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자동인형 오토마톤-270화 (270/329)

< 오토마톤과 함께하는 역사관! 270 >

엘프 조사단의 수장이 아는 사람이라는 보이드 자작의 소개에 망가뜨린 정원의 복구를 돕고 있던 캐롯이 희석제로 불려온 것이다.

“자자! 여러분! 검은 소나무 탑의 멋쟁이 필림 장로님을 소개해 드릴게요!”

엘프를 거의 처음 본 왕립 조사단이 쭈뼛거리며 그들과 통성명하고 함께 조사를 시작했다.

그렇게 바위 거인의 구동, 동력 전달, 신경계, 건축 양식 등 모든 방면에서의 조사가 이뤄졌다.

조종실 내부로 들어가 이곳저곳을 살피는 필림 장로에게 왕립 조사단장이 다가와 물었다.

“장로님, 이게 대체 뭡니까? 저희는 800년 전의 역사에 대해서는 들은 게 없습니다. 이것도 거의 전설로만 전해져 오던 것이었지요.”

“전승 지식의 관리가 엉망이로군. 언젠가 자네들의 선조에게 분명 관련 자료를 공유했었는데 전해지지 않은 건가?”

엘프는 잘 아는 사람이 아니면 좀 쌀쌀맞다.

쓴 것을 삼킨 얼굴의 왕립 조사단장에게 등을 보인 채 앉은 필림 장로는 바닥의 파편을 주워 살피며 중얼거렸다.

“자네 조상들은 굉장한 문명을 일궈냈지. 그리고 그걸 온전히 싸움을 벌이는데 다 써 버렸어. 이 전설의 거인도 그 시대의 것이지만, 당시의 싸움만은 용케 피한 것 같군.”

“우와, 정말요? 하지만 지금 남아 있는 게 별로 없는데요?”

똘망똘망한 목소리,

천장의 조종석 입구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캐롯을 필림 장로가 가리켰다.

“보게, 저 오토마톤이 그 증거야. 구성품을 일러볼까? 내부 근육과 인대, 신경계는 키메라 합성 기술의 산물이야. 뼈대를 비롯한 구동부와 동력계는 마도 과학의 것이고, 섬세한 감각기관과 그걸 관리하는 두뇌 제어부는 또 어떤가.”

짧은 숨을 돌린 필림 장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정확히 캐롯을 보고 있었다.

“신께서 자기 모습을 본떠 인류를 만들었다는 흔한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거야. 막되어 먹은 인류는 그런 창조주의 흉내를 내보고 싶었던 것인지, 문명의 정수를 한데 모아 또 다른 의미의 자손을 만들어 냈지.”

그나마 온전하게 남은 거인의 조종실, 그 안을 조사 중이던 사람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어 엘프 장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필림 장로는 손가락을 들어 여전히 거꾸로 매달린 자동 인형 오토마톤을 가리켰다.

“그것이 너희들이다. 문명과 기술의 진수이며 동시에 우리들의 또 다른······.”

“아빠!”

냅다 장로의 말을 끓어 버린 캐롯이 공중에서 휙 돌아 착지하더니 필림 장로에게 덥석 안겨들었다.

“킁카킁카! 아빠! 좋은 냄새 나요!”

눈썹을 꿈틀거린 필림 장로는 캐롯을 번쩍 들어 올리더니 맞은편의 왕립 조사단장의 품에 안겨주었다.

“사실 네 아빠는 이쪽이란다.”

“우와! 아빠가 둘이라서 너무 좋아! 이 아빠는 배가 나와서 푹신푹신-!”

캐롯의 저세상 텐션이 부활하자 킥킥큭큭하는 소리가 들린다.

쿨시크를 넘어 언뜻 차가워 보이는 엘프들마저 쿡쿡 웃음 짓자 그걸 넋 놓고 바라보던 모두는 캐롯에게 고마워했다.

뻣뻣한 분위기를 좀 부드럽게 다듬어 놓은 캐롯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애들은 가까이 있는 어른들이 하는 걸 보고 배운데요. 그러면 신님도 결국 우리랑 비슷하지 않았을까요? 그분도 망쳐 가며 배우는 도중인 거예요.”

그 말에 필림 장로가 캐롯을 새삼 다시 보았다.

양 손가락을 V로 만들고 브이브이를 외치고 있는 이 꼬마 인형은 최근 신형 오토마톤 개념 정립에 몰두하고 있는 그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고 있었다.

갑작스레 반짝이는 눈이 된 필림 장로가 왕립 조사단장을 바라보았다.

