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화 - 오토마톤과 함께하는 북부 개척! (2)
캐롯은 그 뒤로도 숲을 헤매고 다니는 사람들을 찾아서 밖으로 내보냈다.
다만, 비타의 경우엔 혼자인데다 겁을 잔뜩 먹어서 함께 데리고 나와야 했다.
“무서워요! 혼자 못 가요! 으아앙! 캐롯 같이 가 줘요!”
“그래그래. 한 번쯤 상황을 살피러 돌아가자.”
그렇게 표식을 보면서 숲속을 되돌아 나가는 중에 캐롯은 비타의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화장실 가려고 분명히 지오랑 같이 들어왔었는데, 갑자기 없어져 버렸어요.”
“그랬구나. 그런데 무슨 볼일을 보러 그렇게 깊이 들어갔어?”
얼굴이 새빨갛게 된 비타가 무어라 웅얼거렸는데 캐롯은 잘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하여간 표식을 따라 한참 걸어가니 슬금슬금 빛이 보이고 삼나무 사이로 손을 흔드는 모두가 보였다.
“캐롯! 돌아왔구나!”
“응응, 잘 찾아들 왔네? 그런데 지오, 네 옆에 그건 누구야?”
얼굴에 세로줄이 생긴 모두가 지오에게 달라붙어 있는 여신관을 보았다.
캐롯의 손을 잡고 돌아온 비타가 역정을 냈다.
“지오! 갑자기 없어져서는 그 계집애는 누구야! 세상에 나잖아?!”
비타가 둘,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던 지오는 완전히 당황해 버렸다.
“어, 어으응?”
비타가 하소연했다.
“나, 나는 비타야!”
“내가 비타야!”
“아니야 나야! 이게!”
비타가 양손을 마주 잡고 힘겨루기하는 꼴에 모두가 당황했다.
하지만 밑에서 몸싸움 중인 비타를 번갈아 보던 캐롯만은 기묘한 얼굴이었다.
그러다 주변 경계 중인 다른 오토마톤을 불렀다.
“51호. 네 눈에는 어떻게 보여? 둘 다 비타야?”
“예, 둘 다 여신관 비타로 보입니다.”
호에에에!
캐롯이 놀라운 표정으로 팔짱을 끼는데 아리에테가 나섰다.
“신관이라면 치료나 상태 이상 해제를 쓸 수 있겠지.”
라이트! 라이트!
쌍라이트에서 뿜어진 밝은 빛이 숲을 밝혀 나갔다.
다음으로는 힐과 상태 이상 해제.
하지만 여기서 둘은 같은 소릴 지껄였다.
“다친 사람이나 얼빠진 사람이 필요한데요.”
마족 나미가 낄낄대더니 유유의 팔을 잡아당겼다.
“마침 잘됐군. 이 녀석이 얼빠졌으니 사용해라.”
“뭐야?!”
둘이 티격태격하자 두 비타가 버럭 외쳤다.
“아이 참! 지금 장난칠 때가 아니라고요!”
찌릿 서로를 노려본 비타가 또 목청을 세웠다.
“따라 하지 마!”
“너야말로!”
이 기묘한 상황에 구조된 엘프 생태학자는 오히려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과연 원시림, 이건 정말 멸종한 도플갱어일까요? 탐구욕을 자극하는군요. 정말 도플갱어라면 어디까지 모방할 수 있죠? 원리는? 구조는? 음후후후!”
비타가 서로 손을 붙잡고 질겁했다.
“엘프 아저씨 눈빛이 이상해요!”
“무서워요!”
퍽!
“아악!”
냅다 지오의 곁에 서 있던 비타를 걷어차 쓰러뜨린 캐롯이 도끼를 꺼내 그 머리를 내리찍었다.
“캬아아악!”
워낙 갑작스러워 말리지도 못한 모두에게 끔찍한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깡마른 인간형 생물이었는데 얼굴이 없는 게 아닌가?
그 위에 올라타 있던 캐롯이 빵긋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이젠 어떻게 보여? 나랑 같은 게 보이나? 달걀귀신이 보여?”
모두가 고개를 훙훙 끄덕였다.
아리에테가 물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나?”
“응. 하는 게 재미있어서 잠자코 있었지. 신기하네, 다른 오토마톤 눈은 속이는데 내 눈에만 제대로 보인다는 거지?”
캐롯이 손가락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켰다.
“나만 뭔가 특별한가?”
“마왕님 뿔이나 머리카락 때문 아닐까?”
“마마마! 마왕님의 뿔과 머리칼!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도플갱어를 해부하려고 덤비던 생태학자가 코를 마구 벌렁거렸다. 그의 눈빛은 도무지 엘프라고 하기엔 선을 넘은 상태였다.
마족 유유가 넌더리를 냈다.
“멀끔하니 생겨서 좋게 봤더니 엉망이네. 역시 인간이 제일 나은 거 같아.”
캐롯이 숲을 향해 몸을 휙 돌렸다.
