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토마톤과 함께하는 숙청! 265 >
크랭크는 목숨을 건졌으나 상황은 좀처럼 정리되지 않았다.
제이드 기사단장이 실종 상태라 아리에테가 임시 지휘권을 잡아 생존자들을 규합, 부상자를 구출했으며, 힐링 포션을 마시고 상태가 호전된 크랭크는 사방에 널린 파편 조각을 주워다 임시 대피소를 만들어 냈다.
쏴아아아!
“대피소가 완성되었다! 다들 이쪽으로 옮겨!”
흩날리는 빗속을 뚫고 사람들이 부상자를 옮기기 시작한다.
이 와중에도 크랭크는 망치와 밧줄로 대피소를 확장해 나갔다.
탕탕탕!
“너는 모험가가 되지 않았다면 목수가 어울렸을 것 같다.”
아리에테의 감상에 망치질하던 크랭크가 투구를 돌렸다.
“부상자에게 비를 맞힐 수는 없다. 구출 상황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지?”
“아직 수색 중이다. 하지만 폭심지에 있던 사람들은 꽤 많이 죽었어.”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긴 아리에테가 짧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가랑비가 흩날리는 폭발 현장에서는 파편을 치우고 깔린 사람을 구출하는 일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위급 상황에서 오토마톤은 물론이고 자동 갑옷도 상당한 유용성을 드러냈다.
지치지 않는 데다 힘도 셌기 때문에 사람을 도와 많은 일을 해냈다.
트드득-!
전복된 차량을 바로 세우자 아래에 사람이 깔려 있다.
누군가가 대놓고 그 이름을 부른다.
“제이드! 이 녀석아! 어서 눈을 떠!”
“스, 스틱스 아저씨······?”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자동 갑옷을 주워 입은 스틱스 정비 반장이 기사단장에게 우악스러운 손을 뻗었다.
“가, 가만히 있어라.”
“으으윽.”
자동 갑옷이 남은 파편을 치우고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리고는 임시 야전 병동으로 달려갔다.
부러진 사지의 고통을 억누르며 기사단장이 물었다.
“으, 으윽, 사, 상황은?”
“습격이 있었지만 전부 격퇴했다! 지금은 구조 작업 중이야! 혹시 남길 말이 있으면 해봐라! 너희 가문에 전해 줄 테니!”
보통은 더 이상 말하지 말라고 하는 거 아닌가?
햇병아리 시절부터 기사단에서 보아 온 노련한 기술자의 농담에 제이드 단장이 킥킥 웃는다.
자동 갑옷이 투구를 돌리더니 스틱스의 목소리로 말했다.
“웃는 걸 보니 썩 괜찮구만, 이봐들! 단장님 구해왔어!”
임시 병동에서 바쁘게 오가던 사람들이 반색한다.
“아아! 단장님!”
“기사단장님을 어서 이쪽으로!”
그녀가 신관의 신성 치료를 받는 동안, 캐롯은 매캐한 연막이 깔린 숲속을 주파하고 있었다.
우다다다!
촤아아악!
숲 저편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급정거하니 연기 속에서 익숙한 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족장님!”
킁킁!
오크 족장의 이름은 도동가, 유난히 우람한 허벅지 덕에 터질 것 같은 가죽 바지가 눈에 띈다.
연막 때문에 코가 매운지 인상을 찌푸린 그녀가 어떤 꼬마의 목덜미를 잡아 내밀었다.
“오옥! 왕자님!”
와다다 달려간 캐롯이 기절한 왕자를 받아 들자 도동가 족장이 말했다.
“큰소리 들었다. 하지만 멀었다. 그래서 늦었다. 그리고 찾았다.”
뭔가 언어의 문법이라도 연습하는 것 같았지만, 의미는 충분히 전달되었다.
함박웃음을 지은 캐롯이 고개를 들자 도동가 족장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그러더니 천천히 허리를 숙이고 캐롯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너, 정말로 기계인형.”
입 찢어진 소녀가 톱니를 드러내고 히죽 눈웃음을 짓더니 대뜸 손을 내밀었다.
“그래도 우리는 친구?”
친구, 이 단어는 잘 안다.
무뚝뚝한 오크 여전사의 얼굴로 포악한 미소가 번진다.
