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화 - 오토마톤과 함께하는 마왕성! (2)
멋들어진 경례를 붙인 캐롯은 내내 포로들 주변을 알짱거리며 식사를 준비하고 그네들의 말 상대가 되어 주었다.
“그래서 오늘은 맥주!”
“맥주? 그게 뭐냐?”
커다란 맥주통을 번쩍 들고 온 캐롯은 나무 상자를 밟고 올라서서 맥주통 뚜껑을 열더니 거기다 시커먼 술병을 들이부었다.
“사탕수수로 만든 다크 럼이에요. 이거 럼 중에선 꽤 비싼 거임. 그리고 레몬!”
레몬은 그냥 손아귀 힘으로 전부 으깨서 털어 넣었다. 그러고는 두 손을 맥주통에 집어넣고 휘휘 저으며 손을 씻더니 마지막으로 유리잔으로 떠서 내밀었다.
“이로써 마리아 여관 비전의 흑맥주 탄생!”
“마리아네 흑맥주가 그런 식으로 만드는 거였어? 흑맥주 아니잖아!”
지켜보던 경비병 하나가 버럭 외치자 캐롯이 눈을 찡긋 윙크했다.
“맥주가 시커먼 색이면 그게 흑맥주지 뭐, 아무렴 어때요?”
술 냄새에 반응한 마족들도 그 충격적인 제조 과정에 너 나 할 것 없이 한마디씩 했다.
“손을 씻어 넣은 걸 마시라고?”
“난 안 먹을 거다!”
캐롯이 히히 웃으며 말했다.
“나는 뭐다? 오토마톤, 내 손은 모양이 손일 뿐, 냄비 속에 넣어 휘젓는 국자와 별 차이 없다는 거죵.”
“그건 궤변이다!”
잠시 후, 드라고니안과 마왕의 아들들은 모두 유리잔을 하나씩 들고 시커먼 유사 흑맥주를 들이키고 있었다.
“크악! 이거 죽이는데!”
“후욱후욱! 힘이 넘친다! 한 잔 더 줘!”
얼큰하게 취해서 떠들어대는 그들을 앞에 둔 캐롯은 또 앞에 쭈그려 앉더니 두 손으로 볼때기를 감싸며 물었다.
“저기저기, 마왕님은 어떤 사람이에요?”
“음, 우리 같은 하급 전사는 뵐 일이 적지. 도련님들은 잘 아시지 않을까?”
고개를 휙 돌린 캐롯은 마왕의 아들들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너희들 엄마는 어떤 사람이야?”
“야, 쟤들에겐 말 높이면서 우리한텐 왜 반말이야?”
캐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쑥 내밀었다.
“뭐랄까…… 너희들은 나랑 정신 연령이 비슷해 보이거덩.”
파하하 웃거나 피식피식거린 그들도 결국 마왕에 대해 늘어놓았다.
술이 들어가니 알딸딸해져 기분이 좋아졌고, 갇혀 있으니 할 일이라고는 입을 놀리는 것뿐이었다.
“고지식한 분이다. 함부로 말도 못 걸지.”
“어릴 때는 그렇게 잘 대해 주셨는데.”
쭈그려 앉은 캐롯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이야기를 듣다가 중얼거렸다.
“마왕님은 친구도 없나 보네. 사천왕인가 하는 사람들하고도 내내 기 싸움 중이라며? 자리 빼앗기지 않으려면 그럴 수도 있지. 그게 아들들을 멀리하는 이유기도 할 테고, 누구 손에 놀아나는지 어떻게 알아?”
그 추리에 마왕의 아들 쉬페르가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맥주를 다 마셔 버린 발칸이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음, 한 명 있다. 마왕님의 친구.”
“야, 그걸 친구라고 해야 해? 측근이라고 불러야지.”
캐롯이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오오! 외톨이 마왕님의 친구! 듣고 싶어! 누구임?”
맥주로 기분이 좋아진 마왕의 아들들이 히히킥킥 웃더니 말했다.
“인간 여자 소개해 주면 알려줄게.”
“거참, 호색한이 따로 없네. 너희들 그거 발정기 끝날 때도 되지 않았어?”
마왕의 아들들이 짓궂게 웃으며 맥주잔을 슥 들었다.
“우린 그런 거 없어, 아버지가 인간이어서. 그래서 이런 위문단에 끌려다니는 거지.”
“아빠가 인간? 우와! 누군데? 마왕을 자빠뜨리다니 대단하잖아? 인류가 낳은 희대의 쾌남아라고!”
“푸흐읍! 으억, 제, 제길! 큭큭!”
그 헛소리는 이제 주변 경계를 맡은 인간 경비병까지 웃겨 버렸다.
푸근한 표정을 지은 쉬페르가 말했다.
그는 맥주잔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너 대단하네. 뭔가 가까이 두고 있으면 주변이 따뜻해져. 분명 공기는 차가운데.”
