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토마톤과 함께하는 클리셰! 247 >
쿵-!
걸음 한 번에 지진이 일어난 것 같다.
“우와하하! 걷는다! 걸었어!”
“으아아! 내, 내려줘!”
눈이 빙글빙글 돌고 있는 왕자와 함께 같은 좌석에 앉은 캐롯이 혀로 날름 입술을 핥더니 조종간을 잡고 팔과 다리를 놀리기 시작한다.
파란 하늘 아래 전장 5미터급의 초대형 자동 갑옷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려 탑승형, 주변의 구경꾼 사이에서 이젤리아 정비 반장이 고개를 들고 소리쳤다.
“이 녀석아! 잘 좀 해!”
“이 녀석이라니! 감히 왕자님께! 목이 날아가고 싶은 건가!”
“아, 아니! 같이 탄 오토마톤에게 한 소리요! 어허! 칼 뽑지 마시고!”
호위 기사와 툭탁거리는 정비 반장의 곁으로 초대형 자동 갑옷이 묵직한 팔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여 보더니 곧 크랭크가 자주 하는 짓거리를 시작했다.
두 팔을 들어 올리고 구부린 자동 갑옷에게서 캐롯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프론트 더블 바이셉스! 뒤로 돌면 백 더블 바이셉스! 그리고 여기서 업 도미날 앤 타이!
바이셉스 어쩌고는 나쁘지 않았지만 대형 갑옷 덩어리가 두 팔을 투구 뒤로 돌리고 웅장한 가슴 장갑판을 쑥 내미는 것은 좀 기분 나쁘게 보였다.
어느새 팔짱을 낀 크랭크가 나타나 물었다.
“멋지군요. 언제 이런 것을?”
이곳 정비 반장의 이름은 스틱스, 내심 기쁜 듯 코 밑을 손가락으로 슥 문지르던 그가 흐흐 웃어댔다.
휘하의 기술진 역시 어떠냐? 하는 표정으로 구경 나온 리즈넷 기술진을 바라보았다.
“자네라면 이해해 주지 않을까?”
두 팔을 펼친 그가 격정적으로 외쳤다.
“거대 인형 병기의 꿈을-!”
쿵-!
-사이드 체스트!
확성기로 캐롯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자동 갑옷은 이제 한쪽 다리를 앞으로 살짝 내밀고 두 팔을 뒤로 돌려 깍지를 잡아보고 있었다.
그걸 보고 투구 속의 눈썹을 꿈틀거린 크랭크가 상의와 바지를 벗더니 그 자세를 다시 잡으며 외쳤다.
“틀렸다. 사이드 체스트는, 흡! 이렇게 하는 것이다!”
-오우! 이렇게?
왕가의 시중을 받드는 무리의 대표인 중년 여성이 그 꼴을 보고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
“저자는 어째서 매번 벗는 것인가?”
“어마나! 호옥!”
근육양철거인의 우람한 포징 때문에 얼굴이 달아오른 여성 피해자가 속출했다.
보다 못한 호위 기사단이 화를 내려는데 금발 여기사가 뛰어오더니 그들의 일을 대신 해주었다.
“좀 하지 말란 말이다!”
철썩!
크랭크의 등짝을 후려친 그녀가 그의 몸을 두 손으로 밀어내더니 자리를 바꾸어 중년 시종장과 호위 기사들에게 연신 사과했다.
평소라면 아리에테가 사고를 치고 크랭크와 캐롯이 수습하는 편인데 이번만큼은 입장이 뒤바뀌어 버렸다.
다시 옷을 입을 생각은 없는지 여전히 검정색 속옷 차림인 크랭크가 팔짱을 끼고 투구를 들었다.
“그런데 어째서 캐롯이 저 안에 있는 겁니까?”
멋진 척을 하고 있지만 등짝에는 벌겋게 달아오른 손바닥 자국이 선명하다.
그걸 보고 낄낄 웃던 스틱스 정비 반장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해 주었다.
“자동 갑옷을 분해해서 그 신경계를 그대로 사용한 건데, 우리 쪽 기사를 태워봤지만 일어서지도 못하더군. 그래서 구경하던 그 꼬마를 태워봤지. 아무래도 들어간 인공 근육이 많아서 그걸 다 제어하지 못하는 모양이야.”
크랭크가 투구를 끄덕였다.
“개선의 여지는 아직 충분하군요. 게다가 전장에 나가시는 왕자님을 보호할 수도 있고요.”
“그렇지! 이참에 공적도 쌓아주면 좋고, 우리 정비단의 이름도 알리게 되니 말이야. 하하!”
마침 같은 생각이었던 스틱스가 씩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하지만 크랭크는 딴생각에 빠져 있었다.
