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토마톤과 함께하는 투기장! (7) 290 >
“으랴차!”
쾅! 콰쾅!
캐롯의 본디 전투 방식은 가벼운 몸을 이용한 속도전, 하지만 지금은 외부 무장 장착으로 그걸 완전히 포기하고 온전히 힘으로만 밀어붙였다.
“하하하! 그 팔은 어디서 난 거냐! 굉장한데?!”
“거기 서!”
붕붕붕!
방방 뛰어다니는 스틸레인을 향해 캐롯이 주먹을 풍차처럼 휘두르는데 무겁고 느려서 잘 맞지 않는다.
하지만 방어에는 그만이어서 커다란 팔을 들면 그야말로 방패가 세워졌다.
퍼퍼퍽! 쾅!
“으하하! 당신 주먹질과 발차기 따위 아무렇지도 않아! 으럇!”
훙!
커다란 주먹이 날아들자 스틸레인이 재빠르게 몸을 숙였다.
그녀는 지금 신나서 죽을 지경이었다.
“두근두근하구만! 우긋?!”
쾅!
도끼눈을 뜬 캐롯의 멋진 어퍼컷이 기어코 적중했다.
뒤로 날아간 스틸레인은 장애물로 갖다 놓은 잡동사니를 부수고 나동그라졌다.
원래 오토마톤과 인간의 전투는 핸디캡을 적용하는데 지금 두 사람의 싸움은 그런 것이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의 진심 배틀이었다.
처음 트리스타가 공방에 왔을 때, 호기심이 생긴 캐롯이 그녀에게 대무를 요청했다. 하지만 트리스타는 정중히 거절,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엘프도 사람이에요. 오토마톤과 어떻게 싸워요?”
주먹을 거둬들인 캐롯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다.
“이 거짓말쟁이! 그럼 저건 뭐냐고!”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먼지구름 속, 시뻘건 도끼눈의 괴물이 일어섰다.
“솔직히 말해봐! 엘프란 건 대부분 당신 정도야?”
“케헥! 콜록콜록! 그럴 리 있겠냐? 하지만 인간들보다 힘이 센 건 사실이야. 다들 내숭을 떠는 것뿐이지. 하하!”
그녀의 폭로에 구경 온 사람들이 다들 입을 딱 벌리고 동료 엘프를 쳐다보았고, 관중석에 앉아 있던 여성 엘프들은 달아오른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려 버렸다.
몇몇은 항의했고,
“그런 말씀은 하지 않으셔도 되니까 앞을 보세요!”
“은하계 도깨비 펀치!”
고개를 돌린 스틸레인이 얼른 몸을 숙이자 그 위로 왕 주먹 캐롯이 휭 하고 날아갔다.
그러더니 자기 무게를 못 이기고 잡동사니를 부수고 나뒹굴었다.
“머, 멈추지 않으아아앗!”
콰쾅-! 와장창!
부셔 버린 나무 상자에 걸쳐져 엉덩이를 드러낸 꼴을 보고 스틸레인이 폭소를 터트렸다.
“크하하! 바보 자식! 연습 좀 하고 오지 그랬냐! 거기 딱 대고 있어라! 네 녀석 엉덩이를 걷어차 주마!”
희열에 찬 눈으로 달려간 빨간 머리 변태 엘프가 꼬마 인형의 조그만 엉덩이를 겨냥하고 멋들어진 다리를 쭉 들어 올리자 캐롯도 가만있지 않았다.
재빠르게 몸을 일으키더니 오른팔을 방패 삼아 내밀고 왼손으로 카운터를 날린 것이다.
“이거슨 미끼! 나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테야!”
훙-!
거창한 다짐과는 별개로 이번엔 헛손질, 다루기 힘든 고릴라 암즈에 캐롯이 혀를 차는데 스틸레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꼬맹이! 갑자기 궁금해졌는데, 오토마톤도 자주 쓰는 손이 있어?”
막 대답하려는데 목소리가 멀어지는 것이 기묘하다.
먼지구름을 헤치고 나가 보니 스틸레인이 자리를 바꾸려고 벌써 저만치 달려가고 있었다.
“야! 어디 가! 치사! 치사해!”
프하하! 웃은 스틸레인이 씩씩 숨을 몰아쉬며 손가락 욕을 날린다.
“난 사람이거든!”
얄미운 엘프!
이대로 싸워도 상관없지만 캐롯도 뒤로 돌아 달렸다. 왜냐하면 급하게 만든 고릴라 암즈의 상태가 이상해서.
“왁! 덜그럭거려!”
늘어뜨린 양팔을 질질 끌고 벤치로 달려가는데 뒤에서 화려하게 수리된 스팅이 쫓아온다.
짝-!
챙-!
캐롯과 손을 마주치자마자 달려 나간 오토마톤이 떨어지는 검을 받아냈다. 전 주인의 영향으로 검객의 길을 걷고 있는 자동 인형 로테였다.
“반갑다. 나는 로테.”
“반갑습니다. 나는 스팅.”