“헹! 이 몸은 비싼 몸이야! 우리 주인님은 억만금을 줘도 안 판다고? 그래서 희대의 쾌남은 누구야? 외톨이 마왕님의 최측근은 또 누구고? 저녁에 맛난 거 해줄게 살짝만 알려주셈. 나만 알고 있을겡.”
귀여운 몸짓으로 귀를 들이대는 꼴을 보고 킥킥거린 쉬페르가 좀 생각하다가 상관없다는 듯 떠들어댔다.
“마왕성에 쳐들어온 용사, 그게 우리 아버지야.”
* * *
이 사실은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다.
상황실에서 보고를 전해 들은 헤리슨과 간부들은 귀를 의심했다.
캐롯은 이제 음담패설을 늘어놓았다.
“하여튼 용사를 사로잡은 마왕이 그게 여잔 줄 알고 능욕하려다 되레 역관광을 당하고 눈깔에 하트가 제대로 박혀서 제안했다지 뭐야. 나의 씨주머니가 되어라. 용사! 그리하면 싸움을 멈추겠다!”
테이블에 올라서서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은 꼬마 인형을 바라보며 헤리슨이 코를 좀 벌렁거렸다.
“그 용사 에스파다가 남자였다니, 믿을 수가 없구나.”
“더 믿을 수 없는 건 용사 주제에 마왕과 금실이 아주 좋았데요. 그래서 낳은 애들만 60여 명!”
고인 능욕 수준의 폭탄 발언에 모두가 기겁했다.
“60명?!”
“대체 얼마나 해댄 거야?”
캐롯은 신나게 떠들었다.
“예, 게다가 전부 아들!”
“아들이 60명!”
청중의 반응이 아주 찰져서 캐롯은 말하는 재미를 만끽하고 있었다.
조그만 얼굴로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은 캐롯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을 들었다.
“마족은 여초 모계사회다 보니 수컷을 많이 거느린 일족의 발언권이 강해지는데, 하필 그 일족 대표가 아들을 쑴풍쑴풍 낳아대다 보니 지금까지 쭉 마왕직을 유지할 수 있었대요. 에, 임신 기간이 1년쯤이라고 보면 용사님은 죽기 직전까지 쥐어 짜였다고 볼 수 있겠…….”
“으어으흐흠!”
거창하게 헛기침을 한 헤리슨이 캐롯을 제지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그녀의 부관이 거들었다.
“둘의 사이가 좋았다는 대목이 신경 쓰이는군요. 그러면 용사의 오토마톤이 왜 마왕의 곁을 떠나지 않는지 그 이유도 대략 가늠할 수 있겠습니다.”
“오! 뭔데요?”
캐롯이 고개를 내밀자 헤리슨이 되레 질문으로 대답했다.
“캐롯, 너는 크랭크가 만약 죽으면 다음은 누굴 따를 거지?”
“에?”
마왕과 용사의 스캔들 덕에 조금 소란스럽던 모두의 시선이 캐롯에게 향했다.
사람처럼 보이고 사람같이 행동하지만 그래도 캐롯은 사람이 아니다.
평소 생각해 보지도 못한 것인지라 잠깐 입을 다물고 골똘히 생각하던 캐롯은 손가락을 딱 튕기더니 발랄하게 대답했다.
“오! 그래서? 그래서 마왕 곁에 남은 거라고 보는 거예요? 우와!”
보통 오토마톤이면 질문에 대답을 먼저 했을 텐데 캐롯은 한 걸음 더 앞의 상황을 보고 있었다.
캐롯의 차기 주인님 후보를 기대했던 사람들은 실망했지만 헤리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용사가 부탁했거나, 거기서 쌓은 추억을 밑거름 삼아 스스로 마왕을 따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
“어제의 적이 오늘의 주인님? 와, 그거 참 기분 묘하겠네.”
어째서 당시 마왕이 공격을 멈추고 순순히 화평을 받아들였는지, 왜 용사의 오토마톤이 거기 남아 있는지를 두고 분분했던 의견이 정리되는 순간이었다.
헤리슨이 캐롯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했다. 이것저것 좀 더 캐내 봐라.”
“옙! 아, 맞다! 수다쟁이 발칸이 그러던데 마왕의 아들이라고 해도 그다지 큰 입지는 없대요. 4대 마족을 이끄는 수장들이 워낙 막강해서 딱히 마왕의 친자식들이라고 해서 뭘 제 맘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래요. 그래서 이런데 팔려 다니는 거래요.”
“그 4대 마족은 뭐냐?”
캐롯은 이제 손가락을 꼽으며 이야기했다.
“마왕을 배출한 뿔 마족, 지금 밖에서 경비병이랑 꽁냥 대는 언니들이 뿔 마족이고요. 수가 제일 많데요. 그다음 용 마족, 하여간 파충류같이 생긴 애들은 전부 거기 모여 있대요. 그 외에 수 마족, 머리에 동물 귀 달린 수인 퍼리 일족이 있고요.”
