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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인형 오토마톤-279화 (279/329)

< 오토마톤과 함께하는 문제아! (2) 279 >

정확히 6시간 후, 추위에 눈을 뜬 니케는 불안한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조금 전까지의 따스함은 온데간데없고 시퍼런 눈을 뜬 검은 그림자가 정좌를 한 채 그를 마주하고 있었다.

“으허헉!”

깜짝 놀라서 물러서니 캐롯 17호가 말했다.

“앞으로의 방침을 의논합니다. 소지금이 있습니까?”

“으, 응.”

하룻밤 만에 고분고분해진 니케가 주머니를 탈탈 털어 동전을 내놓자 그걸 받아 세어보던 캐롯 17호가 고개를 든다.

“여비를 마련해야 합니다. 메인쿤까지 걸어간다고 해도 거기서 청동문 이용 금액이 발생합니다. 당신과 나, 2인분입니다.”

“어, 얼만데?”

“약 30만 리즈가 필요합니다. 소지금은 8만 리즈, 22만 리즈 부족.”

잠시간의 정적, 새벽잠을 방해받은 마구간 주인들의 투레질 소리가 그걸 깨트렸다.

푸르륵!

커다란 말을 돌아본 니케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 메인쿤까지 걸어서? 말도 안돼! 마차를 이용하자. 여비는 빌리면 돼.”

“누구의 이름으로 빌립니까?”

“그야 우리 가문의 이름으로!”

캐롯 17호가 현실을 지적했다.

“지금 당신은 가치 증명 중, 나 이외에 다른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습니다. 내가 허가하지 않습니다.”

“으이익!”

그 말은 곧 지정된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방해도 불사하겠다는!

세상은 항상 나를 기준으로 움직인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니케의 작은 세계에 조금씩 금이 가고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니케가 먼저 물었다.

“어떻게? 어떻게 하면 돼? 이 망할 게임의 규칙은 대체 뭐야?”

“도중에 멈출 수 없는 인생 게임, 내 말이 곧 법입니다. 당신의 목숨은 지금 내 손안에.”

뿌직!

니케가 버럭 외치며 삿대질했다.

“너야말로 어디서 배운 말버릇이야! 인형 주제에! 인형 주제에! 인간님에게 대들기나 하고! 때리기나 하고! 내 얼굴이······ 어?”

부어서 엉망이 된 얼굴을 매만지던 니케가 놀라 버렸다.

두리번거리는 그를 향해 캐롯 17호가 지급된 재산 하나를 빌려준다.

“무릇 자동 인형은 언제나 말끔한 미모를 관리해야 하는 법, 제 손거울입니다. 특별히 빌려드립니다.”

쯧, 말하는 게 뭔가 얄밉다.

새벽 여운을 빌려 작은 손거울에 얼굴을 비춰보니 붓기가 전부 가라앉았다.

하룻밤 새?

“어제 마신 물에 포션을 섞었습니다.”

두들겨 팬 이유가 있었구나!

이마에 핏대가 솟은 니케가 작은 인형을 노려보며 으름장을 놓았다.

“야, 너 내가 혀 깨물고 죽으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야?”

“궁지에 몰렸으나 내세울 것이 없는 인간들은 자기 목숨을 담보로 협박을 가한다고 주인님께 들었습니다. 다만, 그것은 허풍일 가능성이 크며 또한 혀를 깨무는 정도로 사람은 죽지 않습니다.”

니케가 가장 싫어하는 팩폭이 이어졌다.

찔끔한 그를 캐롯 17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려다본다.

“그리고 나 역시 당신이 그렇게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입니다.”

창문으로 새벽 여운이 쏟아지는 마구간, 일어선 인형 소녀가 자리에 앉은 인간 소년에게 손을 내밀었다.

“묻겠습니다. 그대는 나의 임시 마스터가 되어 사회 구성원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됨됨이를 지금이라도 배워보시겠습니까?”

정신적으로 볼을 부풀리긴 했지만 니케는 어쨌든 그 손을 잡았다.

온화한 성품의 부모에게 조용조용한 말만 들으며 지내 오다 이렇게까지 몰아세워진 적은 처음이었다.

니케 베르란디드 15세, 인생 처음 위기감을 느꼈고, 그걸 무시할 정도로 지능이 떨어지진 않았다.

어쨌든 돌아가기만 해보라고!

이후로 캐롯 17호의 장비를 팔아서 여비를 마련하자고 했다가 된통 걷어차인 니케는 휴게소를 거점으로 삼아 초원의 약초 채집을 시작했다.

꽃밭에 다소곳이 앉은 캐롯 17호가 말했다.

“계절은 가을, 만물이 무르익습니다. 거기엔 흔한 약초도 많습니다.”

“너도 좀 도와!”

