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화 - 오토마톤과 함께하는 사랑의 국경선! (3)
북쪽의 겨울은 갑자기 다가온다. 그래서 가을이 시작될 때부터 겨우내 먹을 식량부터 난방까지 미리 준비하느라 다들 바쁘다.
아르곤에서 조금 더 북쪽에 있는 휴전선 마을도 그랬다.
쉴 새 없이 마차와 차량이 오고 가며 보급품을 옮겼는데, 그중엔 겨울 기사단의 전용 차량을 끌고 나온 지오와 보리스도 있었다.
겨울 남부 출장까지 시간이 좀 남아서 한가한 사람들이 차량을 이용해 벌이를 나온 참이었다.
“도착했어!”
장갑차량이 마을로 들어서자 하역 작업에 참여한 일꾼들이 달려온다.
벌 떼같이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던 지오와 보리스는 좀 도울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너희들이 끼면 우리 일당이 줄어! 화물 다 빠지면 차나 빼줘!”
“어, 예.”
작년까지만 해도 그들 역시 이걸 했었다.
“운이 좋았어.”
멍하니 선 지오가 그렇게 중얼거리는데 보리스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작업 끝났어. 차 옮기고 밥 먹으러 가자.”
“음.”
한적한 곳에 차량을 옮겨두고, 데려온 캐롯 시리즈에게 경비를 맡겨놓은 둘은 오랜만에 찾아온 휴전선 마을로 들어섰다.
작은 마을이 오늘따라 인파로 북적인다.
주둔한 경비대와 모험가를 상대로 장사를 하는 상인들에게 오늘 같은 날은 그야말로 대목이었다.
그래서 항상 찾았던 제일 싼 식당이 오늘 일꾼들로 붐빈다.
“저기 보리죽이 끝내줬는데.”
“저쪽 오트밀은 어때? 싸고 양 많고.”
시장 바닥에서 두리번거리던 두 청년은 갑자기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보리스가 지갑을 넣은 가슴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지오, 우리 이제 돈 꽤 있지 않아? 다른 거 먹자.”
“그렇네, 옛날 기억 때문인지 싼 것만 찾아 버렸어.”
“쯧, 없이 살아온 기억이 제일 무섭다더니 진짜야.”
그래서 둘은 큰맘 먹고 조금 비싼 가게로 들어섰다.
“그래 봤자 변방의 식당이지만.”
“오, 젊은 모험가분들이네, 뭘 드릴까?”
싹싹한 여주인에게 적당히 음식을 주문하자 바로 요리가 나왔다.
보리스가 그걸 떠먹으려는데 곁에 누군가가 바싹 붙어 앉는다.
뿔 가림 모자를 눌러쓴 모르핀이었다.
턱을 괸 그녀가 심드렁하게 묻는다.
“맛있나?”
“풉-!”
입에 머금었던 것을 뿜어내자 맞은편에 앉은 지오가 그걸 얼굴로 받아냈다.
하지만 밝게 웃으며 모르핀을 보았다.
“모르핀!”
반갑다는 듯 씩 웃은 그녀가 손수건을 내민다.
“바보 녀석, 칠칠맞게 무슨 짓이냐? 넌 빨리 닦아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보리스가 질겁하며 물러섰다.
“하, 한동안 안 보인다고 했더니! 미친 거야? 왜 여기 있는 거야!”
“뭐냐, 왜 이렇게 시끄러워. 앉아, 안 잡아먹는다.”
작은 손바닥으로 옆자리를 톡톡 치자 보리스는 눈썹을 움찔거리더니 지오의 곁에 앉았다.
모르핀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이렇게 경계를 당하고 있는 거지? 내가 뭔가 실수라도 했나?”
기가 찬 보리스가 울컥해 버렸다.
“물고 빨았잖아! 나 술 먹여서!”
그 순간, 가게에 정적이 감돌아 버렸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보리스는 이제 울먹이며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스르륵 자리에 앉았다.
주변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보리스의 가슴을 후벼 파 버리는 덕분에 그는 입 대신 귀를 막고 싶어졌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모르핀이 그제야 손바닥을 부딪치더니 말했다.
“아, 그랬지? 미안하다. 잊고 있었어.”
“이봐요! 잊을 게 따로 있지-!”
다시 벌떡 일어선 보리스가 침을 튀겨가며 소리치자 모르핀은 킥킥 웃으며 그가 먹다 남긴 음식을 보더니 수저를 집어 들었다.
“그즈음 발정기라서 어쩔 수 없었어. 사과하마. 하지만 너도 조심해라. 음냠냠, 어, 이거 맛있구나. 하여튼 네 냄새는 일부 녀석들에게 상당한 자극을 주니까.”
“자극? 냄새?”
눈을 동그랗게 뜬 보리스가 자기 몸을 킁킁거리는 사이, 얼굴을 닦던 지오가 반갑게 말을 걸었다.
“줄곧 여기 계셨던 거예요?”
