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토마톤과 함께하는 투기장! (2) 285 >
오토마톤의 튼튼한 몸은 참나무 방패에 비교할 수 있다.
튼튼하지만 아예 부수지 못할 것도 없다. 둔기나 쇠붙이, 화살 등에 충분히 타격을 입는다.
탁!
목검으로 날아오는 창대를 쳐 내자 창날이 휙 돌아간다.
그때를 노려 돌입하려 했으나 히죽 웃은 반디가 몸을 반 바퀴 돌려 창대의 아랫부분으로 글라디우스의 머리를 노렸다.
칙!
글라디우스가 서둘러 몸을 빼 그것을 피하자 반디는 낄낄거리며 창날을 다시 앞으로 내밀었다.
“창과 칼은 조금 달라! 타격점이 2곳이나 되거든? 잘 다루는 것들에게 걸리면 까다롭지! 바로 나처럼!”
“인정합니다. 나도 창술을 배워보겠습니다.”
“오우, 그러냐!”
다시 빙글빙글 돌리며 찌르기가 날아온다.
글라디우스가 그걸 견제하며 조금씩 뒤로 물러서기 시작하자 관중석의 탄식과 환호는 그칠 줄 몰랐다.
이 와중에 아준의 벤치에서는 긴급 수리가 한창이었다.
얼마나 큰돈이 걸린 것인지 수리공 다섯 사람이 부서진 오토마톤에게 달라붙어 있다.
“좋아 떼어냈다! 예비 팔 부착 서둘러!”
“마력 충전은 언제 끝나!?”
“금방 돼요!”
“전투복 상의가 너덜거려! 교체해!”
빠른 수리를 위해 고가의 장비들이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사람들의 목소리도 여기저기서 쏟아진다.
벤치에 앉아 경기장 상황을 살피던 팀 마스터가 눈을 부릅떴다.
“음? 저 자식들 태그한다!”
그 말대로 단창 공격에 밀리던 오토마톤 글라디우스가 뒤로 훌쩍 뛰더니 자기네 벤치로 달린다.
글라디우스 대신 나온 것은 여자였는데, 얼굴 전체를 가리는 하얀 마스크에 긴 머리를 산발한 덕분에 오토마톤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좌우에 길게 드러난 저 귀,
“쯧, 엘픈가?”
단창을 바로 잡은 반디의 앞으로 나온 엘프 전사는 무언가를 축 늘어뜨렸다.
촤르륵!
쇠사슬에 연결된 묵직한 쇳덩이가 모습을 드러내자 반디가 긴장했다.
“컥! 유성추?”
단창의 대응책으로 나온 유성추에 반디가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어이! 수리는 아직이야?”
“5분 더 버텨!”
“제길!”
휭휭휭-!
엘프 여자의 머리 위에서 유성추가 돈다.
단창을 내민 반디가 어색하게 웃었다.
“어어음, 나, 날씨 좋지 않소?”
촤르르륵!
대답 대신 유성추가 날아들자 겁먹은 반디가 반사적으로 몸을 틀었으나 유성추는 이름 그대로 급격하게 방향을 꺾어 그의 창대에 휘감겼다.
“으어억?”
단숨에 창대를 빼앗긴 반디는 곧 몸을 돌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상대편의 엘프 역시 손에 쥔 사슬을 내던지고 그를 쫓기 위해 달린다.
엘프의 신체 능력은 거의 오토마톤 수준, 벗어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크억컥!”
결국 상대 엘프에게 붙들려 난데없는 레슬링이 시작되었다.
다리를 휘감아 남자의 등에 달라붙어 그 목을 조르는 엘프 여자가 가면을 들이댔다.
“항복하세요.”
“크으윽, 으으음! 오, 오히려 조, 좋은걸?”
반디는 코를 벌렁거리며 정말로 좋아하고 있었다.
힘으로 그녀의 팔을 벌린 반디가 버럭 외쳤다.
풀려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소리를 지르기 위한 것이다.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엘프에게 안겨 보겠냐고! 우효! 좋은 냄새! 한 달간 목욕은 없다!”
“징그러운 남자군요.”
“우에에엑?!”
등에 달라붙은 엘프가 힘을 주자 반디가 당장 파랗게 질렸다.
그때 본부석에서 붉은색 깃발이 올라온다.
투기장도 결국 장사인지라 놔두면 수리와 치료를 해가며 하루 종일 싸워대기 때문에 일정 시간이 지나면 선수 전부를 투입시켜 대난전을 유도하도록 했다.
긴급 수리가 끝난 아준이 반디를 구하기 위해 뛰어나왔다.
상대측에서도 글라디우스를 내보냈고, 곧 둘은 조르기 중인 팀원을 구하고 지키기 위해 박진감 넘치는 쟁탈전을 벌였다.
아준 팀에서 손나팔을 만든 여성 기사가 외친다.
“반디! 버텨요!”
