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토마톤과 함께하는 회춘! 253 >
그리고 그런 그들을 책임지고 있는 수비대장 푸시케는 요즘 밝아진 휘하 장병들을 보면서 묘한 기분을 느꼈다.
“뭐야, 뭔가 좋은 일이라도 있나? 다들 얼굴이 좋은데? 나 몰래 남친들 만나고 왔어?”
몇몇은 정말로 그런 것인지 몸보신한 얼굴을 슬쩍 돌리며 킥킥 웃어댔다.
병사 하나가 손을 들었다.
“대장, 날이 추워지는데 탈영병 수색은 그만두고, 겨울 식량을 좀 마련해야 하지 않아? 마왕성의 보급을 기대하느니 우리끼리 각자도생하자고.”
맞는 말인 듯, 턱을 매만지며 혀로 입술을 좀 핥던 푸시케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해. 혼자서 어떻게 살아남을지 모르겠다만, 다 계획이 있겠지. 수색은 중단, 근무 없는 녀석들은 따로 사냥 좀 해봐.”
“얏호! 사냥이다!”
그러다 눈을 부릅뜬 그녀가 외쳤다.
“그리고 자식들아! 발정기인 녀석들은 알아서 해결해! 괜히 저쪽 놈들 꾀어내지 말고! 너희들은 경비를 서러 온 거냐 애를 낳으러 온 거냐?”
“생기는 걸 어떻게 해? 그리고 자식이 많아야 내 편이 생긴다고. 무레나 좀 보라고.”
마족 병사 하나가 가리킨 곳에는 일반병 최고참 무레나가 있었다.
그녀의 좌우로는 똑 닮은 병사가 둘 더 있었는데, 그녀의 자식들이다.
험난한 마왕령에서 자식을 둘이나 키워낸 위대한 어머니 무레나는 도도하게 턱을 좀 세워보았다가 곧 쑥스럽게 키득거렸다.
“나는 운이 좋았을 뿐이야. 반은 너희들 덕이지. 나 혼자서 키운 게 아니니까.”
마족치고는 겸손한 반응에 푸시케 수비대장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분통을 터트렸다.
“그래도 자식들아! 염문 뿌리지 말란 말이야! 저쪽 사령관 녀석이 자꾸 뭐라고 그런다고! 위문단을 기다리던가! 아니면 본국에 가서 찾던가! 그러고 보니 본국에 갈 수 있는 녀석들 꽤 되지 않아? 무레나! 너만 해도 그래!”
빡친 수비대장의 일갈에 찔끔한 마족 병사들은 다들 손가락이나 목, 귀에 뭔가 반짝이는 장신구를 매달고 있었다. 행여 그게 들킬까 노심초사 딴청을 피우기 시작한다.
다시 지목된 무레나가 후후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 난 여기가 좋은걸? 아주 뼈를 묻고 싶을 정도야.”
“흐흐, 그거 뼈가 녹을 때까지를 잘못 말한 것 아니야? 너도 요즘 발정기잖아.”
동료 병사의 짓궂은 물음에 딸들의 얼굴이 좀 빨개졌을 뿐, 팔짱을 낀 무레나는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대신 사나운 표정을 지으며 웃음 지었다.
“케케케, 갖고 싶으면 너도 저쪽에서 큰 걸 훔쳐.”
“캬아아악! 무레나! 하하하!”
“으흐흐하하하! 멋진 말이야! 츄릅! 아우, 침이 자꾸-!”
저급하고 징그러운 농담에 다들 잔인한 폭소를 터트렸고, 그들을 앞에 둔 수비대장 푸시케는 절망해 버렸다.
“여기가 사랑의 국경선이냐? 어휴! 어디서 이상한 편법을 알아서는!”
마왕령에 퍼진 강력한 마기는 모든 생명체에 간섭하여 그 결과 여성체의 비율을 압도적으로 높여 놓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종의 번식을 위한 욕구는 그대로여서 당연히 경쟁은 치열하고, 거기서 밀려난 자들은 자연히 주변의 큰 도시이나 마족의 수도로 발길을 돌리곤 한다.