공적? 이름을 날려?
탁!
손바닥을 주먹으로 때린 그가 투구를 돌렸다.
중년 시종장의 곁에는 제이드 기사단장도 함께 나와서 갑옷 거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10살짜리 왕자를 어떻게든 전장에 밀어 넣으려는 아동학대의 이유를 확실히 간파한 크랭크가 의미심장한 말을 날렸다.
“그런 거군요.”
설마 이런 것까지 만들 줄은 몰랐다는 듯이 눈썹을 꿈틀거리던 제이드는 모르겠다는 투로 그를 바라보았다.
“음? 갑자기 뭔가? 그보다 경은 왜 벗고 있는 거지? 아니, 이젠 됐다.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말하는 도중 우스꽝스러운 포징을 잡는 그를 보고 기사단장마저도 포기해 버렸다.
근처의 아리에테는 부끄러워 미칠 지경인지 두 손으로 얼굴을 덮고 있었다.
그 와중에서도 캐롯은 들썩이는 운전석에 앉아서 왕자를 껴안고 웃어대고 있었다.
쿵! 쿵!
“왕자님아! 앞을 봐! 앞을! 하하하!”
“으아앙!”
가동 테스트가 끝나고, 겨우 풀려난 왕자는 시종장의 앞에서 울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시종장은 봐주지 않았다.
허리를 숙인 그녀가 왕자에게 속삭였다.
“왕자님, 권리에는 책임이 뒤따릅니다. 당신은 장차 이 나라를 이끌고 나가셔야 합니다. 그러니 지금 그 위엄을 세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이 여왕 폐하가 바라시는 것이고요.”
왕자는 그래도 울음을 그치지 않았고, 그래서 시종의 무서운 목소리는 계속되었다.
“아직 어린 공주 전하의 미래가 당신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울고 있는 얼굴에 허망함이 더해졌다.
이런 말을 하는 시종장도 가슴 아팠지만 이대로라면 가능성 높은 미래가 될지도 몰랐다.
“안돼, 그건 안돼에. 훌쩍······.”
두 손으로 눈물을 닦고 스스로 일어서는 그를 대견한 듯 바라보는데 그 머리에 별안간 꽃으로 만든 화관이 올려졌다.
왕자를 궁지로 몰아세운 인형 소녀였다.
첫사랑이 오토마톤이라는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왕자가 눈물이 그렁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머리의 화관을 만져 보았다.
아까부터 다 듣고 있던 캐롯이 두 팔을 펼치고 해맑게 외쳤다.
“목소리 없는 자의 고통을 위해 기꺼이 일어서는 그대야말로 이 왕관이 어울린다! 대신 그 무게를 버텨내 보아라!”
그리고 몸을 반 바퀴 돌리자 오른손이 왕자에게로, 왼손은 무릎을 꿇고 있는 거대 자동 갑옷에게로 향했다.
“그리하면 이 몸이 다리가 되어 그대와 그대의 힘을 잇겠노라! 모든 클리셰를 이겨내고 승리의 밭에 자유라는 씨앗을 심어 평범한 일상을 수확하는 거야! 내가 도와줄게!”
활기찬 인형 소녀의 입에서 가슴을 울리는 말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온다.
때 이른 왕관을 머리에 쓴 왕자가 소매로 눈가를 닦았다.
그리고 인형 소녀의 손을 잡고 거인을 올려다보더니 머리에 쓴 화관에서 작은 꽃송이 하나를 떼어내 캐롯의 귓가에 끼워주었다.
눈물을 그친 왕자가 콧물을 들이키며 밝게 웃으려 노력했다.
“흐으읍! 음, 고마워. 그리고 잘 어울려. 예쁘다.”
“아, 정말? 우헤헤!”
하하호호거리는 소년, 소녀들과 다르게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죽였다.
“전설 속 그 장면 같구만그래.”
“전설이요?”
스틱스가 설명했다.
“이젤리아 건국 신화에 나오지. 바위 거인과 함께 사악한 용을 무찌르고 나라를 세운 용사의 이야기. 여기 사람들이 커다란 물건에 환장하는 이유가 그거 때문이기도 하고.”
그제야 주변 여기사들의 무시무시한 시선을 의식한 크랭크가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기 시작했다.
아리에테가 쏘아붙였다.
“뭐냐? 더 벗고 있는 게 아니었나?”
“좀 더 이쪽으로 와라.”
“무, 뭐냐?”
그녀를 가까이 끌어당기자 아리에테가 당황했다.
더불어 주변 여기사들의 시선은 이제 아리에테를 향해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관심을 딴 곳으로 돌리는 데 성공한 크랭크는 제이드 기사단장을 바라보았다.
