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치열한 논쟁
정신이 딴 데 팔린 허영월은 여종의 말을 듣지 못했다.
“란아(兰儿), 요즘 큰오라버니가 많이 변한 거 같지 않아?”
여종은 잠깐 멍해 있더니 갑자기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면서 답했다.
“큰공자님, 예전보다 더 부드러워지고 재미있어졌어요. 게다가 재주가 엄청 많아졌잖아요. 예전에는 맨날 굳은 얼굴이었던 데다가 소저랑, 둘째 공자님한테도 잘해주지 않았잖아요. 나리랑 대화할 때에만 웃는 모습을 본 것 같아요.”
여종의 대답이 마음에 든 듯, 허영월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그게 다 오라버니 잘못만은 아니지. 어머니가 오라버니를 싫어했잖아.”
허영월은 큰오라버니와 사이가 끈끈해진 느낌이 좋았다. 마치 살랑살랑 불어오는 포근한 봄바람을 맞는 것처럼 기분이 달콤하면서도 산뜻해졌다.
예전에 큰오라버니는 인정미도 없고, 재미도 없었으나, 지금은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말도 따뜻하게 하지 않던가?
* * *
허칠안이 허영음의 방 문어귀에 도착했다. 아직 남녀를 가릴 나이가 되지 않은 허영음이었기에 문도 두드리지 않고 바로 들어갔다. 허영음은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돼지털로 만든 칫솔을 손에 들고 엄숙한 표정으로 거사를 치르듯 이를 닦고 있었다.
다른 한쪽에서는 여종이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오야버니…….”
허영음이 거품을 입 안 가득 물고 인사를 얼버무렸다.
“어찌 혼자 씻고 있느냐?”
허칠안이 여종을 보면서 물었다.
허나 금방 칫솔에서 입을 뗀 허영음이 대신 대답했다.
“아버지께서 사내대장부는 어려서부터 자립할 수 있어야, 무공을 잘 익힐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너…… 네가 여자애인 줄은 알고 있니?”
“알아요.”
고개를 갸웃거리던 콩알이가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면서 답했다.
‘너, 너 모르는 것 같은데…….’
“그럼 남자애랑 여자애의 다른 점이 뭔지 알아?”
“그건 몰라요.”
콩알이는 성실히 답하곤 되물었다.
“다른 점이 뭐예요?”
‘이건 생리학적인 수업인데. 일장 연설하면 끝이 없는 데다가 그렇게 말해봤자 영음이는 알아듣지 못할 거고…….’
허칠안은 전생의 9년 의무교육 과정을 통해 다진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남녀노소가 다 알아듣기 쉽게 설명했다.
“음, 쉽게 말하자면…… 남자애는 커서 까불이가 되고, 여자애는 커서 울보가 돼.”
허영음이 그제야 모든 걸 깨달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그래서 어머니가 맨날 나를 까불이라고 했구나.”
그러더니, 허영음은 이내 좋다고 방안을 휘젓고 다니면서 기쁨에 겨운 목소리로 외쳐댔다.
“나는 까불이다. 나는 까불이다!”
허칠안은 묵묵히 방안을 나서더니 방문을 꼭 닫았다.
‘오늘 아침은 집에서 먹지 말아야지.’
* * *
경성의 번화한 거리, 여기저기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너도나도 아침 식사 장사를 하느라 분주했다. 허칠안은 현아와 두 골목을 사이 둔 곳에서 아침밥을 해결하기로 했다.
노점 주인은 피부가 까무잡잡한 마른 체형의 중년 남성이었다. 그는 검은색 앞치마를 두르고, 누구를 봐도 미소를 지었다.
음식은 아주 맛있었다. 허칠안은 오늘 아침 식사가 만족스러운 바였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모든 음식에 단맛이 난다는 점이었다. 대봉 경성 사람들이 단맛을 선호하는지라 콩물은 차치하더라도 순두부마저 설탕을 추가하는 듯했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의 기호에 맞추고 싶지 않았던 허칠안은 노점 주인에게 설탕을 추가하지 말고, 간장, 돼지기름, 파와 마늘을 추가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밖에 유자 4개, 고기만두 6개, 소가 없는 찐빵 2개, 죽 한 사발, 반찬 세 접시를 주문했다.
그러고 다 먹고 나서 계산하려 했는데…….
“이 돈 못 받습니다. 저희 가게에 와서 아침을 드시는 것만으로도 더없는 영광입니다.”
포졸복을 알아본 노점 주인이 한사코 돈을 마다했다.
