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토마톤과 함께하는 투기장! (6) 289 >
3일 후, 드래곤 슬레이어의 재시합 소식 덕에 트로겐은 아주 축제 분위기였다.
투기장으로 통하는 입구는 한두 군데가 아니었고, 그 주변에는 으레 노점들이 즐비하게 깔려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세상에! 불법 투기장 하나만으로 이 정도야?”
순찰 중이던 경비대장 후보 리엘과 그린이 유례가 없을 정도로 북적이는 도시를 바라보며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청동문을 통해서 하하호호 웃으며 들어서는 여행객들을 보고 있던 리엘이 고개를 휙 돌리더니 그린을 보았다.
이 금발 인형 경비대장도 마침 여행객들을 보고 있다.
“너도 지금 나랑 같은 생각했지?”
“그건 어떤 생각입니까?”
리엘이 끙하는 표정을 지었다.
“저기, 경비대가 할 소리는 아니지만 도시 운영상으로는 꽤 괜찮지 않아? 이런 거 말이야.”
신생 방주 도시 트로겐에는 아직 그럴 듯한 돈벌이가 없었다. 순서상 상공업을 발달시키려 노력하고는 있지만 그것도 아직은 걸음마 단계, 이 와중에 들어선 사행성 투기장은 도시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구경하러 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식당과 가게가 들어서고, 투기장에서 활약하는 오토마톤을 위한 수리점은 물론, 기타 관련 업자들이 순식간에 자리를 잡았다.
겨우 그거 하나에 크고 작은 가게들이 달라붙자 하나의 경제가 굴러가기 시작한다.
리엘이 쓴 것을 삼킨 표정을 지었다.
“투기장이야 가끔 성행하다 사라지곤 하는데 이렇게 뻔뻔하게, 거기에 지하경제까지 쑥쑥 키워 버린 경우는 처음이야. 도시 운영 위원단은 이 기회에 반성해야 한다고.”
그린은 대답 없이 몸을 돌리더니 시찰 겸 순찰을 계속했다. 인파 속에 가려져 있던 경비대원들이 금발의 심판자를 따라 걷는데 꽤 멋진 모습이었다.
“결정하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경비대장이 해야 할 일은 도시민의 안전을 위한 치안 유지가 최우선, 여기에 사행성 투기장은 불법입니다. 토르페도의 체포조는?”
“지금 준비 중입니다.”
그린이 팔을 휘두르며 지시했다.
“필요악 같은 건 듣기 좋은 헛소리입니다. 불의는 처단합니다. 전 경비대원은 각자 대기 위치로, 사람들 사이에 섞여 나올 간부급 관련자를 색출하여 체포합니다.”
그러자 경비대원들이 우르르 달려 골목길로 사이사이로 퍼져 사라졌다.
뒤에서 그린의 카리스마를 눈여겨보던 리엘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가 다시 익살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팔짱을 끼었다.
“오늘 어쩌면 잔업할지도 모르겠는걸?”
* * *
지상과 마찬가지로 지하 투기장도 한참 준비 작업으로 분주했다.
험상궂은 사내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전표를 팔고 자리를 안내하는 등의 일을 맡았는데 생각보다 잘해내고 있었다.
“자자! 배팅 서두르쇼!”
“통로에 멈추지 마!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채워 앉아! 화장실하고 매점은 저쪽이다! 자리 맡고 나서 가!”
“이봐! 싸우지들 마! 투기장에 집어 넣어줄까! 엉?!”
조금 거친 안내원들의 활약으로 투기장 내부는 이제 사람이 꽉꽉 들어차 발 디딜 틈조차 없게 되었다.
대기실에 와 있던 필림 장로가 바글바글한 관중석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기껏해야 싸움 구경 아닌가? 다들 뭐가 그리 재미있어서 모여드는 건지 모르겠군.”
“투쟁은 생물의 본능이야. 대리 만족이라도 어디냐? 나는 이해해.”
놀랍게도 이 말을 한 것은 그의 동족이었다.
재시합 준비 만전, 대기실에는 포니테일의 과격 엘프 스틸레인과 그들의 기술로 오버홀을 마친 오토마톤 스팅을 비롯해 팔다리에 의수를 달고 나온 여자도 하나 있었다.
특이점은 셋 다 머리가 빨간색.
후민이 두 다리로 서 있는 누나를 보고 눈물을 머금었다.
“누나.”
“야, 사내자식이 왜 울어?”
번쩍거리는 의수로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리민이 씩 웃는다.
막상 그녀도 의족을 달고 다시 걷게 되었을 땐 눈물을 보였었다.
물론 지금은 다시 그 괄괄한 누나로 돌아왔지만.
