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8화 - 오토마톤과 함께하는 갈무리! (2)
피아노가 말했다.
“자리를 옮기시죠.”
셋은 마왕의 서재로 자리를 옮겼다.
“오, 여기는 멀쩡하네?”
“네가 그 무기를 조금만 아꼈더라면 이 정도로 누더기 성이 되진 않았을 거다.”
이빨을 슥 드러낸 캐롯이 일반형 몸체를 사용해 키가 약간 작아진 피아노를 가리켰다.
“신들린 녀석을 상대로요? 설마? 한 발이라도 아꼈다간 지금 이렇게 하하호호 못해요?”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차를 우리던 피아노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싸움이 끝난 직후, 의지할 대상을 잃은 마왕은 초 단위로 정신 상태가 피폐해져 가고, 마족들은 여전히 살기등등한 채라 크랭크는 피아노의 소생 작업을 단 1시간 만에 해치웠다.
그렇게 깨어난 피아노를 보고 나서야 마왕은 겨우 안정을 되찾았고, 사태는 그제야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다만 피아노의 소생 작업 전후로 보여준 마왕의 추태는 캐롯이 그녀를 울보 마왕이라고 놀릴 충분한 이유를 제공하였다.
캐롯이 가만히 테이블 맞은편에서 차를 마시는 마왕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 파티에 아리에테라는 여기사가 있거등요? 님 좀 닮은 듯.”
“호오, 나와 닮았다고?”
캐롯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얼굴이 아니라 뭐랄까, 분위기? 하여튼 뭔가가…….”
사실은 의지할 것이 없으면 울어 버리는 울보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캐롯은 마왕의 위신을 생각해 입을 다물어주었다.
“그리고 여기 온 이유 중의 하나! 짜잔! 피아노 몸체 제작사로부터 회신이 왔어요.”
캐롯이 내미는 편지를 읽던 마왕의 얼굴이 밝아졌다.
“된다는 말이냐? 좋군. 잘됐구나.”
“지금도 꽤 괜찮지 않아요? 꼭 옛날 그대로여야 해요?”
편지를 접어 피아노에게 넘겨준 마왕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옛 생각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다. 피아노는 그동안 나를 보필하면서 다른 사천왕과도 자주 충돌했지. 게다가 은퇴 선언을 한 이상, 그 힘은 필요하다.”
“그거 말인데, 정말이죠? 함부로 못 나설 거라는 거.”
뒤통수를 제대로 얻어맞은 마왕은 보복으로 냅다 은퇴를 선언, 이 발언에 모두가 난색을 표현했다.
울보 마왕이 날카로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서로 눈치를 보겠지. 서로 싸워도 좋고, 마왕을 자처하는 녀석이 나서도 좋다. 본보기로 부숴주마.”
“호에에, 마왕님 무셔라. 맞다. 에탕다르는요? 배덕의 에탕다르, 역습의 에탕다르.”
찻잔을 든 마왕이 중얼거렸다.
“고얀 녀석, 아마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겠지. 마왕 자리를 넘볼 정도로 야망이 있는 녀석은 아니었다. 다른 녀석들도 다 한패일 테니 측근도 새로 뽑아야겠군.”
탁자에 올린 팔로 얼굴을 감싼 캐롯이 마왕을 바라보았다.
은퇴 마왕 티르피즈가 캐롯을 가리켰다.
“네 녀석, 마왕군에 들어올 생각은 없느냐?”
뜻하지 않은 초대에 캐롯이 눈을 땡그랗게 뜨더니 빠하하 웃어 버렸다.
“내가요? 마왕군에요? 우와! 마침 마왕님 머리칼이랑 뿔도 얻었으니 딱 좋은데?”
티르피즈도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정중히 거절.
“아쉽구나. 그 무기와 함께라면 상당한 전력이 될 거로 생각했는데.”
“아, 고대인의 마력포? 그거 엘프들에게 뺏겼어요. 지금 이야기 그 사람들에게 들려주지 그래요? 도와줄 텐데.”