하지만 허칠안이 해치운 텅 빈 접시들을 바라보는 노점 주인의 눈빛에는, 아쉬움이 서렸다.
“정말 안 받아도 되겠습니까?”
노점 주인은 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허칠안이 아침에 먹은 양은, 네댓 사람의 양에 가까웠다. 워낙 많이 벌지 못하는 장사라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뼈 빠지게 일해도 가족들이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감히 받진 못하지……. 어디 감히!’
“예, 예! 괜찮습니다.”
노점 주인은 아무래도 일전에 포졸들에게 괴롭힘을 많이 당한 모양이었다.
“음, 그럼 여기 앉아 잠깐 소화하고 갈 테니 방해하지 말고 일 보세요.”
허칠안이 손을 흔들면서 노점 주인을 쫓았다.
노점 주인은 어명을 받은 듯 굽신거리면서 자리를 떴다.
‘대봉 황조 제도의 폐단들이 너무 오래 지속됐군. 서리들의 무자비한 행각들을 하루빨리 숙청하지 않으면 백성들의 생활은 나아지지 않을 거다.’
노점 주인이 바삐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던 허칠안의 머릿속에, 조금 전 못내 아쉬워하면서도 감히 돈을 받지 못하던 노점 주인의 눈빛이 자꾸 떠올랐다. 분명 자신이 주인인데, 거지처럼 구걸하는 듯했던 노점 주인의 처지는 마음 아픈 현실이 아닐 수 없었다.
‘옛날부터 백성에게 가장 큰 피해를 줬던 건 큰 인물들이 아니라 큰 인물들의 눈에 띄지도 않는 똥파리 같은 존재들이었지.’
허칠안은 호주머니에서 동전 10닢을 꺼내 탁자에 놓고 묵묵히 떠났다.
* * *
“가셨군…….”
안도의 한숨을 쉬던 노점 주인이 우중충한 표정으로 그릇과 젓가락을 거두러 탁자로 걸어왔다.
‘아침부터 재수 없구먼!’
노점 주인이 속으로 외쳤다.
하지만 탁자 앞에 도착한 노점 주인은 넋이 나가고 말았다.
‘이게 무슨 일인가? 동전이 왜 여기에?’
조금 전 포졸이 돈을 남기고 간 것이었다. 그것도 먹은 것에 비해 더 많은 돈을!
노점 주인이 다급하게 거리로 나가 보니 포졸복을 입은 청년의 뒷모습이 보일 듯 말 듯하다가, 이내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갑자기 목구멍에 뭐가 걸린 것 같단 느낌을 받았다.
장사한 지도 몇십 년이 돼갔지만, 밥을 먹고 돈을 내는 포졸은 처음이었다.
* * *
점호가 끝난 뒤, 허칠안이 주 현령을 찾아 휴가를 신청했고, 주 현령은 두말없이 허칠안의 휴가를 허락했다.
* * *
급하게 허부에 돌아온 허칠안이 허신년의 방문을 열었다. 눈빛이 서로 마주친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머리를 끄덕였다. 허신년은 미리 준비한 옅은 남색에 옅은 회색 구름무늬가 가득한 유삼(儒衫)을 내놓았다.
허칠안은 동생이 입은 짙은 열구름 무늬의 청색포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신년아, 네가 입은 옷이 참 멋있구나. 우리 바꿔 입는 게 어떠냐?”
이에 허신년은 ‘꿈 깨셔!’란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연정경의 무부와 서생의 유삼은 어울리지 않았다. 근육이 불뚝불뚝한 강대한 체구에 널찍한 유삼이 꽉 끼기 때문이었다.
서생들이 좇는 유삼의 미(美)란, 옷소매가 바람에 휘날리며 속세를 벗어난 것 같은 선기(仙气)를 풍기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서생 차림을 한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허부를 떠났다. 은자 3냥을 주고 황표마(*黄骠马: 누런 바탕에 흰 점이 있는 말) 두 필을 세내어 번갯불 번쩍하듯 경성을 떠났다.
* * *
둘은 경성 근교 60리 밖에 있는 청운산(清云山)을 향해 달렸다. 청운산에는 서원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바로 그 명성이 자자한 운록서원이었다.
청운산은 본명이 따로 있었다. 구체적으로 뭐라 불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운록서원이 이곳에 터를 잡은 후로 책 읽는 소리가 끊기지 않았고, 청기(清气)가 청운산을 감싸고 돌아 ‘청운산(清云山)’이라 개명했다.
