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토마톤과 함께하는 투기장! (4) 287 >
쿠오워어어억! 두두두-!
“하하하! 나 잡아봐라!”
술 안개를 헤치고 뛰쳐나온 캐롯의 뒤로 거대한 코뿔소가 모습을 드러냈다.
술 반병으로는 어림도 없었는지 캐롯이 다급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술 좀 더 줘! 빨리!”
“그렇다면 내 걸 받아라! 이건 캡틴쿠다! 아주 독하지!”
“독 안개를 만들어 뿌릴 셈이냐! 내 걸 받아! 이건 불도 붙어!”
정신줄을 놓아 버린 주정뱅이들이 술병을 던지기 시작했고, 그걸 한 아름 껴안은 캐롯은 무시무시한 야수를 뒤에 달고 달리며 연신 병을 입에 대고 기울였다.
샤아아아아······!
두두두두두! 쾅! 쾅! 쾅!
경기장 자욱이 술 안개가 퍼져 나가고 거기에 휘말려 여러 차례 벽을 들이받은 마왕류 무소는 결국 졸린 듯 눈을 끔뻑이더니.
쿵!
마지막 돌격을 끝으로 방호벽에 머리를 처받은 채 기절해 버렸다.
투기장 전체를 채운 안개 무리에 얼큰하게 술기운이 올라 버린 심판이 외쳤다.
“히끅! 원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다운! 다운! 마왕류가 쓰러졌다!”
곧이어 쓰러진 마왕류 무소의 배를 타고 기어오른 캐롯이 양손에 술병을 들고 승리의 함성을 내질렀다.
어째서인지 벌게진 얼굴은 덤.
“우뾰삐-!”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던 관중들은 곧 대폭소를 터트리며 환호했다.
“와하하! 뭐라는 거야!”
“저 자식도 취했구나!”
“오토마톤인데 취해?”
“아무렴 어때! 으하하!”
기괴한 소리를 지르고 데굴데굴 굴러 내린 캐롯은 결국 운영위원에게 안겨 크랭크의 투구를 쓴 코비에게 인도되었다.
사무실로 돌아온 캐롯은 술기운이 오른 루칸에게 격한 칭찬을 받았다.
“마치 축제 같지 않냐! 하하하!”
“으에, 이거 왜 이러지?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는데······.”
반면 제정신을 차린 캐롯은 머리를 붙잡고 힘들어했다.
단독으로 마왕류를 쓰러뜨린 적은 처음인지라 하여튼 예선은 통과, 드래곤 슬레이어의 가능성을 확인한 투기장에서는 바로 대전 상대를 잡아주었다.
날짜는 내일, 상대는 현재 주가 급상승 중인 팀 스틸레인.
“허억! 드, 드래곤 슬레이어요?”
“으하하! 좋았어!”
빨간 머리 엘프 여자가 신나게 웃으며 주먹을 팡팡 부딪친다. 그녀와 팀을 이뤄 연승 중인 소년 후민이 자기 오토마톤을 바라보았다.
“우리 애는 그 정도로 강하지 않아요! 부서질 거예요.”
“이 꼬마는 왜 이리 겁이 많냐?”
선수 대기실, 마스터 후민이 버럭 외쳤다.
“비빌 언덕이 없으면 누구든 나처럼 돼요! 이번엔 포기해요! 진다고요!”
“그럼 네 누나 의수 마련은 어쩔 건데?”
후민이 움찔했다.
엘프답지 않게 케케케 웃으며 송곳니를 드러낸 스틸레인이 허리에 손을 올리고 그를 쳐다보았다.
“상대는 드래곤 슬레이어다. 말도 안되는 배율일 거야. 이기면 네 누나에게 새 팔다리를 달아줄 수 있어. 아르곤의 그 여기사처럼.”
사지 절단 여기사 아리에테의 이야기는 유명했다.
괴물에게 팔다리를 빼앗긴 사람들에겐 그야말로 희망의 등불.
야비한 엘프의 제안에 후민의 눈빛이 흔들린다. 그러다 문득 앞의 오토마톤을 바라보았다.
누나가 모험가로 활동할 당시 마련한 것으로, 방열 가발도 자기 머리를 잘라 만들 정도로 애지중지하던 녀석이었다.
게다가 이름도 멋지게 지었다.
“스팅 괜찮겠어?”
“괜찮습니다. 저는 주인님께 영양가 높은 식사를 준비하고 싶습니다.”
확실히 투기장에서 싸우니 보리빵에 물을 말아 먹는 것보다 나은 생활이긴 하다.
시큰둥한 얼굴로 눈물 나는 그네들의 가정사를 구경하던 스틸레인이 끼어들었다.
“어이, 잊지 마라. 지금 너희들 고용주는 나라고.”
“예, 마스터.”
그때 대기실 문이 열리더니 덩치 큰 남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팀 스틸레인, 준비하십쇼.”
