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반수의 칠률 시에 놀란 대유들
“이번에 내가 운록서원을 위해 길을 열어 초석을 깔겠지만, 서원의 본 모습을 다시 찾으려면 나 혼자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소. 우리 셋이 뜻을 모아야 하기도 하지만, 더욱이 훌륭한 젊은이들이 나와야지.”
이모백과 장진은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장진이 머리를 돌려 정자 밖에 있는 학생들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여기 누가 양공을 위해 시 한 수 읊을 자가 없느냐?”
“시를 읊으면 선물이 있어야지. 아니면 흥이 안 나잖소.”
양공이 자신의 허리춤에서 자옥(紫玉) 하나를 취했다. 자색의 빛이 좌르르 흐르는 자옥에는 신비함이 묻어났다.
“1순위를 차지한 자에게 이 자옥을 선물로 주지.”
정자 밖에 서 있던 학생들의 눈이 반짝반짝거렸다. 양공이 몸에 지니고 다니는 옥패(玉佩)에는 재기(才气)의 세례를 받아 신비함이 묻어났다.
그밖에 양공이 자옥을 선물하는 것에는 또 다른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윗사람이 몸에 지니고 다니는 물품을 아랫사람이나 학생한테 주는 것은, 옥패를 가진 자가 윗사람의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학생, 선생님을 위해 시 한 수 읊어 보겠습니다.”
청색의 유삼(*儒衫: 유생들이 걸치는 옷)을 입고 허리춤에 옥패를 매단 학생이 가슴을 펴고 성큼 나서서 정자 안에 있는 세 명의 이름 높은 유생들에게 공수하며 말했다.
이모백이 웃으며 말했다.
“나의 제자 퇴지(退之)라고 하네. 시에 무척이나 재능이 있는 친구지.”
미소를 머금은 양공이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양공은 주씨인 퇴지라 불리는 학생이 송별시를 읊고 나자, 얼굴이 활짝 피었다. 시가 엄청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좋구나.”
병법대가 장진은 한마디 하고는 더 이상 평가를 하지 않았다. 앞에 앉은 대유(大儒) 모두 시에는 그보다 재능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좋은 첫인상이 결코 좋은 결말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이어지는 문장은 그야말로 용머리에 뱀꼬리라 형용할 수 있었다.
그 후 읊은 시들은 그저 합격 수준에 이르렀다.
이러한 광경에 이모백이 한탄을 늘어놓았다.
“국자감이 성인을 위해 전적(*典籍: 중요한 문헌)을 다시 모으고 난 뒤, 천하 서생 모두 고전에만 얽매여 시나 문장을 썼는데, 시간이 오래 되니 시나 문장이 틀에 박혀 중심이 없고 너저분해졌네.”
이게 바로 유가가 근대에 와서 쇠약해진 원인이었다. 200년 전으로 돌아가 보면, 유가의 명언은 이랬다.
‘불문(佛門)은 엄청 훌륭하고, 도문도 우수하지. 물론 술사도 좋아. 남다른 길이지만 고사나 박수도 영성은 있어 칭찬할 만해. 음, 거칠고 무식한 무사는 나가 주시오, 여기는 문인들의 집회요. 가는 김에 요족들을 함께 데려가오. 그리고 그 외의 여러분은 미안하지만 아무짝에도 쓸모없소.’
이렇게나 기고만장했던 유가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양공은 깊이 탄식했다.
“됐네. 이런 얘기는 그만합세. 우리 서생들, 누가 또 시를 읊어 보겠는가?”
한참 동안 아무 소리도 없었다.
주퇴지는 자옥이 이미 자신의 것이라는 것마냥, 뜨거운 눈빛으로 자옥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때!
“제가 시 한 수 읊어 보겠습니다.”
허신년이 무리 속에서 빠져나와 정자 앞으로 걸어왔다.
허신년은 일부러 지금까지 침묵을 지켜왔다. 겸손한 그로서는 너무 일찍 좋은 시구를 읊어 함께 공부하는 서생들을 난감하게 하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과거 주퇴지와 논쟁을 벌였던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 * *
“허신년, 제 학생이오. 병법에 정통한 유망한 친구지요.”
병법대가 장진이 소개를 했다. 속으로는 한마디 덧붙였다.
‘시사에는 별 재능이 없습니다만.’
장진은 앞에 나선 허신년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시도 쓸 줄 모르는 네가 웬일로?’
자옥이 자신의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주퇴지는 경계의 기색을 보이더니 허신년인 것을 확인하고는 바로 경계를 풀었다.
그저 힐끗 허신년을 쳐다보았다.
여러 해 동안 함께 공부했던지라 속내를 다 안다고 할 수는 없었으나, 적어도 상대방의 장단점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책론에 뛰어난 허신년은 병법에도 조예가 깊었다. 다만 시사엔 재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친구였다.