“하여튼 고맙다야. 덕분에 다시 일어섰어. 스팅도, 주인님 먹여 살리느라 고생 많았지?”
역시 번쩍이는 몸이 되어 버린 스팅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그랬습니다.”
“야! 그럴 땐 빈말로도 아닙니다, 주인님. 이렇게 말해줘야지!”
“사실을 말한 것일 뿐입니다. 당신은 편식이 너무 심했습니다. 이제 두 다리로 걸을 수 있으니 먹고 싶은 걸 먹을 수 있겠지요.”
“아무렴! 이제 너희들이 붙여준 이 팔다리로 더 많은 걸 해내야지! 그 여기사처럼!”
사납게 웃음 지은 리민이 손바닥을 주먹으로 때렸는데 퍼억! 하는 소리가 울린다.
하얗게 질린 그녀가 손을 붙잡고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끄으으아아! 아파! 소, 손이! 내 손이!”
“이해할 수 없군요. 왜 멀쩡한 손을 때리는 겁니까? 주의하십시오.”
“걱정해 줘! 걱정!”
“이해 불가, 그건 오토마톤은 이해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이 거짓말쟁이!”
괄괄한 리민이 스팅에게 삿대질을 하며 꽥꽥거리자 따라온 엘프들은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뒷짐을 지고 있던 필림이 끼어들어 한 가지 가설을 주장했다.
“소란스럽군. 빨간 머리는 다 이런 건가?”
격투용 장갑을 끼고 있던 스틸레인이 입술을 쭉 내밀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다.
“뭐, 인마?”
“어이쿠, 실례했습니다.”
딴청을 부리는 필림을 좀 쏘아본 그녀는 리민과 스팅에게 고개를 돌렸다.
화려한 빨강이 가득하다.
그녀는 이 빨간 물결이 참 마음에 들었다.
“야, 너희들. 이대로 나랑 파티까지 결성하는 게 어떠냐? 너희들은 돈을 벌고 나는 심심풀이를 해결하는 거지.”
“엇, 정말요?”
“안됩니다! 대장로님! 여기까지만 돌아보고 복귀하시기로 하셨잖습니까!”
고개를 돌린 스틸레인이 역시 입술을 오므린 채 또 빙구미를 선보였다.
“움? 그랬나? 기억 안 나는데?”
“아니! 장로님! 일부러 그러시는 거죠!”
“크크큭, 흐흐흑!”
진담과 허풍이 조금씩 섞인 사람들의 우스꽝스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후민은 이제 울면서 웃기 시작했다.
오늘은 미래를 되찾은 날,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와아아아!”
관중들의 함성이 쏟아지자 농담을 주고받던 사람들이 고개를 돌린다.
경기장 저편, 3일간의 준비 끝에 서로에게 승리와 패배를 안겨줄 친애하는 호적수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고개를 돌린 스틸레인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음, 저 자식들도 왔네. 시작하자. 선빵은 당연하지만 나다.”
그녀가 경기장에 오르자 사람들이 열화와 같은 환호를 내질렀다.
“우와아아아! 망나니 엘프 스틸레인이다!”
“이번엔 이상한 짓 좀 하지 마!”
이어서 캐롯도 맞은편 경기장에 올랐다.
“드래곤 슬레이어다!”
“힘내라 꼬마야! 너한테 전 재산을 걸었어!”
고개를 휙 돌린 꼬마의 작은 얼굴이 오만상을 찡그리며 커다란 주먹을 들고 흔든다.
“아휴! 그러지 좀 마! 그걸 왜 매번 어딘가에 걸어두는 거야? 그러니까 도망가는 거라고!”
“으하하! 저 녀석 말하는 것 좀 보게!”
한마디 쏘아붙여 주니 다들 신나게 웃기 바쁘다.
“야호! 그래도 나 보러 와준 건 기뻐! 다들 밥은 챙겨 먹었어?”
평소처럼 밝게 웃으며 관중들에게 두 손을 흔드는데 원근감이 이상한지 다들 눈을 가늘게 뜨거나 크게 떴다.
“이봐, 저 녀석 팔이 좀 이상하지 않아?”
“어? 저게 뭐지?”
고릴라처럼 커다란 양팔을 붙인 캐롯이 잘록하지만 짧은 허리에 그 손을 올리더니 도끼눈을 뜨고 맞은편을 노려보고 있다.
“여! 꼬마! 좀 괜찮냐?”
그 목소리에 캐롯의 얼굴이 한층 더 우거지상이 되었다.
오토마톤인데도 불구하고 고르곤의 재주 덕분에 얼굴에 핏줄 비슷한 것도 돋아나 버렸다.
