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토마톤과 함께하는 감자 캐기! (2) 274 >
마을에서 감자를 팔아 마련한 경비용 자동 인형, 크랭크의 작품 중 하나, 게이지와 가이거. 방열 가발은 물론 거기에 묶인 리본과 핀도 여전하다.
“습격인 줄 알았습니다. 반갑습니다.”
“캐롯, 반갑다.”
히히 웃음 지은 캐롯이 그네들을 두루 살피며 말했다.
“편지로만 보다가 1년 만에 찾아온 건데 움직임은 아직 썩 괜찮은걸? 전투복은 새것이네?”
“마을 사람들이 교체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이외에 다른 오토마톤도 더 있습니다.”
게이지가 가리킨 곳에는 더 이상 다가오지 않고 원래 위치로 돌아가는 자동 인형들이 있었다.
얼핏 군용 사양의 실루엣.
“쟤들은 뭐야? 새로 산 거야?”
“아닙니다. 현재 메크로에는 전향한 흑마도사들이 이주해 온 상태입니다. 그들의 감시와 보호, 또는 비상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와 있습니다. 이 사실은 마을 사람들이 모르니 비밀 유지에 동참하여 주십시오.”
캐롯이 얼빠진 얼굴이 되어 버렸다.
“엣? 흑마도사?”
작년에 있었던 흑마도사 토벌전, 거기서 투나와 아리에테를 만났다.
캐롯이 고개를 휙 돌렸다.
“아리에테가 저기에 있어!”
“하하하! 감자로 술도 담글 수 있다니! 몰랐다!”
얼큰하게 취한 아리에테가 즐겁게 웃는다.
크랭크가 그만 마시라 말렸지만 듣질 않았다.
“으응? 생명의 은인께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히끅! 나는 이제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것이다! 이제 네 말 따위는 듣지 않을 거야! 히끅!”
그러더니 크랭크에게 바싹 달라붙어 그 팔을 끌어안고 코를 골기 시작했다.
양철 거인도 그녀의 주사에 두 손을 들어 버렸다.
“허허허! 처녀 술버릇 고약하구만!”
“게다가 약해!”
“어디서 어떻게 만났어요?”
독한 감자술은 크랭크의 경계심도 누그러뜨려 놓았다.
그는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작년 흑마도사 토벌전의 생존자입니다. 팔다리가 잘린 채였지요.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자리에 모인 마을 사람들이 놀라 버렸다.
“하지만 팔다리 멀쩡한데?”
“의족입니다. 시온.”
“예.”
잠든 아리에테가 팔을 풀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놀랍고도 기괴한 모습, 사람은 자고 있는데 몸이 따로 혼자서 움직인다.
“와?”
“오!”
신기해하는 사람들 사이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자들이 몇 보인다.
그리고 또 그들을 촌장이 불러서 소개했다.
“여기도 작년쯤 이주해 온 사람들이야. 다들 아는 게 많지. 이분은 의사, 이분 약사시고, 이쪽은 애들 공부를 가르치고 계시네. 농사법도 많이 봐주고 계시지.”
“이런 고마우실 데가.”
자리에서 일어난 크랭크가 손을 내밀자 젊은 남녀들이 떨떠름하게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아 흔들었다.
투구를 쓴 거인, 분명히 거기서 보았다. 게다가 당시 실험체까지 나타나다니 이 무슨 지독한 우연인가.
조촐한 잔치가 끝나고 내일 수확을 위해 다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모두가 잠든 새벽녘, 전향자들이 한 집에 모였다.
“어쩌지?”
“그 여자야. 난동을 부리다가 팔다리가 잘린!”
“제길, 조용히 사나 싶었더니.”
만삭인 배를 하고 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가 눈을 올려 뜨고 중얼거렸다.
“진정들 해, 그냥 우연이야. 오히려 우리 덕에 그 여자도 자유를 찾은 거라고?”
“그건 그런데······.”
배를 안은 그녀는 이제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그만 됐어. 딱히 뭘 더 한 것도 아니잖아, 그저 죄책감일 뿐이야. 게다가 우리에게 손을 대지도 못해. 따라온 자동 인형들이 가만있을 것 같아?”
“오, 그렇게 생각해?”
깜짝 놀란 모두가 고개를 돌리자 창문으로 웬 똘망똘망한 소녀가 얼굴을 받치고 있다.
“너, 너는!”
“그래그래, 나 알지? 놀라지 말고 문 좀 열어봐.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어.”
모두는 만삭의 여자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턱 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짧은 다리로 뽀작뽀작 집안으로 들어선 캐롯이 히죽 웃는다.
“오호, 잘 꾸며진 공방이네. 누가 마도사 아니랄까 봐.”
이리저리 움직이던 캐롯의 시선은 곧 식탁에 앉은 여자에게 고정되었다.
신기한 걸 본 모양인지 눈이 갑작스레 커진다.
“와, 저 배 좀 봐. 너 임신한 거지? 몇 개월이야?”
“9개월하고 20일째.”