“제 임무는 관찰, 노동이 아닙니다.”

꽃밭을 기어 다니던 니케가 우거지상이 되었다.

어느새 다가온 캐롯 17호가 말했다.

“이 부근에는 예쁜 돌도 많습니다. 그것도 주워갑시다.”

“이거?”

흙 속에 굴러다니는 파란 돌멩이를 들어 보이자 17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청금석입니다. 보석의 일종입니다. 주워갑시다.”

“보석? 이게?”

보석이라는 말에 눈이 뒤집힌 니케가 나뭇가지로 흙을 파헤치며 돌만 죽어라 모으기 시작했다.

“아, 배고프다. 밥은?”

그러다 지쳐 꽃밭에 드러누운 니케에게 17호가 내민 것은 메뚜기였다.

“야! 먹는 것 정도는 챙겨줘!”

“그러니깐 이걸 먹으면 됩니다.”

“나는 사람이야!”

“사람도 결국 동물의 일종.”

니케가 기겁하는 사이 17호는 가을 메뚜기를 잔뜩 잡아서는 불에 구워 내밀었다.

“이, 이걸 먹으라고?”

“주인님은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이라고 좋아하셨습니다. 먹을 수 있습니다.”

벌레를 먹으라니! 결국 니케는 도망쳤다.

하지만 바로 쫓아온 17호에게 붙들려 억지로 메뚜기 구이를 입안에 쑤셔 넣어지게 되었다.

“그, 그만해! 우어업!?”

“인간은 먹지 않으면 움직이지 못합니다. 먹어야 합니다. 입을 크게 벌리십시오.”

17호의 굉장한 힘에 붙들린 니케는 결국 그걸 삼켜야 했다.

눈물을 글썽이며 입안의 메뚜기를 게워내는데 17호는 더 많은 메뚜기 구이를 내밀며 말했다.

“당신의 놀라운 업적 중에는 산 개구리를 또래에게 억지로 먹인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기분이 어떻습니까?”

“흐우으으! 우으으!”

울면서 바닥을 기어 도망치는 니케를 걷어차 버린 17호는 버둥거리는 그의 입에 메뚜기 구이를 잔뜩 쑤셔 넣어주었다.

해가 떨어질 때쯤 들판을 뛰어다니던 소년, 소녀가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왔다.

휴게소의 경비병들은 전날 무슨 소리를 들었던 모양인지 별말 없이 그들을 들여보내 주었다.

철그럭-!

마구간, 보자기 삼아 돌을 싸 온 윗옷을 바닥에 내리자 묵직한 소리가 들린다.

건초 더미에 주저앉아 눈가를 비비며 훌쩍이는데 17호가 따라 들어오더니 손짓했다.

“저녁 시간입니다.”

“됐어. 배불러.”

“아니요. 이곳은 휴게소, 많은 사람이 오고 갑니다. 그걸 사줄 사람도 있을 겁니다.”

눈을 번뜩 뜬 니케가 다시 옷자루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식당 앞에 우물쭈물 서서 좌판을 벌이자 지나는 사람 중 하나가 관심을 드러냈다.

“이건 청금석인가? 보석으로의 가치는 없고 빻아서 염료로나 쓸 수 있겠군.”

“어, 얼마나 될까요?”

거지꼴의 소년과 그 곁을 지키고 있는 소녀형 오토마톤을 쳐다보던 상인이 가격을 제시했다.

“전부 3,000만 리즈 어떠냐?”

3,000만?!

니케가 놀라서 고개를 들자 상인이 곁의 자동 인형을 가리켰다.

“이 애 포함.”

“어! 정말요?”

퍽!

주먹질 한 방에 소년이 저만치 뒤로 날아갔다.

몸을 돌린 꼬마 인형이 다소곳이 허리를 숙였다.

“관심 감사합니다만, 제 주인님은 저런 더러운 몰골의 소년이 아닙니다.”

식은땀을 흘리며 웃어준 상인은 주워온 청금석과 약초를 5만 리즈에 사주었다.

하여튼 이리하여 돈 나올 구멍이 생기자 이튿날부터 청금석과 약초를 닥치는 대로 줍기 시작한 니케는 수일 만에 목표 금액을 맞추는 데 성공했다.

“오늘까지 오십만 오천 리즈, 교통료를 제하고도 남겠습니다.”

“크허어어-!”

거창한 한숨을 쉬면서 건초 더미에 드러누운 니케가 구운 메뚜기를 집어먹어 시커메진 입가를 닦으며 중얼거렸다.

니케의 눈빛은 죽은 생선같이 되어 있었다.

“메, 메뚜기는 맛있는데 이제 질렸어.”

“먹고 싶어도 이젠 없습니다. 날이 추워지고 있으니 곧 자취를 감출 겁니다. 일찍 자둡시다. 내일 첫차로 이동합니다.”