음식을 떠먹던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음, 그래. 뭘 좀 찾으러 다니느라 바빴다. 겨울이 오면 숲속의 괴물들이 따뜻한 곳으로 이동하거든? 돌아다니기 편해.”
“그건 저희도 그래요. 조만간 남부로 출장을 가는데 저희도 따라갈 겁니다.”
모르핀이 수저를 입에 물고 고개를 들더니 조금 우물거리다가 꿀꺽 삼킨 다음 말했다.
“음, 너희들을 데리고 이 안쪽을 좀 돌아다닐까 했더니, 그래서 얼마나 걸리는데?”
“두 달쯤 걸린다고 해요.”
시무룩해진 모르핀은 이제 보리스를 보았다.
“아쉽군. 귀염둥이 보리스의 투덜거림을 두 달 동안 못 본다는 건가?”
“아니, 뭔가 나한테 말할 때는 어쩐지 깔보는 것 같지 않아?”
빈 그릇에 수저를 던져 넣은 모르핀이 배를 두드리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 잘 먹었구나. 하여튼 이제 발정기가 지나 버려서 지금은 별로 아무렇지도 않으니 걱정 마라. 그런데 머리 잘랐구나. 아쉬운걸? 나는 네 긴 머리가 좋았는데.”
여러 가지로 이마에 핏대가 솟은 보리스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들었다.
“아니, 잠깐만! 그 발…… 뭐시기라는 건 매년 오는 거야? 그럼 내년에 또 그러는 거야?”
가만히 있으면 쿨뷰티 속성으로 보이는 모르핀이 대답 대신 눈과 입을 초승달처럼 만들고 히죽 웃는다.
그래서 보리스는 울상을 지으며 진지하게 파티를 그만둘 생각까지 해 버렸다.
머리를 휙휙 흔든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
“안돼! 이제 시작인데!”
“그렇지. 이제 시작이지.”
무심한 듯한 모르핀의 중얼거림과 알 수 없는 속셈의 저 눈빛, 보리스는 고양이처럼 하악거렸다.
“이봐, 당신 사람이 좀 바뀐 거 같지 않아? 전에는 안 그랬잖아! 그때가 훨씬 보기 좋았다고!”
눈을 크게 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모르핀이 고개를 쑥 내밀더니 보리스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보기 좋았다고? 내가 말이냐? 그러니까 좋았다는 말이지?”
“어, 으……!”
갑작스런 반응에 당황한 보리스가 말을 잇지 못하고 얼굴을 붉히자 모르핀은 눈을 감고 손바닥을 내밀었다.
“됐다. 대답은 그것으로 충분해. 음, 그랬구나.”
“그, 그랬긴 개뿔이! 노, 놀라서 당황한 것뿐이야!”
“야! 시끄러웟! 밥 좀 조용히 먹자!”
“왜! 나는 재미있는데! 하하하! 더 하라구!”
“캬! 달다달아!”
가게 안에서 놀림과 항의가 쏟아지자 지오가 대신 사과했으며 보리스는 고개를 숙이고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모르핀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턱을 괴고 그를 쳐다보았고.
우연히 지나가는 그들을 보고 뒤를 밟았던 모르핀은 식당에서 이야기를 좀 나누다가 세워놓은 장갑차량 앞에서 자루 하나를 쥐여주며 투나에게 전달을 부탁했다.
“이 시기에 나는 약초다. 그 녀석이 좋아할 거야.”
“흥! 알았수다.”
차량에 오른 보리스가 퉁명스레 그것을 가로채자 모르핀이 빙글빙글 웃었다.
“남부로 떠나기 전에 인사차 한번 찾아가마.”
“흥! 그러든가 말든가.”
실컷 놀림을 당해 시큰둥해져 버린 보리스와 운전석에서 고개를 꾸벅이는 지오에게 손을 흔들어 준 모르핀은 뒤뚱뒤뚱 떠나가는 장갑차량을 배웅하다가 주변을 살피더니 곧 숲으로 뛰어들었다.
빨간 휴전선을 앞에 둔 모르핀이 건너편의 누군가를 부른다.
“쿠핀.”
나무 뒤에서 머리를 빗어 틀어 올린 여자가 걸어 나왔다. 그러더니 심드렁하게 붉은 선 건너편에 서 있는 모르핀을 바라보았다.
“너 대체 어떻게 그쪽으로 넘어간 거야?”
“사업상 비밀이야. 크크.”
쯧, 하는 소리로 혀를 좀 찬 쿠핀이 말했다.
“애 가진 사람들을 먼저 공략하다니 재주도 좋아. 푸시케 대장이 너 때문에 요즘 편두통에 시달리는 것 같더라.”
“남자 하나 갖다 바쳤는데도 그래?”
팔짱을 한 쿠핀이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그거랑은 다르지! 입장상 그래야 한다고! 푸시케 대장이 붙들려가 봐. 동시에 여기 녀석들 다 탈영해 버릴 거다.”
“신기하네, 신기해. 전에는 안 그랬잖아? 다들 난리 통에 애는 뒷전이었잖아? 지금처럼 애지중지하지도 않았잖아?”