드러난 하얀 이빨은 캐롯보다 멋진 것이었다.
도동가 족장은 그 손을 맞잡는 대신 뒤쪽을 가리키며 사로잡은 괴한들을 보여주었다.
“저거 우리 가진다. 새로운 종마.”
“오우! 좋으실 대로 하세요.”
붙들려 있던 사내들이 질겁하고 발버둥을 쳤으나 잔뜩 몰려온 오크 여전사들은 키키케케 사납게 웃어댈 뿐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도동가 족장은 그제야 캐롯의 손을 맞잡았다.
“너만, 우리 친구.”
“에에?”
크랭크와의 내기를 떠올린 캐롯이 떫은 표정을 지었으나 입이 찢어져 있어서 뭘 해도 흑막의 꼬마 부하가 웃는 것처럼 보인다.
“에, 뭐 그래도 상관없나? 하여튼 고마워요. 그리고 빨리 가봐야 해, 다들 찾고 있거든요.”
“음, 우리 약속대로 신호 기다린다.”
캐롯이 뜨악했다.
아까는 눈이 뒤집혀서 그런 생각조차 못했었다.
“아차차! 신호탄이 있었지. 왜 잊고 있었을까? 이젠 필요하면 언제든 부를게요. 고마워요!”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준 캐롯은 서둘러 왕자를 등에 업고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갔다.
비 오는 숲길을 한참 달리는데 등에 업은 왕자가 깨어났다.
“으음! 추, 추워······.”
“오! 깼구나?”
밝은 얼굴의 캐롯이 고개를 돌리자 반쯤 눈을 뜬 왕자와 눈이 마주쳤다.
동시에 번쩍이는 하늘의 섬광,
꽈르릉-!
흘러내린 빗물 덕에 얼굴은 물론 길게 찢어진 입안의 날카로운 톱니 사이사이에도 핏물이 줄줄 흐른다.
일부러 노린 것인지 캐롯은 그 상태로 히죽 웃으며 속삭였다.
“나 예뻐?”
“아으으······.”
왕자는 다시 기절했다.
때마침 빗줄기가 약해지고, 케케케 웃어 버린 캐롯은 등에 업은 왕자를 다시 한 번 추스른 다음 찰박찰박 비 오는 가을 숲을 뛰기 시작했다.
“나 이번에 새로운 전술적 개념을 획득했어. 들어봐라? 죽기 직전까지 몰아세워도 내 손으로 마지막을 장식하지 않은 한, 그건 내가 죽인 게 아냐.”
“아니, 그건 궤변이 아닌가?”
어이없다는 아리에테의 중얼거림은 크랭크의 강한 긍정에 묻혀 버렸다.
“맞다. 자기들이 멋대로 죽어 버린 거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 상대는 잘 고르도록 하자.”
“응!”
왕자를 다시 구출해 온 캐롯은 영웅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그 얼굴이 너무 끔찍스럽다는 소리가 나와서 크랭크가 자리에 앉혀놓고 바느질에 한창이었다.
천막 바깥, 비가 쏟아지는 참혹한 현장을 둘러보던 아리에테가 쓴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입에서 욕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쯧, 제기럴!”
몸을 데우기 위해 뜨거운 물을 차 대신 마시던 사람들이 구시렁거리며 상황을 저주했다.
“르메르트 어쩌고 하던 공작 놈 짓인가? 잡히면 가만두지 않겠어.”
“그건 나도 동감이군.”
팔에 붕대를 감고 임시 병동의 야전 침대에 앉아 있던 제이드 기사단장의 대답이었다.
쏴아아아!
“제길, 비라도 좀 멈춰 줬으면 좋겠다. 체온이 내려간다고.”
곳곳에 세워진 야전 병동에는 마력 화로로는 부족해서 오토마톤을 데려다 그 방열로 난방을 하는 참이었다.
그리고 그때쯤 캐롯의 임시 수리가 끝났다.
칼을 씹어 깨트린 틀니는 이빨이 깨져 버려 그 나이대의 개구쟁이처럼 되어 버렸고, 찢어진 입가는 바느질로 기워놓았다.
자리에 앉아 손거울을 들여다보던 캐롯이 고개를 들고 방긋 웃는다.
“나 예뻐?”