두 사람은 반시진을 달리고 나서야 먼발치에 자리한 청운산의 윤곽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옹기종기 들어선 콩알만한 서원의 건물들도 어렴풋이 보았다.
“신년아,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허칠안이 달리는 속도를 줄이고는, 사촌동생이 말고삐를 잡아당기기를 기다렸다가 말을 이었다.
“네가 말해봐, 성인(聖人)은 일품(一品)이었을까?”
허칠안은 이 세계의 수행 품계에 엄청 큰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알 방도가 없었을 뿐이었다.
허칠안의 물음에 허신년의 턱이 오만하게 하늘을 찔렀다.
“형님은 그것을 제가 안다고 생각합니까?”
‘모르면 모른다고 할 일이지, 이렇게 오만한 태도는 또 뭐냐…….’
눈을 희번덕거리던 허칠안이 계속하여 물었다.
“그럼 성인이 몇 살까지 살았는지는 알아?”
허신년이 머리를 끄덕이더니 답했다.
“82세.”
위대한 유학의 개척자, 일품이 아니었어도 낮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런 그도 82세까지 밖에 못 살았다고? 그래, 이 시대의 일반인에 비하면 고령이긴 하지. 과연 성인은 장생이 불가능했을까? 음, 지금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아니야. 아직 파악한 정보가 너무 적어…….’
“운록서원은 외부인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건 내부 규정이라 저로서는 스승님의 승낙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없어요. 형님은 정말 자신 있습니까?”
허칠안이 고개를 절레절레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건 사람하기 나름이지.”
두 사람은 작전을 개시하기 전에, 집안 여인들을 운록서원에 맡기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하면 호부시랑이 복수하더라도, 운록서원에서 허부 여인들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세은 사건으로 이미 생사를 한번 오갔는데, 이놈의 세은 사건은 끝나지도 않는구나. 앞쪽으론 떨어지면 바로 산산조각이 될 낭떠러지가 기다리고 있어. 한 발만 잘못 디디면 바로 굴러떨어지겠지……. 정말 가문의 위기로구나.’
허칠안이 두 발로 말 복부에 힘을 가했다. 그러자 말이 갑자기 속도를 내며 허신년과 거리를 벌렸다.
이에 허신년은 질 수 없다는 듯 말채찍을 휘두르며 허칠안을 따라갔다.
* * *
청운산은 웅장하지도 않고 수려하지도 않았다. 청기충천(清气冲天)이 아니었다면 일반 야산과 별반 다른 점이 없었다.
산중에는 정원도 있고, 각루(*阁楼: 다락방이 달린 누각)도 있고, 광장도 있고, 폭포도 있었다. 청석판을 깐 보도는 마치 거미줄을 친 것마냥 얼기설기 얽혀 여러 장소를 연결했다.
절벽 옆에는 각루 한 채가 있었는데, 절벽을 향한 면에 벽을 설치하지 않아 2층 회랑에 서 있으면 광활한 평원과 먼 산들의 윤곽이 한눈에 들어왔다.
다시는 바둑을 두지 않으리라 굳게 맹세한 대국수 이모백이,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회랑에 서서 두 벗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논쟁을 듣고 있었다.
“이 한 보는 내가 잘못 둔 거라 다시 두겠네.”
“바둑알이 바둑판에 떨어졌으면 더 이상의 시정하지 못하지. 이건 규칙이 아닌가.”
“성인이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잘못을 알았다면 바로 시정하라고.”
“성인의 뜻은 그 뜻이 아니잖은가.”
“그럼 뭔가?”
“망할 노인네, 지금 나와 도를 논하겠다 이거야? 그래, 좋아. 오늘 이 자리에서 끝장을 보지.”
“그래! 끝장을 보지.”
이때 이모백이 머리를 절레절레하더니 한마디 뱉었다.
“바둑 풋내기들! 이러고 싶을까!”
논쟁을 벌이고 있는 두 명 중 한 명은 병법대가 장진이었다. 다른 한 명은 흑포에 수염을 가슴까지 기른 노인이었다.
그의 이름은 진태(陈泰)요, 자(字)는 유평(幼平)으로 운록서원의 사대 대유 중 한 사람이었다.
사대 대유 모두 각자 가지고 있는 재능이 상이했는데, 이모백은 바둑, 장진은 병법, 자양거사 양공은 치학(治学)에 조예가 깊었다.
진태는 치국(治国)에 남다른 재능이 있어, 그의 저서 <치국경락(治国经略)>은 대봉 관장에도 널리 보급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