팔을 푼 쿠핀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손가락을 들었다.
“너, 그 이상 말하지 마.”
얼굴에 그림자가 잔뜩 낀 모르핀이 히죽 웃으니 날카로운 상어 이빨이 슥 드러난다.
말이 통하는 사람에 한해 모르핀은 그 속을 긁는데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
쿠핀은 그게 통하는 사람이었고.
툭!
품에서 꺼낸 종이를 비행기로 접어 날리자 그게 쿠핀의 가슴에 닿아 떨어진다.
부리부리한 눈으로 노려보는 그녀에게 모르핀이 말했다.
“토끼는 굴을 3개 파놓는다고 하지. 그중 하나야.”
“무슨 말이야? 뭐 어쩌라고?”
대답 대신 이 재수 없는 상어 이빨이 또 히죽 웃는다.
“위문단 오고 있다며? 애들 숨겨.”
입술을 삐죽 내민 쿠핀이 그걸 주워 들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모르핀은 자리에 없었다.
지도를 펼친 쿠핀은 흥! 하는 콧소리를 내면서 몸을 돌렸다.
“받았으니 줬을 뿐이야. 뭐가 나빠?”
말은 그렇게 하지만 쿠핀은 종이비행기에 그려진 지도를 살피며 서둘러 애들이 뛰노는 거주 구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휴전선 마을의 보급품 이송은 오후에도 계속되었다.
바쁜 건 인간 경비대지만 그걸 멀리서 보는 마족들도 하나같이 배부른 미소를 지었다.
“와, 많이도 들어온다. 올겨울은 따뜻하겠구만.”
“쯧! 얻어먹을 생각뿐이지?”
사악한 표정을 지은 마족이 가운뎃손가락을 쳐들고 외쳤다.
“얻어먹긴! 이 얼굴과 이 몸매로 홀려서 뺏어 먹는 거지! 저 병신들은 아양 한 번 떨어주면 껌뻑 죽는다고! 마음만 먹으면 목도 딸 수 있다고! 흐하하!”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동료 하나가 비꼬았다.
“그럼 따와 봐.”
“어, 아니, 그, 그래도, 나 좋다고 쩔쩔매는데. 그, 그럴 필요까지 있으려나…….”
식은땀을 비 오듯 흘리기 시작한 그녀가 시선을 피하며 작게 중얼거리자 다들 깔깔거리며 놀려대기 바쁘다.
“인간 남자 따위, 별 힘도 없을 텐데 뭐 하러 거기 매달리냐?”
“아냐, 그건 네가 몰라서 그래. 허릿심은 진짜 끝내 준다고. 게다가 이것들은 1년 내내 발정기야. 최고라고, 츄릅!”
말을 하면서 입가의 침을 닦는 그녀를 보고 징그럽다는 표정을 지은 동료 전사가 쏘아붙였다.
“그럼 좀 빌려줘 봐. 얼마나 좋은지 내가 알아볼 테니까.”
그러자 모두의 얼굴이 굳어졌다.
분위기가 흉흉해지자 최근에 이곳에 배치된 마족 전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왜들 이래?”
“아, 그거 얘네들한테 금기어다냐. 말하면 안되는 거다냐. 앞으로 조심해라냥.”
목책 너머를 바라보며 날카로운 손톱을 야금야금 깨물던 고양이 수인의 중얼거림.
푸시케 휘하의 제3국경선 수비대에선 하나밖에 없는 고양이 수인 마뇽이었다.
손톱을 갈무리한 그녀가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들었다.
요즘 바빠서 몰래 만날 시간이 없었던지라 마뇽은 초조해진 상태였다.
“하악! 제길, 저 망할 빨간 선은 어떻게 좀 안 없어지나?”
“마뇽이! 냥을 붙이지 않아?”
모두의 놀라움에 일그러진 시선을 돌린 마뇽이 누구보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그 자식이 좋아하니까 붙이는 거뿐이야. 씨발! 내 집사, 다른 년이 채가는 거 아니겠지? 응?”
내내 귀여운 짓만 해대던 고양이 수인의 상스러운 발언에 모두가 또 호들갑을 떨었다.
“끼야악! 마뇽! 너도? 하하하! 여기는 정말로 사랑의 국경선이야? 너 털 없는 허여멀건한 것들은 싫다며?”
“닥쳐! 빌어먹을 본국에선 아무것도 안 오니까 나도 호구 하나 걸었다. 왜! 꼽냥!?”
버럭 소리를 지른 그녀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손톱을 꺼내 깨물기 시작했다.
“난 모르겠는데, 그 자식 꽤 잘생겼다고 그러더라. 인간 계집애들이 채가는 거 아니겠지? 냥냥.”
흐흐히히 웃어 버리는 동료 중에서 유난히 장난기 넘치는 얼굴을 한 마족이 머리 위에 쫑긋 솟아난 마뇽의 귓가에 대고 속닥였다.
“사실은 지금 너 안 보는 곳에서 둘이서 알콩달콩꽁냥꽁냥…… 으엑, 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