“그런고로! 내 눈이 제일 밝으니 또 들어갔다 와야겠어! 비타! 라이트를 걸어줘.”
다들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비타의 라이트로 번쩍이는 몸이 된 캐롯은 누가 와도 따라가지 말라고 당부한 다음 다시 숲으로 뛰어들었다.
그렇게 숲속을 쏘다니며 나머지 사람을 찾던 캐롯은, 이윽고 뭔가 색다른 곳에 도달했다.
어둡고 깊은 삼나무 숲속, 별안간 한 가닥 빛줄기가 쏟아지는 작은 꽃밭이 드러났다.
“여긴 뭐야? 이 계절에 꽃이라고?”
굵은 삼나무로 둘러싸인 둥그런 꽃밭이 눈길을 끌긴 했으나 지금은 사람부터 찾아야 해서 그만 몸을 돌리려는데 누군가가 불러 세웠다.
“게 섰거라.”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익숙한 얼굴이 손짓하고 있다.
캐롯은 맥이 탁 풀려 버렸다.
“드래곤 메르카바.”
붉은 머리칼을 산발한 14~5세쯤 되는 소녀가 히죽 웃는데 입술이 귀밑까지 찢어져 올라간다.
눈도 드래곤의 그것이 슬쩍 드러났고.
시큰둥해진 캐롯이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그럼 이건 님 짓이네요?”
“그렇다. 이리 오너라.”
용님이 부르는데 이 상황에 도망치기도 그렇다.
가져온 무기가 뭐뭐 있었지?
고대인의 그 무기는 참 끝내 줬는데.
꽃밭 중앙에는 어느새 새하얀 탁자와 의자가 세워졌다.
맞은편에 앉은 메르카바가 손가락을 튕기자 테이블에 장기판이 깔렸다.
“에탕다르 녀석을 데리러 왔다가 네 이야기를 들었지. 여기 일을 망쳐 놓았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화나서 복수하러 오신 거예요?”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음 지은 메르카바가 흥얼거리듯 대답했다.
“나를 진정 화나게 하려면 좀 더 노력해야 할 것이다. 장기를 그리 잘 둔다지? 어떠냐? 이길 때마다 흩어진 친구들을 하나씩 돌려주마.”
“내가 지면요?”
“그러면 네가 가진 것을 하나씩 받겠다.”
의미심장한 메르카바의 시선, 캐롯은 뻔한 클리셰를 알아챘다.
마주 앉은 캐롯은 고민할 틈도 없이 말을 옮겼다. 그러면서 손가락을 들이댔다.
“무르기 없기!”
“물론.”
캐롯이 숲속으로 뛰어들고 1시간 뒤, 갑자기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돌덩이를 껴안은 드워프 광물학자가 나타났다.
그리고 또 10분 후에는 리슐리에가, 다시 30분 후에는 모르핀과 보리스가 동시에 나타났다.
그런데 두 사람의 분위기가 미묘하다.
손을 잡고 나타난 둘을 보고 유유가 휘파람을 불었다.
“뭐야, 어디서 무슨 재미있는 일을 하다 온 거야? 엉?”
“두 사람 기어코!”
비타까지 합심하자 부끄러워진 보리스가 슬그머니 손을 놓으려 했으나 모르핀이 놓아주지 않았다.
보리스의 손을 꽉 잡은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모르핀이 중얼거렸다.
“뭐냐,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왜 갑자기 여기로 떨어진 거지?”
눈에 핏발이 솟은 비타가 소리쳤다.
“그 멀리 떨어진 곳에서 뭘 했는지 어서 말해요!”
“그래! 뭘 했냐!”
철벽 모르핀은 딴청을 피웠다.
“캐롯은 어딜 갔지?”
“크으윽!”
비타와 유유가 그들을 추궁하는 사이 마지막 번쩍임이 나타났다.
츠팟!
그렇게 돌아온 것은 오토마톤 59호, 그는 캐롯이 맡긴 쪽지를 가져왔다.
쪽지의 내용은 간결했다.
이 사태가 드래곤 메르카바의 짓이며 지금 안쪽에 붙들려 있다는 것, 그리고 밖에 도움을 요청하라는 내용이었다.
도끼눈을 뜬 아리에테가 칼을 뽑아 들고 숲으로 뛰어들었다.
“이 사악한 드래곤! 내 당장에!”
“으악! 아리에테!”
“돌아와, 등신아!”
아리에테는 정말로 돌아왔다. 본인의 의지와는 별개로.
뛰어들어 간 기세로 다시 숲에서 달려 나온 그녀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헉?! 분명 안쪽으로 향했었는데?”
리슐리에가 한숨을 쉬었다.
“그 던전에서 있었던 악몽이 떠오르는군요.”
이제 모두는 단장인 아리에테를 보았다.
개인적으로는 어떻게든 구하러 가고 싶은데 단장으로서 해야 할 판단은 그게 아니었다.
결국 아리에테는 철수를 지시했다.
