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토마톤과 함께하는 고문! 266 >
그로부터 수일 후, 그들은 이젤리아 왕국 수도에 도착했다.
이국적인 주택이 잔뜩 늘어선 도시의 대로로 2층 건물 높이의 자동 갑옷이 느릿느릿 걷는다.
쿵-! 쿵!
그 커다란 손바닥 위에는 꼬마 하나가 서서 시민들에게 마구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야호! 안녕하세요. 사랑하는 백성 여러분!”
이빨이 하나 빠진 개구쟁이가 와하하 웃으며 두 손을 흔드는데 시민들은 여러 가지 의미로 놀라워했다.
“왕자님이야!”
“우와! 저 거인은 뭐야?”
“세상에!”
왕자님이 5미터짜리 거인을 타고 돌아왔다는 소식은 금세 거리로 퍼져서 환영 인파가 쏟아져 나와 그의 귀환을 반겼다.
더불어 소식을 접한 왕궁에서도 급조한 환영단이 몰려나와서 시가행진 중인 거대 기사의 주변을 호위했으며, 마지막엔 꽃잎까지 뿌려대며 환영식을 마무리했다.
“와하하! 그럼 여러분 좀 있다가 또 봐요!”
궁전의 성문 안으로 들어간 거대 자동 갑옷과 그 손바닥에 오른 왕자가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자 뒤따라온 시민들이 환호했다.
성문이 닫히고, 궁성 관계자들이 몰려왔다.
“호위와 시종단은 어쩌시고 혼자서 오셨습니까?”
바닥에 내려온 왕자는 팔짱을 끼고 히죽 웃으며 속삭였다.
“어때? 내가 죽은 줄 알았지? 이히히!”
다들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으나 인상이 꿈틀거린 사람도 몇 있었다.
폴짝 뛴 왕자가 다시 거인의 손바닥에 올라타자 위로 쑥 올라간다.
모두를 내려다보며 왕자가 버럭 외쳤다.
“당장 근위기사단을 호출! 감히 왕자님의 목숨을 노리다니! 반란자 색출이다! 모조리 숙청이야! 숙청! 르메르트 공작부터 조져! 즉각 시행하라!”
앞뒤 분간 없이 떠들어대는 왕자님을 다들 멍청히 올려다보는데, 함께 온 자들이 정말로 암살 시도가 있었음을 알리고 근위기사단장을 호출했다.
그제야 놀란 사람들이 허둥지둥 날뛰기 시작한다.
“진짜라니깐? 봐봐, 마력수정폭탄을 직격으로 얻어맞아서 이빨도 하나 빠져 버렸어.”
“와, 왕자님의 용안에 흠집이! 내 이자들을 당장에!”
분기탱천한 근위기사단장이 부하들을 이끌고 용의선상에 오른 반란자들을 포박하러 달려가 버렸다.
무장한 근위병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저택을 수색하는 등 한동안 난리가 일어났다.
이 와중에 왕자는 여전히 대형 갑옷에 올라탄 채 사실상 유폐된 여왕의 구출을 위해 정원을 헤집어가며 별궁으로 쳐들어갔다.
“엄마!”
작업복 차림으로 한가롭게 정원을 가꾸고 있던 여왕이 고개를 들었다.
백금발을 틀어 올린 우아한 여성이었는데 그리 인상이 강해 보이진 않았다.
쿵-!
하지만 거대한 발자국에 꽃밭이 으깨지는 것을 보고는 눈썹이 위로 확 솟아올랐다.
“이 몸의 꽃밭이-!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 그대는 누구더냐!”
꽃밭에 무릎을 꿇은 거대 기사가 손을 내밀자 그 위에 오른 꼬마 왕자가 두 팔을 들고 여왕의 앞으로 다가왔다.
“엄마! 내가 돌아옴!”
여왕은 기가 차 버렸다.
그녀는 손에 든 전지가위로 눈앞의 꼬마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대는 누구더냐? 왕자는 날 닮아서 숫기도 없고 그리 활발하지 않아.”
“오우야! 엄마의 자식 디스 무섭다.”
몸을 돌린 캐롯이 조종석 안쪽에 대고 손짓하자 진짜 왕자가 지친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어, 어머니. 저 돌아왔어요.”
눈이 커다래진 여왕이 꽃밭으로 뛰어들더니 조심스레 뛰어내리는 아들을 받아냈다.
오랜만에 엄마의 품에 안긴 왕자는 그간의 고생과 설움에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거대한 기사를 배경으로 꽃밭에 얼싸안고 있는 모자를 흐뭇하게 지켜보던 캐롯은 마침 다리에 무언가 와서 비비적거리는 것을 보고는 두 손으로 그걸 안아 올렸다.