“이제 준비는 완료되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모두가 제이드 기사단장을 바라보았다.
최근 운이 순풍을 탔는지 하는 일마다 다 잘되는 것 같다.
어떻게든 이 기세를 살려야 한다!
“그렇다면 본때를 보여주러 가자! 출발 준비를 서둘러라!”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모두가 바빠지기 시작했다.
짐을 싸고, 무기를 점검하고, 그리고 연인과 이별을 나누기도 하고.
출발 준비로 한창 바쁜 시간, 정비창에서 일을 돕던 청년이 큼직한 나무 상자를 옮기는데 누군가 불렀다.
“모브모브.”
기둥에 얼굴 반만 내밀고 히죽 웃으며 손짓하는 사람은 취향이 좀 무서운 여기사 페이지.
그녀의 등장에 무심한 모브의 얼굴이 확 달아오르더니 주변을 살피며 우물쭈물 나무 궤짝을 내리고 그녀에게 총총 향한다.
으슥한 골목길로 청년을 끌고 들어간 페이지가 갑자기 그의 품에 와락 파고들자 당황한 모브가 주변을 살폈다.
“잠깐, 누, 누가 봅니다.”
“곧 죽을지도 모르는데 보면 어떠냐? 나를 안아라, 힘껏!”
“밖에서는 좀······.”
“으응? 벌써 내가 싫어진 것이냐?”
아랫입술을 삐죽 내민 여기사 페이지가 그를 올려다보자 눈을 질끈 감은 모브가 마지못해 그녀를 꽉 안아주었다.
마치 곰에게 안겨 있는 것 같은 기분이지만 페이지는 오히려 좋아했다.
한참 그러고 있던 그녀가 숨넘어가는 소리 비슷하게 말했다.
“으윽, 터질 것 같아, 정말 못 참겠구나.”
놀란 그가 팔을 풀었지만 달아오른 페이지는 떨어지지 않고 발돋움을 하더니 모브의 귀를 살짝 깨물며 속삭였다.
“돌아오면 이 다음 걸 하자. 바쁜데 미안하구나. 어서 가봐라.”
우물쭈물 고개를 끄덕인 모브는 커다란 손으로 홍당무처럼 달아오른 얼굴을 가린 채 서둘러 골목길을 벗어났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페이지가 또 부르고 있어서다.
“모브, 나는 꼭 돌아올 것이다. 그러니 바람 피지 말고 기다려라.”
그냥 보통 사람이라면 좋았을 텐데, 어쩌다 저런 화려한 여기사를 만나서.
찡그린 얼굴로 머리를 휘휘 흔들다 성큼성큼 골목길을 다시 돌아온 모브는 페이지를 다시 한 번 꽉 안아주며 중얼거렸다.
“나는 이제 당신이 없으면 안되는 몸이 되었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꼭 돌아와 주십시오.”
비쩍 마른 청년의 몸을 수 개월에 걸쳐 완전 자기 취향으로 바꿔 놓은 여기사 페이지의 입가가 마녀처럼 히죽 찢어졌다.
“으음, 물론이다. 이 단단한 가슴과 투실한 엉덩이는 내가 만든 것이다. 그러니 오로지 나만의 것이야. 후후흐흐.”
3살 연상의 여기사가 모브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그의 엉덩이를 꽉 움켜쥐었다.
이제 코가 제대로 꿰어 버린 모브는 눈을 질끈 감고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출발 전 남자 친구를 안아보는 것으로 속풀이를 한 페이지는 짧은 한숨을 내쉰 다음 골목길에 방치된 큼직한 나무통으로 걸어가 그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확 달아오른 두 여기사가 쭈그려 앉은 채 고개를 들고 있었다.
후배 기사 하나가 벌떡 일어서더니 외쳤다.
“못생겼다면서요! 못생겼다면서요오! 멋지기만 하구만!”
남은 여기사 하나도 나무 통 안에서 일어나 외쳤다.
“아으아! 다음! 이 다음에는 대체 뭘 하는 겁니까! 서 페이지!”
“아니! 어떻게 저 사람을 잡았는지부터 썰을 풀어봐요!”
“아하하!”
배를 잡고 즐겁게 웃음 지은 페이지의 인상이 사나워진다.
그녀는 가운뎃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돌아오면, 살아서 돌아오면 처음 만날 날부터 들려주마. 약속은 지키겠다. 그러니 개미밥은 되지 말아라.”
멍청한 얼굴로 선배 여기사 페이지를 쳐다보던 두 여기사가 붉은 도끼눈을 떴다.
“우오오오! 기필코! 기필코 살아남읍시다!”
“그렇습니다! 개미 따위에게 죽을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