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자고로 나쁜 놈들이 더 날뛰더라
그렇게 자옥은 허신년의 손에 들어갔다. 양공은 득의만면으로 무리와 작별하고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한마디 남겼다.
“이렇게 재능 있는 친구가 매몰되어서는 안 되네. 순정(纯靖), 근언(谨言), 자네들 생각은 어떠한가?”
두 명의 대유는 못 들었는지 아니면 못 들은 척하는 건지, 잠자코 있다가 양공과 작별했다. 마차가 멀어지자 이모백이 허신년의 손을 잡아 한쪽으로 끌고 가서 말을 꺼냈다.
“신년아, 갑자기 제자를 삼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구나. 마침 오늘 아무 일 없는데 같이 가서 네 형님을 만나 보자꾸나.”
이에 대경실색하던 장진이 다급히 말했다.
“신년아, 형님과 함께 내 제자가 된다면, 가문의 미담이 되지 않겠느냐.”
시를 쓰든 안 쓰든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중요한 인재가 매몰되는 게 아까울 뿐이었다.
후세에 길이 전해질 <나의 스승 장진>이란 시를 얻어도 물론 좋은 일이지만 말이다.
이에 이모백이 말했다.
“병법은 주류가 아니다. 모름지기 학자란, 우선 경서의 뜻을 익히고, 책론에 능해야 하며, 심신을 닦아 집을 다스려야 하느니라.”
“허허, 바둑이 그럼 주류겠소? 아직도 위연에게 졌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다니. 위연과 바둑을 두어 이긴 적이 없잖소.”
장진이 반격에 나섰다.
“이 노인네야! 입 닥치게! 내 앞에서 위연을 거론하지 마시오. 내가 워낙에 인재를 아끼는지라, 이 학생을 제자로 받고야 말겠으니.”
“이런 망할. 그게 인재를 아끼는 것이오? 시적인 재능을 탐내는 거지.”
“후안무치한 노인네. 오늘 내 호연정기(浩然正气)로 한 번 혼나야겠네.”
“쳇! 내가 가만있을 줄 아는가?”
허신년은 이 모습을 보면서 머리가 쑤셔오는 것을 느꼈다.
멀리에서 지켜보던 학생들도 대경실색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얼굴이 빨개지도록 싸우는 대유 두 분은 심지어 손까지 올릴 기세였던 것이다.
* * *
십일월 말의 어느 아침, 정원으로 나가본 허칠안은 정원에 있던 물항아리에 얇은 얼음이 깔린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맘때가 되면 경성의 온도가 영하로 내려가는구먼.’
대봉 황조는 구주(九州) 중원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다면 경성 기후는 온대 대륙성 계절풍 기후에 속했다.
겨울에 난방이 없으면 견뎌내기 엄청 힘들었다.
“이 시대의 겨울, 뼛속까지 시린 거야 두말하면 잔소리지.”
허칠안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수학˙물리˙화학 성적이 안 좋았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세 개 과목의 성적이 좋았더라면 기초건설이 낙후하고 물자가 궁핍한 이 시대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백성들의 생활에도 많은 편리를 가져다 줄 수 있었겠지.’
* * *
해가 중천에 걸렸다. 수려한 열여섯 소녀가 다섯 살 어린 동생의 손을 잡고 북적이는 거리를 거닐었다. 초롱초롱한 눈은 쉴 틈 없이 굴러다녔고, 조각한 것 같이 어여쁜 입술에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허영월은 담벽색의 비단옷을 차려 입은 채였다. 조화롭게 뻗어 나온 덩굴이 소맷부리와 옷깃에서 눈부시게 꽃을 활짝 피웠다.
게다가 널찍한 옷소매가 찰랑찰랑 흔들리니,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가 따로 없었다.
허칠안의 머릿속에는 저도 모르게 전생에 보았던 고대 복장을 한 미인 형상이 그려졌다. 이 시대 여인들의 의복은 그에 비해 보수적이면서 화려함이 덜한 듯했다.
“그래 이 방법도 괜찮을 것 같은데? 여인들의 의복을 더 화려하고 예쁘게 개량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거지…….”
떠오르는 획기적인 디자인이라고는 망사 스타킹, 나시 스타킹…….
‘잠깐, 멈춰! 멈춰! 그랬다가는 당장 오문(*午门: 자금성 정문)으로 끌려가 참수형을 당할 거다!’
덜커덩덜커덩하며 지나가는 마차, 물건을 멘 방물장수, 종종걸음을 치는 행인, 즐비하게 들어선 상가……. 풍경은 고대 장터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허영월이 가진 사촌 오라버니에 대한 인상은, 한 달 사이 많이 바뀌었다. 예전처럼 그렇게 낯설지가 않았다.