“어크억! 으히히-!”
엘프 여자에게 깔려서 질린 얼굴을 하면서도 반디는 웃고 있었다.
기가 찬 수리 기사가 중얼거렸다.
“저 자식, 지금 엘프 여자 엉덩이에 깔려서 좋아하는 걸 거야.”
“우와, 개변태네.”
“저런 놈은 어디든 꼭 한둘씩 있다. 3분 후 들어간다. 바즈라 준비해라.”
화려한 노란색 방열 가발을 가진 오토마톤이 벤치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오토마톤 바즈라는 좀 더 기괴한 모양이었다.
양팔에 외부 무장 집게가 달려 있고, 전투복도 크고 두꺼웠다.
하드 스킨은 출전 금지인지라 노말 오토마톤에 중장갑을 달아놓은 것이었다.
그때 갑작스레 공이 울렸다.
깡깡깡!
“그만! 그만해!”
심판이 경기 중단을 외치고 운영위원들이 달려 나왔다.
그들이 잡담하는 사이 붙들려 있던 반디가 결국 기절해 버렸다.
몹시 행복한 모습으로.
“아준 팀 다운!”
“어휴, 저 등신!”
“승자! 팀 글라디우스!”
검정과 흰색, 바둑판 모양의 체커 플래그가 올라왔다.
더불어 관중들의 환호성과 비명도 따랐다.
“우오오오오-!”
“믿고 있었다구!”
“안돼에에! 전 재산 걸었는데!”
심판이 확성기를 대고 외쳤다.
“멋진 승부였어! 팀 아준의 선수는 오히려 천국에 간 얼굴인데?”
“시끄러워욧!”
해당 팀원의 역정에 하하 웃어댄 심판은 경기장을 정리할 동안 안내 방송을 계속했다.
“본 투기장에서는 승자를 축복하고 패자를 격려한다! 관중들은 오늘도 힘차게 싸운 전사들에게 박수를 부탁해! 전표는 환전소에서 교환 가능하니 그쪽으로! 아깝게 잃은 사람은 다음 기회에! 매점과 화장실은 동편에 있어! 길 잃은 사람은 근처 험상궂은 형들에게 말해줘. 자자! 다음 경기는 15분 후 시작한다!”
관중석에는 거친 남자들이 대다수였지만 간간이 가족과 동료를 따라 나온 여자와 아이들의 모습도 보인다.
놀랍게도 엘프나 드워프도 몇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모험가가 아닌 이상 오토마톤이 진심으로 싸우는 걸 볼 기회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관중석에서 눈을 부릅뜨고 부들부들 떨던 빨간 머리 포니테일의 엘프 장로 스틸레인이 꽥 소리를 질렀다.
“이거다-!”
“자, 장로님?”
눈에 핏발이 돋은 스틸레인이 보좌관들을 쳐다보았다.
아니, 노려보았다.
“당장 인형 하나를 구해와! 팀을 꾸려! 나도 저기 나가고 싶다! 피가 끓는구나!”
“아아! 장로님!”
경기가 끝나자 사람들이 바쁘다.
대다수는 전표를 바꾸기 위해 환전소로 몰려갔다.
워낙 사람이 많아서 질서와 치안 유지를 위해 덩치 큰 사내들이 소리를 지르며 정리를 해댔다.
“줄 서! 줄!”
“으하하! 한몫 단단히 잡았어!”
“나는 잃었어! 아아아!”
웃는 사람과 우는 사람의 희비가 교차한다.
환전소 안쪽의 사무실에서도 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었다.
“으하하! 한몫 단단히 잡았구나!”
끊임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돈 자루를 보면서 사내들의 얼굴이 해맑아진다.
그걸 쳐다보던 중년 남자가 히죽 웃더니 말했다.
언젠가 샤를에게 호된 꼴을 당했던 아르곤 4번가 폭력단의 두목이었던 남자로, 이름은 루칸.
“보라구, 내 말이 맞지? 이게 먹힌다니까. 다들 오락에 굶주려 있거든? 하하하!”
좀 떨어진 곳에는 멋진 슈트와 검은색 색안경을 쓴 여자들이 붉은 코트 차림의 여자를 호위하듯 서 있다.
“이번 달 상납금도 짭짤할 거요. 기대해 주쇼.”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여성은 일행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우물쭈물하던 사내들이 눈치를 살피며 다가왔다.
“형님, 누구십니까? 자주 보이시던데.”
“저분께는 실례되는 행동하지 마라. 최고 투자자시다.”
그때 청년 하나가 들어오더니 보고했다.
“보스, 아르곤의 드래곤 슬레이어를 포섭했다고 합니다.”
투기장 보스 루칸의 얼굴이 밝아진다.
“후후후! 하하하! 좋구나! 한바탕 크게 노릴 수 있겠구만!”
* * *
쾅-!
“모두 꼼짝 마라!”
