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토마톤과 함께하는 연담! 240 >
쿵쿵-! 트드득!
팔다리가 엄청나게 길어지고 시야도 높아졌으며 힘도 세졌다.
전고 2.3미터에 전투 중량 150㎏ 정도 되자 온전히 몸을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어지간한 잡목은 그냥 넘어가 버린다.
그야말로 용기백배, 어째서인지 고양감이 멈추지 않는다.
커다란 자동 갑옷에 들어간 여기사들이 어쩐지 신나서 중얼거린다.
“아버님 품에 안겨 있는 것 같아요.”
“그거 멋진 비유인데? 나는 남자 친구에게 안겨 있는 것 같아.”
“서 페이지! 나, 남친 있었습니까?”
더 이상 밤의 숲이 두렵지 않게 된 페이지의 자동 기사가 엄지손가락을 세우고 투구를 돌린다.
어쩐지 익살스럽다.
“후흐흣, 평민이지만 좋은 사람이다. 다음에 보여주지.”
“평민요? 그래도 우리들 귀족이잖아요. 게다가 당신의 가문은 분명······.”
가문 이야기가 듣기 싫었는지 페이지의 자동 갑옷이 커다란 손바닥을 펼쳤다.
“흥! 그런 거 알 바냐? 가문의 휘광을 등에 업고 싶었다면 기사단에 들어오지도 않았어. 나는 내 인생을 살고 싶어서 여기에 온 거다.”
그러면서 손에 든 모닝스타를 들어 올렸다.
“그 리즈넷에서 온 투구 거인과 비슷한 느낌이야. 크고, 무뚝뚝하고, 못생겼지.”
“에? 모, 못생겼다고요? 그래도 좀 잘생겨야죠!”
“얼굴값을 하려는 것들은 딱 질색이야. 그건 온전히 내 전용이어야 한다. 내 말만 들어야 하고, 내 지배하에 있어야만 해.”
그녀의 말에 동료 여기사들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자동 갑옷의 마스크에 가려 보이진 않았지만.
“서 페이지, 말씀이 좀 무섭······!”
훙! 빡-!
휘둘러진 모닝스타가 바위를 쪼개 버리자 다들 깜짝 놀랐다.
오토마톤 전용이라서 인간은 그냥 휘두르기 버거운 물건인데 지금은 그런 무게 따위 느껴지지 않았다.
남친 자랑하려다 묘한 연애관을 내비친, 여러 가지 의미로 관심의 대상이 된 무서운 여기사 페이지가 부서진 바위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따위 얼굴로 바람을 피우면 이걸로 뭉개 버리겠어. 죽여 버리겠다.”
“하, 하하하! 보보보, 보고 싶네요! 서서서 페이지의 나나나, 남친!”
다들 그녀에게 거리감을 느끼기 시작하는데 쩌렁쩌렁한 확성기 소리가 울린다.
“이봐! 잡담은 숙소에서 해라! 지금 작전 중이라고!”
“옙!”
쿵쾅쿵쾅!
여기사들은 실전을 통해 자동 갑옷의 운용을 익혀 나갔다.
그리고 전술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오토마톤의 할 일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다른 임무를 받았다.
바로 전선의 평화 유지.
자동 갑옷 기사단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면 기사단 소속의 자동 인형들이 배치되어 주변의 경계를 맡았다.
캐롯은 딱히 정해진 곳 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상황을 살폈다.
그래서 속속 점령지의 숲속에 자리를 잡는 오토마톤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숲속을 쿵쾅쿵쾅거리며 씩씩하게 걸어가는 커다란 자동 기사를 바라보던 캐롯이 말했다.
“어때? 애들이 다 커서 손이 덜 가니 이제 좀 편하지 않아?”
이젤리아의 걸어 다니는 여신상이 고개를 돌린다.
정교하게 깎아놓은 저 얼굴은 정말 멋진 조형미를 자랑했다.
“그렇습니다. 이대로 방어에만 집중합니다. 역할은 점령지의 치안 유지.”
팔짱을 끼고 있던 캐롯이 물었다.
“있잖아. 너 에이그스타 가문이라고 알아?”
“모릅니다. 그리고 지금은 작전 중입니다. 관련 없는 질문은 자제해 주십시오.”
대답 대신 히히 웃어준 캐롯은 몸을 돌리고 저쪽에서 또 개미를 붙잡고 난리를 떠는 철없는 기사단을 말리러 달려갔다.
새벽, 아침 해가 떠오른다.
쿠쿵! 쿵!
떠오르는 태양을 등지고 커다란 갑옷으로 무장한 백합기사단이 도시 주변 정리 작전을 마치고 도시로 귀환했다.
개미에게 주변 숲까지 침범당한지 거의 한 달만의 일이었다.
“와아아! 잘했어!”
“고마워요!”
마을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여 이른 아침에도 성문으로 들어서는 막강한 위용의 기사단을 반겼다.
