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화 - 오토마톤과 함께하는 사랑의 국경선! (4)
눈을 부릅뜬 마뇽이 하악! 거리더니 우악스러운 손아귀로 동료의 목을 잡아챘다.
“그럼 넘어가서 다 씹어 먹을 거닷!”
“마뇽! 마뇽! 야! 이 녀석 말려!”
“켁켁! 이 애정 결핍 고양이가!”
“이거 놔! 놓으라고! 그렇지 않아도 벼르고 있었다냐!”
마주 보이는 마왕군 목책에서 마족들이 자기들끼리 난동을 부리자 성벽에서 경계하던 병사와 모험가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봐, 너희 여친들이 서로 싸운다.”
급하게 망원경을 꺼내 든 청년들이 안타까운 소리를 냈다.
“허억! 마뇽!”
“벨라! 아이고!”
그러다 둘이 서로를 마주하더니 어색하게 웃다가 손을 내밀었다.
“그…… 미안해. 우리 애가 장난이 심해서, 분명히 먼저 놀렸을 거야.”
“아뇨. 저도, 울컥하는 데가 있어서요.”
곁에서 심드렁한 표정으로 망원경을 든 또 다른 사내가 중얼거렸다.
“적군끼리 잘도 논다. 이게 다 겔 그 자식 때문이야. 포주 같은 짓을 하고 앉아서는.”
그러자 오히려 그도 발끈한 누군가에게 멱살을 잡혔다. 마뇽의 남친이라던 청년이었다.
“포! 포포포주라니요! 마뇽은 그런 여자가 아니에요! 어서 취소하세요!”
“어엇? 이 이상성벽털쟁이 자식이? 당장 이거 못 놔!?”
“그게 뭐 어때서요!”
“그만둬! 이 친구들 좀 말려!”
* * *
성벽 위에서 드잡이와 몸싸움이 한창인 그때, 이 소란에 간접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은 경비대 건물의 마당에서 하드 스킨 오토마톤의 몸체를 씻어주고 있었다.
수건을 들고 몸을 편 그가 기분 좋게 웃음 지었다.
“이야, 번쩍번쩍한걸? 어떠냐, 너희들도 기분 좋지?”
사적인 대화는 가능한 지양할 것, 그래서 묵직한 전사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뭐야, 성벽 위에서는 싸움인가? 소란스럽네. 겔, 왁스 가져왔습니다. 이거죠?”
건물 위를 올려다보며 다가온 사내가 들고 온 깡통을 내밀자 까끌까끌한 수염의 겔이 하하 웃으며 그걸 받았다.
“어, 고맙군.”
왁스를 가져다준 정비병이 주변에 서 있는 하드 스킨 오토마톤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바쁜데 괜히 고생하시는 거 아닙니까? 이거 사실은 저희 일인데.”
“아냐, 그냥 내가 좋아서 하는 거야. 이 친구들 덕분에 전선이 유지되는 거니까. 이런 거라도 좀 해주고 싶어서.”
듣고 있던 사내가 가볍게 웃더니 경례를 붙였다.
“하여튼 고맙습니다.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안쪽에서 작은 애들 머리 빗기다 온 거라서요.”
“그래, 어서 가봐. 정비관께 큰 애들 세척 작업 끝냈다고 전해주고.”
“옙.”
긴 겨울을 앞둔 경비대에서는 보급품의 반입뿐만 아니라 개인 무기를 포함한 주력 병기의 정비 작업도 한창이었다.
겔은 바쁜 정비반을 도와 오토마톤들의 세척을 거들고 마무리로 하드 스킨의 갑옷에 왁스로 눈부신 광까지 내놓았다.
“휘유~! 번쩍번쩍하는군. 3일에 걸친 대장정이었구나. 용사의 오토마톤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거야. 그렇지 않아?”
여전히 묵직한 전사들.
이어서 세탁해 놓은 방열 망토를 달고 있는데 성벽 위에서 또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린다.
“저게 뭐야?!”
병사들이 산기슭에서 모습을 드러낸 부유섬을 발견하고는 급히 통신관에 대고 외쳤다.
“긴급 보고! 맞은편 마왕령 상공에 정체불명의 비행선이 출현했습니다!”
상황실, 성벽 이곳저곳에서 비행선 관련 보고가 쏟아지는 가운데 의외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겔의 목소리였다.
-긴급 보고, 정체불명의 비행선은 마족 보급선으로 추정. 오랜만에 보네요. 2년 만인가?
하는 것 없이 노는 것처럼 보여도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은 가끔 약에 쓸 데가 있었다.
그의 말에 분주하던 상황실도 조금 안도를 되찾았다.
잠시 후 성벽 위로 헤리슨이 올라와 망원경을 들었다.
“맞네, 보급선이네. 푸시케가 저번에 말했던 위문단이라는 녀석들인가?”
“위문단요?”