입 찢어진 여자의 흉악 전설을 계승한 캐롯의 물음에 다들 쓰게 웃어 버렸다.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린 캐롯은 비가 쏟아지는 밖으로 달려 나가더니 입가에 손나팔을 만들고 하늘을 향해 외쳤다.
“이봐요! 하느님! 이제 됐으니 그만 좀 뿌려요! 사람들이 힘들어 한다고!”
쏴아아아!
투둑투둑!
그러자 거짓말처럼 비가 멈추더니 구름 사이로 밝은 햇살이 쏟아진다.
그걸 본 모두가 어이없는 얼굴로 천막 아래에서 고개를 내밀고 구름이 지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엣, 정말로?”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은 마성의 꽃 소녀가 하늘을 향해 손을 흔들다가 사람들을 돌아보고는 치맛자락을 살짝 들고 따뜻하게 웃는다.
이윽고 하늘에서 쏟아진 빛무리가 정확하게 캐롯을 비춰주었다.
“자연의 스포트라이트!”
“지금이라면 여신의 인형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겠는걸?”
용기는 전염된다.
소녀의 웃음으로 기운을 차린 사람들이 다시 천막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비도 그쳤으니 다시 생존자 수색을 개시한다!”
“약초! 누가 숲에서 약초 좀 해와요!”
“식량도 다 날아갔어. 멧돼지든 사슴이든 상관없으니 사냥도 부탁해!”
폭탄에 동료를 잃고 처량하게 비까지 얻어맞아 주눅이 들 법한데도 사람들에게서 다시 활기가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허리에 두 손을 올린 캐롯이 그들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음! 눈물은 그 정도면 됐어! 살 사람은 살아야 해! 그리고 복수다! 숙청이야! 피값을 받아내러 가자!”
삶의 따스함이 순식간에 복수의 뜨거움으로 바뀌고 사람들은 미워할 것을 찾아냈다.
그 소리를 들은 크랭크가 고개 돌렸다.
심각한 얼굴로 침상에 앉아 있는 기사단장이 보인다.
“사로잡은 친구들을 만나보러 갈 참입니다만, 함께하시겠습니까?”
“음, 같이 가지.”
자리를 옮긴 천막에서 심문이 시작되었다.
크랭크는 고문에 상당한 소질이 있었다.
그저 투구를 벗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발광과 경기를 일으키며 아는 것을 술술 불어냈다.
천막 밖에서 노트를 든 사람이 그걸 받아 적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결과, 여러 가지 정보를 얻어냈다.
흑막도 드러났고.
구출해 낸 간부급을 모아놓고 임시 회의가 시작되었다.
머리에 붕대를 감은 시종장도 동석했다.
“이놈들도 기사단이었습니다. 특수전 전문으로 훈련된 자들이라더군요. 의뢰주는 놀랍게도 귀족원이었습니다.”
“피의 숙청이야!”
캐롯이 빽 소리를 지르자 어른들의 얼굴로 진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제이드 기사단장의 얼굴은 묘하게 차가웠다.
“이것은 명백한 암살 시도이며, 생사고락을 함께한 부하들이 희생되었다.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이다. 크랭크 경.”
크랭크가 투구를 돌리자 제이드 기사단장이 말했다.
“우리는 발이 묶였다. 그대는 왕자님을 호위하여 먼저 수도로 향하도록 하라. 곧 따라가겠다.”
“알겠습니다.”
시종장이 반대했다.
“너무 위험합니다! 돌아가서 호위를 충원하고 출발하는 것이······.”
“시종장,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는 서둘러야 합니다.”
호위 기사 하나가 물었다.
“차량도 다 망가졌는데, 이동 수단은 어떻게 합니까?”
딱!
기사단장이 손가락을 튕기자 머리에 붕대를 감은 스틱스 정비 반장이 인근에 엎어져 있는 거대 자동 갑옷을 가리켰다.
“저 녀석, 아직 움직입니다.”
캐롯도 거들었다.
자켓 안에서 신호탄을 꺼낸 캐롯이 힘차게 줄을 당기자 노란색 신호탄이 솟아오른다.
팡-!
잠시 후, 주변 숲에서 바사삭거리는 소음과 함께 개미에 올라탄 오크 전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숫자만 대략 100여 기.
“뭐, 뭐냐?!”
“이젠 오크 놈들까지!”