“연산 보조로 함께 남아 있던 그 고대인의 자동 인형도 보고 싶소. 그건 인류의 보물이 될 거요.”

조사단장의 얼굴이 잔뜩 굳어지더니 거절했다.

“그분은 이젤리아의 산 역사, 절대로 허락할 수 없습니다.”

“이런, 그거 참 안타깝구려.”

예상했던 반응인지라 필림 장로는 그저 음흉하게 웃기만 했다.

* * *

피해 복구, 파벌 숙청, 이상 번식한 크림슨 앤트의 원인 규명과 그 대응책 등등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이 와중에, 르클레르를 앞세운 리즈넷 상회 길드에서도 그간 밀린 외상값 청구를 위해 직접 수도를 내방했다.

밀린 대금의 액수를 들은 제이드 기사단장은 얼굴이 핼쑥해져 버렸다.

“그, 그렇게나?”

어두운 회의실, 측근을 대동하고 맞은편에 앉은 르클레르가 히죽 웃는다.

“딱히 전부 돈으로 받겠다는 건 아닙니다. 광물 채굴권이나 기술진이 제작 의뢰한 물건들의 지식재산권으로도 협상 가능하니 이점 숙지해 주십시오.”

“으으으음! 어쩐지 속는 기분이야. 고생은 우리가 다 했잖은가!”

르클레르가 어깨를 으쓱이며 히죽 웃는다.

“기분 탓입니다.”

제이드 기사단장은 꾹 다문 입을 부들부들 떨더니 곁에 앉아 있는 붉은 선글라스의 노신사를 바라보았다.

“후작님도 뭐라고 좀 해주십시오. 이건 너무 많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보이드 자작은 회의실을 휘적휘적 걸어서 르클레르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이쪽이요.”

“후작님!”

기사단장의 절박함에 다들 쓴웃음을 지었다.

르클레르가 보이드를 바라보았다.

“놀랍군요. 언제 후작 작위를 받으셨습니까?”

“드래곤 슬레이어라고 치켜세워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공작 영애.”

다시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그는 또 휘적휘적 회의실을 걷어 반대편으로 가더니 제이드의 곁에 앉았다.

노신사의 행동이 재미있었는지 다들 흐뭇한 표정이 되었다.

지팡이를 한번 들었다가 탁하고 놓은 그가 말했다.

“너무 많이 떼어먹으면 이젤리아 쪽에서 보복으로 수출입 관세를 때릴 겁니다. 나라면 그럴 거요.”

“음!”

제이드의 눈빛이 번쩍이자 르클레르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다시 가격을 제시했다.

“아니! 그래도 많잖은가!”

르클레르가 또 어깨를 으쓱이며 히죽 웃는다.

“기분 탓입니다.”

* * *

협상단의 밀고 당기기가 이어지는 동안 크랭크와 캐롯, 아리에테는 느긋하게 소개장을 들고 유서 깊은 오토마톤 제작 명가 에이그스타 가문을 방문하고 있었다.

멋진 집사 복장을 차려입은 잘생긴 청년이 두 팔을 벌리고 그들을 맞이했다.

“광견병 걸린 햄스터! 회전하는 오르골 인형! 스팀 레이디! 안개 속 여신의 인형! 하늘다람쥐! 마성의 꽃 소녀에, 드래곤 슬레이어!”

모두 캐롯의 위명들, 새삼 놀란 아리에테가 박수를 쳐 버렸다.

캐롯은 허리에 손을 올리고 의기양양 기뻐했고.

크랭크가 정중히 인사했다.

“자세히 아시는군요.”

방문객의 안내를 맡은 젊은 집사가 푸근하게 웃는다.

“저희 가주님께서는 유명한 오토마톤의 이야기를 아주 좋아하시거든요. 그 활약은 작품 활동에 많은 자극이 된다고 하십니다.”

“우와! 그럼 다른 오토마톤도 아세요?”

캐롯을 내려다보며 흐뭇하게 웃음 지은 그가 크랭크를 보았다.

마냥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호기심이 충만한 표정이 드러났다.

“저도 조금의 식견은 있습니다. 대체 어떻게 하면 이런 걸작이 나오는 겁니까?”

“사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우연의 산물입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완성도가 기적에 가깝군요.”

진지한 두 사람의 아래에서는 캐롯이 빙글빙글 춤을 추며 오두방정을 떨고 있었다.

“호오옵! 걸작! 내가 무려 세기의 걸작이래! 아리에테!”

“어, 음, 세기란 말은 없었지만 걸작은 맞다 생각한다.”

