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토마톤과 함께하는 해충 퇴치! (2) 242 >
철컥-! 끼릭.
무릎을 꿇은 자동 기사의 등 뒤에서 망토가 들썩이더니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여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웃 도시의 기사단장님이라서 다들 아는 얼굴이었다.
“역시! 제이드 기사단장이시군요.”
“그 얼굴은, 집사장인가?”
늙은 사내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주님은?”
“개미와 싸우시다 그만······.”
말을 줄이는 그를 보고 씁쓸한 표정을 지은 그녀가 주변의 살아남은 시민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대들은 살아남았다. 그러니 그분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다.”
죽은 영주를 치켜세워 주는 말에 모두가 울먹였다.
생존자 중에는 이곳 영지를 수호하던 기사단의 잔존 병력도 남아 있었다.
“저희도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전부 데려갈 수는 없었다.
“남아서 이곳을 지킬 인원도 필요하다. 가져온 장비와 식량, 오토마톤을 남겨놓고 갈 테니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오늘을 미래의 술안주로 삼을 수 있도록 하라.”
“이렇게 고마우실 데가!”
그녀의 말에 감동한 시민들이 울먹이거나 환호했다.
제이드 기사단장은 밝게 웃었다.
“돕고 살아야지. 영주님들도 그렇게 친하셨으니, 가끔 싸우기도 하셨지만.”
옛이야기에 집사장은 또 눈물을 훔쳤다.
도시가 해방되고 보급로가 확보되자 물자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함께 온 기술진들은 그들의 망가진 자동 인형들을 모조리 고쳐 놓은 것도 모자라 약속대로 각종 무기와 식량도 나눠주었다.
트드득-!
잡동사니를 치우고 도시 복구를 돕고 있는 커다란 갑옷을 보고 사람들이 저마다 놀라워했다.
“대단해. 자동 갑옷이라고?”
“리즈넷에서 만들어서 보내준 거래.”
다 부서진 도시 안에서 오랜만에 사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구하고 잔존 병력을 규합하면서 덩치가 커진 백합기사단은 대낮에도 개미들과 싸움을 벌여 그것들을 격퇴, 하나둘씩 고립된 도시와 마을을 해방시켰고 그 소문은 빠르게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생각지도 못한 최약체 기사단의 활약에 환호하는 자들도 있었고,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아 수군거리는 자들도 있었다.
장비와 갑옷을 수용한 거대 이동 차량을 얻어 타고 다음 방주 도시로 향하던 캐롯이 차량 지붕에 걸터앉은 채 밖으로 내민 다리를 흔들어댔다.
“드래곤 킬러라더니 별거 아니네?”
“음, 되레 궁금하군. 어떻게 그런 별명을 얻은 거지? 분명 까다로운 녀석들이지만 퇴치 못할 정도는 아니었어. 혹시 지금 우리 장비가 좋아서 그런 것인가?”
“오, 그럴 수도 있겠는 듯?”
팔짱을 하고 이국의 가을바람을 느끼고 있던 아리에테는 고개를 숙이고 캐롯을 내려다보았다.
둘은 히히 웃으며 엄지를 들었다.
“아리에테, 빨리 해치우고 돌아가자. 곧 영농조합에서 가을걷이 의뢰도 있을 거고, 겨울 오기 전에 애들 데리고 던전도 돌아봐야지.”
“그래, 이제 며칠 남지 않았구나. 이번 토벌에서 복귀하면 드디어 집으로 돌아가는 거다.”
푸르른 가을 하늘 아래에서 아르곤 공방의 그윽한 약초 향기가 그리워진 아리에테였다.
다음 날, 어째서 드래곤 킬러라는 별명이 얻은 것인가? 라는 아리에테의 의문이 풀렸다.
현지에 도착하자마자 함락된 방주 도시의 탈환을 시도한 백합기사단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패배, 급히 후퇴했다.
덤벼드는 적의 숫자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쾅-! 쿠쾅-! 펑!
치리리리! 치리리!
마법사와 스크롤을 동원한 폭격조차 무시할 정도의 숫자였다.
그 위용은 전술에 조예가 깊지 않은 사람조차 대번에 상대가 되지 않음을 알 수 있을 정도.
어떤 독재자가 그랬다, 양은 그 자체로서 질적 우위를 점한다고.
드물게 당황한 캐롯이 외쳤다.
“워, 세상에! 파도! 파도가 온다! 저게 전부 병정개미야! 숫자가 너무 많아! 못 이겨!”
붉은 몸체가 새까맣게 보일 정도로 몰려오는 병정개미의 파도는 진정한 드래곤 킬러의 모습을 유감없이 선보였다.
다들 자각했다. 저기에 휩쓸리면 죽는다!
