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토마톤과 함께하는 음흉한 주인님! 248 >
사랑 이야기에 홀딱 빠진 여기사들이 생환 의지를 불태우는 사이, 캐롯과 크랭크는 협약을 맺은 오크 부락으로 달려가 출발 소식을 전했다.
그전에 캐롯이 데려온 오토마톤을 소개했다.
경비대 창고에 방치된 물건을 멋대로 고쳐 만든 녀석이었다.
“글을 읽어 줄 거라고?”
오크 부락의 인간 종마 델린저가 검은색 방열 가발을 산발하고 전투복을 차려입은 오토마톤을 바라보았다.
소프트 스킨을 가진 캐롯과는 다르게 날것 그대로의 모습을 가진 기계 인형의 등장에 다른 오크들은 무서워서 가까이 오려 하지 않았다.
캐롯이 신나게 떠들어 댔다.
“선금이에요. 기술이라고는 하지만 원하는 수준을 몰라서 지금에 맞은 걸로 찾아왔어요.”
곁에 서 있던 크랭크가 내민 배낭에는 폐허가 된 도시에서 수거한 책이 잔뜩 들어 있었다.
여러 전문 지식에서부터 생활 양식, 교양, 이 와중에 도덕과 윤리 책은 특히나 깨끗한 새것이었다.
그걸 준비한 캐롯이 윙크를 찡긋하며 말했다.
“씨앗은 준비되었어. 이제 노력과 발전은 당신들의 몫.”
“오오!”
의미를 알아들은 델린저는 그만 감동했다.
그의 통역을 전해 들은 오크 족장은 여전히 팔짱을 한 채 버럭 외쳤다.
아직 한 가지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우리 땅!”
“에헤이, 그건 임무 완료 보상! 이 애 머릿속에 지도를 기억시켜 놨어요. 성공하면 길 찾아갈 거니 따라가면 돼요.”
검은 머리 오토마톤을 힐끗 보던 족장이 음!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캐롯은 이제 데려온 오토마톤에게 고개를 돌렸다.
“소개할게, 앞으로 네가 이끌어야 할 종족이야. 이름은 에, 오만이라고 하자. 오크랑 휴먼의 반반. 신인류! 네겐 이제부터 신인류를 어엿한 사람으로 이끌어야 하는 막중한 임무가 내려졌어. 잘해보라고.”
“신인류 오만을 어엿한 사람으로, 알겠습니다.”
마침 생각났다는 듯 손바닥을 마주친 캐롯은 이 검은 머리 오토마톤에게도 이름을 붙여주었다.
“아테나! 어떤 신화의 문명과 지혜의 여신이래.”
그리고 전쟁, 하지만 그 말은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출발 날짜와 장소, 시간을 알려준 캐롯과 크랭크는 다시 마을로 복귀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때 오크 부락의 꼬마 소녀가 무언가를 들고 도도도 달려온다.
크랭크가 허리를 숙이자 꼬마는 특별히 커다랗게 감아놓은 솜사탕 막대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델린저가 웃는다.
“요즘 유행이지. 다른 부락에서도 구하러 온다고?”
그 유명한 솜사탕보다 피부색만 빼고 완전 인간과 다를 바 없는 하프 오크의 특성을 더 관심 있게 살펴보던 크랭크는 곧 손을 내밀어 꼬마 소녀의 선물을 받았다.
팔짱을 한 오크 족장이 버럭 외쳤다.
“저 남자 씨앗 원한다!”
“안돼에! 널 다른 남자에게 줄 수 없어!”
화들짝 놀란 델린저가 추장에게 매달렸으나 추장은 의지를 굽히지 않고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크랭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더불어 주변 여자 오크들도 히죽거리며 관심을 드러냈다.
동물 가죽으로 만들어진 치마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잘록한 허리와 커다란 가슴은 인간의 그것을 능가할 지경이었다.
크랭크는 솔직한 심정을 드러냈다.
“몸매도 취향이고, 솔직히 나쁘지 않지.”
눈을 동그랗게 뜬 캐롯이 고개를 돌리는데 손에 든 솜사탕 막대를 장식처럼 투구에 꽂은 크랭크가 어느새 방패와 도끼를 쥐고 몸을 숙였다.
“나를 쓰러뜨려라. 나와 내 오토마톤을 이길 수 있다면 그래도 좋다.”
“와하하! 우리 주인님의 순정이 걸렸구나! 그렇다면 나도 가만있을 수는 없지!”
장단을 맞춘 캐롯이 허리의 리본을 잡아당기자 동그란 치마 속에 숨겨진 칼날이 튀어나왔다.
챵!
그 모습에 마지못해 입술을 삐죽 내민 오크 족장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동시에 델린저를 포함한 부족의 몇 없는 남자들은 묘한 안도감을 느꼈고.
“늦지 말라고!”