배치된지 얼마 되지 않은, 마뇽의 남자 친구인 청년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그와 드잡이를 벌였던 사내가 으르렁거렸다.
“자식아, 저기는 우리랑 반대야. 남자 마족이 온 거라고, 쓸쓸한 여전사를 위로하러.”
멍청한 얼굴을 했던 청년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하지만 눈앞에는 휴전선 마을 총책임자가 눈을 부릅뜨고 서 있다.
“여, 우리 신병 안색이 나쁜데. 무슨 일이지?”
“어,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들키면 다 죽는다!
청년은 필사의 의지로 그녀의 시선을 받아냈다. 이윽고 고개를 돌린 헤리슨이 다음 지시를 내렸다.
“부관, 성벽 주변으로 무장한 오토마톤을 배치해. 남자 마족은 성깔이 괴팍해. 괜한 시비를 걸지도 몰라.”
그녀는 이어서 통신관을 열고 말했다.
“나 헤리슨이다. 전 경계병은 들어라. 마족 보급선이 왔다. 아마 마족 남자도 같이 왔을 거야. 교전이 발생할 수 있으니 전원 완전 무장 상태로 대비 태세를 갖춰라.”
교전 대비 태세가 발령되자 모두가 긴장했다.
특히나 위문단의 목적을 알게 된 사람들은 속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 되었다.
제길! 저 빨간 선 없어지지 않으려나!
* * *
한편, 접경지 경비대와 마주한 마족 경비대의 거주 구역에서는 야단법석이 일어나고 있었다.
방금 돌아온 쿠핀이 미노를 커다란 항아리 속에 숨기며 말했다.
“미노, 여기 숨어서 엄마가 올 때까지 나오면 안돼. 알겠지?”
“숨바꼭질이야? 나 이거 잘해!”
“그래그래. 절대로 나오면 안된다?”
“응!”
뚜껑까지 덮어준 쿠핀이 서둘러 집 밖으로 나가더니 문도 걸어 잠갔다.
맞은편에서도 비슷한 일을 하고 있었다.
“으에엥! 나도 갈래!”
“안돼! 나오지 말고 있어! 말 들어!”
애를 처음 키워본 마족 엄마는 당황해서 목소리를 높여 버렸다.
쿠핀이 다가갔다.
“오지 말고 애 데리고 숨어 있어. 근무 나갔다고 둘러댈게.”
“어? 그, 그럴까?”
“그래, 빨리 들어가.”
전투 중일 때는 괴물과 같던 마족 여전사들이 애를 안고서는 마냥 울먹였다.
주변을 살핀 쿠핀은 서둘러 마을 광장으로 나가서 보급선에서 내려오는 날개 달린 마족들을 맞이했다.
화려한 제복을 차려입은 남자 마족이 바닥에 내려서자 등의 날개는 그림자처럼 사그라져 버렸다.
모인 사람 중에 그들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다.
최근에 이곳에 배치된 마족 전사가 놀라워했다.
“세상에, 진짜로 마왕님 아들들이 왔잖아?”
“저게 마왕님 아들이라고? 정말?”
“도시에서 우연히 본 적이 있어. 진짜야.”
여자들이 수군대자 괜히 기분이 좋아졌는지 히죽히죽 웃던 남자 마족들은 그녀들의 마을을 구경하다가 저마다 중얼거렸다.
“거주 구역은 어디나 비슷한데 여기는 특히 열악하네.”
“여긴 변방인데다 공물도 보내지 않아서 한동안 보급이 없었거든. 기술자 지원도 없었고.”
듣고 있던 모두가 우거지상이 되었다.
네놈들이 와서 가져가라고! 그 먼 길을 직접 오란 거냐?
보통 같으면 굽신대기 마련인데 하도 오랜만에 온 데다 그동안 갖은 고생을 해댄 덕분에 마왕에 대한 충성심은 옅어지고 되레 반발심만 강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그들을 처음 본 사람은 호기심 어린 눈을 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마왕의 아들들은 머리에 뿔이 없고, 외모만으로는 인간과 똑같이 생겼다.
다만 그 몸에서 피어오르는 묘한 분위기만은 과연 마왕의 자식이라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마왕의 아들들 역시 마왕령 제3경비단의 전사들을 두루 살피더니 신기하다는 표정이었다.
“하하, 뭐야? 우리가 올 줄 알고 미리 예쁘게 꾸미고 있었던 거야? 보기 좋은데?”
“그렇네, 다들 말끔하니 목욕도 제대로 하는가 봐. 오면서 들른 곳은 전부 야생 동물 같은 꼴을 하고 있었는데.”
쿠핀을 선두로 다시 한 번 도끼눈을 떴다.
너희들 보여주려고 머리 빗고 씻은 거 아니거든?!
그들을 호위해 온 자들은 전신에 비늘이 잔뜩 난 종족들로, 얼핏 리자드맨처럼 보였는데 등에 날개가 날려 있었다.
