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토마톤과 함께하는 사랑의 국경선! (1) 292 >
트로겐의 불법 오토마톤 투기장은 개념 결계를 돌파한 경비대의 손에 정리되어 그렇게 막을 내렸다.
이후, 도시 책임자를 두루 만난 필림 장로는 꽤 그럴듯한 협상안을 끌어냈다.
그리고 영주를 설득해 투기장을 도시 기간 사업으로 운영하도록 했다.
경비대장의 집무실, 사태 수습을 위해 필요하다며 요 며칠 필림 장로에게 끌려다니던 캐롯이 중얼거렸다.
“어휴! 투기장을 중심으로 시장경제라는 게 만들어질 거라고 누가 알았겠어. 동네 사람들이 다 들고일어나서 이야기 들어주느라 혼났네.”
정리된 상황을 전해 들은 크랭크가 중얼거렸다.
“여기는 그다지 일거리가 없으니까. 그래도 정식 투기장이라니, 허가가 쉽지 않을 텐데.”
“저도 그럴 것으로 생각했습니다만, 허가가 났습니다.”
커다란 책상을 앞에 두고 앉아 있던 그린이 서랍을 열어 투기장 운영 허가 증서를 꺼내 보여주었다.
옥새까지 찍힌 진품 허가서였다.
팔짱을 낀 크랭크가 말했다.
“놀랍군요.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 사람들이 이걸 밀어붙인 거랍니까?”
그 대답은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위명을 간판 삼아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을 구워삶는 역할을 맡았던 캐롯이 했다.
“필림 장로와 스틸레인 대장로가 투기장의 존속을 원했다고 해. 오토마톤 기술 개발에 좋은 실험장이 될 거라고 하던 걸?”
비슷한 생각을 했던 크랭크도 고개를 끄덕였다.
투기장에서는 이기기 위해 기상천외하고 실험적인 기술도 적극적으로 사용해 보곤 한다. 아마 그 점을 노린 거겠지.
문명의 선구자 어쩌구 하면서 연구 개발을 외주로 돌리는 사람들이니 그럴듯하다.
캐롯은 이제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어쨌든 잘됐어! 당분간 투기장을 중심으로 일거리가 늘 테니까.”
“정말로 그렇습니다. 하지만 곤란한 것이, 당시 투기장에서 활동하던 팀들의 반수 이상이 복귀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리에테는 훈련소 일로 바빠서 데려오지 못했기에 지금 트로겐 경비대장 사무실에는 크랭크와 캐롯뿐이었다.
크랭크가 말했다.
“그 사람들은 산전수전 다 겪은 신중한 사람들이니 아마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겁니다. 당장은 현재 인원으로 운영해야겠군요.”
“그래서 여러분께 부탁이 있습니다.”
그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크랭크와 캐롯을 바라보았다.
“저와 태그 팀을 만들어 주십시오.”
“잉?”
이제는 지하가 아니라 떳떳하게 지상에 세워진 투기장, 엘프 장로회의 지원으로 원래 광장이 있던 자리에 정말로 대규모 콜로세움이 지어졌다.
“와아아!”
정식 투기장으로 개장은 했으나 입만 벌리고 있는다고 먹을 것이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어떻게든 이 기회와 기세를 이용해야 합니다.”
그를 위해서 경비대장은 친히 투기장 간판 선수가 되기로 했다.
롱소드 하나 달랑 든 오토마톤이 경기장에 올라서자 사람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한다.
그도 그럴 것이, 멋진 경비대장 제복에 길고 아름다운 금발을 늘어뜨린 명망의 대상이었으니까.
“우와! 정말이야! 경비대장이다! 금색 악마! 황금빛 심판자!”
“경비대장님이시다!”
“대장님! 대장님께 월급을 걸었습니다!”
구경 온 경비대원들이 한자리 차지하고 앉아서 응원하고 있었다.
곁에 따라 올라온 캐롯이 킥킥 웃는다.
“와! 이건 생각도 못해봤네. 경비대장이 투기장 선수라니.”
“허점을 노린 겁니다. 신기하니 구경하러 오지 않겠습니까?”
히히 웃음 지은 캐롯이 맞은편의 상대를 가리켰다.
저쪽도 뭔가 멋진 녀석들이 올라와 있다.
“쟤들이 우리 상대야?”
“그렇습니다. 저쪽 마스터가 제게 악감정이 많습니다.”
방열 가발을 바뀌어도 매번 돋아나는 머리카락 안테나가 어떤 촉을 감지했다.
순간 배를 붙잡고 파하하 웃어 버린 캐롯이 날카로운 얼굴을 들었다.
“대단해! 공식적인 복수전의 기회라니! 이거 괜찮네, 대전 상대가 마르지 않겠는걸?”