긴장한 기사단원들이 각자의 무기를 쥐었다. 하지만 제이드 기사단장은 아집으로 뭉쳐진 무모한 명령 앞에 소중한 단원이 반으로 갈라지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고개를 돌린 그녀가 빠르게 외쳤다.
“철수! 재정비한다! 연막탄! 오토마톤은 탈출 시간을 확보하라!”
퍼펑펑펑!
노란색 유황 연막이 사방에서 터져 나오고 눈에서 시뻘건 빛을 뿜어낸 오토마톤들이 시간을 끌기 위해 뛰쳐나갔다.
하얀 몸체에 검은색 방열 가발, 이젤리아가 자랑하는 걸어 다니는 여신상으로 불리는 것들이었다.
그 사이에는 꼬꼬마 오토마톤도 하나 끼어 있었다.
열 방출을 위해 양 갈래로 묶고 있던 금색 방열 가발을 풀어 헤친 캐롯이 사납게 웃어댔다.
“쿠헤헤! 덤벼! 이 개미 새끼들아! 그 집게 하나는 선물로 가져갈 테다!”
사심이 듬뿍 담긴 외침과 함께 오토마톤과 병정개미의 파도가 격돌했다.
챠챠챵! 챙!
병정개미는 덩치에 비해 대단히 기민하고 재빨랐으나 상대는 기계 인형, 생물의 반사 신경을 아득히 능가하는 반응속도를 가지고 있었다.
캉! 캉캉! 퍼석!
오토마톤의 힘으로 도끼가 휘둘러지자 개미의 이빨 집게가 부러진다.
캐롯이 그것을 잽싸게 주워 들고 뛰어올랐다. 그러고는 큼직한 배에 그 집게를 박아 넣었다.
치리리리릭-!
“으오! 으오오! 이얏호우!”
발광하는 개미의 등에 올라타 로데오를 선보이던 캐롯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신호탄을 발견했다.
휘리릭-! 뻥-!
“푸른 하늘에 빨간 신호탄! 우리도 철수!”
주변에서 싸우던 오토마톤들도 신호탄을 봤기 때문에 철수는 신속했다.
캐롯은 그 와중에 부러진 이빨 하나를 챙겨오는 것을 잊지 않았다.
개미가 빠르다곤 하나 진심으로 도망가는, 무려 지치지 않는 기계 인형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철수 직후, 제이드 기사단장과 측근들은 상황을 살피기 위해 인근의 높은 절벽에 올라 있었다.
저 멀리 노란 안개 속 지상에 끔찍하게 바글바글하는 개미 떼가 보인다.
제이드 기사단장이 탑승한 자동 기사가 고개를 돌린다.
“숫자가 너무 많아. 여왕이라도 있는 건가, 마력수정폭탄의 수배는 어떻게 됐지?”
“요청은 했습니다만, 아직 답신은 오지 않았습니다.”
다른 기사단에서 편입되어 부관을 맡은 사내가 지적했다.
“가능한 저 방주 도시는 유지해야 합니다. 향후 시민들의 삶의 터전이 되어야 하니까요.”
쯧, 도시와 함께 통째로 날려 버리고 싶었던 제이드 기사단장은 그 불만을 혀를 차는 것으로 대신했다.
“오토마톤이 복귀했습니다!”
“돌아가자. 무기와 병력을 보충하고 작전을 새로 짜야겠다.”
제이드 기사단장이 먼저 망토를 펄럭이며 몸을 돌리자 전원 자동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들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원래 이름은 백합기사단이지만 잔존 기사단을 모두 받아들인 지금은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동부 연합 검은 백합기사단.”
“왜 검은 백합이냐?”
캐롯이 새로 편입된 기사단원들을 보면서 말했다.
“꽃집 언니가 알려줬는데, 검은 백합의 꽃말이 뭔 줄 알아요? 복수래요. 무시무시하죠?”
모두가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모태가 된 것이 백합기사단이기도 했고, 몇몇은 백합 중에 검은색도 있었냐고 신기하게 여겼다.
그 이름 자체는 일전에 싸웠던 마도사 오토마톤 사레나에게 깊은 인상을 받은 리즈넷 기술진 중 하나가 제안한 것이었다.
차량을 타고 다시 돌아가는 길, 캐롯이 개미 군단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 괴물이 우리 편이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야. 공중에서 그 열선 마법을 마구 쏴대면 꼼짝없이 쓸어 버릴 수 있는 거 아님?”
잠자코 듣고 있던 기사가 까끌까끌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공중 폭격이라······ 좋은걸? 하늘을 날 수 있는 기계를 만들 수는 없나?”
“오! 돌아가면 우리 기술자들에게 물어봐요!”
