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토마톤과 함께하는 투기장! (1) 284 >
그때 호기심 잔뜩 들어간 시선을 하고 크랭크를 보던 신관 비타가 입을 열었다.
“아리에테도 봤다면서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음, 그랬다. 그냥 맨얼굴만 보이던데.”
설명을 원하는 시선, 모두가 크랭크를 보았다.
투구 아랫부분을 열고 차를 후르릅 마시던 크랭크가 그윽한 시선으로 아리에테를 바라보았다.
아마 네 팔다리가 멀쩡했다면 너는 잃어버린 동료들을 만났겠지.
“되새길 추억 하나 없는 쌀쌀맞은 여자에겐 안 통하는 것 같더군요.”
눈썹을 버럭 세운 아리에테가 곁에 앉은 크랭크를 올려다보더니 입을 딱 벌렸다.
씹고 있던 음식물이 입안에 한가득.
“우으으음-!”
괴상한 신음을 흘린 크랭크가 투구를 옆으로 휙 돌리자 아리에테가 의기양양하게 웃는다.
그러더니 자리에 모인 모두를 둘러보았다.
“되새길 추억이 없다고? 그럼 지금 우리가 만들고 있는 건 뭐냐? 나는 너희들을 추억할 거다. 십수 년이 지난 뒤에도 오늘을 기억하자.”
“와아! 그거 멋진 말이에요!”
자리에 앉은 모두가 저마다 따뜻하게 웃는다.
“오험!”
헛기침을 좀 한 리슐리에가 슬쩍 끼어들었다.
“그리고 이건 별개의 건입니다만, 수료생 중에서 당시 함께한 파트너 오토마톤의 구매를 요청하는 고객이 있습니다.”
“응?”
모두가 캐롯과 크랭크를 쳐다보았다.
파트너 오토마톤이라면 그들을 인도하는 캐롯 시리즈다.
자리에서 발딱 일어난 캐롯이 두 팔로 가슴을 가리키며 주목을 이끌었다.
“괄목하라! 그리고 찬양하라! 마성의 꽃소녀가 남자를 후리는 솜씨를 말이야! 으호하하!”
캐롯과 반대로 크랭크는 팔짱을 끼고 거절했다.
“쓴소리, 단 소리 들려주고 주먹질도 서슴지 않으니 색다르게 보였겠지요. 하지만 거절.”
“8번 창고의 그거죠?”
“마지막 조정 작업이 남았습니다. 그게 제대로 움직이는 걸 보고 싶습니다.”
리슐리에가 반년간 지켜보기에 이 양철 거인도 어딘가 삐뚤어져 있다.
겉은 친절하지만 속은 염세적이며 지적 호기심을 기술적으로 이뤄보려는 묘한 구석이 있었다.
회의 겸 티 타임을 마치고, 다들 각자의 일터로 향했다.
“얼마 전까지 길드 의뢰 게시판을 기웃거리는 게 일이었는데 말이야.”
“음.”
겨울을 준비하는 분주한 도시의 거리를 걷고 있던 코비의 말에 보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코비가 갑자기 그를 빤히 보며 말했다.
“그런데 보리스, 어쩐지 좀 어른스러워진 것 같지 않아?”
또 무슨 생뚱맞은 소리냐는 듯 뚱한 얼굴을 한 보리스가 한 가지 지적했다.
“그전에 우리 이미 어른 아냐?”
“음, 모르겠네. 좀 다르긴 한데. 머리를 잘라서 그런가?”
“어이, 듣고 있냐고?”
코비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하는 가운데 눈을 가늘게 뜬 명탐정 비타가 슬쩍 끼어든다.
“수상하죠? 모르핀이랑 좋은 일 있었던 거 아니에요?”
평온하던 보리스의 얼굴이 확 달아오르더니 도망치는 비타의 뒤를 쫓기 시작한다.
“날 그런 뿔난 여자와 엮으려고 하지 마!”
“엄마야!”
일행의 뒤에서 지오와 이야기 중이던 캐롯이 그걸 보고 낄낄거리더니 팔짱을 끼면서 사악하게 웃음 지었다.
“자, 나의 권능은 남자에게도 영향을 끼칠지 어떨지 기대되는 걸?”
“권능요?”
후후헤헤 웃으며 혀를 빼문 캐롯이 눈가에 V자 손가락을 들이댔다.
“뿜뿜! 크랭크의 오토마톤에게 머리카락을 팔면 노오오옵은 확률로다가 남친이 생기는 무시무시한 권능이지!”
“아!”
지오와 코비가 동시에 감탄사 아! 를 내놓았다.
“들은 적 있어! 그거 남자도 되는 거였어요?”
“우잉, 모르겠는걸? 그래서 한 말이잖아. 자, 보리스가 어찌 되려는지 심도 높은 관찰 부탁해. 진짜 남친이 생기면 큰일이니까.”
나도 이제부터 머리를 길러야겠다는 둥의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코비와 잠자코 듣고 있던 지오가 그만 폭소를 터트렸다.
때마침 버릇없는 여신관을 붙잡아 끌고 온 보리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이, 이거 놔줘요!”