마주한 검 사이로 마스크를 내밀며 짧게 인사를 마친 그 둘은 화려한 칼솜씨를 선보였다.
챠챠챠챠창! 챙! 캉!
스팅이 단순히 속도로 때려 맞추는 고속 타격 검이라면 로테는 하프 소딩에 기반을 둔 전투 기술에 능했다.
예를 들면, 무섭게 날아드는 칼날을 강철 장갑으로 잡아챈 다음 칼손잡이를 쥔 손 그대로 주먹질을 날린다던가 하는.
쾅-!
페이스 마스크에 주먹질을 당한 스팅이 삐꺽이며 물러선다.
로테가 뒤를 이어서 칼날을 단창처럼 붙잡고 덤벼들자 스팅은 거리를 두더니 재빨리 위력적인 찌르기를 선보였다.
벤치에서 긴급 수리 중이던 캐롯이 빽 외쳤다.
“피해! 그 찌르기는 위험해!”
동시에 눈을 번뜩인 스팅이 돌격창처럼 쏘아져 나갔다.
쿠쾅-!
카가각!
직선으로 날아드는 롱소드의 진행 방향을 칼날을 비껴 대 틀어 버린 로테는 그대로 검을 던져 버리고 스팅의 팔을 붙잡아 꺾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끼긱기긱-!
쓰러진 스팅이 일어서려 했으나 팔이 뒤로 꺾인 상태라 움직일 수가 없다.
삐빅!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카운트가 시작되려는데 갑작스레 스팅의 머리가 부엉이처럼 뒤로 돌아왔다.
쾅! 빠각!
관절의 반대 방향으로 꺾여 날아온 주먹에 로테의 고개가 삐뚤어졌다.
“으겍! 저게 뭐야!?”
크랭크도 수리하다 말고 신기하다는 듯 쳐다본다.
“이중 관절을 이용한 역각 구동인가, 참신하군.”
팔과 목이 뒤로 돌아간 기괴한 몸으로 일어선 오토마톤 스팅이 곧 그것들을 원래대로 되돌리더니 롱소드를 주워 들었다.
로테도 일어났으나 그의 검은 부러진 상태, 그걸 벤치에서 보고 있던 아리에테가 자기 검을 던졌다.
“이걸 써라!”
훙훙훙! 깡!
날아가던 검은 공중에서 다른 칼에 부딪혀 떨어졌다.
검을 던진 것은 다름 아닌 스팅, 그는 장갑을 낀 주먹을 들더니 곧 맨손 격투술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관절이 반대로도 꺾이는 오토마톤의 격투술은 인간의 그것과는 별개로 굉장히 기괴하면서도 엄청난 효율을 자랑했다.
벤치에서 지켜보던 장로 필림도 놀라워했다.
“굉장하군! 대단하구나.”
그의 곁에는 트리스타가 피로에 쌓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굳이 사람 형태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적용해 본 건데, 내구성이 약하군요. 좀 더 궁리가 필요합니다.”
크랭크처럼 팔짱을 낀 그녀가 말했다.
“저는 아직 더 배워야 합니다.”
그녀의 열의를 지켜본 필림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잠자코 있던 후민이 시계를 보고 끼어들었다.
“저, 시간 다되어 가요. 지금 불러서 수리해야지 대난전에서 밀리지 않을 거예요.”
“대난전? 그건 뭐지?”
누나 리민의 중얼거림, 물을 마시며 쉬고 있던 스틸레인도 시계를 보더니 불만을 드러냈다.
“쯧, 경기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걸.”
“이건 막판 뒤집기 같은 거라서요. 미리 준비해야 해요.”
“와, 이거 제 동생입니다. 제 동생요.”
똑똑한 동생을 둔 리민이 대견하다는 듯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용주가 싸움질에만 관심을 두었기에 어쩔 수 없이 팀의 운영을 담당했던 후민의 주장에 스틸레인이 힘을 실어줬다.
“그 녀석 말대로 해. 필림, 다음 내보낼 녀석 데려와. 어디에 있냐?”
딱!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은 필림 장로가 손가락을 튕기자 벽에 기대어져 있던 관짝이 들썩이더니 뚜껑이 열렸다.
삑-!
팀 스틸레인의 벤치에서 교대 사인이 올라왔다.
정방향 역방향 양쪽으로 움직이는 팔다리로 기괴한 격투술을 선보이던 스팅이 뒤로 물러서자, 분전하던 로테 역시 서둘러 아까부터 복귀 사인을 내고 있던 팀 벤치로 달려갔다.
“어서 와! 으왁! 얘 팔 좀 봐!”
로테는 덜렁거리는 양팔을 흔들며 말했다.
“가능한 한 대응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맨몸으로 맞서기엔 상대의 가동 영역이 규격 외. 저런 건 본 적이 없다.”
“팔다리가 앞뒤로 다 꺾이는데 나라도 놀라겠다. 근데 넌 왜 아까부터 반말이니?”