사람이 많으니 기회도 많았고, 운이 좋으면 마왕의 피를 이은 자들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방법으로는 마왕군에 입대하여 일정량의 공로를 인정받는 것.
이 경우 여러 가지 특권을 주는데 거기엔 어떤 권리도 포함된다.
그렇게 해서 근무일 수를 채우고 떠나는 자들도 많고, 다시 배속되는 신병 마족도 많은 편인데, 마왕군 제3국경선 수비대는 그 수비대장이 바뀌고부터는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어서 반수 이상의 병력이 공공연한 이유로 알박기에 나서 버렸다.
그래서 수비대장의 외침에도 다들 히죽히죽 웃기 바쁘다.
그 외 몇몇은 분통을 터트리기도 했고.
“흥! 오지도 않을 위문단 따위 언제 기다려!”
“본국에서 찾으라는 말도 그래! 특권은 개뿔, 자식이라고 낳은 게 촉수 괴물은 좀 아니지 않냐? 그럴 바엔 저 선 너머의 나약한 인간 계집들처럼 냄새나는 내 것을 갖고 싶다고!”
여전히 팔짱을 하고 주변의 목소리를 들으며 흐흐 웃던 무레나가 입을 열었다.
“보라구 푸시케 대장, 좋게 생각해. 우리는 지금 적군의 전투력을 빼앗고 있는 거야. 조금만 지나면 대장 밑에 이런 부하들이 잔뜩 늘어날 거라고?”
그녀의 딸들이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묘하게 설득력 있는 말이지만 도무지 찬성하기 힘들다.
말이 통하지 않는 휘하 장병들을 보면서 푸시케는 이제 커다란 두 손으로 얼굴을 덮어 버렸다.
대신 굵은 손가락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는 퍽 진지했다.
“이것들아, 그래도 입장상 내 눈에 걸리면 가만두지 않을 거다.”
“옙!”
활기찬 병사들이 거창하게 경례하더니 각자 근무지로 흩어졌다.
몇몇은 사냥을 위해서 안쪽 숲으로 향하기도 했고.
그리고 그들의 모습을 멀리서 망원경으로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탈영병 모르핀.
다가오기 힘든 절벽에 임시 거처를 꾸린 그녀는 설탕을 듬뿍 퍼 넣은 뜨거운 커피를 홀짝이며 키득거렸다.
* * *
꿈도 야망도 확실한 계획도 없이 그저 막연한 앞날만을 보면서 살아온 모르핀은 최근 엄청나게 활기차 버린 자신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그저 마족 아이들의 척박한 생활에 약간의 보탬이라도 주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다고 그녀는 나중에야 밝혔다.
물론 그건 먼 미래의 이야기.
지금의 모르핀은 숨을 몰아쉬며 초원을 달리고 있었다.
“허억! 헉! 흐흐하하하!”
가슴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것은 가쁜 숨만이 아니었다.
이 감정, 뭐라고 했었지? 고양감? 희열?
“그런 것 아무렴 어떠냐! 비켜라! 나는 바쁘다!”
코케코케코케케!
커다란 장닭 같은 코카트리스가 정면에서 덤벼드는데도 불구, 꿀리지 않고 달리던 모르핀은 엄청나게 높은 뜀뛰기로 녀석을 뛰어넘어 버리는 신기를 선보였다.
뒤를 이어 공중에서 자동 석궁을 뽑아 장전과 동시에 목표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투투투투투퉁!
코캬캬캭!
하늘에서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으나 코카트리스의 깃털은 여러 겹으로 두꺼워서 자동 석궁의 화살도 어느 정도 방어가 가능하기에 녀석은 몸을 웅크리고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비장의 마비 공격이면 저 인간도 굳어 버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투두두두두-!
코캭?!
