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토마톤과 함께하는 19시간! 251 >
수일 후, 리즈넷 상회 사람들과 함께 이번 무기 원조 사업의 책임자 르클레르가 방문했다.
기사단을 돕기 위해 장기 체류를 선택한 그들을 이제 데리러 온 것이다.
“원래 2주 일정이었는데 말이지. 한 달이 다 되어 가고 있어.”
그 말을 듣자마자 아리에테가 퍼뜩 정신을 차리더니 안절부절못한다.
“허억! 그렇군! 여기 일에 계속 정신이 팔려 있었다! 우리 파티는? 진행하고 있던 상황은? 아아아!”
머리를 붙잡고 절규하는 그녀를 향해 캐롯이 히히 웃어댔다.
“그러면 너만이라도 돌아갈래?”
캐롯이 없으면 불면증이 다시 재발하기 때문에 아리에테는 강한 거절 의사를 밝혔다.
“아니다, 나도 남겠다. 기회라고 생각하자. 그리고 르클레르, 우리 이야기는 들었나? 왕국에 초대받았다.”
“오면서 들었어. 너희들이 돌아갈 준비는 따로 해놓을게. 그리고······.”
고개를 돌린 르클레르는 떠날 채비를 갖춘 기술진들에게 환하게 웃어주었다.
“여러분이 그간 보여주신 열정은 국가 이익에 큰 보탬이 되었습니다. 작지만 따로 보답이 있을 테니 기대하십시오.”
“엥? 국가에 보탬이라뇨?”
“이젤리아를 말씀하시는 건가 봐.”
자기 욕구에 솔직했던 미친 공돌이들은 그저 고개를 갸웃했을 뿐이다.
떠나는 그들을 보내주기 위해 기사단과 시민들이 나와서 조촐한 환송식을 열었다.
개중에서는 모 여기사와 나이스 썸싱을 일으킨 사람도 있었다.
기술자 하나가 떠나는 마차에 몸을 실으며 외쳤다.
“꼭! 꼭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나를 기다려 주시오!”
밤새 울었는지 눈이 벌겋게 된 여기사는 그저 웃으면서 손을 흔들기만 할 뿐이었다.
주변에서 야유와 부러움이 쏟아졌으나 그네들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르클레르가 히죽 웃으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보이드 자작도 저런 식으로 리즈넷에 남게 된 거라고 들었다. 현지에서 사귄 부인께 홀딱 빠져 버려서 말이야.”
“호오우메! 나이수 썸싱!”
캐롯은 찐빵 같은 볼을 붙잡고 영문 모를 소리를 질러댔고, 그 곁을 지키고 있던 아리에테는 빨간 선글라스의 보이드 자작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분에게도 젊은 시절이 있었다니 놀랍군. 어쩐지 평생 그 모습이었을 것 같았는데.”
“만나면 놀려줘야지! 케헤헤!”
마지막으로 마차에 오르기 전, 르클레르가 편지 한 장을 내밀었다.
“리즈넷 상회 지점에 보여주면 돌아갈 배편을 수배해 줄 거다. 아니면 보이드 자작과 함께 돌아와도 되고, 지금 그분도 왕국 수도에 계시거든.”
“그분이? 알겠다.”
시민들과 기사단의 열렬한 환송을 받으며 기술진을 태운 마차는 그렇게 훌쩍 떠나 버렸다.
든든했던 외국의 기술자들이 다 떠나 버렸지만 도시 시민들이나 기사단은 전혀 허전함을 느끼지 못했다.
이유는 아직 남은 세 사람 때문이었다.
무지막지한 자동 갑옷 기사단 앞에 선 조그만 인형 소녀가 팔을 번쩍 들고 외쳤다.
“오늘도 개미를 때려잡으며 강하고 힘찬 하루!”
“우와아아!”
“여신의 인형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가즈아!”
정말로 여신의 가호가 함께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기사단 건물의 무기 창고, 제이드 기사단장은 리즈넷 상회 편으로 도착한 나무 상자 앞에서 가슴을 붙잡고 눈물을 흘릴 뻔했다.
그토록 요청하던 마력수정폭탄의 재고가 도착한 것이다.
캐롯이 자동 기사단을 이끌고 해충 퇴치를 벌이는 사이, 리즈넷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나름대로 평화로운 일상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우화아으우아암!”
새벽까지 연구에 몰두하다 기지개를 켠 투나가 거창한 하품을 하자 뜨개질하고 있던 샤를이 고개를 돌렸다.
“연속 작업 시간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당신은 식사와 수면이 필요합니다.”
“어, 아직 2시간 남았거든?”
손가락을 꼽으며 대꾸하는 투나를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돌린 샤를은 느긋한 손놀림으로 뜨개질을 계속했다.