숙모가 미워했던 몸 주인은, 콩알이를 뺀 남은 두 동생을 싫어했다.
오라버니라 부르면서 인사를 건네던 허영월도, 몸 주인에게 외면을 당한 이후로 만나면 머리만 살짝 끄덕이곤 했다.
관계가 많이 개선되었으나 어색함은 여전했다. 어린 여동생의 손을 꼭 잡고 걸어가는 허영월은, 허칠안과의 사이에 두 사람이 설 수 있는 거리를 유지했다.
호기심 많은 콩알이가 여러 번 언니 손을 뿌리치고 물건 구경하러 가려 했지만, 그녀는 있는 힘껏 잡아당기는 언니의 손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했다.
“탕후루, 탕후루…….”
콩알이가 방물장수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이가 다 썩고 싶어?”
허영월은 혼내면서 콩알이를 질질 끌고 가다시피 했다.
큰 일을 한 번 치르고 난 허씨 가문의 금고는 바닥났다. 지난 한 달 동안 집안 모든 사람이 바닥난 재정에 쪼들렸다. 지금 허영월에게는 동생한테 탕후루를 사 줄 동전 하나 없었다.
허칠안은 뒤에서 두 동생을 지켜보았다. 물론 큰 동생을 보는 것이었다. 늘씬한 몸매에 소녀의 풋풋함과 요조함이 묻어났다.
봄에 처음으로 튼 버들눈을 방불케 하는 여리여리한 뒷모습에선, 이 나이 소녀만이 가지고 있는 상큼함과 활력이 엿보였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급해진 콩알이가 엉덩이를 뒤로 빼고 두 발을 땅에서 떼지 않으면서, 언니에게 반항했다.
허영월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짜증이 난 모양이었다.
“오라버니도 은자를 가지고 나오지 않았어. 하지만 금방 생길 거야…….”
허칠안이 작은 동생을 위로하고 있는데, 갑자기 발밑에 딱딱한 물건이 밟혔다. 내려다보니 색깔이 짙은 쇄은자였다.
허리를 굽혀 주우니 한 전이었다.
지난 한 달 동안 은자 한 전을 줍는 확률이 너무 높았다.
허영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은자를 줍다니?!!’
한편, 허칠안은 생각했다.
‘오늘은 기루에 가서 노래를 들을 수 있겠구먼……. 어언 이틀이나 기루를 가지 못했는데.’
돈을 줍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기분 좋아진 허칠안이 쇄은자를 주물럭거리며 방물장수를 향해 걸어갔다.
“탕후루 세 개 주시오.”
“알겠수다.”
까무잡잡한 방물장수가 웃음꽃을 피우며 탕후루 세 개를 뽑아 들었다.
“동전 여섯닢이요.”
잔돈을 찾지 못하자, 그는 옆에 있는 상가에 가서 은자를 동전으로 바꾸어 여섯닢을 남기고 나머지를 노끈으로 꿰매어 허칠안에게 주었다.
대봉의 화폐 체계를 보자면, 은자 한 냥이 팔 전이었고, 이것이 곧 천 닢이었다. 금은 사치품으로서 화폐 체계에 넣지 않았다. 가난한 집안은 한평생 금을 접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잔돈과 탕후루를 건네받은 허칠안은 하나는 입에 넣고 다른 두 개는 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탕후루를 조신하게 받던 허영음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습니다. 오라버니.”
단맛에, 곧 허영음의 두 눈이 반달이 됐다.
머리를 끄덕이던 허칠안이 콩알이를 내려보았다. 이미 작은 입으로 탕후루를 깨물고 있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오라버니 탕후루도 단맛이에요?”
입이 미어지도록 탕후루를 입에 넣은 허영음이 웅얼거렸다.
“왜? 더 먹고 싶어?”
허칠안은 어린애의 마음속 생각을 읽어버렸다.
“앗, 오라버니가 어떻게 알았지?”
깜짝 놀란 허영음은, 자신의 생각마저 읽어버린 오라버니를 우러러 보았다.
너털웃음을 짓던 허칠안이 입을 열었다.
“탕후루 많이 먹으면 입 안에 벌레가 생겨.”
“어떤 벌레요?”
허칠안은 잠깐 생각해보더니 벌레에 대한 묘사를 시작했다.
“그 있잖아. 흰색에 통통한 몸집. 온몸에 기름이 좌르르한 벌레.”
허칠안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콩알이가 놀란 듯 침을 꼴깍 삼켰다.
허칠안은 공수하면서, 작은 동생에게 탕후루를 바쳤다.
두 동생을 거느리고 거리를 누비던 허칠안의 눈에, 번화한 경성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러나 그는 결코 기쁘지 않았다.
또 은자를 줍게 된 것이었다.
‘과학적이지가 않아!’