그녀는 울상을 지으며 삼나무 숲을 돌아보았다.
“반드시 데리러 오겠다! 반드시!”
* * *
한편, 드래곤 메르카바를 상대로 장기판을 벌인 캐롯은 연이은 연승으로 동료들을 모두 돌려받고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의 탈출을 걸고 대결을 벌이고 있었다.
치이이이!
장기 말을 옮기던 메르카바가 캐롯의 머리 위를 살폈다.
“착각이 아니라면 네 머리에서 연기가 나는구나.”
“과과과과여여여열 주주중이라라라라. 으고옥!”
언젠가 보이드 자작과의 대결에서 보여준 캐롯의 연산 능력을 크랭크는 미래 연산이라고 이름 붙였다.
말 그대로 상대의 현재로 다음 미래를 계산한다.
이 능력의 단점은 엄청난 발열과 그로 인한 동력 소비.
치트키로 드래곤과의 게임을 몰아세운 캐롯은 대신 동력을 전부 소모해 버리고 말았다.
이이이잉!
꿍-!
마력석 충전을 요청하기 위한 여분의 동력까지 전부 소모한 캐롯이 장기판에 머리를 처박아 버렸다.
다음 수를 기대하던 메르카바는 캐롯의 그 꼴을 보고 심드렁한 표정을 지어 버렸다.
“이건 무슨 일이냐? 이제야 이겨볼 수 있겠다 싶었는데 너무하는군.”
손등으로 턱을 받치고 동력이 떨어진 캐롯을 가만히 지켜보던 메르카바는 묘한 심술 한 가지가 떠올랐다.
“잠깐 쉬었다가 할까?”
히죽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메르카바는 그렇게 혼자서 정원을 나섰다.
다시 돌아온 메르카바는 옷을 갈아입은 상태였다.
그녀는 여전히 엎드려 있는 캐롯을 살펴보고는 그 작은 등에 손가락을 들이댔다.
“나와 어울려 준 답례다.”
이이이잉-!
캐롯의 전신에 붉은 기운이 머무르자 마력 엔진이 다시 활기를 뿜어내며 꼬마 인형을 일깨웠다.
반짝 떠오른 빨간색 유리 눈동자에는 완전 충전 상태를 알리는 별 모양의 무늬가 드러났다.
찡-!
발딱 몸을 일으킨 캐롯이 주변을 살폈다.
“푸하-! 잉?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오억! 장기 도중이었지!”
그러면서 장기판을 들여다보는데 맞은편에는 여전히 메르카바가 앉아 있었다.
“어어? 옷은 또 언제 갈아입었어요?”
“옷차림이야 계절에 따라 바뀌지. 그보다 네 차례다. 어서 두거라.”
기억이 새로 이어진 캐롯은 다시 한 번 미래 연산을 가동, 장기 말을 놓을 자리를 찾았다.
그런데 나 지금 엄청 활력 넘치지 않아? 뭐야 이거? 아까 만해도 마력 엔진 간당간당했는데.
착-!
말을 옮긴 캐롯이 눈을 올려 뜨고 드래곤을 바라보았다.
“나 지금 도무지 질 거 같지 않아요.”
“오호라! 이거 참 건방지구나.”
레드 드래곤 메르카바가 캐롯의 도발에 넘어가 장기 말을 붙잡았다.
수 시간 뒤, 승부는 캐롯의 승리로 끝났다.
“으쟈아! 드래곤을 이겼어! 드래곤을! 으아하하!”
꽃밭을 뒹굴며 신난 캐롯과는 반대로 메르카바는 넋 나간 표정으로 숲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발딱 일어난 캐롯은 이제 참패한 메르카바의 주변을 돌아다니며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내가 이긴 거죠? 맞죠? 그죠? 집에 보내주실 거죠? 명색의 드래곤님이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을 거죠?”
다시 한 번 장기판을 노려보던 메르카바는 결국 패배를 시인했다.
“그래, 약속이다. 가거라. 즐거운 시간이었다.”
“우와-! 나도요! 안녕히 계세욤!”
바로 몸을 돌려 나가려는데 메르카바가 캐롯에게 작은 꾸러미를 던져 주었다.
“선물이다. 가져가거라.”
“이게 뭔데요?”
당장 열어보니 주먹만 한 수정구가 굴러 나왔다.
“잉?”
고개를 드니 삼나무 숲의 정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테이블도, 의자도.
다만, 한 줄기 빛이 떨어지는 꽃밭만이 그대로 그곳에 있었다.
잠자코 꾸러미를 여민 캐롯은 두 팔을 들고 와락 뛰쳐나갔다.
“우오와아아! 드래곤에게 홀린 게야!”
우다다다다다!
다다다다!
다닷!
어두침침한 삼나무 숲에서 뛰쳐나온 캐롯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태양이 작열하는 한여름의 밀림이었다.
“으에엥?! 이게 뭐야!”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캐롯은 논리 충돌을 일으킬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