“좋아! 가자! 한바탕 날뛰어 보는 거야! 으하하!”
엉덩이를 씰룩이며 스틸레인과 오토마톤 스팅이 걸어 나갔다. 공통점은 둘 다 빨간 머리.
투기장 출전을 위해 여러 전투용 자동 인형을 물색했는데 그중 스팅이 선택된 이유는 단순히 머리 색이 같아서.
“와아아아!”
롱소드를 뽑아 들고 함성이 쏟아지는 경기장을 마주한 스팅을 바라보며, 후민은 얼마 전까지 둘이서 약초를 캐 누나를 보살피던 나날을 떠올려 보았다.
무어라 잘 헤아리지는 못하겠지만 뭔가 복잡한 기분이 든다.
다만, 하나는 확실하다.
내가 잘해야 해!
의지를 다지는 소년에게 망나니 장로 스틸레인을 보좌하는 엘프 청년이 다가왔다.
“소년, 아예 이쪽에 소유권을 전부 넘기는 것이 어떻소? 가격도 후하게 쳐주지.”
우물쭈물하던 후민이 울상을 지으며 웃는다.
“누나랑 저, 스팅, 이렇게 우리 셋밖에 없어요. 엘프님이시면 가족을 팔겠어요?”
비빌 언덕이 없는 소년은 자동 인형마저도 가족으로 끼워 넣고 있었다.
엘프 남자는 안타까운 듯 입을 다물었다.
* * *
앞서 먼저 투기장을 찾아가 축제 분위기를 만들고 돌아온 캐롯은 이제 경비대에서 그 정확한 위치를 알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위치라는 게 이미 다 알고 있는 곳이었다.
경비대장 집무실, 책상 위에 펼친 도시 설계도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캐롯이 말했다.
“요기야. 지하 수로로 내려갈 수 있었어. 아니, 근데 온 동네 사람이 다 돌아다니던데 여길 못 찾아?”
경비대장 후보생 중 하나인 레일라가 고개를 내밀었다.
“여기는 도시 건축 당시에 지하 대피소로 만든 곳인데, 확인된 것만 다섯 군데 정도 되거든? 그런데······.”
“헐, 전부 빈 곳이라고?”
크랭크가 찾아왔다는 소식에 서둘러 복귀한 토르페도가 말했다.
“이 중 하나에 있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경비대는 진입할 수 없었어. 거기 드나드는 사람들을 앞세우고도 가봤지만 역시 실패했다. 못 들어가.”
캐롯이 놀라워했다.
“호우야. 신기하네. 어디 마녀가 저주라도 건 거야?”
“신빙성 높은 가설이었습니다만, 당신의 보고로 확실해졌습니다. 개념 결계가 있나 봅니다.”
여전히 책상에 앉아 있던 그린의 대답이었다.
플루이드의 결혼식 이후 오랜만에 만난 그린은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캐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얼굴을 내밀었다.
“호오오오, 그런데 너 진짜 그린 맞지? 분위기가 색다른데.”
“씁! 경비대장님께!”
경비대장 후보생들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쳐다보자 캐롯은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눈치를 살피는 시늉을 했다.
그린이 손을 들었다.
“업무 중 논리 충돌을 자주 일으키는 바람에 대대적인 개수 작업을 받았습니다. 달라 보이는 건 그 때문일 겁니다.”
“으햐~! 경비대장 일이라는 게 오토마톤이 오버 히트할 정도야?”
“신규 방주 도시 일이란 게 그렇습니다. 내가 정리하고 다듬어서 이쪽으로 넘길 겁니다.”
그린이 가리킨 곳에는 경비대장 후보들이 하나같이 팔짱을 끼고 잘난 체를 하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시아가 눈을 반짝이며 끼어들었다.
“저기, 저기. 네가 그 캐롯이지?”
“맞아요. 내가 바로 아르곤 최고의 귀염둥이! 우리 초록이의 친구!”
“씁!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호옵!”
입을 두 손으로 가리고 몸을 움츠렸던 캐롯이 슬그머니 웃기 시작한다.
그 행동을 지켜보던 신시아가 놀라워했다.
“와아! 어떻게 한 거죠? 이렇게까지 유연하다니! 우리 경비대장도 이 정도로 만들어보고 싶어요!”
집무실에 잠깐의 정적이 흐르더니 모두가 반대, 거절 의사를 밝혔다.
“아니오. 나는 지금으로도 충분합니다.”
“경비대장이 저런 촐싹쟁이가 된다니! 나는 반대다!”
“옳소!”
잠깐 낄낄거린 캐롯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어쩔래? 그게 정말 개념 결계라면 못 들어가는 사람은 못 들어간다는 거잖아.”
팔짱을 낀 크랭크가 말했다.
“뭔가 순서와 법칙이 있을 거다. 그걸 찾아보자. 캐롯과 코비는 예정대로 투기장에 나가도록 해라. 새로운 정보가 있으면 알려주고.”