“호오오! 네가 왕자님네 고양이야? 하얀 고양이네.”
“냥.”
파란 눈의 고양이가 짧게 인사하는 것 같다.
으히히 웃어준 캐롯은 고양이를 끌어안은 채 정원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쿠르르르릉-!
퀘에에에에에!
별안간 일어난 땅울림, 저 멀리 도시 한복판에서 거대한 붉은 몸체가 솟아오르는데 별궁의 정원에서도 보일 지경이었다.
왕자와 닮은 분장을 한 캐롯이 고양이를 안은 채 이마에 손을 올렸다.
“저건 또 뭥미?”
“냥.”
몇 분 전,
바쁘게 움직이는 근위대를 따라 르메르트 공작 저택으로 쳐들어간 크랭크와 아리에테는 거기서 훤칠한 키의 잘생긴 중년 남자를 마주했다.
공작은 난데없이 무장하고 찾아온 근위기사단을 보고 역정을 냈다.
“이게 무슨 짓인가!”
“왕자님의 암살 시도가 있었습니다. 잠시 동행하여 주십시오.”
그를 대하는 근위대장의 인상이 사납다.
귀족원, 기사단을 동원하여 여왕을 유폐시킨 것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던 그였다.
그렇지 않아도 벼르고 있던 참인데, 암살이라니! 그것도 제 아들을!
미친 게 아닌가 싶으면서도 이참에 잘 걸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눈썹을 꿈틀거린 그가 어이없다는 투로 말했다.
“아비가 자식을 해하려 한다니 그건 또 헛소리인지 모르겠군. 그래서 증거는 있고?”
따라온 아리에테가 호오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내 왕자의 아버지, 여왕의 남편은 누군가하고 궁금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도 융숭한 대접을 위해 따라왔던 크랭크가 앞으로 나섰다.
“요즘 향수병이 도질 것 같군요. 이제 그만 공방으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무슨 소리지? 이자는 누구인가?”
이윽고 크랭크가 투구를 붙잡았다.
“제 소개가 늦었습니다. 리즈넷 최고의 고문 전문가, 그것이 바로 저입니다. 자, 알고 계신 것을 다 알려주시렵니까?”
이건 또 무슨 헛소리인가 싶었던 공작은 그의 맨얼굴을 보고 주춤거리더니 뒤로 물러섰다.
그 말고도 방 안에 모인 모두가 누군가를 부르며 오열하기 시작한다.
너무 시끄러울 지경이라서 크랭크는 공작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위협도 가할 겸.
누구를 보게 된 것인지 르메르트 공작은 울면서 외쳤다.
“어, 어째서 당신이 여기에? 돌아가시지 않았소! 내 품 안에서!”
“듣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왕자를 시해하라 하셨습니까?”
“아니, 아니오! 그 가짜를 몰아내고 자리를 잡는 동안 상경을 늦추라고 했지, 거기까지 하라곤 하지 않았소! 아아! 미안하오, 미안하오. 아멜리아! 다 내가 모자란 탓이오. 으흐흑!”
크랭크가 한 발 내딛자 공작은 두려운 듯 두어 발 물러섰다.
“그럼 누가? 가담자는?”
“기사단의 급진파 중 하나일 거요. 저기 책장에 클럽 명부가 있소. 으흐흑! 아멜리아,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잘못했소이다. 어찌 그리 급하게 먼저 가시었소.”
주저앉은 공작은 이제 거창한 소리로 울어댔다.
“호오!”
크랭크가 서재의 책장으로 고개를 돌리니 이미 누군가가 팔짱을 끼고 기대어 있는 것이 보였다.
새하얀 얼굴, 빨간 머리.
“신기한 저주로군. 무어냐 그것은? 교묘하군, 그래.”
분명 방금 전까지 없었던 소녀다.
힐끗 아리에테를 보았으나 그녀도 고개를 저으며 검을 붙잡는다.
그런데 이 소녀,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낯이 익다.
하얀 피부에 머리카락만 붉은색, 그리고 뭔가 싸늘한 분위기.
수다쟁이 오토마톤에게 들었던 이야기 하나를 떠올린 크랭크가 투구를 쓰더니 다시 철면피가 되어 물었다.
“메르카바 님이십니까?”
“나를 아느냐? 나는 너를 모른다. 너는 누구지?”
그제야 알아본 아리에테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마녀의 저주 때문에 주위에서 들리는 소음이 거슬렸던지 메르카바가 손가락을 튕기자 소리가 싹 사라졌다.
크랭크가 점잖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당신의 가슴에 구멍을 낸 인형의 주인이 바로 저입니다.”
잔뜩 분위기를 잡고 있던 드래곤 레이디 메르카바가 고개를 들더니 반색했다.
