정일세.”
앞뒤가 꽉 막힌 학자들이야 규정을 엄수하는 게 당연했다.
그러자 허신년이 입을 열었다.
“장공주께서도 서원에서 종종 지내지 않았습니까?”
장진이 고개를 절레절레하더니 말했다.
“장공주께서 어떤 신분이더냐.”
허신년이 불만이 잔뜩 담긴 어조로 대꾸했다.
“서원은 모든 외부인의 투숙을 금하지만, 황실 혈통만은 예외인 것이군요.”
‘이 녀석은 어찌 말을 한결같이 저따위로 할꼬?’
말문이 막힌 세 명의 대유는 그저 웃기만 했다.
그러나 허칠안은 허신년의 말에 하마터면 소리 내어 크게 웃을 뻔했다.
‘내 동생의 독설은 언제 들어도 치명적이군! 사람을 한 방에 보내다니.’
이때 이모백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말을 꺼냈다.
“자네의 이 학생이 입명경에 이르면 어찌 될지 너무 기대되는군.”
‘그건 너무 공포스러운 일이지…….’
장진이 입을 삐죽거렸다.
진태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허칠안만을 지켜봤다. 그러더니 한마디 물었다.
“네가 허칠안이더냐?”
“네, 학생 허칠안입니다.”
유삼을 입은 허칠안이 진짜 학자라도 된 듯 읍하면서 답했다.
“듣자하니 시에 엄청난 재능이 있다더구나.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어떤가? 만약 이 자리에서 자네가 우리 셋 모두 만족할 만한 시를 지어낸다면 노부가 자네와 약조하지. 허부 여인들이 서원에서 지낼 수 있게 해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안전 또한 서원에서 책임지겠다고.”
이를 유도해내는 것이 허씨 집안의 두 형제가 이곳에 온 목적이었다. 허신년이 미소를 머금더니 머리를 돌려 형님을 쳐다봤다.
“형님…….”
그는 한편으로는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단순히 시를 짓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책을 좀 읽었다 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지을 수 있었다. 하지만 대유 세 사람이 만족할 만한 시를 짓는 것은, 아주 어려웠다.
‘시를 지으라고? 이건 무상으로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겠다는 거나 마찬가지 아냐?’
하지만 허칠안은 바로 대꾸하지 않고 깊이 고민하는 척하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자유로이 지을까요? 아니면 대유께서 주제를 지정해주시면 그 주제에 맞게 지을까요?”
대유 세 사람이 눈빛을 교환하더니, 이윽고 장진이 입을 열었다.
“권학(勸學)!”
‘그럼 그렇지, 과연 원하는 게 따로 있었구만! 자유로이 지으라고 하면 몇 초 내에 후세에 길이 전해질 시를 읊어줄 텐데.’
그나마 주제가 자신이 축적한 지식에 크게 어긋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권학’ 두 글자를 따라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라면, 고등학교 때 배웠던 <권학(*勸學: 순자의 저서 중 하나. ‘학문에 힘쓰도록 권함’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시라고 하니 이에 바로 적용할 수 없었다.
서중자유황금옥, 서중자유안여옥(*书中自有黄金屋, 书中自有颜如玉: 학문을 잘 닦으면 부귀영화가 따라오고, 학문을 잘 닦으면 미인을 아내로 맞을 수 있다)!
그러자 허칠안의 머릿속에 바로 시 한 수가 떠올랐다.
권학과 관련된 시에서, 지명도로는 이 시를 이길 시가 없었다.
하지만 허칠안은 이내 이 시를 포기했다. 운록서원의 처지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이 시는 송조(宋朝) 황제가 쓴 시야. 그러다 보니 시에 너무 많은 공명의 유혹이 들어있지. 하지만 공명과는 거리가 먼 운록서원이다. 신년이 거인에 급제했을 때에도 어디 가난하고 척박한 곳으로 보내질지 모르겠다고 탄식한 바 있지. 이 시를 읊는다는 건, 운록서원의 아픈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격일지도 몰라.’
오랫동안 침묵하는 허칠안을 바라보는 허신년의 양미간에 주름이 깊어졌다. 장진과 이모백은 기대에 찬 눈길로 허칠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태만 미소를 머금고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허신년은 붓, 먹, 종이, 벼루를 찾아, 탁자 위에 놓고 형님을 위해 먹을 갈았다. 한 손으로 붓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옷소매를 잡은 후, 붓에 먹을 묻히더니, 이내 형님에게 붓을 쥐라고 눈치를 줬다.
‘내 그 괴발개발 서법으로? 그건 서법이라 할 수도 없는데……. 안 돼!’
허칠안은 속으로 자신의 하찮은 서법을 조소하면서, 겉으로는 가르치는 자세를 취하곤 입을 열었다.
“신년이 저 대신 쓰겠습니다.”
이에 허신년이 머리를 끄덕이더니, 옷깃을 바로 하고는 탁자 앞에 바른 자세로 앉았다.
“삼경등화오경계(*三更灯火五更鸡: 삼경까지 등을 켜고 공부했는데, 오경 되니 닭 울음소리가 들렸다). 정시남아독서시(*正是男儿读书时: 이때는 남아가 책을 읽을 가장 좋은 시간이다). 흑발불지근학조(*黑发不知勤学早: 소년시절 아침 일찍 일어나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백수방회독서지(*白首方悔读书迟: 늙어서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다 받아쓰고 난 허신년이 붓을 놓았다. 그는 선지 위에 멋진 필적으로 쓰인 칠언시(*七言詩: 한 구가 일곱 문자로 된 중국의 시)를 다시 보더니, 만면에 격앙된 정서를 드러냈다.
방 안에는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허신년은 시의 여운에 깊이 빠졌다. 대유 세 명도 총총거리며 탁자 옆으로 걸어와 아무 말 없이 시가 적힌 선지만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가슴까지 닿는 긴 수염에 흑포를 입은 진태의 눈에, 빛이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