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허칠안의 일기
“올해는 경자년, 병술월(丙戌月), 갑오일(甲午日)…….”
예전 같았으면 몰랐을 법도 한데, 몸 주인의 기억이 있어 다행이었다.
추측에 의하면 오늘은 아마 쥐의 해, 양력 10월 8일이었다.
‘음……. 나도 일기를 써야지.’
허평지의 말에 틀린 거 하나 없었다.
‘나도 인생을 좀 다르게 살아야 해.’
개똥 같은 사회에서 너무 높이 오르는 것은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재산을 몰수당하는 대관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가장 편하고도 안전한 생활을 하는가 한 번 연구해 봤더니, 그 결과는 중산층의 사람이었다.
그들은 일반인보다는 풍족하게 살면서도, 윗 계급의 싸움에 말려들지 않았다. 평소 약간의 손해를 참작하더라도 이 계층의 삶이 가장 편하고 안전했다.
[10월 19일, 날씨 흐림. 반드시 돈이 있어야 한다. 이 세계에서 은보다 믿음직스러운 것이 금이다. 상인은 지위가 낮지만,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다. 며칠 지나서 포졸을 그만두려 한다. 한 달에 은 두 냥에 쌀 한 섬 받고서야, 언제 교방사(教坊司)에 가서 아름다운 여인과 밤을 보내겠는가.]
[10월 20일, 날씨 흐림. 포졸을 그만두려는 계획을 미루었다. 사업을 일구고 나서 그만두어야지. 오늘 동료가 패표(*牌票: 명령 집행 시 제시하는 공문)를 가지고 상인을 갈취하는 모습을 보니 영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 이게 이 세계의 본모습이다. 예전의 나였으면, 진작 앞에 나서서 꾸짖었을 것이다. 하지만 생활에 치여 까칠한 성미가 다 닳아 떨어져 나갔다. 아무것도 바꿀 수 없을 때에는 침묵하자. 그밖에 오늘 관아에서 은자 한 전을 주웠다.]
[10월 21일, 날씨 맑음. 오늘 왕 포두가 우리를 데리고 기루에 갔다. 기루에 대한 나의 인상이 바뀌었다. 노래도 들을 수 있고 극도 볼 수 있는, 그야말로 영혼의 안식처였다. 연정경지에 있는 나로서는 동정을 잃어서는 안 된다. 슬펐다. 한참을 보아도 숙모보다 더 고운 여인을 발견하지 못했다. 숙모의 미모를 논하자면 풍만하면서도 화려하지만, 결코 양갓집 부인의 단정함이 빠지지 않는다. 기루 여인들은 다 너무 경박하다.
기루에서 은자 한 전을 주웠다. 마침 노래 듣고, 음식 먹은 값을 치를 수 있었다. 땡잡았다.]
[10월 22일, 기루에서 노래 들음.]
[10월 23일, 기루에서 노래 들음.]
[10월 24일, 기루에서 노래를 듣고 있는데, 왕 포두가 뭐가 그리 즐겁냐고 물었다. 대가 지불 없이 눈으로 즐기는 것이 기뻤다.]
[10월 25일, 허칠안아, 허칠안! 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 더 이상 이렇게 지낼 수 없어. 너 목표를 잊었니?]
[10월 26일. 기루에서 노래 들음.]
[10월 27일, 기루에서 노래 들음. 오늘은 은자를 못 주웠다. 호주머니에서 한 전을 꺼내 지불했다. 퉷! 난잡하기 그지없는 곳. 다시는 안 올 거다.]
[10월 28일, 이 세계에는 화약도 있고 화통도 있다. 심지어 조각(*皂角: 비누)도 있는데, 효과가 엄청 좋다. 그렇게 비누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래, 유리!
유리를 만들 수 있어. 고대인들은 유리를 본 적 없을 거야.]
[10월 29일, 유리를 생각했으니 이제는 출로를 개척해야지. 오늘 집에서 숙부의 비상금을 주웠다. 은자 한 전.]
[10월 30일, 기루에서 노래를 들음.]
[10월 31일, 오늘 또 돈 벌 수 있는 기회를 발견했다. 종이를 개량할 수 있다. 대봉은 문인을 중요시하기에, 더 나은 종이를 만들어 낼 수만 있다면 가장 좋은 것을 먹고, 가장 고운 기녀와 잠 잘 수 있을 거다. 어디 보자. 종이 제조 흐름이…….]
[11월 1일, ……됐어. 종이같이 작은 일에 마음을 두지 말자. 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시멘트 제조.