“연산 능력을 확장, 내가 인식하는 세계가 넓어졌다.”
아리에테가 피식 웃으며 캐롯을 보았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냐?”
“에에엥? 나는 그래도 사람 봐가면서 하거든요? 아리에테야말로 아무한테나 막말하잖아. 엄청 버릇없게 보이거든, 그거?”
아리에테는 오히려 뻔뻔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모르는 사람인데 알 게 뭐냐? 숙이고 들어가면 머리로 올라서려는 것들이 많은 곳이다. 기선 제압이 중요해.”
“어휴! 어련하시겠어요? 그래도 동네 어르신들한테는 좀 굽신거려 봐. 다들 뻣뻣해서 시집이나 가겠냐고 말하더라.”
아리에테가 당황했다.
“무무무슨! 그런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러는 와중에 로테를 데려다 자리에 앉히고 팔을 살피던 크랭크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프레임을 부러뜨릴 줄이야. 이래서 투기장에 출전하는 오토마톤들이 다들 교체식 팔다리를 했던 거로군.”
수리가 끝난 고릴라 암즈로 엄지손가락을 펴든 캐롯이 윙크했다.
“나랑 아리에테가 시간을 벌어볼 테니 최선을 다해봐.”
“알겠다. 맡겨 봐라.”
양측 벤치에서 긴급 수리가 한창인 와중에 다음 선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 나선 것은 아리에테. 그리고 상대 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관전하려고 몸을 내밀고 있던 캐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어? 아리에테가 밀리는데?”
“우어억?!”
촤르르륵-!
뒤로 죽 밀려난 아리에테가 검을 고쳐 쥐었다.
심심하면 공방의 자동 인형들과 대무를 해대는 덕에 개인 전투력은 꽤 만만치 않다고 자신하던 그녀는 완전히 당황해 버렸다.
“무슨 힘이-!”
말하는 도중 그녀를 향해 묵직한 나무망치가 떨어져 내렸다.
쾅-! 쿠르르릉-!
엄청난 무게 때문에 먼지구름과 함께 땅울림이 일어날 지경이다.
몸을 숙인 아리에테가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
“나무망치 주제에 대체 뭐냐, 안에 뭔가 넣은 건가? 그렇다면-!”
그녀가 덤벼들자 상대측 오토마톤이 커다란 나무망치를 다시 들어 올렸다.
떨어지는 망치를 향해 아리에테가 검을 휘두른다.
“기껏해야 나무다! 잘라주마!”
깡-!
“깡?”
아리에테가 당황했다.
쾅-!
벤치에서 보고 있던 필림이 히죽 웃는다.
“저 망치는 세계수의 규화목으로 만든 거지. 소드 마스터가 멸종한 지금, 그걸 벨 수 있는 사람은 없다네.”
쾅-! 쾅! 쾅!
떡방이 찧듯이 떨어지는 나무 화석 망치의 폭발적인 위력에 아리에테는 이리저리 구르며 회피에만 급급했다.
“심판! 이건 전술과 개인기를 겨루는 시합 아니었나!”
히죽 웃은 심판이 확성기를 들고 대답했다.
“그 이전에 구경거리라서요. 당신에게 건 사람들이 많습니다. 좀 더 멋진 모습 보여주십쇼.”
“망할-!”
쾅-!
사람 많은 투기장에 나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티 안 나게 화장도 좀 하고 무장도 최대한 멋진 걸로 골랐는데, 실상 그녀를 맞이한 것은 멋진 격투가 아니라 무지막지한 망치질이었다.
“으악-!”
쾅-!
“오우야! 이건 이것대로 보기 좋은데? 몸매가 죽여 주는걸?”
“흐, 흐흐, 가, 가슴이 출렁출렁거려.”
화려한 여기사가 망치를 피해 볼품없이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모습은 묘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하여 발칙한 자들의 시선을 더욱 부릅뜨게 했다.
캐롯이 손을 내밀고 바락바락 외쳤다.
“바보야! 고집 피우지 말고 이리 와서 교대해!”
“에잇! 제길!”
눈을 질끈 감은 아리에테는 결국 롱소드를 집어 던져 상대를 주춤하게 만들더니 곧바로 달려서 캐롯과 교대했다.
이윽고 고릴라 암즈와 세계수 규화목 망치가 격돌한다.
“으랴차!”
훙!
빠각!
이를 까득 깨문 캐롯의 왕 주먹에 규화목 망치가 부서졌다.
정확히는 무게를 버티지 못한 자루가 부러져 버렸다.
“어라? 부서지네? 아리에테가 힘 다 빼놔서 그런가?”
벤치에 쓰러져 있던 아리에테는 좀 더 버텨야 했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킥킥 웃던 캐롯이 바닥에 굴러다니는 망치 머리에 발딱 올라서더니 팔짱을 끼고 상대를 내려다보았다.
맞은편 오토마톤 역시 가만히 캐롯을 올려다보았는데 눈빛이 이글이글 불타는 것 같다.
뭐지? 이 묘한 기분.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