갑옷 안에 든 기사들도 진한 감격을 느꼈다.
철야로 작전을 마치고 귀환한 기사들이었지만 바로 숙소로 향하진 않았다. 그들은 정비창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술진들에게 찾아가 운영상의 문제점을 보고하고 수정을 요구했다.
제이드 기사단장의 경우엔 자동 갑옷을 올려다보며 칭찬 일색이었다.
“아주 좋았다. 출력이 낮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다루기 쉬웠어. 그보다 망토를 달고 싶군. 중갑 인형처럼. 그리고 기사단의 문장도 그려 넣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누구인지 알려야 해.”
“중갑 인형?”
크랭크가 투구를 기울이자 옆의 누군가가 거들었다.
“하드 스킨 오토마톤을 말하는 거야.”
갑자기 생각난 크랭크가 되물었다.
“여긴 그 중갑 인형이 없습니까? 한 대도 못 봤군요.”
제이드 기사단장은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물건은 우리에게까지 떨어지지 않아. 그거 한 대만 있어도 이렇게까지 밀리진 않았을 텐데, 그리고 이 자동 갑옷도 내 독단으로 수령한 것이거든.”
크랭크의 투구 속 눈이 가늘게 변했다.
“그걸 무마하려면 전과를 올려야겠군요.”
“그렇지. 경은 말이 통하는군.”
투구를 끄덕인 크랭크는 한바탕 난동을 부리느라 이곳저곳에 긁힌 상처가 있는 자동 갑옷을 살폈다.
그리고 기술 인력들을 모았다. 따로 현지의 정비 반장이 있었으나 철수 전까지는 크랭크가 임시로 정비 반장을 맡기로 했다.
그래 봐야 모두의 이견을 조율하는 정도라서 나서기 싫어하는 그도 어쩔 수 없었다.
그 역시 외관보다 성능을 중시하는 성격이라서.
“긁히거나 도장이 벗겨진 정도의 파손은 무시, 파손된 장갑판 위주로 보수합시다. 그리고 기사단의 문장과 망토가 필요합니다. 이건 도시 시민들에게 맡기도록 합시다.”
팔짱을 하고 흐뭇하게 그들의 일 처리를 지켜보는 제이드 기사단의 곁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캐롯이었다.
“단장님은 좀 쉬셔야 할 듯?”
“아직은 괜찮다.”
“님이 쉬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눈치 보거든요.”
“아!”
뒤를 돌아보니 지친 기색이 역력한 단원들이 서 있다.
쓰게 웃어 버린 그녀가 모두에게 휴식을 명령하고 자신도 숙소로 돌아갔다.
낮부터는 경비대에서 주변 경계와 정찰에 임했다.
기사단이 밤새 청소해 준 덕분에 개미는 물론 몬스터도 눈에 띄지 않았다.
도시 주변의 안전이 확보되자 성문이 개방되고 마을 사람들이 모처럼 성 밖으로 나가서 임산물을 채취하고 주변에 심어놓은 농작물을 살피기 시작했다.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 크랭크는 장비를 빌려 또 이상한 것을 만들어대고 있었다.
아리에테를 재우고 온 캐롯이 다가왔다.
“폐품을 잔뜩 가져다가 또 뭐 만드는 것임?”
“돌아가기 전에 선물이나 남겨놓을까 하고.”
그러면서 크랭크가 만들고 있는 것을 살펴본 캐롯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게 뭐야? 칼이야? 몽둥이야?”
“비슷한 거지.”
알 수 없는 말만 남기고 크랭크는 계속해서 쇠를 갈아대고 두들겼다.
저녁쯤, 승전에 힘입어 오랜만에 꿀잠을 자 버린 제이드 기사단장은 말끔한 얼굴로 송구스럽게 나타났다.
“늦잠을 자 버렸군.”
“많이 자야 피부가 고와진대요.”
캐롯의 말에 제이드가 흐뭇하게 웃는다.
“그대는 정말로 오토마톤인가? 볼수록 놀랍군.”
“데헷.”
혀를 내밀고 손가락을 볼에 갖다 대는 등의 귀여운 짓을 보여주는 캐롯에게 밝게 웃어준 그녀가 작업장 구석에서 아직도 혼자서 뭔가 갈아내고 망치질하는 거인을 가리켰다.
“그런데 네 주인은 투구를 벗지 않는 건가? 계속 쓰고 있구나.”
“아, 저주에 걸려서 그래요.”
제이드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저주?”
으히히 웃음 지은 캐롯이 크랭크의 이야기를 떠들어대는 동안 크랭크의 곁으로 아리에테가 나타났다.
“지금이야말로 자동 2륜 차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망치질을 멈춘 크랭크가 뭔가 생각에 잠긴다. 그러더니 투구를 돌렸다.
“기동력은 중요하지. 부분 동의한다.”
“오오! 그럼 만들어 주는 건가?”
“아니, 재료가 부족해. 시간도 없고, 그래서 당분간 보류.”