“귀가 긴 녀석들하고는 그다지 엮이고 싶지 않구나. 꼬투리를 잡힌 내정 간섭은 사양하련다.”
킥킥 웃던 캐롯이 손가락을 들었다.
“그럼 인형 병기라도 잔뜩 가지고 가야겠네요. 저 피아노 같은.”
고개를 돌린 마왕도 곁에 가만히 서 있는 피아노를 올려다보았다.
그때 뭔가를 눈치챈 캐롯이 발딱 일어나서 마왕을 쳐다보았다.
“아! 잠깐만! 지금 정세 불안 상태의 원시림으로 우릴 끌어들이는 거예요? 완전 심술이네!”
마왕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야 알아챘느냐? 그렇다. 심술이다. 우린 좀 더 서로를 비벼대며 모난 부분을 갈아댈 필요가 있어.”
의심스럽다는 듯 한쪽 눈썹을 곧추세운 캐롯이 얼굴을 쑥 내민다.
“우리 전부?”
“그렇다. 우리 모두 다 함께.”
호숫가의 조약돌처럼 모두가 사이좋게 동글동글.
용사와의 추억을 떠올린 마왕 티르피즈는 그윽한 표정으로 눈앞의 인형 소녀를 바라보았다.
목을 거둬들인 캐롯이 쓴 것을 삼킨 표정을 지었다.
“캬, 역시 마왕. 생각이 비범해.”
마왕은 또 웃음을 터트렸다.
“너는 정말 표정이 풍부하구나. 재미있구나. 인형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야.”
“그런 말 자주 들어요. 피아노는 나 하는 거 잘 보고 배워.”
피아노는 나직하게 대답했다.
“사양하겠습니다.”
“이잉? 아, 맞다. 이거 네 나사 아니니? 저기서 주웠는데.”
“그 놀림은 사천왕 에탕다르에게 한 번 당했습니다. 더는 속지 않습니다.”
“와! 늑대 아저씨 재빠르네. 근데 대체 뭐에 마왕님을 배신했을까? 궁금하지 않아요?”
며칠 보지 못했지만 호탕한 늑대인간은 꽤 기억에 남았다.
마왕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휴전선이 생기자 밖으로 나가지 못한 분쟁은 내부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와 용사는 그걸 억눌러서 막았지. 그랬더니 놀랍게도 인구가 늘기 시작하더군. 유일하게 줄어든 건 죽어야 생기는 언데드뿐이었다.”
말하면서 뭔가 가닥을 잡기 시작한 마왕은 턱을 매만지며 계속 중얼거렸다.
“입은 많은데 먹을 게 적어지기 시작한 게지. 당연한 수순이었다. 더구나 수인족의 영토에는 드래곤 레어가 있어서 사냥감도 적어.”
“아니! 사냥을 못하면 농사라도 지으면 될 일이지! 멍청한 늑대 아저씨네.”
캐롯이 끼어들자 마왕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 맞장구를 쳤다.
“나의 용사도 그렇게 말했었다! 내가 그 멍청한 육식 동물들에게 바깥의 다른 놈들처럼 곡식을 먹으라 식량 개혁안을 제시했는데 거절당했지 뭐냐. 놈들은 아직 기본 수렵 채집에 머물러 있어. 말이 통하지 않아.”
“그것 참, 계몽이 필요한 마족들이네요. 마왕님 힘들겠어요.”
위로받은 마왕은 깊은 수심이 피어오른 얼굴을 두 손으로 덮어 가렸다.
마왕은 그 상태로 중얼거렸다.
“우우우, 그렇단다. 이젠 그만두고 한적한 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지만 용사와의 약속 때문에 버티고 있어. 피아노, 항상 해주던 그걸.”
마왕이 몸을 슬쩍 기울이자 피아노가 그녀를 안아주며 등을 토닥토닥해 주었다.
“고생이 많습니다. 티르피, 힘내세요. 티르피. 할 수 있습니다. 티르피.”