“그대가? 놀랍군. 그것의 완성도는 기적이었다. 나에게 팔지 않겠는가? 내 수집품에 추가하고 싶구나.”
“안됩니다. 캐롯은 제 인생 최대의 작품, 누군가에게 넘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구나. 안타깝군.”
잠깐 입을 다문 그녀가 일그러진 눈빛으로 되물었다.
“아느냐? 주인의 자리야 시간을 들이면 얼마든지 갈아치울 수 있다. 지금의 이 나라처럼.”
스릉-!
검을 뽑은 아리에테가 크랭크의 몸을 가리고 섰다.
“이, 이 사악한 드드드래곤! 무무무슨 속셈이냐!”
버럭 외치긴 했지만 드래곤이라는 것을 알아챈 이상 겁이 나기 마련, 칼끝이 속절없이 떨린다.
눈앞의 이 무모하고 용감한 여기사를 살피던 메르카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는 뭐냐? 몸이 두 개인가? 오! 자동 인형에 인간의 몸이 섞여 있구나.”
혼자서 문답하며 감탄하던 메르카바가 가까이 다가와 아리에테를 살피더니 말했다.
“놀랍다. 이름이 무엇이냐?”
“아, 아리에테다!”
오들오들 떨면서도 검을 내리지 않은 그녀를 보고 메르카바가 빙긋 웃는다. 그러더니 무시무시한 눈빛을 드러냈다.
“너도 내 수집품에 추가하고 싶구나. 수정 속에 박제시켜 놓으면 멋지겠어.”
아리에테의 등골에 소름이 돋아 버렸다.
후다닥 물러선 그녀는 크랭크의 커다란 몸 뒤로 숨어 버렸다.
당황한 아리에테가 시선을 위로 뜨고 외쳤다.
“시온! 왜, 왜 이러는 거냐! 내가 겁먹은 것처럼 보이잖아! 다시 앞으로 나서!”
그녀의 머리에 장식된 검은 티아라가 대답했다.
“거부합니다. 당신은 위험합니다.”
“내 말에 따라! 우리는 위험하지 않아!”
“지금 당신은 공포심에 사로잡혀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습니다. 마스터의 안전을 최우선합니다.”
끼긱! 긱!
“이익, 내, 내 말을 들으란 말이다.”
급기야 아리에테는 행동을 강제하는 시온과 싸움이라도 하는 듯 이상한 몸짓으로 움직여 댔다.
그 꼴을 본 메르카바가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유쾌하구나. 재미있는 녀석이구나. 그럼 이건 어떠냐? 죽은 후에 시체를 주는 것이다. 그 대신,”
메르카바는 무시무시한 대가를 제시했다.
“네게 진짜 팔다리를 다시 붙여주마. 나는 키메라 합성 기술에 정통해 있다. 죽은 것도 살려낼 수 있지.”
츠팟!
순간 이동, 아리에테에게 바싹 달라붙은 채 모습을 드러낸 드래곤 레이디가 여기사의 귓가에 속삭인다.
“어떠냐? 사지절단 여기사, 진짜 팔다리를 가지고 싶지 않은가? 네 남자가 침대에서 좋아할지도 모른다.”
얼굴이 확 달아오른 아리에테가 저도 모르게 힐끔 쳐다보자 크랭크는 기분이 좀 나빠져 버렸다.
“우리는 절대 그런 사이가 아닙니다.”
여러 가지로 분노한 아리에테가 손을 휙 휘둘렀다.
“사람을 가지고 놀지 마라! 드래곤!”
“크흐흐하하하!”
다시 책장 앞으로 돌아온 메르카바가 그 가면 같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웃더니 말했다.
“몹시 재미있는 녀석들이구나. 상으로 너희들이 궁금한 것을 알려주겠다.”
히죽 웃던 그녀가 손가락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켰다.
“나다, 전부 내가 시켰다. 여왕을 밀어내고 왕자를 없애라고 말이야.”
“뭣!?”
놀란 아리에테와는 별개로 얼굴에 철판이 깔린 크랭크는 무덤덤하게 드래곤의 앞에서 팔짱을 끼는 위엄을 선보였다.
“왜입니까?”
“그야 재미있는 유희를 위해서지. 이놈들은 맞장구를 쳐주는 것만으로도 서로를 의심하고 배척하더구나.”
메르카바는 무슨 생각인지 바닥에 주저앉아 오열하는 공작을 가리키며 자신의 계획을 술술 풀어놓았다.
“그리고 다음 계획은 저 녀석을 왕으로 앉히는 것이었다.”
슬쩍 그를 쳐다본 크랭크가 투구를 기울였다.
“저자가 실권을 쥐면 뭔가 바뀝니까? 목적이 무엇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그리고 갑자기 수다쟁이가 된 이유도 알려주면 좋겠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