그 날개 달린 도마뱀 인간 중 하나가 푸시케 경비대장을 쳐다보았다.
“나는 마왕군 제24보급선 단장이다. 그대가 제3국경선 경비대장 푸시케인가?”
“그래, 내가 여기 책임자다. 야! 보급을 왜 이제야 가져다줘!”
큰소리로 버럭 외치자 마주한 도마뱀 인간이 쩔쩔매기 시작했고, 구경하던 남자 마족들은 피식피식 웃는다.
따라온 마족 남자 하나가 대신 대답했다.
“우리도 바빠. 어디 올 곳이 여기뿐인 줄 알아?”
뿔 마족 일족은 자존심이 높아서 마왕 정도가 아니면 다들 그냥 반말 일색이다.
그들의 변명을 들은 푸시케가 인상을 구겼다.
“하여튼 뭐 그래, 이제라도 찾아와 준 것만 해도 고맙다. 그래도 좀 빨리 오지 그랬냐. 다들 발정기 지나 버렸다고.”
“뭐? 아깝네, 잔뜩 모아왔는데. 그럼 아쉬운 대로 저쪽 마을에서 인간 여자라도 좀 잡아다 줄 수는 없을까?”
뚜둑, 이 새끼 봐라?
“뭐?”
“응?”
기 싸움이 일어나자 도마뱀 인간이 말렸다.
“도련님, 이곳은 전선이 안정된 곳이라 괜한 마찰을 일으킬 필요가 없습니다.”
“칫! 요즘 왜 이렇게 조용해졌어? 몇 년 전만 해도 다들 지지고 볶고 재미있었잖아?”
이 와중에 코를 붙잡은 녀석 둘은 등에서 날개를 쫙 펼치더니 다시 하늘 위의 부유섬으로 날아올랐다.
“볼일 없으면 난 올라가련다. 여기 냄새 나.”
“나도, 생각 있는 애들은 위로 올라와, 올라올 수 있으면 말이지. 키키키.”
“님 좀 얄미움.”
“에, 그런가? 킥킥.”
둘이서 재잘거리며 위로 휙 날아오르는데 딱히 날개를 퍼덕이는 것 같지도 않다.
그들을 올려보던 마족 경비병 몇이 서둘러 손을 쑥쑥 들었다.
“어, 나, 난 할래!”
“나도! 이건 내 권리야!”
그러자 뒷짐을 지고 기다리던 선한 인상의 남자 마족이 빙그레 웃었다.
“그럼 내가 상대해 줄게. 너희들 집 어디야?”
“저, 저쪽이야.”
“안내해 줘. 너 꽤 귀엽네. 몇 살이지?”
“어, 어어, 137살. 너, 너는?”
“이제 100살쯤 됐을걸? 누나네, 누나.”
붙임성이 좋은 청년이 바싹 달라붙어 팔짱을 끼자 마족 경비병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코를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얼결에 순서를 빼앗긴 동료 마족이 손을 흔들었다.
“야! 다음은 나라고!”
“기다리고 있어. 금방 갈게.”
“어, 그, 금방은 안 보낼 거거든?!”
역시 생전 처음 본 마왕의 아들들인지라 침을 꿀꺽 삼키는 사람도 많았다.
푸시케가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모인 사람들에게 팔을 흔들었다.
“잘됐네. 생각 있는 것들은 서둘러. 그리고 이봐, 보급단장. 빨리 보급 내놔.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거야?”
“재촉하지 마라. 이제 옮길 거다.”
그의 말대로 갑옷을 입은 도마뱀 인간들이 날개를 펴고 상공의 부유섬을 오르내리며 상자를 옮기기 시작했다.
정말 오랜만에 받는 보급인지라 푸시케는 그만 눈물이 날 뻔했다.
그러다 사달이 났다.
“어? 뭐야 이 애는?”
“앗!”
남아 있던 마왕의 아들 곁에 웬 꼬마 마족 소녀가 나타났다.
“우와, 잘생긴 오빠야다.”
모두가 기겁했으나 마왕의 아들은 의외로 다정했다.
쭈그려 앉은 그는 꼬마를 보고 익살스럽게 웃어주었다.
“짜식이 보는 눈은 있어서. 걱정 마라, 난 애들을 좋아해. 얌마. 너 이름 뭐냐? 어? 응? 킁킁, 어엉? 흠흠?”
갑작스레 꼬마 소녀의 정수리에 코를 들이대고 냄새를 맡던 그의 얼굴이 우거지상이 되었다.
마왕의 아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야 이 자식, 인간 냄새가 나잖아?”
그다음 일어난 일은 세상 모든 애 엄마를 기겁하게 만든 짓이었다.
뻥!
무지막지한 발길질에 걷어차인 조그만 아이가 하늘로 붕 떠올라 마을 밖 공터에 떨어져 버렸다.
쿠핀의 눈이 뒤집혔다.
“미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