캐롯의 눈이 커졌다.
“오오? 목소리 바뀌지 않았어?”
“용사의 목소리를 흉내 낸 것이다. 과거의 미련에 집착하는 내가 한심하지 않으냐?”
시무룩해진 마왕의 물음이었다.
크랭크는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은 다른 말로 얼버무리는 짓을 잘했다. 캐롯도 그걸 보고 배웠고.
“오오! 용사님 목소리 좋다. 노래도 잘 부르겠네?”
“당연하다. 들어보겠느냐?”
하지만 문제에 봉착했다.
피아노는 제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몸체는 노래를 부를 정도로 폐활량이 크지 않습니다.”
“아쉽네. 이참에 피아노 수준의 자동 인형을 여러 대 만들어 달라고 해야겠네. 사천왕 대용품으로.”
다음으로 캐롯은 그 용사와의 약속이 무어냐고 물었지만 마왕은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럼 에탕다르 동네 근처에 사는 드래곤 이름이라도! 더 자세히는 원시림 내부의 모든 드래곤 분포도가 필요해요!”
“무엇 때문이냐? 드래곤 슬레이어의 피가 끓기라도 하는 게냐?”
마왕이 피식 웃으면서 그 이름을 가르쳐 주었다.
“위치가 알려진 건 메르카바 님의 레어 정도다. 다른 건 그냥 해로운 마수라고 생각하는 게 좋아.”
“잉? 메르카바?”
마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혼쭐을 내주었다는 그 용님이시다.”
“에에? 이젤리아에 있는 거 아니었어요?”
“무슨, 드래곤은 레어가 몇 군데나 된다. 그중 하나가 이젤리아에 있을 뿐이지.”
“아, 별장 같은 거구나.”
“그분은 좀 특이한 분이시지. 의외로 말이 통한단다. 요즘 조용히 계시는 건 아마 네 덕분이겠지.”
신뢰성 없는 마왕의 이야기에서 캐롯의 얼굴이 우거지상이 되었다.
“에에? 의외로 말이 통해요? 이젤리아에서 그런 난리를 부렸는데? 날 보고 수집품에 집어넣겠다고 했는데?”
“분명 너희가 먼저 손을 댔을 거다. 먼저 나설 분이 아니야. 선물이라도 잔뜩 들고 가서 이야기를 해봐라. 좋은 지식을 나눠주실 거야.”
캐롯은 기가 막혔다.
“와! 뭔가 엄청난 고평가를 받고 있지 않아? 드래곤 메르카바 님.”
잠깐 생각에 잠겼던 캐롯은 이제 발딱 일어났다.
“하여튼 이 소식을 어서 주인님에게 전해야 해! 그냥 드래곤이면 그렇구나 싶겠는데! 내게 악감정을 가진 드래곤이라는 게 문제야!”
“그게 아니래도. 그분은 놀이며 장난을 좋아하신다. 지금이라도 통신해 보겠느냐?”
수정구를 찾는 마왕을 보고 캐롯은 기겁했다.
“으갹! 그만둬요!”
질려 버린 캐롯이 호들갑을 떨자 또 한바탕 웃어 버린 마왕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리 때문에 겨울은 여기서 날 것 같으니 자주 들르거라. 쿠키를 구워줄 테니 친구들을 데려와도 된다.”
“우와! 정말요? 아, 그렇지. 편지가 하나 더 있었다.”
좋아라 하던 캐롯이 또 편지를 내밀었는데 대상이 피아노였다.
“나에게 말입니까?”
“그래, 성녀가 보내는 티 타임 초대장이야. 이건 비밀 엄수!”
편지를 펼친 피아노의 곁에서 마왕도 팔짱을 끼고 고개를 기울였다.
오토마톤 피아노만 곁에 있으면 아주 멀쩡해지는 마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럴 거로 생각했다. 성녀 베키가 살아 있었군.”
“인간은 그리 오래 살지 못합니다. 어떻게?”