“으음!”
아쉬운 얼굴의 아리에테에게 제이드 기사단장과 캐롯이 함께 다가왔다.
“서 아리에테, 좀 쉬셨는가?”
준 기사단원 취급에 어제오늘 아리에테의 얼굴이 퍽 밝아져 있었다.
“예, 기사단장님이야말로. 그보다 앞으로 일정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고개를 끄덕인 제이드가 턱을 짚으며 생각에 빠진 얼굴을 했다.
“모처럼 얻은 무장이다. 이대로 주변을 정리하면서 진격하고 싶군. 인근에 함락된 도시며 마을이 많아. 그것을 하나씩 되찾는 것이다.”
아리에테도 고개를 끄덕였다가 캐롯에게 한 소리 들었다.
“에엥? 우린 체류 기간 지나면 돌아가야 하거든?”
“아, 그렇군.”
제이드 기사단장을 포함해서 어느새 몰려온 다른 여기사들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건가? 도와주면 좋을 텐데.”
“맞아요.”
캐롯이 열 손가락을 폈다가 왼쪽의 다섯 개를 접었다.
“2주 일정에 이제 5일 지났거든요? 아직 일주일 더 남았으니 걱정 마요. 남아 있는 동안은 있는 힘껏 도울 테니까.”
그제야 사람들의 얼굴이 좀 밝아졌다.
그때 기술자 하나가 슬쩍 끼어들었다.
“자동 갑옷의 수리가 끝났습니다. 말씀하신 옵션도 설치했고요.”
“오오!”
50여 기의 자동 갑옷은 전부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좌우 어깨에는 기사단의 문장과 더불어 각 기체의 구별을 위한 숫자가 그려졌다.
몹시 흥분한 여기사들이 기술자를 붙잡고 말했다.
“개, 개인 가문의 문장도 넣고 싶습니다만!”
“그건 차차로 합시다. 애초에 우린 리즈넷 사람이라서 이젤리아 귀족 가문의 문장을 모르거든요.”
고개를 끄덕인 여기사들은 곧 정비창으로 사용 중인 창고에 모인 채 기사단장과 경비대장 주최로 앞으로의 방침과 작전을 전달받았다.
얼떨결에 함께 가서 작전을 전달받았던 아리에테와 캐롯이 돌아왔다.
여전히 작업장 하나를 벌려놓고 자리 잡은 크랭크는 투구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지?”
“가까운 거리에 고립된 도시와 마을이 있다고 해. 일단은 그걸 차례로 되찾으면서 전진.”
아리에테의 말이 끝나자 캐롯이 아하하 웃는다.
“들었어? 이젤리아 기사단은 서로 반목이 심하데. 특이나 여자뿐인 백합기사단의 경우엔 이참에 공적을 쌓아놓지 않으면 나중에 위험하다더라고?”
“그건 안타깝군. 하지만 좋은 판단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보다는 뭔가를 하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미래가 생기지 않아.”
크랭크가 가끔 하는 소리인데 아리에테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말에 자기 생각을 좀 덧붙여 주었다.
“그건 때와 장소와 상황에 따라 다를 것 같군.”
한참 뭔가를 조립하던 크랭크의 투구가 아리에테에게로 향한다. 그러더니 슬쩍 끄덕여졌다.
“일리가 있다. 조건부 긍정.”
살짝 골이 난 아리에테가 캐롯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면서 크랭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사실대로 말해봐라. 사실은 네가 인간이고 저게 오토마톤이지?”
“으아악하하하하!”
괴상한 폭소를 터트린 캐롯이 배를 잡고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한다.
근처에서 자동 갑옷의 장갑판을 수리 중이던 아르곤 정비 길드 소속의 기사 하나도 낄낄 웃어댔다.
“좀 무뚝뚝해도 그 정도는 아니죠.”
“그래도 너무하잖은가. 이 철면피가, 여자와 말할 때는 좀 부드럽게 대하도록 해라. 살살 어르고 달래듯이 말이다. 네 화법은 너무 퉁명스럽다. 모르는 사람은 상처받아.”
아리에테의 조언이 시작되자 바닥에서 발딱 일어난 캐롯이 끼어든다.
“오오! 그건 경험자의 어드바이스?”
“겨, 경험자는!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보통은 이런 퉁명스러운 말보다 듣기 좋은 말이 더 끌리지 않나?”
난데없는 이 연애담스러운 이야기에 한창 나이의 주변 여자들의 눈과 귀가 돌아간다. 이 진한 호기심 앞에서 모두가 평등해졌다.
하지만 철면피 크랭크는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자기 작품이 제대로 작동할 것인지에 온 신경이 쏠려 있었다.
완성된 물건을 들고 이리저리 살피던 크랭크가 투구를 들고 아리에테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속에도 없는 소리를 하면서까지 매달리고 싶지 않군. 사나이 가는 길에 여자는 필요 없다.”