“어? 잠시만, 아는 얼굴인데?”
소란이 일어났지만 금세 조용해졌다.
공통의 적을 두고 같이 싸우다 보니 서로 눈에 익은 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적의 적은 나의 친구, 이름하여 전우라고 부른다.
캐롯이 허리에 손을 올리고 씩씩하게 웃으며 어른들을 바라보았다.
“나 예뻐?”
트드드득-!
쿵!
쓰러져 있던 거대 자동 갑옷이 몸을 일으키자 모두가 물러섰다.
비로 축축해진 땅에 커다란 발자국이 남아 버렸다.
바퀴가 멀쩡한 짐마차에 짐과 사람을 싣고 그걸 밧줄로 연결해 자동 기사가 끄는 방법으로 선발대가 출발한다.
잠깐 모습을 드러냈던 오크 라이더는 숲길을 통해 그들을 따랐고.
마차에 앉아 있던 크랭크는 기사단장에게 받은 쪽지를 펴보고 있었다.
-배후에 계신 분께 융숭한 대접을.
“뭐라고 적혀 있나?”
쪽지를 슥 보여주자 아리에테의 콧구멍이 벌렁거리기 시작한다.
그걸 슥삭슥삭 접은 크랭크는 종이비행기를 만들어 비가 그친 초원으로 휙 하고 던져 버렸다.
“우리도 비행선이 있다면 좋을 텐데, 통신도.”
“그렇구나. 왜 막아놓았지?”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크랭크가 상식이 부족한 아리에테를 보았다.
“발화수정이나 부싯돌이 없이 불씨를 얻는 방법을 아나?”
“모른다. 그런데 너는 가끔 빙 에둘러서 말하는군.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바로 해라. 네 속마음 따위 나는 모른다.”
덜컹거리는 마차 안, 함께 탄 호위 기사며 시종들이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크랭크는 두 손을 비비는 시늉을 하기 시작했다.
“마른 나무를 이렇게 비비는 거지. 계속 비비다 보면 마찰열로 불씨가 생기고 그걸로 불을 붙이는 거다.”
“음, 그래서?”
팔짱을 낀 아리에테가 고개를 끄덕이자 크랭크가 마저 말을 덧붙였다.
“인간들은 가까이 붙여 놓으면 그렇게 서로 열을 내다가 결국 불이 붙기 때문이라더군.”
처음 듣는 이야기인 듯, 사람들의 시선이 흥미롭다.
아리에테도 처음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다시 눈썹이 휙 세워 버렸다.
“그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뭘 근거로 그렇게 단정 지은 거지? 대놓고 물어보고 싶군!”
팔짱을 하고 입술을 내밀고 있던 아리에테가 갑자기 새삼 놀랍다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고 보니 여긴 엘프나 드워프가 없구나?”
“이제 알았나? 너는 관찰력이 부족하구나.”
퍽퍽!
주먹으로 어깨를 좀 두들긴 아리에테가 손가락을 들이댔다.
갑자기 그녀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보다, 잊지 마라! 내가 네 목숨을 구했다. 이걸로 나를 구해준 은혜는 갚은 거다. 나는 이제 정말로 같은 눈높이에서 너희들을 마주할 거야.”
목숨을 구원받은 처지라는 어설픈 거리감이나 마음의 짐 따위 없이!
잠깐 입을 다물고 있던 크랭크가 말했다.
“시온, 네 소유권을 아리에테에게 넘기고 싶다. 동의하나?”
“동의합니다.”
아리에테의 머리 위에 올라간 검은색 티아라에서 나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인 크랭크가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투구 안의 눈매가 부드럽게 웃고 있다.
“선물이다. 이제 네 몸의 남은 절반도 네 것이다. 목숨을 구해줘서 정말로 고맙다. 아직 해보고 싶은 것이 많았거든.”
“어, 으어!”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버버거리던 아리에테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마차 천막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소리를 꽥 질렀다.
“으아아! 나는 이제 나로서 거듭났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아이 시끄러워, 네 시작점은 왜 이렇게 많아? 또 무슨 일이야?
앞에서 마차를 끌고 있던 자동 갑옷의 투구가 부엉이처럼 뒤로 돌아왔지만 아리에테는 대답 대신 그저 밝게 웃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