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토마톤과 함께하는 감자 캐기! (1) 273 >
쌈박하게 머리를 자른 보리스의 말이었다.
머리를 깎고 한숨 푹 잔 보리스는 원래의 투덜이로 돌아와 버렸다.
아리에테는 그의 얼굴을 보더니 코를 벌렁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흠, 너도 좋구나. 잘생겼다.”
“쯧!”
지겹게 들어온 말이라 불만스러운 듯 보리스가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그의 잘생김은 리슐리에도 공감하는 바였다.
“인간성과는 별개로 외모만큼은 취향입니다.”
칭찬과 디스가 동시에 찾아오는 바람에 잠깐 어리둥절해진 보리스는 화낼 타이밍을 파닥 끼어든 비타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아깝게 왜 잘랐어요! 여장 남자 보리스를 기대했는데!”
“흥! 어차피 머리야 또 자라! 가까이 좀 오지 마! 얼굴 들이대지 마!”
그리고 그들의 툭탁거림을 관찰하고 메모를 남기는 자가 있었으니 어떤 이의 사주를 받은 샤를, 휴가 중임에도 트리스타는 자신의 임무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상황극이 끝나고 저녁 식사 시간, 한가득 모인 공방 사람들의 마지막 바비큐 파티가 시작되었다.
지글지글!
상의 탈의에 가죽 앞치마만 걸치고 불판 앞에 선 크랭크가 비밀리에 공수한 와이번 본 메로우를 선보였다.
“맛있어!”
“음!”
“아주 크리미하군요. 이게 뭐죠?”
입맛 까다로운 귀족들의 칭찬에 크랭크의 눈빛이 매섭게 빛난다.
“와이번의 날개뼈 골수입니다. 강해지는 기분이 듭니까?”
“우오오옥!”
“웨에엑!”
구토의 합창이 이어지자 아리에테가 버럭 외쳤다.
“아깝게 무슨 짓이냐!”
“와, 와이번이잖아요! 사람 잡아먹는 몬스터잖아요!”
그 소리에 흥! 하고 코웃음을 친 아리에테는 마늘빵에 본 메로우를 긁어 올리더니 우적우적 씹으며 말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 다 돌고 도는 거다. 괴물들에게 먹히기만 할 거냐? 오히려 그놈들을 잡아먹겠다는 생각은 없고?”
빵을 씹어 먹은 아리에테가 소년들을 바라보았다.
“포식은 강자의 특권이다. 봐라, 온몸으로 와이번의 용기가 퍼지는 것 같지 않나?”
풍만한 가슴을 움켜쥐고 말하는 육식녀의 궤변에 조신한 귀족 소년들의 시선은 도무지 자리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움직였다.
때마침 큼직한 냄비를 가지고 나온 캐롯이 중재에 나섰다.
“에이, 느긋하게 가자고. 우리 투나가 좋아하는 비프스튜야. 먹어.”
“어, 으응.”
강약으로 오르락내리락하니 소년들의 마음도 싱숭생숭하다.
그리고 이튿날, 캐롯의 방열 가발이 완성되었다.
“우오오! 오오오오오!”
발광하는 투나의 앞에는 윤기 나는 검은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캐롯이 손거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 예뻐?”
공방 앞에서 코비와 함께 체력 단련 중이던 5명의 소년이 그걸 보고 확 달아올랐고, 구경 온 보리스도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누구 머린데.”
“우헤헤! 검은색은 나도 처음인데 아주 마음에 들어. 트윈 테일로 묶어보자.”
“나, 내가 묶을래!”
같은 검은 머리의 투나가 호들갑을 떨면서 캐롯의 머리를 정성스럽게 빗어 묶어 주었다.
결국 참지 못한 투나가 캐롯을 끌어안고 외쳤다.
“아버님! 따, 따님을 제게 주세요!”
작업장에서 크랭크의 투구가 쑥 내밀어지더니 절절 흔든다.
그 모양이 재미있었던지 다들 피식피식 웃어 버렸다.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린 캐롯이 외쳤다.
“오늘의 일과는! 두구두구두! 감자 캐기입니다!”
“감자?”
“응, 가까운 개척민 마을에 갈 거야. 아침 먹고 바로 출발할 테니 준비하자.”
식사를 마치고 크랭크는 바로 수송 차량을 끄집어냈다.
“1박 2일 일정입니다. 가시죠.”
파티 멤버와 5명의 추가 인원을 싣고, 파티 전용 장갑 차량이 출발했다.
이 와중에도 아리에테는 추가 인원을 곱게 데려가지 않았다. 한 명씩 지붕에 올려놓고 소리를 지르게 만든 것이다.
