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신년아 형이 너한테 잘해줬잖아
허칠안은 저승사자와 어깨만을 스친 채 지나쳤다. 역시 관리 2세만이 관리 2세에 맞설 수 있었다. 법률의 공평과 공정이란, 작은 인물들 사이에만 적용됐다. 초겨울의 햇빛을 다시금 맞이한 허칠안은, 다시 태어난 듯한 느낌을 받았다.
형부 아문을 나서자마자, 거리의 저 끝에서 바람을 휘날리며 쏜살같이 달려오는 말 두 필이 보였다. 허신년과 허평지였다.
부자(父子)는 백의들에 의해 둘러싸인 허칠안을 보자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그런데 사천감의 사람들은 왜 여기에 있지?’
허신년은 사촌 형을 슬쩍 살피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바로 장읍하면서 대유 두 분께 인사를 올렸다.
“스승님, 고맙습니다. 이모백 선생님, 고맙습니다.”
이모백이 아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시사에 이렇게 재능 있는 친구가 왜 아역이 되었을까? 녕연, 운록서원에서 유가의 도를 수련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 건가?”
‘서로 안 지 이각도 안 되었는데 녕연이라고 부르다니…….’
“노부의 문하로 들어올 수 있잖은가.”
허칠안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허칠안이 사촌 동생을 힐끗 쳐다봤다. 허신년의 얼굴이 굳어있었다.
“두 분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니, 저 칠안, 황송하기 그지없습니다. 다만 어린 시절 책은 좀 읽었지만, 무공을 수련한 이후로는 학문의 길에서 점점 멀어졌습니다.”
상황을 모르는 허칠안이 함부로 응할 수는 없었다.
“무방하네. 학문이란 평생 닦아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언제 시작해도 늦지 않네.”
이모백이 웃으며 긴 수염을 쓸고는 말했다.
‘나에 대한 관심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잠깐 머리를 굴리던 허칠안이,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사촌 동생을 보고 웃다가 입을 열었다.
“네, 맞는 말씀입니다. 학자의 길은 언제 시작해도 늦지 않죠. 제가 학문에 확실히 천부적인 재능이 있긴 합니다만, 두 분께서 이를 알아봐 주시다니 너무 영광입니다. 제가 서원에서 두 분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면 신년을 따라잡는 건 시간문제일 것입니다.”
이 말을 듣던 피식하더니 오기가 가득한 어투로 말했다.
“스승님과 이모백 선생이 마음에 들었던 건 형님의 시입니다. ‘면양정에서 양공을 송별하다, 청주행’과 같은.”
말이 끝나자마자 허신년은, 스승과 이모백을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살짝 떨어뜨렸다.
‘면양정에서 양공을 송별하다, 청주행……. 양공……. 그런 거였구나…….’
오만하기 그지없는 데다 독설을 꺼리지 않는 허신년의 성격을 아는 허칠안은 일부러 허신년의 자존심을 자극해 말을 유도했다.
한편, 허신년의 말을 듣고서야 허칠안은 대유 두 분의 마음을 헤아렸다.
이는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지름길이긴 했다. 왕륜(汪伦)을 보아도 그렇다. 이백(李白)에게 잘 보이더니, 오늘날까지도 이름이 전해지지 않았는가.
이를 통해 내린 결론이란, 잘 보이는 데에도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
고대에서 남에게 잘 보인 사례, 벗에게 잘 보여서 역사에 이름을 길이 남겼다.
현대에서 남에게 잘 보인 사례, 여신에게 잘 보이려다가 빈털터리가 됐다.
고대를 숭상하고 현대를 비하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운록서원 출신의 벼슬길이란 험난하기 그지없었다.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없으니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란 도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럴수록 허칠안의 뛰어난 작시 재능이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이 노인네들 심보가 영…….’
허칠안은 심기가 살짝 불편해졌다. 이 두 사람이 자신을 제자로 삼고 싶었던 것은 늠름한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어서가 아닌 듯했다.
자신의 시가 탐나서였다.
대유 두 분이 얼굴에 철판을 깐 모양이었다. 얼굴에 머금은 웃음이 사라지지가 않았다.
“선생들의 관심에, 칠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최근 들어 영감이 생겨 시 몇 수를 머릿속에 그려두고는 있으나, 발등에 떨어진 급한 불부터 끄고 다시 두 분을 찾아뵙겠습니다.”
‘신년보다는 사려 깊은 친구로군…….’
안도의 한숨을 쉬던 이모백이 더 환한 웃음을 보였다.