돌아가는 마차의 짐칸에 올라서서 한 손에 솜사탕을 들고 나머지 손을 흔들어주던 캐롯이 마부석으로 돌아와 크랭크의 곁에 앉았다.
“이 솜사탕은 아리에테 갖다줘야겠다. 그런데 아테나 이름 참 잘 지은 것 같지?”
“음, 하지만 저들이 여신의 마지막 소양을 마음먹는다면 상황은 달라질 거다.”
크랭크가 가슴속에 품고 있던 납작한 상자를 슬쩍 꺼내 보였다. 그 안에 든 것은 마력수정폭탄의 기폭 스크롤.
캐롯이 뿌하하 웃는다.
“안전장치도 확실히! 음흉한 주인님과 함께하는 세상 참 멋져!”
“사람이 서로를 진심으로 믿는 세상은 앞으로도 오지 않을 거야. 하물며 오크와? 가당치도 않지. 수틀리면 마을째로 날려 버릴 것이다.”
사람의 가능성을 믿고 있는 인형 소녀가 사납게 웃으며 동족 혐오에 빠진 양철 거인을 올려다보았다.
“그럼 어떰? 신인류의 번영을 가지고 내기하실?”
“좋지, 이젤리아에서 새로운 종족이 건설적인 교류를 시작한다는 소문이 들린다면 네 승리다. 10만 걸지.”
손가락을 든 캐롯도 내기를 걸었다.
“나는 네 장수! 내가 이기면 오래오래 살아주는 거야.”
다각다각, 아무도 없는 황무지와 초원으로 느긋하게 마차를 몰아가던 양철 거인의 고개가 돌려졌다. 그러더니 갑자기 투구를 벗는다.
드러난 것은 어느 평범한 남자의 얼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던 캐롯이 팔을 들었다.
“주인님 요즘 머리카락이 좀 길어졌네, 다듬어야겠다.”
“음.”
크랭크는 투구의 꼭대기에 여전히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솜사탕을 뽑아 그걸 날름 핥아 보았다.
그리고 흐뭇하게 웃음 지었다.
“음, 탄 맛이 좀 나긴 하지만 달아. 이 정도면 나쁘지 않지.”
“그거 다행이네.”
캐롯도 마주 웃어주었다.
마차에 오른 친절한 거인과 수다쟁이 인형 소녀는 함께 솜사탕을 들고 저 멀리 보이는 마을로 달려갔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출발 당일, 오크 부족의 족장은 수완을 발휘해 주변 오크 부락에서도 많은 전투원을 모아왔다.
초원에 바글바글한 오크 전사들을 보고 당황하는 기사단을 향해 캐롯이 밝게 웃는다.
“빈집 털이 당할까 봐 인근 애들은 협박해서 다 끌고 온 거래요. 하향 평준화라는 거지.”
“놀랍군, 우리 도시 근처에 이렇게 많았던가?”
개미 사태만 진정되면 이것들도 토벌해야겠다 마음먹은 제이드 기사단장이 그들에게 약속한 장비를 지급했다.
평범한 갑옷이나 검이라면 멸망한 도시에 남아도는 것이 얼마든지 있었다.
저마다 무장을 고르고 착용하느라 왁자지껄한 오크 군단을 뒤로하고 그들의 의견을 수렴해 온 캐롯이 말했다.
“이쪽은 걸어가야 하니까, 이동은 따로 하겠대요. 먼저 출발합니다!”
그렇게 적당히 무장을 나눠 갖춘 오크 군단이 먼저 숲속으로 들어갔다.
연락 및 감시로 캐롯이 자원해서 따라갔다.
손을 흔들어 주고 오크 무리를 따라가는 오토마톤 꼬마를 모두가 신기하게 쳐다보는데 제이드 기사단장이 외쳤다.
“우리도 출발한다! 가자!”
“2차 개미성 토벌단 출발합니다!”
미리 준비된 차량과 마차가 슬금슬금 움직이며 출발을 시작했다.
부서진 물자는 고치고, 모자란 물자는 리즈넷 상회 지점에서 지원해 주어 예전의 초라한 모습은 이제 군단급의 위용을 자랑했다.
그렇게 약 3일간의 행군 후, 그들은 다시 개미성에 도착했다.
방주 도시에 원래 이름도 있었지만 이후 정찰에서 여왕개미의 존재가 확인된 지금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오크 군단은 걸어서 오느라 하루 늦게 도착했다.
기사단은 좀 떨어진 곳에 진을 친 오크 군단을 보고 그만 소름이 돋아 버렸다.
“아니, 어쩐지 더 불어난 것 같지 않아?”
“저것 좀 보십쇼! 개미! 개미를 타고 있는데요?”
두 무리 사이를 바쁘게 오고 가며 연락을 전하는 캐롯이 그 질문에 와하하 웃어댔다.
“여기로 오면서 주변 오크 마을에 다 들렀는데, 그중 하나가 개미랑 공존하고 있더라고요? 놀랍죠? 나도 놀람.”