“으아아아!”
“아으아아악!”
지이이잉!
무대 장치처럼 지붕과 실내를 연결한 리프트를 타고 씩씩거리는 소년들이 오르내린다.
개중에는 소리를 지르다 말고 울음을 터트린 녀석도 있었다.
쿨가이 보리스가 물었다.
“이거 꼭 해야 해요?”
“자신감 향상에 좋다. 속에 쌓인 걸 풀어내는 거지. 나도 자주 했던 거다.”
대답을 마친 아리에테는 다음 소년을 위로 올려보냈다.
지붕에는 호위로 캐롯과 로테가 서 있었다.
“전방에 함성! 가즈아! 아으아!”
“어, 으, 으아아아!”
알게 모르게 쌓아온 소년들의 한 맺힌 소리가 몬스터의 접근을 막아주었는지 그들은 내내 야생동물 한번 만나지 않았으며, 길도 새로 다듬어져 있어 전보다 훨씬 일찍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보여! 개척민 마을이다!”
“저게 메크로야?”
거의 1년 만에 찾아온 메크로는 전보다 제법 규모가 커진 상태였다.
집도 많아졌고, 방주 도시에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높은 방어벽도 세워졌으며, 농지의 규모도 몇 배나 넓어졌다.
“우와! 다들! 이게 얼마 만이야!”
“캐롯? 우와! 캐롯이다!”
밭에서 감자 수확에 한창이던 사람들이 고개를 들고 손을 흔든다.
차량에서 훌쩍 뛰어내려 와다다 달려간 캐롯이 그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고, 크랭크도 차량을 세우고 모두에게 도착을 알렸다.
드넓은 감자밭을 정신없이 구경하던 먹보 코비가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와, 여기가 소문의 크랭크 감자밭인가?”
“크랭크 감자는 뭐죠?”
“그건 말이죠······.”
신난 코비가 대답하려는데 마침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다니던 캐롯이 멍청히 서 있는 그들에게 손을 흔든다.
“코비! 고급 굼벵이들 데려와! 이리 와서 감자 좀 캐!”
“갈게요! 여러분 갑시다!”
으히히 신난 코비가 어리바리한 귀족 영식들을 이끌고 달려갔다.
하나씩 자리를 잡고 앉은 그들은 이제 팔자에도 없는 감자 캐기를 경험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게 싫은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 알이 굵어. 잘 키웠네.”
조용한 성격에 원예에 취미가 있어 개인 온실까지 가지고 있는 귀족 영식 하나가 흙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하얀 알알이 감자를 보고 즐거워하는데, 곁에서 다급한 소리가 들린다.
“이것 좀 보세요!”
“컥! 뭐, 뭐야? 그것도 감자야?”
수박만 한 감자 덩이를 보고 소년들이 경악하는 와중에, 근처에서 그걸 자루에 주워 담기 바쁜 코비는 혼자서 황홀경에 빠진 채였다.
“버터 감자, 감자 스튜, 감자튀김, 으흐히히.”
그들을 보고 낄낄 웃던 마을 사람들이 크랭크와 캐롯을 보았다.
“오랜만일세. 자넨 못 본 새에 더 커진 것 같군.”
크랭크는 대답 대신 우람한 팔뚝을 선보였고, 마을 사람들은 파하하 웃어 버렸다.
바구니를 든 처녀 하나가 캐롯을 보았다.
“캐롯은 머리 색이 바뀌었어. 전에 갈색이었는데.”
“와! 그러고 보니, 나 1년 새에 가발 몇 채나 태워 먹었지?”
그 자리에 아리에테도 넉살 좋게 끼어들었다.
“으흠! 어, 나도 소개를 부탁한다.”
“이분은?”
캐롯이 나섰다.
“아리에테, 우리 파티 리더예요. 그리고 저기 잘생긴 애랑, 신관하고, 마법사에, 감자 덩어리 들고 좋아하는 애가 우리 파티. 아, 그리고 저기 존재감이 없는 쟤도.”
존재감은 없지만 맡은 일은 꿋꿋이 잘하는 지오가 감자 자루를 옮기며 빙그레 웃어준다.
덕분에 마을 처녀들에게 묘한 시선을 받아 버렸다.
마을 어른들은 주변 경계를 맡은 마법사와 밝게 웃으며 애들을 돌봐주고 있는 여신관을 쳐다보았다.
“오! 마법사에 신관! 대단한걸?”
“그럼 나머지 5명은?”
캐롯이 으히히 웃더니 말했다.
“그건 우리 고객.”
이리하여 수확철 감자 일손 돕기가 시작되었다.
