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화 - 오토마톤과 함께하는 사랑의 국경선! (2)
“오크? 그게 뭐냐?”
고개를 돌린 세이건이 쿠바를 부르자 문이 열리고 의수를 매단 근육질 오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오크.”
마족 여자들이 눈을 크게 뜨고 오크를 보더니 다채로운 표정을 지었다.
린테이가 말했다.
“훈크다. 우리는 저걸 훈크라고 불렀다. 어릴 때 발정기의 어머니들이 잡아 온 걸 몇 번 보았다. 일이 끝난 후에는 잡아먹었지. 먹을 고기가 참 많았다.”
오크 전사 쿠바의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팔짱을 끼었다.
“크르륵!”
개중에 몇은 호기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훈크는 그게 지치지 않는다고 들었어! 나는 여름이 발정기야! 그때 부탁해!”
“에그머니! 뭐, 뭘 부탁해요!”
“어, 안돼? 인간들은 오크랑도 짝지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세이건이 또 웃는다. 참 웃음이 많은 친구라고 린테이는 생각했다.
기분이 나빠진 쿠바를 경호원처럼 옆에 세워둔 세이건이 말했다.
“그건 그때 가서 상의합시다. 그렇군요. 겨울에는 사냥이 힘들겠네요. 그럼 겨울에는 그쪽 지역을 살피면서 뭔가 돈 될 만한 게 없는지 좀 찾아봅시다. 자원 탐사라는 거지요.”
세이건이 손을 내밀었다.
“말씀대로 우리는 서로에게 도움이 될 겁니다. 친하게 지냅시다.”
“그래, 친하게 지내자.”
마을 촌장들이 우호의 악수를 하는 자리에 불청객이 나타났다.
고개를 돌린 쿠바가 눈을 일그러뜨린다.
“큼큼, 누가 온다.”
다들 고개를 돌리니 산 능선을 주르륵 타고 내리는 사람이 있다.
마족들이 그 옷차림을 보고 호들갑을 떨었다.
“국경 경비대다! 어서 피해야 해!”
“괜찮습니다. 이쪽에서 잡을 수 있습니다.”
한쪽 눈을 감은 세이건이 팔을 들자 기동 저택에 매달린 포탑 같은 것이 움직인다.
다가오는 사람을 눈여겨보던 린테이가 모두를 진정시켰다.
“그만둬라. 우리 애다. 린도이야.”
같은 편이라는 말에 모두가 한숨을 쉬는데 경비대 복장을 한 마족 여자가 흐흐히히 웃으며 다가왔다.
“다들 여기에 있었네? 마을에 갔더니 없어서 찾아왔어. 무슨 좋은 거래 중이야?”
“린도이! 놀랐잖느냐!”
“와! 로니바 할머니, 오랜만이네. 요즘 더 어려진 거 아니야?”
“앗! 이 녀석! 내려놓지 못하겠냐!”
키가 작은 마족을 할머니라고 부르면서 번쩍 들어 올린 린도이가 버둥거리는 그녀를 보고 깔깔거리다가 이제 세이건을 쳐다보았다.
“호! 이게 전에 이야기했던 그 이웃 마을 사람들이구나.”
“모처럼 얻은 교류처다. 덕분에 마을 살림이 풍족해지고 있어.”
린테이가 그녀를 소개했다.
“린도이, 내 딸이다. 여기서 좀 떨어진 국경수비대에 있지.”
할머니 마족을 내려놓은 린도이는 이번엔 거대한 기동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위장을 위해 일부러 엉망으로 꾸며놓은 그 모습이 그녀의 눈에는 참 멋져 보이기만 했다.
“굉장해. 어떻게 움직이는 거지? 한번 태워 줄 수 있어?”
세이건은 슬쩍 웃었고, 족장 린테이가 설명했다.
“인간들은 우리만큼 튼튼하지 않아서 저런 것에 기대는 모양이다. 골칫덩이 무소 녀석도 저걸로 붙잡았지.”
“와, 그 무소를?”
린도이가 촌장을 보았다.
“그럼 이제 나 경비대 그만둬도 돼? 교류처가 생기면 물건 안 빼돌려도 되잖아.”
“이 녀석들이 자리 잡을 동안 몇 년만 더 기다려라.”
“에잉, 귀찮은데. 알았어. 자자! 인간들아. 반갑다! 내가 촌장 딸이야. 친하게 지내자.”
린테이와 마찬가지로 키가 큰 린도이는 말이 좀 많고 잘 웃는 마족이었다.
“맞다. 촌장, 한 일주일은 조심해. 위문단 녀석들이 온다고 하니까. 그거 알려주려고 왔어.”
린테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위문단? 이 계절에? 날짜도 맞춰주질 않고 제멋대로 돌아다니는군.”
“오, 그게 뭡니까?”