겨드랑이에 머리가 붙들린 비타가 징징거리는 걸 쳐다보던 캐롯이 히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냥 농담 좀 했지. 어서 가자. 애들 기다리겠다.”
건장한 청년들의 중앙에서 아동복에 슬리퍼를 신고 걸어가는 캐롯의 모습은, 얼핏 여느 막내 여동생 같아 보이기도 했으나 실상은 모두를 이끄는 우두머리의 행차 같은 것이었다.
“어이! 스승님!”
건너편 길가의 젊은이들이 손을 흔드는데 차림새가 모험가들이다.
캐롯이 손나팔을 하고 외쳤다.
“여어! 제군들! 오늘도 힘찬 하루야! 어디 가는 길이야?”
“의뢰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에요!”
“수고 많았어! 차근차근하자고! 조만간 남부 겨울 출장 있을 테니 준비해! 같이 한탕 하러 가는 거야!”
코딱지만 한 소녀가 한탕이라고 내지르자 다들 킥킥거리기 바쁘다.
길 건너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말이 나온 김에 곧 있을 남부 겨울 출장 이야기를 떠들어대며 걷던 캐롯은 모험가 길드 앞에서 모두와 헤어졌다.
다른 사람들은 한참 진행 중인 용사 훈련소로 향하던 차였다.
“이리 오너라!”
모험가 길드의 문을 확 밀고 들어선 캐롯의 외침에 모두가 고개를 돌리고 쳐다본다.
“오! 캐롯!”
“마스코트!”
“쿠쿠루삥뽕, 안녕! 여러분! 오늘도 강하고 힘찬 하루! 겨울 남부 출장은 어때요? 소식 나온 거 있어요?”
“없어, 아직 겨울까지 좀 남았으니까. 그보다 너희들 요즘 던전으로 재미 좀 보고 있다면서? 어때? 많이 벌어?”
어느 한가로운 모험가의 질문에 캐롯이 손사레를 쳤다.
“노노, 인건비에 식비, 건물 임대료에, 세금, 던전 유지 보수 비용 제하고 나면 얼마 안 남아요.”
“그게 임대였어?”
“도시 소유라서 아예 팔지는 못한데요. 3년 임대였던가?”
휴개실에 앉아 있던 몇몇 대형 모험단 사람들의 귀가 훌쩍 커지는 것이 재미있었는지 캐롯은 이것저것 잘도 떠들어댔다.
그러다가 누군가에게 이런 소리를 들었다.
“이봐, 너도 꽤 고성능이지? 드래곤도 때려잡았다며?”
“그건 잡은 게 아니라 폭탄으로 쫓아낸 건데.”
“하여튼 인석아! 들어봐 봐. 요즘 좋은 건수가 있는데 말이지······.”
모험가 하나가 귓가에 쑥덕이는 소리는 캐롯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조그만 인형의 눈이 왕방울 만해져서는 그를 바라보았다.
“투기장? 오토마톤 투기장요?”
“목소리 낮춰. 다들 쉬쉬하니까.”
“목소리 낮출 필요 있어요? 불법도 아닌데.”
그때 지켜보던 길드 운영위원이 다가왔다.
“판돈이 커지면서 허가받지 않은 곳은 불법으로 지정되었다. 그런 투기장 이야기가 요즘 심심찮게 들리는 편이지. 보시오, 슬랭. 나라면 드래곤 슬레이어는 거기 초대하지 않겠소.”
고개를 끄덕이며 흐흐 웃어 버린 닳고 닳은 모험가 슬랭은 슬그머니 뒤로 빠져서 가버렸다.
“호오오, 재미있는 이야기네. 오토마톤 투기장이라······.”
“참가할 생각일랑 말아라. 거기 나오는 녀석들은 전투력을 극단적으로 끌어올린 괴물 천지니까. 용사가 데리고 다니던 오토마톤이라도 한 수 접을 거다.”
경고랍시고 한 말이었는데 오히려 캐롯의 호기심에 불을 당겨 버렸다.
“호오오옵! 그 정도?!”
호다닥 공방으로 달려간 캐롯이 이 신나는 소식을 전했지만 크랭크는 강하게 거절했다.
이유는 그 운영위원의 경고와 같았다.
“너는 내 걸작이라고 자신하지만, 솔직히 그런 곳에서 날뛰는 녀석들의 상대가 될지는 모르겠다.”
“에에에? 나 드래곤 슬레이어인데도? 한가락하는데도?”
캐롯의 성화에 크랭크는 일말의 가능성을 고려, 아주 객관적인 시선을 하고 다시 땅콩 캐롯을 살펴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작은 소녀가 잔뜩 기대에 부푼 눈을 뜨고 있는 것이 참 귀엽게 보인다.
하지만 크랭크는 전혀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최대 출력, 프레임 허용 강도, 관절 내구성 같은 스펙은 말할 것도 없고, 그간의 행적과 이뤄 놓은 업적은 이 자동 인형의 가치를 가히 걸어 다니는 기적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걸 투기장에 내던지라는 말인가?
