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토마톤과 함께하는 고용주! 252 >
그것은 식사와 잠을 거르고 철야를 밥 먹듯이 하는 투나를 위한 특단의 대책이었고, 모르핀은 부분 긍정했다.
“그럼 자야지. 나로서도 네가 멀쩡해야 도움을 받을 수 있거든.”
“그전에 식사를.”
샤를이 가리킨 곳에는 따끈한 수프와 빵, 우유가 전부인 조촐한 아침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침을 꿀꺽 삼킨 모르핀이 손가락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킨다.
“내 것도?”
“공방의 모든 살림은 전적으로 제게 맡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제 독단, 손님을 굶주리게 할 수는 없습니다.”
먼저 자리에 앉은 투나가 말했다.
“고, 고기는 없어? 캐롯의 말로는 마, 마족은 가련한 유, 육식 동물이라고 하던데.”
“그건 당신들이 깨어 있을 때 준비하겠습니다. 자기 전에 그런 걸 먹으면 소화가 안된다고 들었습니다.”
얼떨결에 씻고 밥까지 얻어먹게 된 모르핀은 큼직한 수저로 수프를 한 입 떠먹고는 빵을 찢어 우걱우걱 씹어댔다.
“우움?”
마주 빵을 입에 넣고 있던 투나가 모르핀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흔하디흔한 음식이었지만 모르핀에겐 퍽 인상 깊었나 보다.
제길, 맛있다. 부럽다. 왜 우린 이런 문명이 없냐. 우리 선조는 싸움 말고 대체 뭘 했냐.
겨우 따뜻한 밥 끼에 격해진 감정을 들키기 싫었던지 모르핀은 두 손으로 큼직한 수프 그릇을 입에 대고 단숨에 마셔 버렸다.
“후르릅! 크하-!”
손등으로 눈가에 찔끔 솟아난 무언가를 바삐 문질러 없앤 마족 아가씨가 그릇을 내밀며 말했다.
“멀건 국물 주제에 맛깔나는구나. 만드는 방법도 좀 알려줘.”
“아주 간단합니다. 먼저 루를 만듭니다. 녹인 버터에 밀가루를 볶은 다음 우유나 물을 붓고······.”
“자, 잠깐! 메모하게 해줘!”
밥 먹다 말고 서둘러 배낭에서 수첩을 꺼내 온 모르핀이 그걸 받아 적기 시작했고, 투나는 즐겁게 웃으며 그들을 구경 삼아 식사를 이어 나갔다.
식사 후에 밀려온 노곤함에 투나는 담요를 덮자마자 바로 기절해 버렸다.
그녀의 잠자리를 살펴봐 주던 샤를이 고개를 돌렸을 때 모르핀도 팔짱을 낀 채 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다.
요 며칠 숲속을 뛰어다니며 각종 동식물을 채집하고 뒤쫓는 마족 경비대원을 따돌리느라 그녀 역시 잠을 거의 못 잤기 때문이다.
잠깐 고민하던 샤를은 모르핀의 작은 몸을 조심스럽게 들어 크랭크의 침대에 눕히고 담요를 덮어주었다.
그녀들이 깼을 때는 거의 점심시간이 지난 후였다.
“으허억! 벌써 시간이 이렇게!”
“커피입니다.”
“너는 정말-!”
모르핀은 부들부들 떨다가 찻잔을 받고 한 모금 들이키더니 시커먼 찻물을 내려다보며 눈을 반짝였다.
“달고 쓴 맛, 아주 좋아. 이게 뭐지?”
“커피입니다. 단맛은 설탕입니다.”
설탕, 가끔 인간 병사를 남친으로 둔 동료들에게서 캔디를 얻어먹은 적이 있던 모르핀이 환한 얼굴을 했다가 또 우거지상을 지었다.
“왜 이런 것을 너희들만!”
자다 일어나 엉망이 된 머리를 내버려 둔 채 우아하게 머그컵을 든 투나가 고개를 갸웃한다.
“그, 그러게? 왜지? 마족의 무, 문명은 왜 아직 그런 곳에 머, 머물러 있지?”
분노의 원샷을 들이킨 모르핀이 잔을 내밀며 외쳤다.
“한 잔 더!”
정오지만 공방은 고요했다.
그새 세탁해 놓은 옷을 주워 입던 모르핀이 중얼거렸다.
“다른 녀석들은?”
“의뢰차 조금 멀리 나갔습니다.”
모르핀은 장갑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투나가 나타났다.
오랜만에 씻어서 얼굴이 환해 보일 정도다.