기어이 장진과 겨루어 제자를 뺏는다고 하더라도, 허신년과의 관계로 승산이 적었다.
‘허칠안, 말 하나는 끝내주게 잘하는 친구구먼.’
“기왕 이렇게 된 거, 우리 둘은 운록서원에서 자네를 기다리고 있겠네.”
말을 마친 장진이 허신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신년아, 몸을 다스리려면 우선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생각을 틔운지도 일 년이 다 돼 가는데 여전히 수신경에 이르지 못하고 있잖니……. 음, 집에 돌아가서 성인어록을 삼백 번 초록하여 일순 후에 내게 가져오너라.”
허신년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듯 어안이 벙벙해졌다.
“노부의 한 보는, 삼십 장이네.”
이렇게 말을 하곤 몸을 돌리던 장진이 정말 한 보를 내딛자, 정말 그림자도 보이지 않게 사라졌다.
이에 이모백이 뒤질세라 자신의 묘기를 뽐냈다. 그가 발끝으로 자신의 주위에 원을 그리더니 허칠안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삼 촌(寸)이내, 이곳을 떠나 성문에 도착할 걸세.”
이어 그 또한 갑자기 사라졌다.
눈이 휘둥그레진 허칠안이 물었다.
“신년, 이 두 분 무슨 품계야?”
아직 성인어록을 삼백 번 초록해야 한다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허신년은 그저 넋이 나간 채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옆에 있던 허평지가 대신 말했다.
“내 정확하진 않지만 예전에 듣기론 최소 유가 오품, 덕행이라 하더구나. 아닐 수도 있다.”
그러고는 성 밖에서 본 광경을 조카에게 말해주었다.
‘어떤 허세든 내 입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모든 것이 현실로 가능해진다고?’
이에 허칠안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자신을 자극해 말을 유도해낸 허칠안이 얄미워진 허신년은 한숨을 푹 쉬더니 설명을 더했다.
“덕행경은 사람의 행동거지를 규범화하고 언어로 타인을 조종할 수 있습니다. 이 품계의 가장 핵심적인 능력은 언출법수(*言出法随: 입으로 나간 말에 의해 술법이 실현됨)입니다. 일정한 정도에서 사물의 규칙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이로 인해 이 경지에 별명이 하나 있습니다. ‘이문난법(*以文乱法: 학문으로 법을 혼란시킨다)’이라고. 물론 모든 덕행경의 사람들이 방금 전 두 분처럼 해낼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허신년의 설명은 두 무부의 혼을 쏙 빼갔다.
“각 수련체계에는 모두 신비한 능력이 숨어있구나. 무부만 그저 싸움박질 잘하는 게 다지.”
‘그래서 무식하게 힘만 세다고 하지요…….’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가는 매를 맞을 수도 있었기에 허신년은 그저 생각만 했다.
이때 허신년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허칠안을 발견했다.
“동생…….”
“네?”
“이 형님이 평일에 너한테 잘해줬잖아.”
“말을 꺼내기 전에, 우선 자신의 생각을 양심에 비춰보는 게 어떨까요?”
“형님이 부탁 하나 있는데…….”
“……. 말해보세요.”
“동생이 덕행경에 이르게 된다면, 약속 하나 해줘.”
“……. 뭘요?”
“이 형님에게도 초선(貂蝉)을 내어 달라고!”
“이런 저질 인간! 흥!”
옷소매를 뿌리친 허신년이 홱 돌아서더니 가버렸다.
조카의 말을 듣던 허평지는 깊은 사색에 빠졌다.
* * *
허칠안은 사천감에 다녀와야 했다. 그리고 허평지 부자는 장락현아로 출발했다. 허평지가 장락현아를 떠날 때, 딸에게 장락현아 편청에서 기다리라고 분부했기 때문이었다.
허칠안은 경성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관성루에 처음 와본지라, 흥미진진한 눈길로 이곳저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관성루에 와본 적이 있나?”
송경이 물었다.
“처음 와봅니다.”
“자네 표정을 보니, 놀라지 않은 것 같아서.”
송경이 허칠안의 눈빛에서 본 것은, ‘평범하기 그지없구나’란 감상이었다.
처음 관성루를 본 사람 치고 웅장한 건물에 놀라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관성루의 기초만 하더라도, 일반 집의 두 배 높이에 달했다. 기둥은 황궁의 판룡주(盘龙柱)보다 몇 배나 더 굵었다. 게다가 벽돌은 사람의 신장보다 더 높았다.