‘옥패는 내 거야.’
학생들의 시선이 허신년에게 쏠렸다. 무리의 이목을 만끽하던 그가 안하무인인 듯 하늘에 걸린 태양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천리황운백일훈(*千里黄云白日曛: 천 리 석양빛 구름 햇볕을 가리는데).”
대국수 이모백이 머리를 끄덕이면서 긴 수염을 쓸었다. 단순한 경물 묘사지만 드넓은 흉금(胸襟)이 그려지는 시구였다.
“북풍취안설분분(*北风吹雁雪纷纷: 북풍은 기러기에 불고 눈은 바람에 날리네).”
이미 겨울에 들어선 절기. 아직 눈이 내리지 않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내릴 것이기에 지나친 묘사는 아니었다.
황혼이 드리운 시각, 눈앞에는 함박눈이 흩날리고, 귓전에는 북풍이 울부짖으며, 저 먼 하늘에는 무리에서 떨어진 기러기가 날아가고 있는 장면이 그려졌다.
훌륭한 서두였다. 송별하는 목적에 걸맞은 운을 뗐다.
이에 놀란 장진이 허신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기 학생의 수준으론 이 두 마디를 썼다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고심한 결과일 것이었다. 이 수준으로 마무리한다면 주퇴지와 한번 겨룰 만도 했다.
덕망이 높은 세 명의 대유 중, 시사에 가장 깊은 조예를 지닌 양공은 두 마디의 시를 곱씹어 보더니 기분이 언짢아졌다.
천리, 황혼, 북풍, 고안(*孤雁: 홀로 떨어진 기러기), 큰 눈이 펑펑……. 쓸쓸하고 처량한 장면이 그려졌다.
출사가 아닌 좌천에 가까운 심경을 토한 듯싶었다.
다만 운 하나만은 나무랄 것 없이 훌륭했다.
얼핏 보아 중용의 의미를 보여 권한을 쥐여준 출사인 것 같지만, 국자감(國子監) 출신인 그들이 승승장구하는 그를 지켜보기만 하겠는가? 그가 운록서원을 위해 관아에서 초석을 다질 수 있도록 가만히 두고만 보겠는가?
청주로 가는 이 길은, 사실은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아득한 길이었다.
이때 갑자기 허신년이 두 팔을 활짝 펼쳤다. 따뜻한 햇볕이 준수한 얼굴에 비치니, 그 모습이 꼭 흠 하나 없는 옥같이 아름다웠다.
팔을 움직이던 허신년이 양공과 눈을 마주치며 힘찬 목소리로 마지막 두 마디를 읊었다.
“막수전로무지기(*莫愁前路无知己: 가는 길에 아는 이 없다고 근심하지 말게나). 천하수인불식군(*天下谁人不识君: 천하에 그대 누가 모르겠는가).”
정자 안팎이 모두 조용해졌다.
순간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몸에 닭살이 오도도 돋아났다.
주퇴지가 뻣뻣한 고개를 돌려, 불굴의 의지를 보이는 허신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막수전로무지기, 천하수인불식군.”
흥분한 이모백이 박수를 쳤다.
“최고로군!”
처음 두 마디는 처량한 분위기를 자아냈지만, 뒤이은 두 마디는 반전을 보여 마음이 확 트이며 용기를 북돋아 줬다.
어두운 기색의 장진이 허신년을 바라보면서 침묵했다.
양공은 아직도 칠언절구의 뜻에 깊이 잠겨 빠져나오지 못했다.
“훌륭한 시야, 훌륭한 시…….”
그가 중얼중얼거렸다.
“어째서 반수(半首)인 것이냐?”
계속하여 읊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 허신년을 보고는, 병법대가 장진이 궁금함을 못 이겨 물었다.
허신년이 입을 삐죽거리더니 대답했다.
“이 시는 반수(半首)밖에 없습니다.”
‘반수(半首)밖에?!’
현장에 있던 서생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은 이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시를 절반 쓰다 마는 것이 어디 있단 말인가?
“괜찮다, 괜찮아. 반수로도 충분히 놀라워.”
양공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활짝 웃으며 물었다.
“허신년, 이 시의 제목은 무엇이냐?”
“없습니다!”
허신년은 고고함을 유지했다. 그에겐 이를 어찌 해석할 방도가 없었다. 고고한 자태를 고수해야만 더 이상 캐묻지 않을 것이다.
“그래, 그래!”
양공은 오히려 더 크게 웃음을 짓더니 말을 이었다.
“이 시는 나를 위한 송별시가 맞느냐?”
허신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노부(老夫)가 지어 줘도 되겠느냐?”
양공의 마음을 읽은 대국수 이모백과, 병법대가 장진은 배 아파했다.