잠깐 크랭크와 뜨거운 시선을 교환하던 집사가 몸을 휙 돌리더니 별채로 안내했다.

“찾아주시는 방문객이 많다 보니 따로 역사관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천천히 구경하시지요. 에이그스타 가문은 작은 시계방에서부터 시작되어······.”

집사는 그 나이대에 어울리는 활기를 선보이며 나불나불 잘도 떠들어댔다.

아리에테가 그의 빠른 목소리에 두통을 호소할 정도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박물관 같은 내부를 살피던 크랭크는 역대 만들어진 오토마톤의 견본이며 부품, 그 설계 사상 등을 꼼꼼히 살피고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혼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캐롯이 소리를 꽥 지르기 전까지 꽤 유익한 시간이었다.

“우와! 크랭크! 여기 봐봐!”

“이 꼬마가 한참 좋은 시간을 방해하는군.”

집중하던 탓인지 드물게도 크랭크가 캐롯에게 불만을 표시했다.

하지만 캐롯이 가리키는 것을 보고는 멈칫해 버렸다.

죽 늘어진 견본 오토마톤의 중간, 유독 한 모델만 거창한 문장이 그려진 깃발 아래에 서 있었다.

여신상 같은 외형도 눈에 익고, 문장도 눈에 익다.

캐롯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이거 메크로의 봄바 닮지 않았어?”

주섬주섬 안주머니의 수첩을 꺼내 펼치자 봄바의 전신 스케치가 나왔다. 펼친 그림에는 특이한 문장도 하나 그려져 있었다.

수다쟁이 집사장이 히죽 웃으며 다가왔다.

“리즈넷에서 오신 분들은 다들 여기서 멈추시죠. 소개합니다. 저희 가문의 희대의 역작, 용사의 인형입니다. 이 모델은 당시에 개발된 범용기 가이아를 바탕으로 성능을 대폭 개량한 것으로······.”

따로 물어보지 않아도 신나게 떠들어대는 그의 말속에 옛이야기 포함되어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100년 전쯤, 대륙에서 마왕이 출현하자 그를 중심으로 마족들이 힘없는 자들을 폭정으로 억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심심하면 인간 마을에 쳐들어가 아내들이 보는 앞에서 남편들을 겁탈했다죠.”

그 이야기를 들은 크랭크는 심드렁했지만 아리에테는 분노에 치를 떨었다.

앙증맞지만 무자비한 주먹을 꼭 움켜쥔 캐롯이 그걸 마구 흔들며 눈을 반짝였다.

“그래서요? 그래서요?”

하하 웃으며 집사장이 말을 이었다.

“당연하게도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인간은 상대도 되지 않았지만, 오토마톤은 그들을 견제할 수 있었거든요. 영토 확장 여론까지 일어서 북으로 북으로 계속 밀어붙였다죠. 당시 저희도 엄청나게 만들어 보냈습니다.”

그가 두 팔을 벌렸다.

“안타깝게도 저희 가문이 이만큼 번성한 것은 그때의 성과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건 됐고! 그래서요? 그래서요!”

마족들은 분전했고, 엘프들이 중재에 나섰으나 자존심 강한 자들은 화평을 무시했다.

먼저 때렸다는 이유에서였다.

아리에테가 어이없다는 듯 외쳤다.

“무슨! 자기들이 먼저가 아닌가!”

“당시 마족들은 정말로 힘이 지배하는 사회였거든요. 게다가 역일부다처제라고 합니다. 발음과 인식에 주의합시다. 역! 일부다처제. 남자가 별로 없다더군요.”

캐롯이 손을 번쩍 들었다.

“그건 나도 들었어요! 아는 마족 언니에게! 자기만의 수컷을 갖고 싶다면서 되게 분해하던데.”

집사장이 밝은 표정을 지었다.

“그건 저도 자료로만 봤는데 사실인가 보군요. 여러분의 거점 도시에는 마족과의 접경지가 있다면서요?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들러보고 싶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자 마왕의 암살 계획이 세워졌고, 각지에서 용사 파티가 꾸려졌으며 오토마톤 생산 기지나 제작 가문에는 국가 차원의 발주가 들어갔다.

이름하여 용사의 오토마톤, 당시 최신 기술을 모두 집어넣은 특별 주문 제작품들.

집사가 봄바를 꼭 닮은 오토마톤 견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게 당시 저희가 만들어 보낸 것입니다. 파트너 용사들과 함께 마왕성에 돌입하는 데까지 성공했지요.”

“그리고요? 그리고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