크랭크는 결국 캐롯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역시 안되겠다. 네가 부서지는 걸 그냥은 못 볼 것 같아.”
“오우, 나 진짜로 주인님에게 사랑받는 오토마톤이구나. 알았어, 말끔히 포기! 내일 보스전이나 준비해야지.”
수일 후, 그들에게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발신지는 트레일, 발신자는 임시 경비대장 그린.
“그린?”
막 씻고 나온 아리에테가 수건을 목에 걸고 다가왔다.
“누군데?”
크랭크가 시뻘건 눈을 하고 그녀의 젖은 머리에 아이언클로를 올렸다.
“그 꼴은 뭐냐? 나를 유혹하는 것이라면 한참 잘못 짚었다.”
“으아으아아! 놔, 놔줘라! 겉옷을 깜빡했을 뿐이다으아아아!”
캐롯이 편지를 뜯으며 중얼거렸다.
“어휴,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어요.”
내용을 죽 읽은 캐롯이 음흉하게 웃기 시작한다.
“주인님아! 이거 좀 봐봐!”
최근 조심성이 없어진 여기사를 단단히 혼구녕 내놓으려던 크랭크는 눈앞에서 흔들리는 편지에서 묘한 대목을 찾아보고 그걸 가로채 들여다보았다.
“투기장? 조사 의뢰?”
“으하하! 이번엔 오토마톤 투기장이다!”
* * *
오토마톤의 골격 구조와 가동 영역은 인간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자동 인형도 대부분 할 수 있으며, 오히려 더 창의적인 활용을 자랑하기도 한다.
챠챠챠챵! 챙! 까드드드득!
서로 맞붙은 자동 인형이 서로를 향해 검격을 날리는데 칼날의 궤적을 따라 불티가 휘날린다.
너무 빨라서 잘 보이지도 않는데도 관중의 환호는 그칠 줄 몰랐다.
“우와아아아아~!”
“좋았어! 가라!”
콜로세움을 연상시키는 모처의 투기장, 넓은 광장을 내려다보는 관중석으로 많은 사람이 몰려 환호를 지르고 있다.
“마감 다 되어 간다! 빨리빨리 배팅해!”
관중석의 사내들이 돈주머니를 내밀며 막판 배팅을 서둘렀다.
“글라디우스! 10만!”
“아준! 5만!”
여기저기서 전표와 돈이 오고 가고, 오토마톤끼리의 무지막지한 싸움도 극에 달했다.
깡-!
검을 쥔 오른팔이 경기장으로 솟아오른다.
벤치에서 누군가가 처절하게 소리를 질렀다.
“아준!”
팔이 떨어져 나갔지만 오토마톤 아준은 아직 움직인다.
남은 왼팔을 앞으로 내밀고 맨손 격투술을 선보이려 할 때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아준! 돌아와라! 반디와 교대해!”
그러자 맞은편의 오토마톤 글라디우스 측에서 큰소리가 들린다.
“태그한다! 막아!”
파파팍! 팡!
마스터의 부름을 받은 아준은 공격을 포기하고 전력으로 경기장을 뛰어다니며 글라디우스를 회피했다.
아쉽게도 발은 아준이 좀 빨랐는지 기어코 대기하고 있던 사내와 태그가 이뤄졌다.
짝!
놀랍게도 오토마톤 앞으로 걸어 나온 것은 인간이었다.
전사 반디, 원래는 모험가였지만 요즘 투기장에서 한몫 단단히 벌어들이는 중이다.
“우효!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오토마톤이랑 붙어보겠-!”
쾅!
오토마톤 글라디우스의 주먹질에 반디가 나가떨어졌다.
관중석에서는 야유와 탄성이 흘러나온다.
“오, 오토마톤이!”
“사람을 쳐?”
명령이라고는 하지만 자기도 놀라운지 주먹을 들여다보던 글라디우스에게 관중석에서 목검이 던져졌다.
투기장 운영 스탭이었다.
“대인전에서는 힘 조절하고 핸디캡 잊지 마라! 받아!”
철제 롱소드를 바닥에 꽂아 넣은 글라디우스는 날아오는 목검을 보지도 않고 잡아채더니 몸을 숙였다.
그의 상대는 호락호락하지 않은 자였다.
“케헤헤!”
코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몸을 일으킨 반디는 곧바로 손에 쥔 단창을 돌리며 눈앞의 자동 인형을 견제했다.
인간과 오토마톤의 전투라니 말이 안될 것 같지만, 핸디캡으로 목제 무기와 출력 제한으로 어느 정도까지는 상대할 수 있도록 규정으로 묶어 놓았다.
최대 출력은 오토마톤끼리에서만 허가.
이것은 투기장의 노림수로, 인간과 인형이 서로 치고받는 걸 본 적이 없는 일반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선사하여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
샥샥!
얼굴 앞으로 빙글빙글 도는 창날이 휙휙 날아들자 오토마톤 글라디우스가 목검을 휘둘러 보았으나 견제가 어렵다.
반디, 그는 단창의 고수였다.
반디는 신이 났다.
“하하! 어떻게 된 거냐! 덤벼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