문을 박차고 경비대원들이 쏟아져 들어간다.
하지만 그들이 돌입한 곳은 아무도 없는 공간에 불과했다.
지하의 커다란 돔형 공간에 펼쳐진 경기장은 조명이 없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자욱하다.
트로겐 임시 경비대장 오토마톤 그린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경비병들의 보고가 이어진다.
“대장! 이걸 봐!”
오토마톤이라지만 경비대장, 그에게 말을 놓을 수 있는 것은 차기 경비대장 직위를 이어받을 엘리트들뿐이다.
그중 하나인 리엘의 부름에 발걸음을 옮기니 경기장 벽면에 글자가 새겨져 있다.
리엘이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여기 우리가 얼마 전에 발견한 곳이야. 저기 날짜랑 발견자.”
날짜는 일주일 전, 발견자는 토르페도가 이끄는 제3경비단.
놀랍게도 이런 곳만 벌써 다섯 군데나 있다.
그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대답했다.
“같은 곳을 두 번 방문한 것입니까? 마법적인 흔적은?”
“모, 모르겠어요. 저, 저는 화, 화염계 공격 마법밖에는 몰라서······.”
경비대에 발령된 초보 마법사가 고개를 저었다.
잠시 생각하던 그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철수를 명령했다.
“상대측에 굉장한 마법사가 있나 봅니다. 철수.”
아니면 이쪽에서 정보가 새는 것인지도.
요즘 방주 도시 트로겐은 개장 후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과 물건이 오가며 활기에 차 있었다.
이유는 다름 아닌 트로겐 어딘 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오토마톤 투기장 때문.
이게 그냥 넘어갈 수도 없는 것이, 요즘 거기서 돈을 모두 잃고 길바닥에 나앉아 버리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행성 도박은 불법,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찾아내서 박멸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부른 거군요.”
경비대장 집무실, 그린이 찾아온 모험가를 올려다보았다.
일부러 아르곤의 모험가를 부른 이유는 트로겐 모험가 길드 마스터 에드워드의 언질 때문이다.
여기 놈들도 다 한패야.
자리에서 일어난 그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마이스터 크랭크. 먼 길을 오시게 했군요.”
“저야말로 빨리 찾아뵀어야 했는데 늦어 버렸군요.”
흔한 인사치레를 나누면서도 지위가 지위인지라 크랭크는 말을 높였다.
게다가 지금의 그린은 당시 크랭크가 손을 봤을 때보다 사고가 더 유연해진 것 같았다.
쾅!
“그린! 그 사람이 왔다면서? 우와아아아?!”
크랭크가 뒤를 돌아보자 더듬이 머리에 키가 작은 여자가 입을 딱 벌리고 고개를 들고 있다.
트로겐 경비대 소속 오토마톤 정비반의 신시아였다.
그녀가 입을 딱 벌리고 말했다.
“세상에, 토르페도 같은 사람이 또 있네?”
크랭크가 그린을 바라보았다.
“이분은?”
“전에 말한 전속 정비 기사입니다. 신시아, 크랭크입니다. 나를 만들어 주신.”
“우와아아아아! 반가워요!”
호다닥 달려온 신시아가 크랭크의 손을 덥석 잡으며 발꿈치를 들었다.
“내부를 보고 놀랐지 뭐예요! 세상에, 보조 인대를 그렇게 설치할 수 있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재잘재잘 말도 잘한다.
비슷한 계열의 사람을 만나 반가웠든지 크랭크도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혹시 연산 수정을 추가 증설했습니까?”
“맞아요! 훨씬 부드럽죠? 그거 말고도 이것저것 많이 만져서 완전 하이 스펙이에요. 그야말로 우리들의 공동 작품!”
밝게 웃던 신시아가 그린을 보더니 대뜸 외쳤다.
“그린, 부모님을 본 것 같지 않니? 참고로 엄마는 나야.”
그럼 아빠는 나인가?
크랭크가 혼란을 겪는 사이 그린은 다른 말을 꺼냈다.
“마이스터 크랭크, 혼자서 오셨습니까? 캐롯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연히 그쪽에 먼저 초대받아서 투기장으로 숨어들었습니다.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는 대로 알려주러 올 겁니다.”
다시 자리에 앉은 그린이 마치 사람처럼 깍지 낀 손에 턱을 올렸다.
캐롯이 아닌 다른 오토마톤이 저러는 것은 크랭크에게 꽤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위명 때문에 관심을 끌었나 보군요. 잘됐습니다. 이걸로 가설을 확인할 수 있겠습니다.”
“가설?”
신시아가 끼어들었다.
“개념 결계라는 거, 들어보셨어요? 거기 아마 그런 게 있나 보더라고요. 경비대에서 작정하고 병력을 투입했는데 다 이상한 곳으로 가 버려요.”
여기까지 들은 크랭크는 괜히 둘만 보냈나 걱정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