기사단의 본진인 방주 도시 샤인에 도착하자마자 캐롯은 정비창으로 달려가서 다녀온 소식과 함께 비행선에 대한 것을 물었지만 크랭크를 포함한 기술자들도 뾰족한 수는 없었다.
여성 기술자 하나가 크랭크를 보았다.
“그 하늘 사다리는요?”
“화약으로 만든 겁니다만, 그걸 만드는 방법을 모릅니다. 그리고 화약을 만들 수 있다면 날 필요도 없이 멀리서 포격으로 해치울 수 있겠지요.”
“그냥 나는 게 아니라 공중에 정지 상태로 떠 있어야 해. 거기서 마법사들이 마법을 떨구는 거지.”
복귀하자마자 근처 야전 침대에 쓰러져 있던 아리에테가 손을 흔들었다.
“장비가 많아도 결국 사람이 다뤄야 한다. 적 병력에 비해 전투원도 턱없이 부족해.”
크랭크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넌 왜 여기 쓰러져 있지? 숙소에 가서 쉬어라.”
“내가 어디서 쓰러지든 그건 내 마음이다.”
지친 음색으로 중얼거리는 아리에테를 보고 다들 쓴 표정을 지었으나 별말은 하지 않았다.
원정이 실패하는 바람에 다들 잔뜩 풀이 죽어 버렸지만 캐롯만은 신이 나 있었다.
“그것보다 이걸 봐. 병정개미 집게 이빨이야. 으헤헤!”
“요 꼬마 녀석 손놀림이 장난이 아니네. 이건 또 언제 가져온 거야?”
모여 있던 기술자들이 병정개미의 집게 이빨을 만져보며 놀라워했다.
“우와-! 생각보다 가벼워. 그리고 이 강도! 무기로 써도 되겠는데?”
“그래서 원정은 어땠냐? 이야기 좀 해봐.”
기술자들은 밖에 나가 싸울 일이 없으니 이런 식으로라도 현장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캐롯이 고개를 절절 흔들면서 말했다.
“드래곤 킬러 크림슨 앤트라고 하길래 얼마나 대단하나 싶었는데······ 와! 그 정도면 정말로 드래곤도 씹어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완전 파도야 파도.”
아리에테도 침대에 누운 채로 거들었다.
“마력수정폭탄 정도로 타격을 주지 않으면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비행선 이야기가 나온 거지.”
문득 지금 크랭크의 짐을 뒤지면 몇 개 나오지 않을까 싶었지만 아리에테는 그냥 입 다물고 있기로 했다. 그게 저축 대신이라는 이야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도 타격을 줄 수 있는 무기가 있으면 좋겠다. 도망가는 녀석을 뒤쫓는 경우가 가끔 있었어.”
아리에테의 말에 여성 기술자가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아쉬운 대로 그 마법사 인형 잡을 때 썼던 스프링 투창은 어때요?”
“좋군요. 재료를 발주하고 바로 만들어 봅시다. 나머지는 손인데.”
병정개미의 집게 이빨을 돌려받은 캐롯이 마침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지 밝게 웃으며 크랭크를 쳐다보았다.
“손? 손이 부족해?”
곧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캐롯의 입에서 나온 말이 퍽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
“전에 누가 말했더라? 원수지간인 사람들이 서로 손을 잡게 만들려면 더 크고 강한 적을 나타나게 만들면 된다고 하던데. 지금이 바로 그때 아님?”
무슨 말을 하려나 싶었던 크랭크는 캐롯의 계획을 듣고 처음에는 투구를 흔들었다가 그래도 혹시 하는 생각이 들어 버렸다.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도 안되지만 시도해 볼 만한 가치는 있다.”
“가즈아! 야생의 인력 시장!”
모두의 우려 속에 두 사람은 인력 수배를 위해 성을 나섰다. 지친 아리에테는 떼어놓고 오려고 했으나 억지를 써서 따라붙었다.
“나를 떼어놓으려 하다니! 이 처우는 잊지 않겠다!”
“애도 아니니 쉬고 있으면 될 텐데.”
“흥! 네가 죽어 버리면 곤란한 건 우리 쪽이다.”
그리하여 모두는 먼저 도시 밖 숲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군데군데 오토마톤들이 순찰을 다니고 있어서 좀처럼 원하는 것을 찾을 수가 없었다.
“좀 멀리 나가보자. 경비가 없는 저쪽 돌산 너머라든지.”
씩씩하게 걸어가는 캐롯을 따라 2시간쯤 초원을 헤매고 다닌 그들은 도시에서 한참 떨어진 바위산 너머에서 드디어 오크 촌락을 발견했다.
정확하게 먼저 발견한 것은 그들의 옥수수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