시멘트의 성분은 이미 알고 있다. 탄산칼슘, 이산화규소, 삼산화알루미늄, 삼산화이철……. 특정 물리와 화학 표준으로 조제한다. 음, 오늘 장터에서 은자 한 전을 주웠다.
이게 웬일이지? 돈을 너무 자주 줍는다. 불안하다.]
[11월 2일, 시멘트 계획이 실패했다. 이론 지식과 실전 능력은 별개의 문제다.]
[11월 3일, 요 며칠 적금을 다 써 버렸다. 숙부한테서 돈을 빌렸다. 숙부도 똑같이 가난한 처지였다. 허신년이 알고 나서 피식하더니, 몇 마디 조롱하고 은자 5냥을 주었다. 독설과 교만을 빼면 이 사촌 남동생도 괜찮은 녀석이다. 천하가 나 허칠안을 용납지 않으니 대봉 황조에 오늘부로 캄캄한 밤이 내리리라……. 이렇게 말하자 얼굴이 귀밑까지 빨개진 사촌 동생이 소매를 뿌리치며 자리를 떴다.
동생아, 네가 내 남동생이 아니었더라면 여주인공 각인데.]
[11월 5일, 금일, 관아의 포졸들이랑 찻집을 찾았는데, 우연히 이야기꾼의 이야기를 듣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재밌게 읽었던 무협지, 4대 명작, 웹소설을 써내면 누워서도 돈을 벌 수 있잖아. 난 정말 총명해. 오늘 또 은자 한 전을 주웠다. 내일 기루에 갈 돈이 생겼다.]
[11월 7일, 내가 너무 순진했지. 소설 하나가 몇십만 자 내지 몇백만 자에 달하는데, 그걸 붓으로 써낸다고? 차라리 탄필(*炭筆: 그림을 그릴 때 쓰는 숯 토막)을 하나 만들어 쓰는 게 더 빠르겠다. 그런데 다만 소설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
환생한 지 일순(*一旬: 열흘)이 다 되어 가는데 아무 일도 성사하지 못했다. 미쳐 버리기 직전이다.]
[11월 8일, 밖에 비가 내린다. 내 마음에도 비가 내린다. 난 분명 많은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돈으로 바꾸자니, 무에서 유를 창조하자니, 뭔가 부족했다. 입시 교육의 허점을 피부로 느낀다. 오늘 숙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관아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 대해 알았다. 게다가 관아에서 포졸로 일할 때 들었던 것과 겪은 것들을 함께 결합해 보면, 이 세상은 나의 상상보다 더 엉망이었다. 탐관오리들의 횡포가 엄청 심각하다. 작은 것을탐하는 관리정도면 훌륭한 사람이었다. 청렴한 관리를 찾아보기란, 기루에서 처녀를 찾아보기보다 어려운 게 현실이다.]
[11월 9일, 구름이 많음. 사천감 채미는 왜 아직도 날 찾아오지 않는 거지? 전설 속의 연금술을 가지고 싶지 않은 거야? 그 소녀의 미모는 우리 영월 동생에 뒤지지 않는다. 귀여움을 물씬 풍기는 아리따운 달걀형 얼굴. 큰 눈망울은 또 어찌나 어여쁜지. 나의 작업 기술에 넘어올 수도 있지 않을까? 이제는 감정(监正)의 제자 출신, 그런 것 따윈 상관없다. 엄동설한같이 꽁꽁 얼어붙은 사회에서 뜨거운 사랑을 갈망할 뿐이다. 얼른 나를찾아와요. 더 이상 애쓰고 싶지 않아요.]
[11월 10일, 소설 계획이 파탄나고 그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두 동생에게 양산백과 축영대(梁山伯与祝英台)의 대략적인 줄거리를 이야기해 주었다. 많은 부분이 생각나지 않아 엉망으로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다 들은 영월 동생이 눈시울을 붉혔다. 영음이는 울지 않았다. 그래서 한 대 때렸더니 우앙! 울음보를 터뜨렸다.]
[11월 11일, 금일, 이 전리와 술을 마셨다. 술기운이 오르자 진북왕(镇北王)의 왕비가 당조 제일 미인이라고 했다. 대체 얼마나 아름다운지 묻자 제대로 형용하지 못했다. 왜냐면 그도 주 현령 나리에게서 들은 거니까.
집에 돌아와 숙부한테 귓속말로 물어보았더니, 숙부가 낯을 붉히며 극히 제한된 자신의 어휘력으로 애써 왕비의 미모를 설명했다. 결론은 가슴이 대박 크다는 거였다. 이 말에 왕비에 대한 기대가 조금 생겼다.]