“그건 짜서 누구 주게?”
의자에 앉은 채 몸을 돌린 투나가 좀 떨어진 곳에서 뜨개질 중인 메이드 자동 인형을 쳐다보았다.
그 주변에는 색색 털실들이 잔뜩 굴러다니고 있고 웬 고양이 한 마리도 함께 누워 있었다.
털실은 극동 방주 도시 베누스의 임시 경비대장 베누스가 보내온 것으로, 보고서에 가까운 편지에 따르면 면직 가공품에 이어 이젠 실까지 뽑아내고 있다고 전했다.
그걸로 이미 투나의 것은 물론 파티 전원에게 목도리를 짜준 샤를이 말했다.
“지하 정원의 어르신들과 아이들에게 주려고 합니다. 베누스가 보내준 털실은 아직 많이 있습니다.”
“오오, 멋지다. 샤를 엄마.”
문득 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오토마톤이 고개를 든다.
얼굴은 밋밋하기 그지없다. 눈구멍에 유리 구슬 눈동자만 있고, 코도 없으며, 입 역시 열지 않으면 보이지 않았다.
불쾌한 골짜기에서 한 발짝 떨어진 부분에 있는 전형적인 자동 인형의 얼굴이었다.
그 표정과 인상은 온전히 주인님의 상상 속에,
“오토마톤도 사람의 어머니가 될 수 있습니까?”
꽤 철학적인 질문이다.
투나는 흐흐 웃더니 안경을 벗어 입고 있던 옷으로 슥슥 닦기 시작했는데 오히려 더 더러워져서 코를 좀 벌렁거렸다.
안경을 탁자에 올린 투나가 말했다.
“어떤 오크가 인간 아이를 주워다 길러낸 이야기를 알고 있는데 들려줄까?”
“부탁합니다.”
모두가 꿀잠에 빠진 신비로움이 감도는 새벽, 마녀의 이야기는 자동 인형의 호기심을 사로잡았다.
“그렇게 다들 잘 먹고 잘살았지.”
어떤 모험가의 일생을 전해 들은 샤를은 다시 뜨개질바늘을 놀리며 대답했다.
“귀여움, 그것은 사실 종의 보전을 위한 사람의 본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만, 오크도 그게 된다니 놀랍군요. 그들을 식재료 취급하는 마스터 크랭크에게도 들려주고 싶습니다.”
“호오오오.”
색다른 해석을 들려주는 오토마톤을 바라보며 투나가 놀라워하고 있는데 샤를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공방 앞에서 들리는 소리, 누군가가 왔다.
뜨개질거리를 놓고 자리에서 일어선 샤를이 문가로 향했다. 그는 문에 달린 쪽창을 열고 밖을 살폈다.
“누구십니까?”
“샤를이냐? 나다.”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와 쪽창으로 솟아난 더듬이 머리카락을 눈여겨본 샤를은 누가 찾아온 것인지 알아챘다.
“투나, 모르핀이 온 것 같습니다.”
“오오! 열어줘.”
뜻하지 않은 손님의 등장에 투나가 기뻐하며 달려 나왔다.
철컹!
묵직한 철문을 열자 키가 조금 작은 여자 하나가 땀을 뻘뻘 흘린 채 서 있었다.
“후후흐흐! 봐, 봐라. 내가 제대로 찾아왔지?”
철퍼덕!
묵직한 배낭에 깔려 앞으로 고꾸라진 그녀를 보고 투나가 호들갑을 떨었다.
배낭을 치우자 식은땀에 젖어 버린 모르핀이 씩씩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호다닥 달려온 투나는 가장 먼저 귀걸이를 살폈다. 아무래도 중계기로 여기까지 찾아오게 만든 것이라서.
“허호옥! 꺼, 꺼져 있어! 이, 이건 항상 켜져 있어야 하는데.”
“으읍, 과, 광장까지는 괜찮았어.”
쓰러져 있던 모르핀이 중얼거림을 듣고 서둘러 연구실로 달려간 투나는 서랍장에서 여분의 중계기를 꺼내왔다.
“이, 이걸 중앙 광장 분수대에 더, 던져 넣어! 빨리!”
샤를이 치마를 휘날리며 달려가고 잠시 후, 모르핀의 귀걸이에 매달린 빛과 함께 그녀의 안색도 돌아왔다.
눈을 번쩍 뜨자마자 다리를 쭉 펴고 상체를 발딱 일으킨 모르핀이 긴 한숨을 내쉰다.
“프하-! 죽는 줄 알았네.”
“다, 다행이야. 모, 모자랄 줄은 몰랐어.”