어쨌든 그들은 무시무시한 위용을 자랑했다.
개미 때문에 사냥도 못하고 살기 팍팍해진 오크들은 인간들과의 협공 소식에 아니꼽지만 따라나선 차였다.
이 와중에 묘하게 여성체들이 많은 것은 이젤리아 오크들의 특성 때문이었고.
결국 강한 위기 앞에서 약한 모두가 손을 잡는다는 말은 이렇게 현실화하였다.
기사단을 거느린 제이드가 찡그린 얼굴을 들었다.
“원치 않은 협력이지만 어쩔 수 없지! 시작하자! 크랭크 경!”
자동 갑옷을 입은 기사단 사이로 꿀리지 않는 덩치의 양철 거인이 걸어 나왔다.
산 하나를 날려 버렸다는 광기의 폭탄마가 등장하자 다들 입을 다물었다.
크랭크는 나란히 선 오토마톤들에게 가방을 하나씩 쥐여주고 그들이 향해야 할 곳도 알려주었다.
캐롯 역시 이 폭탄 설치반에 포함되어 있었다.
나름대로 기사단의 상징적인 위치인지라 전투복까지 차려입은 왕자가 볼멘 목소리로 물었다.
“너도 가야 해?”
윙크를 하고 눈가에 V자 손가락을 들이댄 캐롯이 외쳤다.
“물론! 이렇게 예쁘게 보일지 몰라도 나는 자동 인형! 사람의 위험을 대신 수행하기 위해 있는 거거든?”
왕자는 볼을 부풀려 불만을 표시했고, 캐롯은 이제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핫하!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이런 실전 경험치 두 배를 양보할 수 있겠냐고!”
캐롯이 위험을 감수하는 이유에 대해서 그제야 알아챈 아리에테가 입을 딱 벌렸다가 근처의 크랭크를 쏘아보았다.
“네가 저렇게 만든 거냐? 엉?”
“음, 만들긴 했는데. 나도 저렇게 될 줄은 몰랐다.”
캐롯은 이제 폭탄 수정구를 가지고 저글링을 펼치면서 왕자를 비롯한 주변 기사단원들을 놀려대고 있었다.
원래는 투척으로 개미성 안에 던져 넣으려 했으나 비슷한 짓을 해보았던 사람들의 증언으로 개미굴 속에 직접 집어넣고 터트리는 것으로 작전이 바뀌었다.
“밖에다 터트려 봤자 지하 깊은 곳에 사는 녀석들은 멀쩡하더라고.”
그렇게 개미들의 활동이 잠잠해지는 밤까지 기다린 후, 캐롯을 포함한 폭탄 설치반이 출발했다.
등에 가방을 메고 와다다 달려간 캐롯은 이미 부서진 성벽을 통해 도시 내부로 들어섰다.
안쪽은 난장판이었다.
길가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은 일개미들이 잠이라도 자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 와중에 밤에도 돌아다니는 개미들이 있었는데 바로 병정개미였다.
“호옵!”
입을 가리고 골목길에 숨은 캐롯이 고개를 살짝 내밀자 개미는 다른 골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틈을 노려 사사삭 움직인 캐롯은 얼마 지나지 않아 광장 부근에 자리 잡은 토굴을 발견했다.
안쪽을 내려다보자 저 아래쪽에 뭔가 불빛 같은 것이 보인다.
캐롯은 바로 그 아래로 폴짝 뛰어들었다.
이제 신나는 개미집 탐험이 시작되었다.
조명을 위한 것인지 먹으려 붙여둔 것인지 개미굴 안쪽에 야광 버섯이 즐비하게 피어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미로 중간중간 만나는 일개미는 다 자고 있었다.
발로 밟거나 하는 정도로는 깨지도 않았으나 경비를 서는 개미도 많이 있어서 캐롯은 숨바꼭질하는 기분으로 그들을 피해 최대한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우히히!”
한참 안을 뛰어다니던 캐롯은 곧 여러 가지 창고를 발견했다.
처음에 발견한 것은 식량 창고, 밖에서 잡아 온 각종 몬스터가 잔뜩 쌓여 있었는데 간간이 사람의 그것도 보여서 그야말로 지옥도를 방불케 했다.
“요즘 안 보이던데 다들 여기 있었구나.”
죽은 것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캐롯은 대신 수정폭탄 하나를 휙 던져 놓고 다음 창고로 뛰어갔다.
“와!”
도시 지하에 만들어졌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규모의 창고는 수면실인지 잠자는 일개미들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여기도 한 개.”
그리고 다음은 번데기 창고, 그다음은 알 창고, 그리고 다음은,
여왕의 침실.
모험가 주인님과 함께 다니면서 별 해괴한 것을 다 보고 만진 캐롯이었지만 이런 건 처음 보았다.
“오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