“응.”

니케는 자연스레 두 팔을 벌렸다.

그러자 17호가 그의 몸에 기댔고 당장 훈훈한 온기가 솟는다.

“며칠째지? 다들 잘 있을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없어져도 내일의 아침 해는 떠오릅니다.”

한마디도 지지 않고 쏘아붙이는 얄미운 인형에게 무어라 한마디 해주려 했건만 잠이 쏟아져 버린다.

곯아떨어진 니케에게 안긴 17호의 중얼거림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당신의 인생도 이제 겨우 시작입니다.”

이튿날, 난생처음 혼자 힘으로 거금을 벌어본 니케는 말끔하게 씻은 다음 첫차를 기다렸다.

이 와중에 17호는 내내 그들을 지켜봐 준 경비병들에게 인사를 하더니 쫄래쫄래 달려와 니케의 복부에 강력한 펀치를 날렸다.

퍽!

“크억!”

배를 붙잡고 허리를 숙이자 그 목덜미를 잡아끌고는 경비들에게 데려가 인사를 시켰다.

“의뢰인께서 감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 그래.”

“수고 많으셨소. 조심하시구려.”

“어, 어윽!”

숨을 할딱이던 그가 고개를 들고 17호에게 역정을 냈다.

“마, 말로 해! 말로! 알아듣는다고!”

“당신은 말로 했습니까?”

이어진 과거사 팩폭에 입술을 부들부들 떤 니케는 또 훌쩍이기 시작했다.

소매로 눈가를 비비며 말했다.

“도, 돌아가면 다 찾아다니면서 사과할 거야.”

“나라면 그래도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눈 말고 아무것도 없는 얼굴, 그래서 표정이 보이지 않은 얼굴이 좌절에 물든 니케의 얼굴을 향해 스르륵 올라갔다.

누군가 보면 여자애가 까치발로 입맞춤이라도 하려는 모양새였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번쩍이는 파란 눈을 바싹 들이댄 17호가 말했다.

“앞에서는 용서한다지만, 속으로는 누구보다 당신의 불행을 원할 겁니다. 어쭙잖게 앞으로 나서지 마십시오. 굳이 원한다면 모르게 도움을 주는 정도면 충분합니다.”

“우으으! 으으읏!”

자비와 용서를 부정당한 15살 소년이 또 꼴사나운 울음을 터트렸다.

주변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쳐다보긴 했지만 커다란 소년이 우는 걸 달래줄 정도로 여유가 넘치진 않아서 다들 무시로 일관했다.

그렇게 아침 첫차를 타고 메인쿤으로 향한 두 사람은, 그곳에서 바로 청동문을 통해 아르곤으로 향했다.

혼자서 다른 도시 관광이 처음이었던지라 니케는 금세 얼굴이 바뀌어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기 바빴다.

“여기가 청동문 안이야?”

“저기 아래 중계소에 통행료를 지불해야 합니다.”

청동문 안쪽의 이국적인 초원과 하늘을 우러러보다가 17호의 성화에 후다닥 달려간 니케는 언덕 아래의 건물로 들어가 입장료를 치르고 나왔다.

“야, 거기서 뭘 해?”

“뭐? 넌 누구야?”

니케가 건물 옆 커다란 비석을 올려다보는 사람 중에서 17호를 발견하고 불렀다가 곁의 누군가가 인상을 찌푸리는 것을 보고는 놀라 버렸다.

“어? 17호 아냐?”

“저는 19호입니다.”

비슷한 또래의 곁에 선 것은 17호와 똑 닮았지만, 머리 색이 달랐다.

이쪽은 화려한 금발, 그때 진짜 17호가 나타났다.

“도련님, 이쪽입니다.”

“야! 너랑 똑같은 애가 여기 또 있······?”

눈을 크게 뜨고 보니 17호의 주변으로 같은 차림에 머리 색만 다른 꼬마 오토마톤들이 더 나타났다.

모두 5대, 자매라도 되는 건지 한자리에 모인 캐롯 시리즈들이 손을 맞잡고 빙글빙글 돌더니 이상한 포즈를 취했다.

“출동! 캐롯 특전대!”

그걸 보던 소년 하나가 소리를 질렀다.

“너희들 대체 몇 대나 있는 거야! 하지 마! 부끄럽다고!”

주위를 살피던 니케는 당황해 버렸다.

똑 닮은 인형만큼 파트너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결국 서로를 알아보았다.

“어? 혹시?”

“어어? 너, 너도?”

동질감의 밝은 표정도 잠시, 그들은 곧 우거지상이 되었다.

이 꼬마와 같이 왔다는 건, 이 녀석들도 가문의 수치스러운 똥 덩어리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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