“뿌, 뿔이 드러나면 들키니까, 이걸 써.”
머리의 뿔을 좀 만져보던 모르핀은 두말없이 망토를 두르고 후드를 뒤집어썼다.
투나가 신나게 외쳤다.
“가, 가즈아! 쇼핑!”
세 사람은 바로 시장으로 향했다.
인간 세계의 모든 것이 신기했던지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던 모르핀은 연신 분통과 울분을 토하다가 강한 의지를 다졌다.
“문명 따위! 만들 수 없다면 빌려 쓰면 되지 않냐! 나는 그러기 위해 나온 것이다!”
라는 선언을 해 버리고는 따로 가져온 물건을 판 돈으로 생필품의 사재기를 시작했다.
큼직한 배낭이 빵빵해지도록 시장을 본 그녀는 잡화점에 있는 마력 화로를 아주 마음에 들어 해서 그것도 몇 개 사 버렸다.
공방에 돌아온 그녀는 마력 화로를 작동시켜 보고 몹시 좋아했다.
“내내 이걸 부러워했었다. 불을 피우지 않아도 물을 끓일 수 있다니.”
보글보글, 쭈그려 앉아 냄비를 내려다보는 모르핀은 갑자기 코끝이 찡해지는 것을 참기 위해 콧물을 거창하게 들이켰다.
그런 그녀에게 투나가 옷 한 벌을 내밀었다.
“이, 이거 선물이야. 흐흐흐, 이, 입어보도록 해.”
자리에서 일어선 모르핀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걸? 내게 주는 건가?”
“거, 거친 일을 하려면 튼튼한 옷이라야 해. 너, 너는 내 수집꾼이니까.”
그래서 그녀가 내민 것은 단단한 가죽과 철판이 꼼꼼하게 박음질 된 강화 인간 전용의 전투복이었다.
주섬주섬 입어보니 사이즈도 딱 맞다.
“오, 오오, 잘 어울린다. 거기 후드도 달려 있으니까. 마, 마을에 들어올 때는 꼭 쓰도록 해.”
“하나하나 정말 고맙다.”
투나가 양 손가락을 V로 만들며 흐흐 웃는다.
“미, 미래를 향한 투자지. 아무것도 심지 않은 따, 땅에서는 아, 아무것도 자라지 않거든.”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모르핀에게 투나는 그 외에도 이것저것 필요한 장비를 더 선물했다.
나이프에서부터 마법 스크롤, 연막탄까지.
“연막탄?”
“여, 옆집에 사는 드워프 아저씨께 어, 얻었어. 가, 가져가. 도망칠 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아도 추적자를 따돌리는 게 힘에 부친 참이었다.
새로 시작하는 모험가처럼 말끔하게 차려입은 모르핀은 묵직한 배낭을 짊어지더니 말했다.
“하나하나 정말 고맙다. 나는 이제 가봐야겠어.”
“으, 음. 조심하고. 그, 그리고 이번에 구해다 줄 물건 말인데.”
착실히 맡길 일거리도 잊지 않은 투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 그런데 어디로 들어온 거야?”
“성벽을 타고 넘었다. 경비를 서는 자동 인형을 속이는 게 힘들었어.”
들어오는 것보다 나가는 게 더 힘들다. 안에는 다니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투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자, 잡히면 그냥 끝나지 않을 테니 조심해야 해. 새, 샛길을 알려줄게.”
투나를 따라 인근의 숨겨진 하수구로 들어간 모르핀은 지하 수로를 한참 걸어서 숨겨진 정원에 도착했다.
아무것도 없는 벽에 손을 대고 무어라 중얼거리자 큼직한 돌문이 나타난다.
“여기는 어디지?”
“흐흐, 나, 나의 비밀 기지.”
샤를이 돌문을 열자 컴컴한 지하 수로에 서 있던 모르핀의 얼굴로 새하얀 빛이 쏟아졌다.
환상적인 지하 정원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놀랍군. 여기는 다른 세계인가?”
커다란 공간에는 빛은 물론 부드러운 바람도 불어오고 있었다.
그곳에 펼쳐진 작은 숲을 정신없이 바라보던 모르핀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따뜻해.”
“오, 오우. 지하라서 그렇대. 마, 마력 보일러를 돌리면 온실로도 쓸 수 있을 거야.”
문을 닫고 들어서자 입구 바로 옆의 콘크리트 건물에서 눈을 동그랗게 뜬 아이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가 환하게 웃으며 달려 나왔다.
“투나!”
“투나 선생님!”
“샤를 엄마!”