경찰학교 출신인 허칠안은 이렇게 해석하기 어려운 상황에 극도로 민감하였다.
“환생과 연관 있나?”
허칠안은 환생하기 전, 골동품 같은 것을 만진 적이 없었다.
허칠안은 중얼중얼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지금 내 손이, 그럼 금손이란 말인가? 하지만 은자 한 전은 또 웬 말인가? 마침 기루에서 노래를 들을 수 있는 돈이잖아. 매일 기루에 퍼질러 노래를 듣는 게 하늘이 내게 내린 운명인가?”
현재 상황을 보아선 신체에 어떤 문제가 있든지 돈을 줍는 건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허칠안은 출처 모를 운에 대해 경계를 놓지 않았다. 시스템이라면 오히려 받아들이기 쉬울 것이다. 적어도 그가 알고 있는 범위 내의 일이니까.
* * *
거리에 청루가 보였다. ‘계월루’라고 적힌 편액이 눈에 들어왔다. 삼등급 청루였다.
왕 포두의 문화전파 덕분에, 허칠안은 청루에 대해 풍부한 지식을 갖게 되었다.
허칠안은 청루의 마지막 글자를 보고도 등급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일등급과 이등급 청루는 ‘원’, ‘관’, ‘각’으로 끝났고, 삼등급과 사등급 청루는 ‘반’, ‘루’, ‘점’으로 끝났다.
정오도 되지 않은 시각.
이미 문을 열고 영업에 나선 청루 여인들이 화려하게 차려입고 이층에 기대어 앉아 미소를 지으며, 오가는 행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마음에 드는 사람이 지나가면 채색 손수건을 내흔들며 간드러진 소리로 불렀다.
“나리, 올라와 저랑 한 잔 하시지요?”
삼등급 청루라 하더라도, 들어가면 최소 은자 이 전은 술값으로 소비해야 했다.
여인과 잠을 자려면 더 많은 돈이 필요했다. 물론 여인의 조건에 따라 차등이 있었다. 오 육 전 가는 여인이 있는가 하면 한 두 냥 가는 여인도 있었으니까…….
허칠안은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다.
탈탈 털어봤자 자산이, 자산이라고 말하는 것도 웃기지만, 아무튼 고작 몇 냥밖에 안 되었다. 이 층에 비스듬히 걸터앉은 분홍빛 여인들을 보니 저도 모르게 감탄이 흘러나왔다.
“당시년소청삼박, 기마의사교, 만루홍수초(*当时年少青衫薄, 骑马倚斜桥, 满楼红袖招: 소년 당시, 청삼을 날리며 말을 타고 다리에 오르면 모든 여인들이 그 모습에 반했다)…….”
‘이건 뭇 남성들의 꿈이 아닐까?!’
“오라버니, 시적 재능을 함부로 남용하지 마세요.”
허영월이 담담하게 지적했다.
그녀는 마음속에서 허칠안의 시를 다시 그려보고는, 아마 감탄했을 것이다.
‘아버지 말씀이 맞는 것 같아. 큰오라버니가 학자의 길에 들어서야 했어.’
“오라버니, 위에 있는 여인들 너무 고와.”
콩알이가 위를 올려보며 말했다.
“장사하는 사람들이니 의복에 신경을 좀 더 썼을 뿐이야.”
허칠안이 답했다.
“무슨 장사를 하는 거예요?”
“신문을 팔아.”
“뭐요?”
콩알이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청루를 올려보며 자리를 뜨지 않으려 했다.
“오라버니!”
허영월이 소리쳤다. 그녀는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책망하는 눈길로 허칠안을 흘겼다.
허칠안은 머리 돌려 허영월을 쳐다봤다.
‘네가 왜 화를 내? 내가 한 농담의 뜻을 알아 듣기라도 한 거야?’
청루를 지나 계속해서 거리를 걷고 있는데, 콩알이가 갑자기 멈춰 섰다.
어육완자 가게 앞이었다. 어육향에 코가 꿰인 콩알이가 요지부동의 자세를 취하였다.
허영월 또한 가게를 힐끗 쳐다보더니 남몰래 침을 꼴깍 삼켰다. 출옥 후 생활에 쪼들리다 보니 삼 일에 한 번 고기향을 맡는 신세였다.
더욱이 허영월은 한창 키가 클 때라 음식에 대한 수요량이 엄청 많았다.
“기다려, 오라버니가 사줄게.”
크지 않은 가게에 사람들이 줄을 엄청 길게 서 있었다. 동생들을 길옆에서 기다리게 하고, 허칠안이 사람들을 비집고 줄을 섰다.
“큰오라버니 너무 좋아.”
침을 삼키던 콩알이가 언니를 올려보며 말했다.
동생의 손을 잡고 허칠안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허영월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