모두가 메모하는 걸 잠깐 기다려 준 캐롯이 마지막 종족을 입에 올렸다.
“마지막 언데드, 사실 종족이라고 부르기에도 미묘한데. 하여튼 무력으로선 제일 막강하데요.”
여기에 더해 캐롯은 각 종족 특성과 서로 간의 반목에 대해서도 다 떠들어댔다.
사람들은 전부 우거지상이 되었다.
“언데드 일족은 처음 들었다.”
“우리는 전체 윤곽도 잡지 못했던 건데. 이리도 간단히.”
“제길, 밖의 뿔 마족들은 물어봐도 모른다고 잡아뗐었는데.”
캐롯이 말했다.
“북쪽 마족의 땅은 아주아주 넓대요. 대부분 위험한 원시림이라 써먹질 못할 뿐이지. 저쪽에서 이런 이야기 제대로 아는 건 아마 푸시케 대장뿐이었을 걸요?”
정보를 캐내려고 일부러 그녀와 친하게 지냈던 헤리슨이 혀를 찼다.
“쯧! 역시 대장질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지. 그 자식은 그런 쪽으론 입이 무거웠어.”
헤리슨이 지시를 내렸다.
“땅콩은 계속해서 정보를 캐내. 특히, 그 마왕의 오토마톤에게 집중해라. 원래 우리 편이었으니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분석반은 정보를 정리하고 그걸 바탕으로 앞으로의 전략을 준비하자.”
“예!”
* * *
무려 마왕성 남하 소식은 세간의 화제가 되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리즈넷 왕성에서도 현 상황을 예의 주시했으며, 엘프들은 공중 전함까지 여러 대 보내주었다.
다만 마왕성을 자극할까 봐 가까이 다가오진 않고 아르곤 상공에서 대기 중.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아야 할 휴전선 마을이었건만 지금은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나 정부 관계자들, 염탐하러 온 엘프들까지 모여들어 엄청난 인파를 형성했다.
시장바구니를 든 캐롯이 사람으로 가득한 시장 중앙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소리를 꽥 질렀다.
“왔어! 왔다고! 아하하!”
그 손짓을 따라 고개를 든 사람들이 이마에 손을 올리거나 눈을 가늘게 떴다.
마왕령 저편, 산 능선 사이로 거대한 무언가가 떠내려오고 있었다.
“마왕성이다! 왔어!”
“비상! 마왕성 출현! 전원 대피하라!”
갑작스런 마왕성의 출현에 모두가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캐롯은 그저 웃으며 손을 흔들기 바빴다.
때마침 우중충한 하늘에선 첫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고개를 꺾어 하늘을 올려다본 캐롯은 완전히 감탄해 버렸다.
우아한 마왕성은 첫눈과 함께 완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우와! 어어엄청! 크다! 게다가 로맨틱해! 첫눈을 흩뿌리며 사랑의 국경선을 찾아온 마왕성이라니!”
캐롯뿐만 아니라 휴전선 마을에 모여 있던 사람들 전부가 고개를 쳐들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저것이 마왕성!”
“말도 안되는 크기잖아?”
눈이 풀풀 날리는 뿌연 하늘을 배경으로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부유섬에는 어지간한 왕국의 성 하나가 통째로 올라가 있었다.
그야말로 웅장한 위용.
“뭐랄까, 마왕의 성이라고 하기에 뭔가 시커먼 먹구름을 몰고 다니는 무시무시한 건물이라고만 생각했어요.”
비타의 감상에 춥지도 않으면서 목도리와 귀돌이를 착용한 캐롯도 히히 웃었다.
“나도. 근데 하얀 외벽에 파란 지붕이라니 마왕님 취향 참 소녀스럽네. 너무 예뻐서 여기 그냥 서 있기만 해도 관광 명소로 대박 나겠다.”
캐롯들이야 마냥 신났지만 다른 사람들은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다.
냅다 공격부터 하는 건 아니겠지?
걱정과는 반대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상공에 멈춰 선 마왕성은 한참 후 작은 부유섬을 떨어뜨렸다.
느릿하게 내려온 그것은 부드럽게 지상에 안착했는데 멋진 제복을 차려입은 사절단이 거기서 내려섰다.
과연 마족답게 제복에 솟아난 얼굴들이 인 외의 극을 달리고 있다.
사절단의 단장이라는 자는 놀랍게도 복슬복슬한 갈기 털을 가진 늑대인간이었다.
그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본좌는 마왕군 사천왕의 하나이며 수인 퍼리 일족의 대표를 맡은 에탕다르라고 한다.”
멍청하게 그를 올려다보던 헤리슨은 순간 집에서 키우는 개를 떠올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