경기장에 올라온 스틸레인의 인사에 캐롯이 엄청나게 큰 팔을 들더니 손가락을 내밀었다.
“야! 빨간 머리! 이번에도 마법 쓰면 당신 실격이야! 알아!”
맞은편에서 허리를 꺾으며 프하하 웃던 스틸레인이 두 주먹을 쥐고 몸을 숙인다.
오랜 세월 살아오면서 별의별 직업을 다 겪어본 그녀가 이번에 선택한 것은 격투가.
빨간 머리 엘프가 장년기 엘프의 특징인 송곳니를 드러냈다.
“궁지에 몰리면 뭐라도 해야지. 규칙에 얽매여 죽을래?”
“우와! 당신 진짜 엘프야?”
“아무렴!”
퉁!
스틸레인이 발사되었다.
새로운 규정, 공격 마법 이외의 것은 주최 측과 협의 후 일부 허용.
보조 마법으로 이동 속도를 올린 엘프가 덤벼들자 캐롯도 맞대응한다.
커다란 주먹을 불끈 쥐고 지면을 때리자 폭발로 파편이 그녀를 덮친다.
쾅! 와르륵-!
외부 무장 왕 주먹을 낀 캐롯이 도끼눈을 뜨고 일어섰다.
“우리 주인님이 만들어 줬어! 당신을 골탕 먹이려고!”
“하하하! 이거다! 이 긴장감! 이 고양감!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이 기분!”
시작종도 때리지 않았는데 저들끼리 싸움을 벌이는 그들을 보고 심판이 확성기를 들었다.
“아니아니, 진짜로 목숨 걸지는 마요! 하여튼 경기 시작!”
“와아아아아아!”
격돌하는 짐승들을 보고 오락에 굶주린 관중들이 환호를 내질렀다.
전용 관람석에서 그걸 내려다보던 붉은 드레스의 여자도 히죽 웃는다.
* * *
같은 시간, 도시 지하의 텅 빈 대피소에 경비대 소속 체포조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앞에 선 토르페도가 말했다.
“시작한다. 다들 경기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관계자만 붙잡아라. 가능한 소란은 일으키지 말고.”
“그런데 저희 어떻게 들어갑니까?”
경비대원들이 의문을 표시하자 토르페도가 갑자기 웃통을 벗더니 온몸에 힘을 주며 마법의 단어를 외쳤다.
“흡! 봐라! 아름다운 이 근육! 3대 800을 위한 노력의 결실!”
츠팟!
“으억? 대장이 사라졌다!”
모두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토르페도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대피소 입구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봤나? 이 개념 결계를 통과하는 방법은 머릿속을 비우는 거다. 투기장에 적의를 가지니 못 들어가는 거야.”
“오오!”
“와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토르페도가 이 비밀을 추리해 냈다고?”
같은 경비대장 후보이자 동기인 레일라의 지적에 토르페도가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흥! 나에 대한 너의 평가 잊지 않으마. 시작하자. 지금 안쪽은 광란의 도가니야. 본부석부터 덮친다. 다들 벗어라.”
당황한 여성 대원들이 뭐라 하기도 전에 대부분이 그의 말에 따라 옷을 훌렁훌렁 벗어 던져 버렸다.
“으아아악! 징그······!”
츠팟!
질겁하던 여성 대원이 갑자기 사라지자 토르페도가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엄지손가락을 들었다.
“봤지? 확실히 효과가 있다. 남자들은 근육을, 여자들은 그걸 음미하도록.”
“말 좀 가려서 해요! 음미는 얼어죽······!”
츠팟!
“우오오! 나를, 나를 봐줘! 이 대둔근을!”
“으악! 엉덩이 저리 치우······!”
츠팟츠팟!
고요한 지하 대피소, 경비대원들의 대환장 파티가 시작되었다.
오로지 토르페도만이 팔짱을 끼고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 순조롭군.”
“순조롭긴 등시나! 대원들 그만두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야! 모집도 어려운데!”
짝-!
츠팟!
분통을 터트리며 그의 등짝을 후려치던 레일라조차 개념 결계를 돌파, 토르페도는 히죽 웃으며 남은 자들을 독려했다.
“실망하지 마라! 초조해하지 마라! 남의 살 따위 부러워 말고 온전히 네 살에게 관심을 가져라! 나를 사랑해야 비로소 남도 사랑할 수 있는 거다! 이렇게! 흐으음!”
멋진 남자 토르페도의 외침에 남아 있던 경비대원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그의 자세를 따라 했다.
그 덕분에 이제 없던 관심도 생길 지경이다.
“사이드 체스트에 이어 우정의 업 도미날 앤 트으으아아이이잇!”
“우오오오옵!”
츠파파파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