옆의 남자에게 고개를 휙 돌린 캐롯이 또 엉뚱한 질문을 했다.
“아저씨, 사람의 임신 기간이 몇 개월이었더라?”
“어, 10개월쯤 된다.”
“오오! 거의 날 때 다 됐네?”
다시 고개를 돌린 캐롯은 방글방글 웃음 지었다.
“알아? 오토마톤끼리는 인간들이 모르는 이야기도 곧잘 해.”
“쯧.”
배부른 여자가 혀를 찼다.
캐롯은 그녀의 앞에 자리를 빼더니 휙 걸터앉았다.
“어디로 갔나 싶었어. 하필 여기로 왔구나. 운도 없네. 아! 당신들 혹시 레그라는 사람 알아?”
서로를 쳐다보던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이름 모른다. 처음 들어.”
“엣, 정말? 아깝네. 주인님이랑 내기했는데. 모르는 척해야지.”
똑똑,
“아, 또 누구야?”
별안간 울리는 노크 소리에 잔뜩 긴장한 모두는 이제 짜증 비슷한 것을 느껴 버렸다.
눈치를 보던 남자가 문을 여니 검은색 방열 가발을 가진 군용 오토마톤이 서 있다.
그는 정확하게 캐롯을 바라보더니 손짓했다.
“뭐, 왜?”
“시간 됐다.”
“에에? 아직 할 말 안 했는데?”
“그럼 빨리 해라. 산모는 일찍 자야 한다.”
딴마음을 먹으면 바로 구축 병기로 돌변하는 오토마톤의 걱정에 배 나온 여자가 묘한 기분을 느끼며 웃어 버렸다.
캐롯이 그녀를 보면서 말했다.
“아까 사지 절단 여기사 봤지? 죄책감에 사로잡혀 사실은 우리가 어쩌구 즙 짜지 말라고 경고하러 왔어. 용서받을 생각일랑 말고 마음의 짐 따위 너희들끼리 가져가. 우리 애는 지금 충분히 행복하니까.”
그러자 경비대 오토마톤의 묵직한 경고가 이어졌다.
“경고, 산모에게 위협을 가하지 마라.”
“에에? 오히려 한소리 들어야 발 뻗고 잘 텐데? 모르니? 이렇게 가지치기해주지 않으면 인간은 머리에서 망측한 상상의 나무가 자라난다?”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는 것만큼 어려운 건 없대.
그 말대로 모여 있던 전향자들은 저마다 짧은 한숨을 쉬는 것으로 복잡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군용 오토마톤의 성화에 캐롯은 자리에 폴짝 뛰어내리더니 툴툴거리며 몸을 돌렸다.
“알았지? 우리 쪽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으니 서로 조용히 가자고.”
희미하게 웃음 지은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러자꾸나.”
“음! 그래도 말이 통해서 다행이야. 아, 눈치 되게 주네! 나간다고!”
캐롯을 쫓아낸 군용 오토마톤이 고개를 돌린다.
동네 처녀들이 붙여준 그의 이름은 디바.
“이 집회는 허가되지 않았다. 전원 해산하도록.”
“그래! 빨리 들어가서 발 닦고 자! 그리고 어떻게 하면 너희들 장례식에 더 많은 사람이 눈물짓게 할 수 있을지도 생각해 보고!”
몸을 휙 돌린 디바가 장갑 낀 손가락으로 캐롯을 겨눴다.
“너는 너무 시끄럽다. 우리는 이자들의 보호와 감시를 명령받았다. 그러니 산모의 앞에서 소리를 지르지 마라.”
“하하하! 웃기네. 어차피 사고 치면 입막음도 겸할 거잖아? 네 이름은 디바보다 더블 엣지가 어울려.”
찡-!
디바의 눈이 번쩍인다.
“자아 레벨이 높은 고성능 오토마톤의 비아냥은 불안정한 산모의 정신 함양에 불필요, 속히 너를 배제한다.”
“오우야! 오토마톤이 미쳤다!”
문을 박차고 달아나는 캐롯의 뒤를 디바가 쫓기 시작하자 술래잡기가 시작되었다.
그렇게 오밤중의 마을 안을 뛰어다니는 오토마톤들을 보고 킥킥거리던 배 나온 여자가 갑자기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으으음!?”
“아하테!”
남편쯤 되는 사내가 당황하자 아하테가 부들부들 떨면서 흐흐 웃는다.
“아파, 나, 나올 것 같아.”
한참 조심해야 할 시기인데 발칙한 인형의 도발이 자극이었던 모양이다.
모여 있던 사람들의 얼굴도 사색이 되었다.
“어어, 워, 원래 이렇게 갑작스러운 거야?”
“어쩌지? 어쩌지?”
다시 돌아온 디바의 손에 대롱대롱 매달린 캐롯이 도끼눈을 뜨고 외쳤다.
“어쩌긴, 천치들아! 침대에 옮겨! 산파 데려오고! 없으면 나이 든 아줌마 아무나!”
부축받아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걷는 아하테의 다리 사이로 핏물과 정체불명의 액체가 줄줄 흐른다.