와르르 몰려든 아이들이 투나와 샤를 주변으로 몰려들어 산속의 새처럼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흐뭇하게 웃으며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데 숲 저편을 가꾸던 노인들도 다가왔다.
“오오, 마녀님 오셨소.”
“으히히, 예, 예에.”
작업복 차림의 노인들은 투나를 올려다보며 웃다가 곁의 배낭을 맨 모르핀을 쳐다보았다.
“이분은 뉘시오?”
“우, 우리 수집꾼이에요. 흐흐, 모르핀. 앞으로 자, 자주 들를 거예요.”
지하 정원을 두리번거리던 수집꾼 모르핀은 그저 고개만 까딱였다.
투나는 그녀를 데리고 평소에는 막아 놓은 수로 옆 비밀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이게 무슨!”
곧바로 성 밖, 산뜻한 햇살이 내비치는 바깥세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투나는 좀 떨어진 곳의 바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바, 바위를 벗어나면 위에서도 보여. 조, 조심하도록 해.”
고개를 돌린 모르핀이 새삼 놀라워했다.
“너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대단한 사람인가 보다.”
오토마톤 메이드를 곁에 세운 검은 마녀가 흐흐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거칠고 아름다운 손이었다.
“아, 앞으로 우리, 치, 친하게 지내자.”
덥석!
모르핀은 두말할 것도 없이 그녀의 손을 꽉 붙잡았다.
약간 이상해 보이지만 듬직한 고용주를 얻게 된 모르핀은 이제 발걸음을 재촉해 북동쪽으로 거리를 잡았다.
중계기로 확장된 구역만 다닐 수 있기에 그녀는 왔던 길을 되돌아 휴전선 마을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마왕령.
인간 측의 영역에서 붉은 휴전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모르핀은 고개를 들고 그것을 훌쩍 뛰어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매서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핀 그녀는 배낭을 단단히 메고 숲속으로 바삐 뛰어들었다.
다음 날 아침, 마왕령 국경선 수비대원들의 거주 구역에 난데없는 선물의 요정이 다녀갔다.
“이게 뭐지?”
야간 경계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마족 수비대원은 자신의 판잣집으로 돌아왔다가 문고리에 걸린 주머니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열어보니 안에는 각종 생필품이 들어 있었다.
고가의 마력 화로도 함께.
“어어?”
누가 이런걸? 혹하는 생각이 든다.
설마? 하지만 애가 들어섰다니까 바로 도망간 그 자식이 이런 걸 남겨뒀을 리가 없다.
게다가 여기는 수비대원들의 거주 구역이고.
어떻게 할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바로 자루를 가지고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녀 외에도 비슷한 선물을 받은 자들이 많았다.
하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설령 그 정체를 알아챈 사람도 입단속을 단단히 했다.
“모루삔 언니여떠! 모루삔!”
“모르핀?”
얼마 전 근무 중 탈영해 버린 녀석이었다.
마족 엄마는 탁자 위 마력 화로와 거기서 끓고 있는 냄비를 바라보며 쓴 표정을 지었다.
“이 자식이, 우리 모두를 공범으로 만들 작정인가.”
“엄마 오늘 저녁은 모야?”
사납던 표정도 잠시,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마족 여자가 후히히 웃으며 딸애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요즘 오랜만에 얻은 자식 보는 재미에 살아가고 있었다.
“오늘은 목욕이란다. 우쭈쭈.”
엄마와는 다르게 기겁한 소녀가 몸을 돌리더니 좁은 집안을 도망쳤다.
“우엥! 목욕 싫어! 추워!”
“아니야. 따뜻한 물이라니까. 이거 봐라, 비누도 있네?”
버둥거리는 꼬마를 허리춤에 끼워 넣은 그녀는 김이 무럭무럭 솟아오르는 나무통에 꼬마를 집어넣고 벅벅 씻기기 시작했다.
한참 후 좀 익숙해진 꼬마는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축 늘어져 버렸다.
낄낄 웃어 버린 마족 엄마가 비누를 북북 문지르더니 딸애를 불렀다.
“이거 봐라. 후!”
퐁!
거친 마족 병사의 손에서 커다란 비눗방울이 만들어지더니 그것이 집안을 둥둥 떠다니기 시작한다.
반짝이는 눈을 뜬 마족 소녀가 입을 헤 벌렸다.
“와! 어떻게? 어떻게 한 거야?”
탈영병의 선물은 모르겠고, 지금 이 순간은 참 즐겁다. 그렇게 생각해 버린 마족 엄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