“그럼 <면양정에서 양공을 송별하다-청주행>은 어떠하냐?”
“네.”
고개를 빳빳이 든 허신년이 한마디로 답했다. 그는 자신의 어투에 공경의 태도가 전혀 엿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하자, 급히 한마디 덧붙였다.
“선생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이렇게 염치없는 노인네를 봤나.”
“흥!”
배가 아픈 다른 두 대유가 불만을 토했다.
“이게 바로 하늘이 내려 준 것이지요, 하하하!”
호탕하게 웃던 양공이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나머지 두 사람에게 읍했다.
시가가 쇠약해진 오늘날, 이 시는 반드시 널리 퍼져 유림(儒林)을 뒤흔들어 천하 서생들에 의해 불릴 것이다.
양공의 명성 또한 더욱 자자하게 될 터였다. 그가 지어 준 시구의 제목은, 사실상 그의 이름과 시를 묶어 놓은 것이었다.
이 시가 대대손손 전해진다면 양공 또한 만고에 이름을 남길 것이었다.
이렇게 훌륭한 시는 대대손손 전해질 가능성이 컸다.
이를 지켜보는 두 대유가 염치없다고 여기는 것은, 허신년이 학생 신분으로 양공에게 준 시에는, 그의 ‘자’ 혹은 ‘호’로 이름을 대체해야지, 이름이 직접 쓰여서는 안 되었다. 동년배거나 친한 벗만이 이름을 시에 직접 써넣을 수 있었다.
이놈의 노인네가 이름을 날리기 위해, 염치고 뭐고 뒷전으로 둔 것이었다.
서생의 가장 큰 꿈이 무엇이겠는가? 수신치국평천하(*修身治国平天下: 몸과 마음을 닦고 나라를 다스려 천하를 평정하다)? 아니다. 이것은 이상이지 꿈이 아니었다.
천백여 년 이래, 서생들의 가장 큰 꿈 중 하나는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것이었다!
스승인 장진은, 자신의 학생이 스스로 지은 것이 아님을 인지했지만 이를 폭로하지 않았다. 자신의 학생이 양공의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어쨌든 좋은 일이었다. 그저 그는 스승으로서 기쁠 뿐이었다.
서생들의 들끓는 의논에 쉼표를 찍듯, 허신년이 헛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스승님, 그리고 두 분 선생님. 이 시는 제가 아니라 지은이가 따로 있습니다.”
떠들썩하던 의논이 삽시에 멈췄다.
대유 세 명의 표정은 각기 달랐다. 장진은 ‘그럼 그렇지.’의 기색이었다.
이모백은 꽤나 놀란 안색이었다.
양공의 반응이 가장 격렬했다. 그가 앞으로 두 발자국 내딛더니 다급하게 캐물었다.
“누구? 우리 서원의 서생이더냐? 이 자리에 있느냐?”
그의 눈길이 허신년을 스쳐 지나가 자리에 있는 서생들 사이를 헤맸다.
“저희 집안 형님이십니다.”
허신년은 턱을 약간 들어 고고한 자태를 유지했다.
침묵하던 서생들 사이에서 또다시 소란이 일었다.
“허신년의 형님?”
“어디에서 학문을 닦고 있지? 어째서 예전에는 이런 사람을 들어 본 적 없단 말인가?”
“내 기억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허신년은 장자인데?”
“신년, 네 형님 존명이 뭐야? 스승은 누구고? 말을 좀 해 봐. 이런 시적 자질이 훌륭한 인재를 모르고 있었다니…….”
서생들이 앞다퉈 허신년에게 물었다.
세 명의 대유도 허신년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무식한 아버지 영향을 받아 무식한 형님을 입 밖에…….’
뚫어져라 쳐다보는 서생들을 인식한 허신년은, 자신이 큰 잘못을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서생들은 이 세상에 학문을 닦는 것 외에는 모두 보잘것없다고 여겼다. 그것은 허신년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운록서원의 서생이라는 수식어는, 더 큰 자부심을 불러일으켰다.
만약 허칠안이 학문에 몸 담근 사람이라면, 그들은 그를 존경하고 흠모할 것이다. 하지만 일개 아역 나부랭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부정적인 정서가 그들의 생각을 사로잡을 게 분명했다.
아역마저 이렇게 절세의 칠률 시를 지을 수 있다면, 그들의 체면을 어디에 둘 수 있겠는가?
허신년은 얼굴에 철판을 깔고 말을 이었다.
“형님의 소속은…… 운록서원도 아니고 국자감(國子監)도 아닙니다. 형님께선 집에서 고전 연구에 고심하는, 공명에 추호의 관심도 없는 성정의 소유자입니다.”
남다른 기백에 순식간에 운록서원 서생들의 본보기와 존경의 대상이 되어 버린 허칠안……. 서생들 모두 그를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