하지만 정도를 모르고 쏟아지는 화살은 그야말로 무자비.
100발짜리 탄통이 거의 다 비워질 정도로 얻어맞자 코카트리스는 순식간에 고슴도치가 되어 쓰러져 버렸다.
철퍼덕!
끼릭! 찰칵!
목표가 쓰러진 것을 확인하자마자 모르핀의 손이 바쁘다.
서둘러 빈 화살통을 제거하고 새 화살통을 장전, 그리고 활줄을 다시 당긴다.
인간의 편을 든 마족이 인간의 무기와 장비를 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자동 석궁도 최근 자주 들르는 투나의 공방에서 빌려온 참이었고.
“쓰면 쓸수록 놀랍네. 어떤 구조지?”
장전을 마친 자동 석궁을 이리저리 돌려 보던 모르핀은 그것을 든 채 고슴도치가 되어 꿈틀거리는 코카트리스에게 다가갔다.
케켁! 찡-!
번쩍 고개를 든 코카트리스가 죽을힘을 다해 두 눈을 부릅뜨고 마비 공격을 시전했으나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반응이 나타났다.
쾅!
날아온 발길질에 머리를 얻어맞고 절명한 코카트리스를 내려다보던 모르핀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흐흐 웃는다.
“여기 몬스터는 약해 빠졌구나. 마침 잘됐다. 오늘은 너로 하자. 으쌰!”
성인 여성치고는 작은 체구이면서도 힘이 어찌나 좋은지 거대한 배낭 위에 코카트리스까지 던져 올린 모르핀은 녀석의 다리를 질질 끌고 다시 바쁜 걸음을 재촉했다.
한참 후 지하 정원의 비밀 출구로 축 늘어진 커다란 닭 머리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에그머니!”
“으허헛!”
약초 밭뙈기를 일구고 거기서 김을 매던 노파들이 갑작스러운 몬스터의 등장에 헛바람을 들이키며 주저앉아 버렸다.
그러고는 그게 누군가의 배낭에 올려져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곧 역정을 내기 시작했다.
“모르핀! 놀랐잖소! 인기척이라도 좀 내시오!”
요 며칠 사냥한 몬스터를 둘러메고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내는 통에 다들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오늘도 커다란 배낭에 사냥감을 걸치고 돌아온 모르핀이 장난스럽게 웃는다.
저 날카로운 상어 이빨과 고양이 눈웃음의 조화는 얼핏 귀엽게 보일지 몰라도 사람 놀래키는 상황에선 참 얄밉게 보였다.
“늙은이들, 이젠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나?”
“상대가 마족이면 놀랄 만도 하죠. 게다가 그런 흉측한 것까지 가지고 나타나면요.”
한가해진 틈에 찾아와서 일손을 거들고 있던 젊은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머리를 길러 이젠 상큼한 단발머리 아가씨가 된 포비였다.
가져온 코카트리스를 바닥에 내동댕이친 그녀가 후드를 벗자 정말로 마족의 뿔이 드러났다.
보통 자유분방한 모양이지만 모르핀의 것은 동그랗게 말려 있어서 얼핏 머리 장식 같기도 하다.
“그래서 숨기기 쉽지. 다행이야.”
모르핀은 여기 지하 정원의 구성원들을 투나의 권속으로 멋대로 판단, 그들과 알고 지내는 편이 앞으로도 수월하리라 생각하고 2번째 방문 때 자신의 정체를 알렸다.
과거 마왕군과의 싸움 탓에 어느 정도의 반목을 생각했으나 말로만 듣던 마족을 처음 봐서 좀 놀랐을 뿐, 다들 한통속이라는 무리의식과 소위 젊은 것의 유입은 그들로서도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의 나이는 평균 60대, 마왕군과의 싸움이 끝나고도 한참 후에 태어난 세대였기 때문이다.
“그런 것보다 나는 아직도 믿을 수가 없구먼. 손녀뻘인데 그 얼굴로 127살이라굽쇼?”