캐롯이 허리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본인에게 물어보든가. 날짜 적혀 있지? 마침 네 몸체 완성되고 난 뒤네. 추억을 되새김질하기엔 딱 좋겠어. 이제 난 가요!”
짤막한 인사를 남기고 몸을 돌린 캐롯은 저 혼자 서재 문을 열고 이상한 노래를 부르며 마왕성을 내달렸다.
“룰루랄라~! 이번에도~! 재미있는 이야기~! 당신과~! 나의~! 신나는 모험은~! 멈추지 않아요~!”
그로부터 수일 후, 아예 공중 전투용 성으로의 증축, 개축 공사가 한창인 마왕성의 고요한 휴일, 인부 대신 손님들이 모여들었다.
머리에 후드를 쓴 사람들이 마왕성에 올라서서 주변을 살폈다.
새하얀 눈이 깔린 공중 정원에는 커다란 석상 같은 기사가 테이블과 의자를 지키고 서 있었다.
눈밭에 발자국을 남기며 도도도 달려간 사람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오롤?”
트드득.
그저 묵묵히 투구를 돌린 오롤은 울면서 웃고 있는 성녀 베로니카를 내려다보았다.
뒤를 이어 마왕성에서 피아노가 눈을 밟으며 다가왔다.
120년 만에 다시 제작된 특주품 몸체를 이식받은 피아노는 여전히 압도적인 모습이었다.
베로니카는 그를 보고도 몹시 반가워했다.
“피아노!”
“반갑습니다. 신관 베로니카.”
피아노의 손을 맞잡고 함박웃음을 지은 베로니카는 바로 어제 같은 일을 떠올리며 현실과 혼동하고 있었다.
피아노가 그녀를 따라온 사람들을 보았다.
“저들은?”
베로니카가 손짓했다.
“다들 살아 있었어! 노노! 키린!”
그녀의 손짓에 고르곤의 공방에서 만난 노노와 수소문 끝에 개척민 마을을 수호 중이던 키린이 다가왔다.
그렇게 100년 전 용사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키린은 기억을 떠올리지 못했고, 노노 역시 온전치 못한 상태였지만 베로니카는 무척 기뻤다.
모두와 함께 자리에 앉은 그녀는 혼자서 즐겁게 떠들어댔다.
“돌입 전에 제우스가 했던 말 기억해요? 모든 일이 끝나면 마왕성에서 티 타임을 가지자는.”
화로에 작은 주전자를 올리고 차를 준비하던 피아노가 대답했다.
“기억합니다. 당신의 실족 직후 사망했지요. 에스파다는 포로로 잡히고, 유일하게 가이만 살아서 돌아갔습니다.”
피아노가 오토마톤 노노를 바라보았다.
“당신의 마스터는 어떻게 됐습니까?”
얼굴에 어디서 많이 본 소프트 스킨을 바른 노노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가이에 대한 건 함구하기로 약속했기에 베로니카도 입을 다물었다.
차는 피아노가 내려주었다. 뜨거운 홍차에 우유를 섞은 밀크티였다.
그걸 한 모금 마신 베로니카는 곧 콧물을 줄줄 흘리며 훌쩍이기 시작했다.
“후으읍, 나, 나만 남아 버렸어요. 나만…….”
“하지만 100년에 걸쳐 작전은 성공했습니다. 보다시피 마왕성은 함락, 마왕은 나의 관리 아래에 있습니다. 용사들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울지 마십시오.”
“흐우우우!”
피아노의 헛소리가 통할 정도로 베로니카는 어리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계속 훌쩍였다.
이 시무룩한 공기를 보다 못한 어느 두더지가 눈밭을 뚫고 솟아올랐다.
푸확!
“으아아악! 고구마! 고구마! 답답해! 내 주변엔 왜 이렇게 울보들 뿐인 거야! 다들! 이 가여운 성녀에게 관심 좀 줘! 살아만 있으면 어제의 적도 오늘의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캐롯이 빽 소리를 지르자 내내 숨죽여 가며 그들을 지켜보던 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