투나의 걱정에도 불구, 고개를 돌린 모르핀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채 크크케케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보다 나는 지금 인간 세상에 나와 있다는 걸 아직도 믿을 수 없어.”
투나가 흐흐 따라 웃어주는데 그때쯤 샤를도 돌아왔다.
정신을 차린 모르핀은 곧바로 가져온 배낭을 끌어와 안에 든 것을 쏟아냈다.
와르륵!
잡동사니처럼 쏟아진 것은 대부분 귀한 약초와 동식물의 가공품이었다.
“호오옥! 야, 야광 버섯! 불도마뱀 말린 것! 인면조 깃털!”
환호하는 그녀를 보고 모르핀은 배부른 미소를 머금었다.
샤를이 물건을 정리하는 동안 투나는 그것들에 값을 매겨 가져왔다.
“이게 뭐냐?”
“저, 저거 대금. 내, 내가 값도 치러주겠다고 하, 하지 않았어?”
“뭐!?”
자리에서 일어난 모르핀은 묵직한 돈주머니를 받아 들고 크게 기뻐했다.
하지만 곧 웃음을 멈추더니 새침한 얼굴로 그것을 도로 내밀었다.
“음, 이번은 서비스로 해줄게, 나는 은혜도 모를 정도로 뻔뻔하지 않아.”
“오호오오올.”
그녀의 행동이 신기했던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상한 소리를 내던 투나는 다시 돈주머니를 받으며 물었다.
“이,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공방을 둘러보던 모르핀은 코를 벌렁거리더니 뚱딴지같은 말을 했다.
“네게서 나는 좋은 냄새는 여기서 옮겨온 것이었군?”
“으히히, 마, 맞아.”
마족과 마녀가 서로를 바라보여 흐흐히히 웃어댔다.
정리를 마친 샤를은 이제 차를 준비했으며, 그동안 모르핀은 가정부 인형의 협박에 가까운 성화에 몸을 씻어야 했다.
크랭크는 뭐든 만들어 놓으면 거기에 임시, 간이라는 말을 잘 붙이는 편이었다.
자기 딴에는 급하게 만든 것이라 그러는 것인데, 그 임시의 완성도는 기성품의 그것을 능가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어엿한 시설은 다 갖춘 간이 샤워실, 홀딱 벗은 채 거울을 바라보던 모르핀은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뜨거운 물을 맞으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밖에 대고 소리쳤다.
“뜨거운 물이 나오잖아!?”
차를 준비하던 샤를이 고개를 돌렸다.
“너무 뜨겁다면 냉수 밸브를 열면 온도가 낮아집니다.”
“아니! 뜨거운 물이 나온다고!”
“그러니까 냉수 밸브를 열면······.”
초점이 맞지 않는 둘의 이야기를 낄낄거리며 듣던 투나가 다 씻고 아리에테의 옷장에서 꺼낸 옷을 빌려 입은 모르핀을 보았다.
옷이 커서 여기저기 묶은 모습도 꽤 잘 어울렸다.
“마, 마족에게는 보, 보일러가 없어?”
“모르겠다. 나는 변방의 소수민족 출신이라서 이런 편리한 도구는 본 적이 없어.”
의미심장한 표정을 한 투나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에게 손짓했다. 그리고 공방 가장 안쪽, 복잡한 배관이 연결된 마력 보일러를 소개해 줬다.
“이, 이게 마력 보일러. 찬물을 뜨겁게 만들지. 겨, 겨울에는 그걸로 난방도 하고.”
입을 헤 벌리고 그걸 바라보던 모르핀이 곧 우거지상이 되었다.
“제길, 이런 게 있으면 그렇게 추위에 떨지 않을 수 있을 텐데! 어째서 너희들만 이런 것을 가지고 있는 거냐?”
“움? 그건 모르겠네.”
부러움과 시기에 찬 눈으로 마력 보일러를 쏘아보던 모르핀이 물었다.
“이런 건 얼마나 하지? 돈으로 살 수 있나?”
“모, 모르겠는데, 내일 잡화점에 가서 물어봐야겠어.”
잡화점! 상점! 방금 온수 샤워로 따끈따끈해진 모르핀이 투나에게 바싹 달라붙었다.
“나도! 나도 데려가다오!”
좀 음흉하지만 기본 심성은 착한 투나가 으흐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는데 샤를이 파토를 놓았다.
“안됩니다. 투나는 연속 활동 시간 19시간째, 이젠 미룰 수 없습니다. 자야 합니다.”
“으잉! 자, 잠깐이면 되는데!”
투나의 불만에도 연산 장치가 증설된 똑똑한 자동 인형의 고집은 완강했다.
이 와중에 모르핀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냐? 그 19시간이라는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