“야, 양수가 터졌어.”
“디바! 나 말고 저 여자를 들어서 침대로 옮겨!”
오토마톤 디바는 상황에 따른 지시에 충실했다.
캐롯을 휙 던져 버린 그가 아하테를 번쩍 안아 침대로 옮기는데 벌써 아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으에엥!”
“세상살이 어떨지 고민 좀 하고 나오지 않아? 성질 급한 녀석이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던 캐롯이 벌떡 일어나더니 손에 낀 장갑을 벗어 던지고 침대에 눕혀진 아하테의 치마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으에에엥!”
한밤중, 소식을 접한 마을 사람들이 달려왔다.
집안에는 바닥에 주저앉은 캐롯이 새빨간 핏덩이를 품에 안고 있었다.
“캐, 캐롯?”
사람의 아이가 태어난 것을 목격하고 그걸 또 받아낸 자동 인형들은 논리 오류를 일으킨 채 움직이지 않았다.
현재 그들의 두뇌는 고속연산 중, 주제는 전향한 범죄자의 아기도 주의 대상인가?
먼저 정신을 번쩍 차린 것은 캐롯, 이 꼬마 인형은 갑작스레 새빨간 핏덩이를 두 손으로 번쩍 들어 올리더니 바락 외쳤다.
“아들이야!”
“어, 오오!”
문 앞으로 몰려와 북적이던 마을 어른들이 몹시 반가워한다.
“그리고 나는 이게 앞으로 어떤 녀석으로 자라날지 정말 기대돼!”
아기를 든 캐롯이 고개를 기울이더니 침대에 누워 있는, 이제 엄마가 된 마도사를 바라보았다.
인형이 지었다고는 믿을 수 없는 매혹적인 미소가 그 작은 얼굴로 번져 나간다.
“당신도 그렇지?”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가을 아침, 마을을 방문한 절친 모험가들이 대신 경계를 서준 덕분에 오토마톤들이 작업에 투입되었다.
“우호오! 힘 좋구나!”
인력 쟁기가 지나간 자리에 굵고 하얀 알감자들이 수북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걸 주워 담는 마을 사람들의 손길이 바쁘다.
차가운 도시 여자, 마법사 리슐리에도 오늘은 감자 줍기에 나섰는데 캐롯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리슈, 나 궁금한 게 있어.”
“뭔데?”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흙바닥에서 감자 캐기에 여념 없는 그녀를 보고 마을 청년들의 눈치작전이 날카로운 가운데 캐롯이 히히 웃는다.
“의외로 남자한테 인기 많은걸? 사짜 들어가는 직업이라 그런 거야?”
“선배는 그거 물어보려고 온 거야? 거기 자루 좀 줘.”
캐롯은 끙차 하는 소리를 내면서 반쯤 채워진 감자 자루를 끌고 왔다.
“마법사는 같은 마법사를 알아봐?”
리슐리에는 감이 좋은 여자였다.
힐끔 캐롯을 쳐다보던 그녀는 주변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여기 나 말고 다른 마법사가 있었어?”
“오? 모르는 거야?”
흙을 털고 일어난 리슐리에가 바구니의 감자를 자루에 쏟아 넣으며 말했다.
“괜히 탐색 마법이 있는 게 아니지. 가까운 곳에서 직접 마법이라도 쓰지 않는 한 몰라. 그건 왜 물어?”
“그냥 궁금해서. 그리고 오늘 일정은 어떻게 돼?”
허리를 편 리슐리에가 감자를 주워 담고 있는 5명의 귀족 소년들을 바라보았다.
하기 싫다고 생떼를 쓸 거로 생각했는데 의외로 잘 따라주고 있었다.
“체험 삶의 현장은 이쯤하고, 오후에 복귀. 내일은 가까운 던전에 데려가 보려고 해.”
“오우! 던전. 인상 깊었나 봐?”
악몽이라도 떠올랐는지 얼굴을 찌푸린 리슐리에가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물었다.
“볼품없는 철광석을 칼날로 벼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
“에? 대장간에 가져가?”
“맞아, 그 점에선 사람도 비슷하다고 생각해. 고난과 역경의 망치질로 불순물을 털어내고 차가운 현실의 담금질로 강인해지는 거지.”
그녀가 드물게도 히죽 웃으며 소년들을 다시 한 번 바라본다.
목소리에서 시커먼 웃음기가 넘치고 있다.
“후후후! 맛만 보여줘도 그건 아주 좋은 인생 경험이 될 거야.”
캐롯이 따라 웃더니 말했다.
“하하! 인생 대장간의 던전 용광로에 인간 철광석이구나. 용사 훈련소 정규 수행 과목으로 삼아도 괜찮겠어. 이거 옮길 거지? 가져갈게.”
자기 몸보다 큰 자루를 껴안고 뒤뚱뒤뚱 걸어가는 캐롯을 바라보며 리슐리에는 낮게 중얼거렸다.
“정규 과목, 확실히 나쁘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