“알았어.”
그리하여 대전 당일, 드래곤 슬레이어가 출전한다는 소식은 도시 전체에 퍼져 평소보다 많은 사람이 투기장을 방문했다.
신기한 점은 여전히 뭔가 꺼림칙한 꿍꿍이를 가진 사람은 전원 텅 빈 대피소로 흘러들어 간다는 것.
거기엔 크랭크의 일행도 섞여 있었다.
크랭크가 말했다.
“어제부터 여러 가지로 시도해 봤지만 계속 맴도는군요.”
한가하다고 탐정 놀이 삼아 따라나선 신시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에에, 오토마톤의 쌈박질이라니 꼭 보고 싶었는데.”
“도시 지하에 이런 허가받지 않은 미궁이라니 불쾌하군.”
곁에 서 있던 토르페도가 터질 듯한 근육을 움찔거리며 말하자 신시아가 그의 제복을 지적했다.
“애초에 이렇게 대놓고 경비대 제복을 입고 오면 어떻게 해요? 사람들 눈도 있는데.”
“음, 그런가?”
얼굴을 긁적이던 토르페도가 갑자기 상의를 벗어 던졌다.
“옷을 벗으면 어떨까?”
크랭크의 눈빛이 번뜩인다.
“당신, 전보다 훨씬 좋은 몸이 되었군요.”
“후후후! 당신이라면 알아봐 줄 거라 믿었지. 잘 보라고, 흡!”
뚜드득!
토르페도가 팔에 힘을 주자 어지간한 사람 머리 크기의 이두박근이 솟아오른다.
크랭크도 따라서 몸에 힘을 주려는데 갑자기 시야가 바뀌어 버렸다.
츠팟!
어둠이 사라지고 빛이 확 피어나더니 웅장한 함성이 울려 퍼진다.
“와아아아아!”
“우오오!”
서로 근육 자랑에 여념이 없던 두 사람이 당황하여 고개를 들었다.
“응?”
“여긴?”
“어머나! 어떻게 된 거예요?”
두 근육 덩이를 징그럽다고 생각하던 신시아도 갑자기 바뀐 주변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크랭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건 개념 결계군요. 아마 투기장에 적의를 가진 사람은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놓았나 봅니다.”
토르페도가 고개를 갸웃했다.
“난 이해를 못하겠군. 그럼 지금은 왜 들어온 거지?”
“생각해 봅시다. 방금 전 우리는 근육으로 한마음이었잖습니까.”
그랬다. 잠깐이었지만 투기장이고 뭐고 머릿속에 오로지 아름다운 근육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감동한 토르페도는 자기 이두박근에 진한 입맞춤을 남겼다.
“이 순수한 마음, 잊지 않겠다. 으움. 쭙쭙!”
“으엑, 징그러워! 그러지 좀 마요!”
“와아아아아!”
신시아의 일그러진 얼굴 뒤로 격렬한 환호가 솟구친다.
고개를 돌리니 경기장 안에서 익숙한 사람들이 날뛰고 있었다.
빨간 머리 스틸레인은 무려 오토마톤과 접근전을 벌였다.
“으아하하하! 덤벼라! 꼬맹이!”
쾅! 쾅!
“으아악! 반칙! 반칙 아냐!?”
전신에 마법을 휘감은 스틸레인이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경기장 곳곳에 설치된 장애물이 박살 나 버린다.
눈이 돌아간 스틸레인은 씩씩 숨을 몰아쉬면서도 좋아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재, 재미있어! 너무 재미있어!
“흐하하! 심판이 가만히 있잖느냐! 우리 함께 관객이 원하는 걸 보여주자!”
공중에 휙 떠오른 캐롯이 버럭 외쳤다.
“무슨 엘프가 이렇게 호전적이야! 그리고 이런 불법 투기장을 봤으면 단속부터 해야지!”
상체를 휙 돌리자 팽이처럼 돌기 시작한 캐롯이 스틸레인에게 날아든다.
으하하 웃으며 뒤로 덤블링을 넘은 그녀는 굴러다니는 돌기둥을 들어 올리더니 그걸 냅다 던져 버렸다.
“이런 멋진 오락거리를 단속하라니! 오히려 장려하고 싶구나! 으라차!”
그녀의 용력으로 날아오르는 돌기둥은 관중석의 사람들을 충격에 빠트렸다.
“굉장해! 저걸 던졌어!”
“여잔데도 힘이 좋아. 평소에 가녀린 모습하고는 전혀 딴판이잖아? 저게 본모습인가?”
그러면서 사람들은 군데군데 보이는 어여쁜 엘프들을 힐끔거렸다.
관중석에 있던 그녀의 동족들은 별다른 변명이나 해명 없이 그저 두 손으로 얼굴을 덮고 있을 뿐이었다.
지, 진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