세이건이 호기심을 드러내자 고개를 돌린 린테이는 소중한 교류처인 그들에게도 정보를 알려주었다.
위문단, 마왕군에 입대하여 최전선을 사수하는 병사들에게는 한 가지 특권을 주는데 그걸 위한 단체다.
전원 마왕의 아들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올 때마다 대량의 보급품과 어떤 행사를 치르고 돌아간다.
서로 간의 문화의 차이를 이해하기엔 많은 시간이 필요한데도 세이건은 인류학자라도 된 것처럼 즐거워했다.
“이요오오! 그거 신기하군요!”
“신기하긴 자식아, 그동안 거들먹거리는 녀석들 비위나 맞춰야 하는데. 그렇지! 촌장, 나 남친 생겼어. 발정기 때 죽 같이 있어서 임신했을지도 몰라.”
내내 평온한 얼굴이던 촌장 린테이가 팔짱을 풀더니 처음으로 밝은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그리고 인간 남자들은 한번 짝을 지으면 가정을 꾸리고 사는 놈들이 많다던데, 이놈도 그런 것 같아. 어머님께 인사하러 오겠다던데? 크크케케!”
“오! 그러냐! 어떤 녀석이지?”
린도이가 신나게 설명했다.
“여름쯤인가. 겁도 없이 이쪽 숲에서 돌아다니는 밀렵꾼을 붙잡았지. 자식이 질질 울면서 살려달라고 말하는데 묘하게 심쿵하는 거야. 그때 발정기 최고점이었거든. 바로 머리끄덩이를 붙잡아 가까운 동굴로 끌고 갔는데, 알고 보니 이 자식 맞은편 경비대원이더라고. 괜히 트집 잡힐까봐 풀어줬는데 새끼가 맛이 들였는지 계속 찾아오지 뭐야.”
모두가 어딘가 삐뚤어진 마족의 연애사에 집중했다.
세이건조차도 그네들의 풍습이 신기했던지 잠자코 들었다.
“마침 잘됐다 싶어서 이 녀석 등골에 빨대 꽂으려고 좀 놀아줬지. 이것저것 많이 뜯어냈어. 가져다준 마력 화로랑 가재도구는 다 그 녀석이 마련해 준 거야.”
“그래서요?!”
되레 인간 측 여자들이 코를 벌렁거리기 시작한다.
이히히 웃던 린도이가 배를 두드리더니 익살스럽게 웃어 버렸다.
“그러다 그만 애가 들어서 버렸지 뭐냐.”
세이건이 놀라워했다. 어디까지나 학술적인 의미로.
“인간이랑 마족이 그게 됩니까?”
“음, 우린 뭐랑 짝지어도 우리 닮은 것이 나오거든?”
모두가 충격에 휩싸인 얼굴을 하자 이상한 말이 나오기 전에 누군가가 재빨리 덧붙였다.
“야야, 그래도 좀 비슷하게 생긴 게 좋아. 이상한 생각하지 마.”
확 달아오른 처녀 하나가 손을 마구 흔들었다.
“아, 아무 생각도 안 했어요! 진짜예요!”
“너 이 자식, 수상한데? 무슨 생각했어! 빨리 대답해!”
와락 덤벼든 마족 여자가 처녀의 겨드랑에 손을 집어넣더니 마구 간지럽히자, 처음엔 깜짝 놀랐던 그녀가 몸을 배배 꼬며 아하하 웃음보를 터트렸다.
비슷하게 기동 저택 안에서 이야기를 엿듣던 신사들도 젊잖은 헛기침을 나누었다.
머리에 뿔 난 사람들과의 교류는 100년 전의 싸움으로 중단, 관련 정보 역시 전부 폐기되거나 숨겨졌기 때문에 알려진 것이 퍽 적었다.
그저 저 붉은 선 너머에 마족과 괴물이 잔뜩 있으니 가지 말라는 말만 들었을 뿐.
문득, 발아래 붉은 선을 바라보는 세이건의 가슴에 두근거림이 일었다.
이 너머는 그야말로 미지의 세계, 게다가 포악하기 그지없다는 마족들도 막상 만나보니 힘겨운 생활에 치여 적당히 융통성을 가지게 된 상황이다.
그러니 이것들을 잘 조합하면.
바로 돈이 된다!
그리고 그 돈으로 다종족연합체 같은 걸 구성하면 나라 하나쯤 세우는 것도 일이 아닐 거야!
그의 야망 넘치는 계획과는 별개로 린도이의 연애 썰은 계속 이어졌다.
“네 애가 생겼다고 알려줬더니 반응이 놀라웠어. 자식이 질질 울면서 엄청 좋아하더라고? 우리 쪽 남자들하고는 완전히 달랐어. 이 자식들은 정말 하나만 보고 살아.”