[11월 12일, 여태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 나. 나를 양육했던 조국을 볼 낯이 없다. 환생자들의 체면을 다 깎아 버렸다.]
[11월 13일, 이 세상에 온 지 한 달 되는 날. 월봉을 받았다. 열심히 일하려는 결심이 섰다. 사업은 나중에 천천히…….]
[11월 14일, 기루에서 노래를 들음.]
* * *
별채.
능형(菱形)의 암기(*暗器: 표창이나 비수 등 몰래 날려 공격할 수 있는 무기류를 통칭함)가 말뚝 중심에 꽂혔다.
지붕에 서 있던 허칠안이, 조준도 하지 않고 손이 가는 대로 뿌린 것이었다.
무려 이십 보 거리 밖에 위치한 말뚝이었다.
이것은 허칠안의 암기 투척 기술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운이 따랐을 뿐이었다.
“내 신체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해.”
허칠안이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한 달 연속, 그의 운은 놀라울 정도였다. 은자만 해도 한 냥 이 전을 주웠다. 이것은 월봉의 절반에 가까운 돈이었고, 3인 가족이 절약하여 3개월을 쓸 수 있는 돈이었다.
가장 신기한 것은 매번 동전을 줍는다는 점이었다. 그저 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괴이했다.
누가 봐도 이상했다.
“시스템의 아버지? 어여 나와요. 나랑 숨바꼭질하지 말고.”
허칠안이 떠보았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지난 한 달 동안 그는 끊임없이 시스템을 깨우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시스템은 없었다. 이게 현실이었다.
그럼 신기하다 못해 괴이한 운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어릴 때부터 복권 한 번 당첨 된 적 없는 비추(*非酋: 운이 없는 사람)에서, 오늘날의 유황(*欧皇: 운이 좋은 사람. 게임할 때 많이 사용함)이 될 줄이야.
‘하지만 유황의 수명은 엄청 짧은데…….’
허칠안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단언컨대 몸 주인은 운이 없었다. 그가 운이 좋았다면 숙모가 그를 싫어할 리가 없었다. 아마 조상처럼 모셨을 것이다.
온 집안이 일을 하지 않고 그가 줍는 돈으로 생활하면 될 테니.
“어디에서 오는지도 모르는 재물. 말 못 할 불안이 닥쳐온다…….”
눈빛이 무거워진 허칠안이 한숨을 내쉬면서 중얼거렸다.
“에라이, 그냥 살아가는 수밖에 없지.”
* * *
오늘은 휴일.
허칠안은 일장 높이의 담을 넘어, 허평지 집에 가서 아침을 먹었다.
그가 지내고 있는 별채는 허씨 저택의 노집사가 지내던 곳이라, 본채와 담 하나를 사이 두고 있었다.
집사가 돌아간 후 쭉 비어 있다가, 숙모와 사이가 틀어진 허칠안이 여기서 지내고 있었다.
황소고집이었던 몸 주인은 본래 세 끼 모두 스스로 해 먹었었다.
허나 지금의 허칠안은 몸 주인의 집념에 대가를 지불할 필요가 없었다. 아침을 스스로 해 먹자니 일찍 일어나지 못하고, 나가서 때우자니 돈만 낭비하는 셈이었다.
숙부네에서 아침밥을 얻어먹어 아낀 돈으로 기루에서 노래 듣는 것이 얼마나 현명한 일인가. 그렇게 절약하여 얇은 비단옷을 걸치고 엉덩이를 흔드는 여인들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 * *
흑적색에 옷소매가 널찍한 옷을 입은 숙모는 허칠안이 들어오자 입을 삐쭉거리더니 고개를 숙이고 죽을 마셨다.
숙모는 부잣집 아씨는 아니었지만 부친이 수재라, 엄밀히 말하자면 선비 집안 여인이었다. 어릴 때부터 보고 들은 것이 있어서인지 그나마 사리는 분별할 줄 알았다. 재수탱이라지만 그래도 조카 덕을 보았는지라, 대놓고 사람을 내쫓지는 못하고 그저 눈을 질끈 감았다.
콩알이는 둥근 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상 위에는 그녀의 아침이 놓여 있었다. 고기만두 세 개, 유조(*油条:중국식 튀김빵) 두 개, 반찬 한 접시, 백죽 한 사발.
“큰 오라버니…….”
허영음이 말을 얼버무리면서 허칠안을 불렀다.
“신년이가 안 보이네요.”
허칠안이 물었다.
“방에 들어박혀 시를 쓰고 있단다.”
허평지가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