촹!
캐롯이 두 팔을 펼치자 손등에서 짧은 칼날이 튀어나온다.
으히히 웃음 지은 캐롯이 말했다.
“어이! 파트너. 준비됐어?”
“물론입니다.”
검을 세운 그린과 캐롯은 관중들의 환호 속에서 상대에게 달려들었다.
* * *
오토마톤 투기장을 도시 기간 사업으로 받아들여 정식 운용을 시작한 트로겐의 소식은 삽시간에 주변 도시로 퍼져 나갔다.
통신망이 제한된 세계에서 이런 소문은 결국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전달되는데, 특정 도시 몇 곳을 연결하는 청동문 덕에 그 확산 속도가 빨랐다.
“게다가 거기 경비대장이 선수로 뛰고 있다던데요? 운이 좋으면 드래곤 슬레이어도 함께 볼 수 있데요.”
“웃기는군. 경비대장이 그리 한가한가?”
“그게 또 웃기는 게, 잡아넣었던 범죄자들이 보복하려고 매번 도전한다고 하더라고요.”
“복수심을 이용한 도시 부흥이로군. 그거 똑똑한 오토마톤이네.”
옹기종기 모여 앉아 복귀한 레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내 하나가 손을 들었다.
“드래곤 슬레이어는 뭐야? 정말 용을 잡았어?”
“왜 있잖아요, 그때 연결 차량 내부로 쳐들어왔던 그 조그만 녀석.”
모두가 지린내를 맡은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 땅콩이 있더라고?!”
“소문의 이젤리아 드래곤 슬레이어가 그 녀석이었어?”
낭만 강도단은 이제 낭만 개척단으로 이름을 바꿔 북부 휴전선 인근에 거점 마을을 마련해 놓았다.
바위를 굴려 쌓아놓은 마을의 방호벽 주변에는 끔찍한 다리가 여러 개 달린, 마치 조개껍데기를 뒤집어쓴 소라게 같은 기동 저택이 감시탑을 대신해 이곳저곳에 세워져 있었다.
굵은 팔뚝으로 팔짱을 낀 사내 하나가 고개를 내밀고 물었다.
“우리 이야기는 없던가?”
“없습디다. 조용해요. 그 양반이 약속을 지켜줬나 봐요.”
다들 가슴을 쓸어내렸다.
얼마 전 카우보이 모자를 눌러쓴 모험가 하나가 불쑥 찾아와서는 이것저것 캐묻는 바람에 어찌나 놀랐던지 모른다.
아이를 안은 여자가 말했다.
“이젠 돌아다니는 건 싫어요. 유목민도 아니고.”
“그건 그래. 애들한테 안 좋아. 안 그렇소? 세이건.”
사이퍼즈 미청년이 기동 저택에서 내리는 화물을 점검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히죽 웃는다.
여자들은 그의 잘난 외모는 마음에 들어 했으나 저 징그러운 웃음만은 경멸했다.
“안 그런데요? 또 뭔 일 있으면 도망갈 건데요?”
“크하-! 촌장이 유목민이라 이거 무슨!”
다들 거창한 한숨을 내쉬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한참 썰을 풀던 레그가 따로 챙겨온 배낭에서 책 몇 권을 꺼냈다.
여자들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건 뭐야? 애들 동화책이야?”
“동화책은 저기 화물에 따로 챙겨왔어. 요크는 어디 있어요?”
남자 하나가 호루라기를 꺼내더니 입에 물고 불었다.
그러자 마을 저편에서 작업복 차림의 코볼트 하나가 신난 얼굴로 네 발로 헥헥 달려왔다.
그러더니 오랜만에 본 레그에게 달라붙어 마구 날름거리기 시작한다.
“켕켕! 레그! 레그! 핥핥핥!”
“아이고! 야, 핥지 마. 핥지 마. 이거 마법서야. 그 녀석들 가져다줘라.”
가슴팍에 책을 껴안은 레그는 이제 두 다리로 달려 1번 기동 저택으로 향했다.
세이건이 그 뒷모습을 보면서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마법이라는 건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그때 털가죽 자켓을 입은 덩치 큰 오크가 다가왔다.
“큼큼, 족장. 뿔난 여자들이 찾아왔다. 자기들 몫을 내놓으라고 하고 있다. 큼큼.”
“영 미덥지 않은가 보네. 자자, 동업자들 것부터 먼저 챙겨줍시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 마을 광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툴툴거리며 일어섰다.
“마을에서 감자나 캐던 내가 이젠 마족 뒤치다꺼리나 하게 될 줄은 몰랐다.”
“태어났으니 살긴 하겠지만 참 징그러운 인생이야.”
그에 반해 여자들은 신난 표정이었다.