린도이의 손가락이 세이건에게 향했는데 젊은 마족들의 표정이 뭔가 아련하다.
“야. 인간, 정말이냐?”
하지만 세이건은 그녀들에게 비참한 현실을 알려주었다.
“아니요. 다 그런 건 아닙니다. 믿는 도끼에 찍히는 발등은 모든 도끼를 두려워하게 만들거든요. 조심합시다.”
단순한 마족 여자들이 하나같이 찡그린 얼굴이 되어 버렸다.
“말 어렵게 하는 것들이 제일 싫어.”
“맞아.”
“이 못생긴 자식!”
킥킥 웃어 버린 세이건이 몸을 돌렸다.
“우리도 조심하지요. 그럼 일주일 후 정오에 여기서 다시 뵙겠습니다.”
“세이건, 위문단은 하늘로 날아오니까. 뭔가로 위를 덮어둬라.”
세이건의 눈이 엄청나게 커졌다.
“하늘요?”
“그 자식들은 부유섬을 타고 날아다녀.”
전설의 부유섬! 북쪽 마왕령 깊숙한 곳에 있다는!
세이건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그건 어디서 구할 수 있습니까? 돈이 되겠군요. 5대5로 나눕시다.”
“이 돈독이 오른 녀석 같으니, 네놈은 다 돈으로 보이느냐?”
기분이 좋은지 린테이가 농담 비슷하게 그를 비꼬았다.
흐뭇하게 웃어준 세이건은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기동 저택에 올랐다.
기동 저택 안에는 사방이 훤히 보이는 선실 같은 곳이 만들어져 있고, 마녀의 삐죽 모자를 눌러쓴 오토마톤이 한 대 서 있었다.
자리에 앉은 세이건이 한쪽 다리를 무릎에 척 걸치며 말했다.
“볼일은 끝났어. 이제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자, 원추리.”
모자를 쓴 오토마톤 원추리가 고개를 들자 양쪽 눈의 색이 다르다.
한쪽 눈에 들어가 있는 것은 눈알이 아니라 기동 저택과 함께 돌아온 사레나의 구슬이었다.
다시 태어난 오드아이 오토마톤 원추리가 팔을 들어 방향을 지시한다.
“기동 저택 기립. 진로 남동, 저속 이동 개시.”
끼이기긱! 쿵! 쿵!
몸체를 일으키고 거친 지형을 거의 무시한 채 느긋하게 거미 다리를 옮기는 거대 기동 저택을 보면서 린도이가 중얼거렸다.
“이봐, 촌장.”
“뭐냐?”
“저 자식들 어때?”
“나쁘지 않다. 나름 공평하게 나누기도 하고. 걱정 마라. 수틀리면 예전처럼 엎어 버리면 그만이야.”
“음, 남친도 사람 함부로 믿질 말라더라. 키킥! 제 자식도 사람이면서. 있지, 나 그 자식 엄청 좋아. 이런 건 처음이야.”
피식 웃던 린테이가 물었다.
“이름은 뭐냐? 나이는?”
생각만 해도 즐거운지 으히히 웃음 지은 린도이가 남친 자랑을 계속했다.
“부르노, 이제 20살이래.”
린도이는 이제 갓 60살 부근이었다.
그녀의 엄마인 린테이가 다시 팔짱을 끼었다.
“그깟 나이 금방 따라잡힌다. 인간은 우리랑 다르게 늙어. 거기에 100년도 못 살지.”
“나도 알아. 그래서 오늘은 어제보다 더 쪽쪽 빨아줄 거다. 애도 잔뜩 만들 거고.”
린테이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내 사위는 제명이 죽지 못하겠군. 아, 그리고 마을에 데려오진 말아라. 다른 녀석들에게 잡아먹힐라.”
상자를 옮기던 로니바가 침을 줄줄 흘리며 버럭 외쳤다.
“츄릅! 촌장! 너 우릴 못 믿는 거냐!”
“촌장! 아까 그놈들에게 남자 좀 부탁해 봐! 나 발정기라서 참느라고 혼났다고!”
“이것들아, 남의 마을 남자 잘못 건드렸다간 바로 전쟁이야. 이런 건 좀 뜸을 들여서 부탁해야지. 거기 훈크는 빌려 줄 것 같던데.”
귀가 확 커진 마족들이 손을 번쩍 들었다.
“훈크도 좋아! 그 자식들은 지치질 않는다고! 으흐히히!”
“나도나도!”
웃는 일이 적었던 마을 사람이 다들 밝아졌다.
교류자들이 고맙게도 이것저것 많이 챙겨준 덕분이라 린도이는 생각했다.
그녀는 배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잘됐다. 역시 애를 키우려면 주변이 활기찬 곳이 좋지.”
벌써 엄마라도 된 것처럼 중얼거리는 그녀의 말에 린테이도 입술 끝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