최근 작황은 연이어 대풍, 일손도 많아져서 중요 수입원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우오오오오오!”
콰가가가가!
캐롯이 큼직한 머리빗처럼 생긴 쟁기를 끌고 달리자 감자가 땅속에서 후두둑 솟아오른다.
“원 세상에, 원래는 말이나 소가 끄는 건데.”
“우리 애들도 저렇게 좀 시켜볼까?”
“그 애들은 경비 세워야죠. 우리가 한가롭게 있는 이유가 그건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마을 사람들 사이에, 함께 쭈그려 앉아서 감자를 골라내던 아리에테가 이마의 땀을 닦았다.
“나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드래곤의 음모에 휘말려 거대 개미와 사투를 벌였는데, 오늘은 감자를 캐고 있군.”
“신나지 않아? 네 삶은 앞으로도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날지 몰라.”
눈부신 가을 햇살 아래, 캐롯의 얼굴이 쑥 내밀어지더니 아리에테의 머리에 밀짚모자를 올려주었다.
살벌한 하이테크 외골격 갑옷을 두른 여기사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 밀짚모자는 그늘을 만들어 그녀의 얼굴을 지켜주었다.
아리에테가 고개를 숙이고 풋 웃어 버린다.
“그 정도는 아니야. 다만, 나쁘진 않다고 해두지.”
“그럼 됐네. 가자, 자루 옮겨야 해.”
“음.”
자리를 털고 일어난 아리에테는 그 용력으로 크랭크보다 더 많은 자루를 들어 올려서 마을 청년들의 가슴에 어떤 종류의 화살을 꽂아 넣었다.
“저 처녀는 크랭크 총각의 색시인감? 힘이 장사여.”
“그런 건가요!?”
마을 어르신들과 처녀들이 궁금해하자 크랭크가 손을 흔들었지만 아리에테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음, 입을 맞춘 사이긴 하지.”
“에에에에!?”
텁!
그녀의 머리에 분노한 크랭크의 아이언클로가 올라갔다.
“헉! 아니! 내가 말을 잘못했다! 그러지 마라! 아으아아아!”
머리를 붙잡고 버둥거리는 아리에테를 가리키며 크랭크가 선을 그었다.
“얼마 전 죽을 뻔했을 때 인공호흡을 해줬습니다. 그걸로 놀리는 겁니다.”
안도하는 사람들도 있긴 했지만 대체로 그들의 툭탁거림을 가볍게 보지 않은 자들이 많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캐롯이 외쳤다.
“오늘치 감자 캐기 끝! 와, 그런데 많이 바뀌었어요. 우리가 없는 새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임?”
“우리도 너희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니 그걸 좀 나눠보자꾸나.”
이윽고 마을로 향한 그들은 촌장을 비롯한 모두에게도 환영받았고, 서로 처음 보는 사람들을 소개하던 것은 자연스레 마을 잔치로 이어졌다.
슬쩍 자리에서 빠져나온 캐롯은 봄바를 찾아 나섰다.
마을 뒷산 보름달 아래의 커다란 바위, 고고한 오토마톤이 올라서서 달을 올려다보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봄바!”
하얀 방열 가발을 늘어뜨린 이젤리아제 오토마톤이 고개를 돌리자 캐롯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키린? 윤 네인.”
이젤리아 말로 네 이름이 키린? 이렇게 물어보자 봄바가 한참 캐롯을 보더니 주섬주섬 수첩을 꺼내 페이지를 넘기고 그걸 앞으로 내밀었다.
-?
그리고 글자도 덧붙였다.
-키린은 누구입니까?
누구냐고? 어?
실망과 함께 찾아온 한 가지 가능성, 캐롯도 수첩을 꺼내더니 적어온 이젤리아 말 중의 몇 마디를 더 떠들어댔다.
아침 인사, 저녁 인사, 작별 인사, 식사하셨어요? 등등.
“이게 무슨 말인지 들려?”
-들립니다. 이해 가능.
캐롯의 눈이 커졌다.
확실해!
“키린, 너 아무래도 용사의 오토마톤이래, 100년 전에 마왕과 싸운.”
슥삭슥삭, 봄바가 글자를 적어 내밀었다.
-그것이 설령 내 과거라고 하여도, 나는 지금 현재의 이곳에 있습니다. 내 이름은 봄바, 나는 개척민 마을 메크로의 경비대장입니다.
“응, 그것도 좋지.”
상당히 마음에 든 대답인 듯, 캐롯은 뒷짐을 지고 푸근한 미소를 머금었다.
사사삭!
어둠 속에서 뭔가 달리는 소리, 캐롯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경계 중인 오토마톤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캐롯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와오! 너희들 오랜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