“그래도 든든한 이웃이 생겨서 좋지 않아요? 생각보다 말도 잘 통하던데.”
애초에 여기까지 올라온 이유가 마왕령에서 나는 특이한 동식물이 목적이었던지라 그들은 일부러 빨간 선 부근에 터를 잡았다.
그러다 정말 우연히 가까운 곳에 이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을에서 좀 떨어진 평야, 낭만 개척단 사람들이 하나같이 밭뙈기를 일구면 참 보기 좋을 거라고 말하는 이곳에 그 붉은 선이 지나고 있었다.
선은 평야의 반을 죽 가르고 산 능선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선의 건너편에는 키가 큰 여자가 나와서 팔짱을 하고 있었는데 머리에 돋아난 뿔이 참 인상 깊다.
쿵! 쿵!
산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긴 다리를 휘적휘적 움직이는 기동 저택이 나무들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숲에서 저걸 처음 봤을 때는 기겁했으나 지금은 흐뭇한 표정으로 그걸 맞이하고 있었다.
쿵-!
붉은 선 앞에서 멈춰 선 기동 저택이 그 자리에 주저앉자 문이 열리고 사람이 걸어 나왔다.
다갈색 피부의 미청년 세이건이었다.
“안녕하세요?”
뿔난 동업자는 슬쩍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뒤따라 나온 사내들이 나무 상자를 그녀가 있는 선 안쪽으로 옮겨다 놓았다.
인근 마족 마을의 촌장 린테이가 말했다.
“다 옮겼으면 남자들은 들어가라. 세이건은 안 들어가도 된다.”
“나는 왜 괜찮은 겁니까?”
“넌 계집애처럼 생겨서 꼴리지 않거든.”
서둘러 기동 저택으로 몸을 숨기던 일꾼들이 그 소리에 폭소를 터트렸고, 세이건도 허리를 꺾으며 웃어 버렸다.
린테이가 손짓하자 좀 떨어진 바위 뒤에 숨어 있던 마족 여자들이 고개를 내밀더니 다가왔다.
그녀들은 그 자리에서 상자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말했던 거 다 있어! 촌장!”
세이건이 손가락을 들었다.
“제일 위에 검은 상자는 선물입니다. 마족은 단 걸 좋아한다면서요? 설탕이랑 캔디를 좀 넣었어요.”
그 소리에 검은 상자를 연 마족 여자들이 저마다 환호하더니 사탕을 나눠 먹기 시작했다.
그걸 흐뭇하게 쳐다보던 린테이가 건너편 이웃 마을의 촌장을 내려다보았다.
“앞으로도 자주 거래했으면 좋겠다. 우리는 서로에게 도움이 될 거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음 사냥 일정은 어떻게 할까요? 저번에 잡았던 녀석들은 다 처분했거든요.”
린테이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곧 추워진다. 동물들은 추워지면 안 추운 곳으로 떠나 버려. 잠드는 것도 꽤 있고, 다시 따뜻해질 동안 사냥은 어렵다. 그거 말고 다른 건 필요 없나? 짠돌이라든가.”
“짠돌?”
세이건이 고개를 갸웃하자 기동 저택의 창문으로 어떤 여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암염이요! 암염!”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 세이건이 뒤를 돌아보며 손짓했다.
문이 열리고 마을 처녀들이 우르르 나오자 상자 속의 물건을 살펴보던 마족 여자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인간 여자다. 오, 신기하다.”
“우린 당신들이 더 신기하거든?”
“인간 남자는 없나? 남자도 보여줘.”
마족 여자 하나가 기동 저택을 살피며 말하자 린테이가 쓴 표정을 짓는다.
“다른 마을의 남자를 보여달라고 하는 것은 실례다.”
“어, 음. 알았다. 실례했다.”
이웃 마을의 친구라도 만난 것처럼 그녀들과 수다를 떨던 인간 여자들이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남자가 적다고 듣긴 했는데, 그럼 저건요? 우리 쪽에선 꽤 먹어주는 얼굴인데.”
모두가 세이건을 보더니 반 정도가 얼굴을 찡그렸다.
“먹을 게 없다면 모르겠지만 우리 쪽에서는 그다지 선호하는 물건이 아니다.”
“나는 좋다! 촌장! 나는 좋다!”
린테이가 세이건을 보고 침을 줄줄 흘리는 마족을 가리키더니 말했다.
“너 같은 것도 마음에 들어 하는 녀석이 없지는 않지만 별종으로 취급받지.”
“프하하!”
극과 극인 평가에 세이건이 또 웃어 버렸다. 그러다 재미가 들린 그가 이 잡담에 끼어들었다.
“오크는요? 오크.”
< 오토마톤과 함께하는 사랑의 국경선! (1) 29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