깃털을 헤집어 자동 석궁의 화살을 뽑아내던 모르핀이 히죽 웃는다.
“그렇다네, 젊은이. 우리 수명은 너희들의 7~8배쯤 된다더군.”
뒷짐을 지고 입술을 오므리며 슬금슬금 다가온 포비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거 완전 엘프인데요?”
“아, 그 숲의 요정들? 나도 처음 봤지. 예쁘더라. 마왕령에도 비슷한 다크 엘프라는 게 있긴 하다는데, 난 그 녀석들은 본 적이 없거든.”
얼빠진 얼굴의 늙은이 하나가 동료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졸지에 회춘했구먼.”
“회춘? 프헐헐!”
한바탕 낄낄거리던 늙은이들이 고개를 쑥 내민다.
요즘 이 마족 아가씨가 자주 뭔가를 사냥해 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뭘 또 잡아 오셨소? 이건 무슨 새요? 장닭인가?”
“오는 길에 덤비길래 잡았다. 늙은이와 애들은 잘 먹어야 해. 오늘 저녁으로 하자.”
삼삼오오 모여들어 바깥세상의 위험한 괴물 장닭을 구경하던 늙은이들이 가슴 따뜻한 표정을 지었다.
투나를 만나기 전까지 아이들이 주워오는 걸로 연명해 왔던 늙은이들이었기 때문에 척박한 환경에서 생활을 해온 모르핀의 행동 양식과 비슷한 점이 많아서 그들은 빨리 친해졌다.
괴물 장닭을 알아보고 흥분한 포비가 끼어들었다.
“이거 코카트리스죠? 깃털은 어떻게 하실 건데요?”
“겨울 코트 대신으로 쓸까 싶은데. 침낭에 넣어도 따뜻하거든.”
이 화려한 코카트리스 깃털을 코트 따위로 쓰다니! 펜촉으로 만들면 하나하나가 다 돈인데! 포비의 콧구멍이 벌렁거리기 시작한다.
“저한테 맡겨주세요! 멋진 코트로 바꿔올게요! 머리랑 발톱도! 눈알이 마법 상점에서 촉매로 비싸게 팔리거든요.”
비싸게, 마법 상점, 이 중요한 정보에 모르핀의 눈빛이 번쩍인다.
하지만 혼자만 먹고살 수는 없으니 선심을 쓰기로 했다.
“좋아. 네게 주지. 코트 한 벌과 바꾸는 거다.”
“물론입니다!”
모처럼 용돈 벌이하게 된 포비가 기쁘게 웃었다.
최근 상점을 꾸리느라 바쁜 그녀였지만 하도 없이 살아왔기 때문에 푼돈이라도 놓치지 않는 수전노 정신이 박혀 버린 탓이다.
괴물 장닭 손질을 마치고 다시 배낭을 짊어진 모르핀은 이번엔 지하 수로로 몸을 돌렸다.
“잠깐 투나에게 다녀오겠다.”
“그러시오. 그동안 저녁을 만들어 놓으리다. 뭐, 좋아하시는 거라도 있으시오?”
손가락을 입가에 대고 음~ 하고 생각하던 그녀가 손가락을 튕겼다.
“저번에 먹었던 그게 좋겠군. 기름에 튀긴 음식, 튀김? 튀김이라는 걸 또 먹어보고 싶다.”
우연히 얻어먹었던 튀김의 바삭함과 고소함을 잊지 못한 그녀의 요청에 늙은이들이 즐겁게 웃어 버렸다.
수로로 뛰어드는 그녀를 바라보던 늙은이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닭고기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이걸로 튀김?”
“맛있으려나?”
과거 부엌에서 요리장 소리를 들은 적이 있던 노파들이 도끼눈을 뜨고 두 팔을 걷어붙였다.
“좀 크긴 하지만 일단 닭 비슷하잖소? 괜찮은 물건이 나오겠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