이 건물을 짓는 데에 소모한 인력, 물력, 재력은 대봉 황조 일 년 세금의 삼분의 일에 해당했다.
이보다 더 높고 웅장한 건물을 지을 사람은 아마 없을 터였다.
사천감 연금술사들과 공부(工部)가 함께, 설계와 건설을 합쳐 12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지은 대작으로써 천하 유일이었다.
‘전생에 고층건물을 너무 많이 보았는지라…….’
허칠안이 웃으며 말했다.
“제 숙부가 저랑 늘 하는 말입니다. 제가 어린 시절부터 남다르게 침착했다고. 눈앞에서 산이 무너져 내린다 해도, 눈 한 번 깜짝하지 않을 것 같다고 말입니다. 아마 이런 기질은 타고난 것 같습니다.”
이에 송경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래, 이런 기질만이 나와 일을 도모할 수 있지.”
이때 허칠안의 눈에 상대방의 거무스름한 눈가가 들어왔다.
‘말실수한 것 같다.’
* * *
허칠안은 관성루 칠층에서 이미 안면을 튼 저채미를 만났다. 담황색의 치마를 입은 그녀는 탁자 옆에 앉아있었다. 탁자 위에는 빛깔 좋은 음식들이 쫙 깔려 있었다.
“어째서 또 일을 저지른 거냐?”
저채미가 허칠안을 힐끗 보더니 입이 미어지도록 음식을 넣고는 웅얼웅얼 물었다.
“조금 전에, 관성루에 계시지 않았던 겁니까?”
허칠안은 송경에게서 일의 경과를 들었다.
“장공주한테 가서 돈을 좀 모아왔지.”
저채미가 답했다.
마침 배가 고팠던 허칠안은 친한 척하면서 탁자 앞에 앉더니, 닭다리 하나를 쥐려 손을 내밀었다.
저채미가 허칠안이 내민 손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커다란 눈에는 경계가 삼엄했다.
“밥을 안 먹었어?”
“네.”
“송 사형, 이 자를 데려가서 밥을 먹이고 다시 데려오세요.”
‘다 큰 허영음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허칠안은 욕이 튀어나갈 뻔한 입을 꾹 다물었다.
“어쩌다 주씨랑 싸우게 된 거야?”
열심히 먹는 데만 집중하던 저채미가 갑자기 물음을 던졌다.
“동생을 데리고 거리를 거니는데, 주씨가 동생의 미모를 탐냈습니다.”
“동생이 예뻐?”
“채미 소저랑 비길 수 있는 미모죠.”
“그러면 쉽게 만나 볼 수 없는 빼어난 미모인 게 틀림없겠군.”
허칠안은 머리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벽에 뚫린 기공을 통해 들어온 햇빛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건강함과 생기를 뿜어냈다.
크고도 동그란 살구 모양의 눈은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을 방불케 했다.
‘전생이었다면 이 미모는 나와 그야말로 천작지합(*天作之合: 하늘이 맺어준 배필)이었을 텐데.’
“세은 사건은 이미 마무리 되었는데. 누가 네 숙부를 눈속임하고 세은을 갈아치웠는지 알아?”
저채미가 손가락을 빨면서 말을 이었다.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허칠안이 머리를 절레절레하면서 답했다.
저채미가 고개를 한번 들어 허칠안을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금 고개를 떨어뜨려 바삭바삭하게 구워진 오리 구이를 먹으며 말을 이었다.
“어도위 천호 육창지(陆淐之)와, 호부 주사(主事) 정신(郑新)이야.”
“그래서요?”
허칠안이 눈썹을 치켜들었다.
“호부시랑 주현평(周显平)이 그들의 뒷심이라고 들었어.”
‘이런 젠장……. 욕 나간다.’
번개 한 줄기가 머리를 내리치는 것만 같았다. 삽시에 많은 의혹들이 풀렸다.
‘그래서 이름 석 자를 듣자마자 죽이려는 마음이 생겼구나. 제 아비의 일을 망쳤다고. 복수하려고 그랬던 거야. 어쩌면 오늘 발생한 일도 그가 오랫동안 계획했을지도…….’
주 시랑의 관저는 내성에 있어, 허씨 집안과는 거리가 엄청 멀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허부 부근에서 돌아다녔다니!
일부러 허씨 집안 부근에서 배회하지 않고서야 그럴 수 없었다.
‘주씨가 내 뒷조사를 했으면 영월이의 얼굴을 모를 수가 없지. 양가 여인을 괴롭히는 척하면서 사실상 나를 자극해 죽일 구실을 찾으려는 거였구나.’
허칠안은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